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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강도[江都]와 강화도[江華島]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천하[天下]의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룩하고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한 이래, 고려[高麗]의 최대 국난[國難]이었던 원[元]나라의 전란[戰亂]을 겪으며, 도읍[都邑]을 옮겨간 고려[高麗]의 강화도[江華島], 강도[江都]는, 지금의 반도[半島] 한국[韓國]에 있는 강화도[江華都]도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강화도[江華都]는, 당시[當時]로부터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의 현존하는 기록[記錄]들을 보면 이에 부합[附合]되는 기록[記錄]도 있으나, 원전[原典]에 실린 당시[當時]의 상황과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이, 지형[地形]과 지리[地理], 물길의 흐름,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등, 그 무엇 하나 역사[歷史]의 흔적[痕迹]과 상황과도 전혀 맞지 않는, 이중적인 모순[矛盾]과 혼란[混亂]스러운 내용만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이유는, 조선사[朝鮮史]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이러한 모순[矛盾]되고 혼란[混亂]스러운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무엇이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고, 무엇이 우리 역사[歷史]의 거짓인가를 명확[明確]히 밝히고,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알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를 이리 만들어 놓은 자들의 간교[奸巧]하고 사악[邪惡]한 소행을 만[萬] 천하[天下]에 드러내고, 후대[後代]에 오는 우리의 후손[後孫]들에게 이를 길이 귀감[龜鑑]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역사[歷史]의 참화[慘禍]를 겪는일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
태종[太宗] 4년[四年]
太宗 四年 正月 帝遣使以璽書諭㬚 三月 㬚遣中郞將池義源 錄事洪巨源 金謙等齎國贐牒文送撒禮塔屯所 四月 㬚遣其將軍 趙叔章 御史 薛愼 等奉表入朝 五月 復下詔諭之 [중략]
태종[太宗] 4년 정월에 황제[皇帝]가 사신을 보내 새서[璽書]로 [철]㬚을 효유[曉諭]하였다. 3월에 철[㬚]은 중랑장[中郞將] 지의원[池義源]을 보내어 녹사[錄事] 홍거원[洪巨源], 김겸[金謙] 등으로 그 나라의 재화[財貨]와 첩문[牒文]을 주어 철례탑[撤禮塔]이 주둔하는 곳으로 보냈다. 4월에 철[㬚]은 그 나라의 장군[將軍] 조숙창[趙叔昌]과 어사[御史] 설진[薛愼] 등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케 하였다. 5월에 다시 조서[詔書]를 내려 그들을 효유[曉諭]하였다. [중략]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
태종[太宗] 4년[四年]
太宗 四年 正月 帝遣使以璽書諭㬚 三月 㬚遣中郞將池義源 錄事洪巨源 金謙等齎國贐牒文送撒禮塔屯所 四月 㬚遣其將軍 趙叔章 御史 薛愼 等奉表入朝 五月 復下詔諭之 [중략]
태종[太宗] 4년 정월에 황제[皇帝]가 사신을 보내 새서[璽書]로 [철]㬚을 효유[曉諭]하였다. 3월에 철[㬚]은 중랑장[中郞將] 지의원[池義源]을 보내어 녹사[錄事] 홍거원[洪巨源], 김겸[金謙] 등으로 그 나라의 재화[財貨]와 첩문[牒文]을 주어 철례탑[撤禮塔]이 주둔하는 곳으로 보냈다. 4월에 철[㬚]은 그 나라의 장군[將軍] 조숙창[趙叔昌]과 어사[御史] 설진[薛愼] 등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케 하였다. 5월에 다시 조서[詔書]를 내려 그들을 효유[曉諭]하였다. [중략]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
대덕[大德] 4년[四年] 2월[二月]
大德 四年 二月, 征東行省平章闊里吉思言 高麗國王自署官府三百五十八所 官四千五十五員 衣食皆取之民 復苛征之 又其大會 王曲蓋 龍扆 警蹕 諸臣舞蹈山呼 一如朝儀 僭擬過甚 遣山東宣慰使塔察兒 刑部尙書王泰亨齎詔諭之 使釐正以聞 [중략]
대덕[大德] 4년 2월에 정동행성평장활리길사[征東行省平章 闊里吉思]가 말하기를, 고려국[高麗國]의 왕[王]이 스스로 설치한 관청[官廳]이 3백 5십 8개소이고, 벼슬아치는 4천 5십 5명입니다. 그들은 옷과 밥을 모두 백성[百姓]에게서 취하면서 다시 가혹하게 세금을 거둡니다. 또 그들의 큰 모임엔 왕[王]은 손잡이가 굽은 곡개[曲蓋]와, 용[龍]을 그린 용의[龍扆]를 갖추고, 거동할 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여러 신하[臣下]들은 춤을 추며 만세[萬歲]를 불러 한결같이 원[元]조정의 의례[儀禮]와 같이하여 참람됨이 너무 심합니다. 하자, 산동[山東] 선위사[宣慰使] 탑찰아[塔察兒]와 형부상서[刑部尙書] 왕태형[王泰亨]을 보내 조서[詔書]를 가지고 그들을 효유[曉諭]하여 바르게 고치고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태종4년[太宗] 4년[四年]
太宗 四年 復遣通事池義深等 致書於札剌亦兒台 四月 遣上將軍趙叔昌 侍御史薛愼如 奉表來朝獻土物 札剌亦兒台 執義深等 送於行在 [중략]
태종[太宗] 4년에 다시 통사[通事] 지의심[池義深] 등을 보내어 찰랄역아태[札刺亦兒台]에게 편지를 전달하였고, 4월에는 상장군[上將軍] 조숙창[趙叔昌]과 시어사[侍御史] 설신여[薛愼如]를 보내어 표[表]를 올려 조정에 나아가 토산물[土産物]을 바치니, 찰랄역아태[札刺亦兒台]는 지의심[池義深]등을 붙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태종4년[太宗] 4년[四年]
是年 權臣崔瑀脅㬚 遷都江華島 瑀遣宦者尹復昌 至北邊諸城 逐蒙古所置達魯花赤 復昌爲宣州達魯花赤所射殺 閔曦與崔滋溫謀殺西京達魯花赤 城民叛 執崔滋溫等來降 是年 札剌亦兒台 攻處仁城 有一僧避兵城內 射殺之 [중략]
이 해에 권신[權臣] 최우[崔瑀]가 철[㬚]을 협박하여 강화도[江華島]로 도읍[都邑]을 옮겼다. 최우[崔瑀]가 환관 윤복창[尹復昌]을 보내어 북쪽 변방 여러 성[城]을 돌며 옹고[蒙古]에서 둔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축출케 하였으나, 윤복창[尹復昌]은 선주[宣州] 달로화적[達魯花赤]의 활에 사살되었다. 민희[閔曦]와 최자온[崔滋溫]이 서경[西京]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죽이려 하자, 성민[城民]들이 반란을 일으켜 최자온[崔滋溫] 등을 잡아 투항하였다. 이 해에 찰랄역아태[札刺亦兒台]가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였는데, 어떤 승려가 성안에서 병화[兵禍]를 피하다가 그를 활로 사살하였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헌종2년[憲宗二年]
憲宗二年 遣多可阿士等三十七人來 憲宗密勅使人曰 汝至 國王出迎於陸 雖百姓未出亦可恕 不然當俟汝歸 發兵討之 及多可等至 㬚遣其宗子新安公佺出迎 請使者入梯浦館 㬚乃出見 多可等怒 不成禮而還 帝乃使阿母侃 洪福源等 分道伐高麗 [중략]
헌종[憲宗] 2년에 다가[多可]와 아토[阿土] 등 37명을 보내면서, 헌종[憲宗]이 사신[使臣]들에게 몰래 칙명[勅命]하기를, 너희들이 이르렀을 때 국왕[國王]이 육지[陸地]에 나와 맞는다면 백성[百姓]들이 비록 나오지 않았더라도 역시 용서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하겠다. 하였다. 다가[多可] 등이 도착하자 철[㬚]이 그의 종자[宗子] 신안공[新安公] 전[佺]을 보내 영접하고, 사자들을 청하여 제포관[梯浦館]에 들도록 한 다음에 철[㬚]은 그제서야 나와보므로, 다가[多可] 등이 화를 내어 예[禮]가 끝나기 전에 돌아와 버렸다. 이에 제[帝]가 아모간[阿母侃]과 홍복원[洪福源] 등을 시켜 길을 나누어 고려[高麗]를 치게 하였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헌종[憲宗] 2년[二年]
憲宗 二年 十二月 遣安慶公湻入朝 明年 湻至營中 設宴犒師 阿母侃等南還 也窟又遣多可等來諭 以陸侍中崔沅等不出 未爲眞降 㬚徵趙邦彦等議其事 是年 大軍所過俘男女二十餘萬 死者不可勝計 郡縣皆爲煨燼焉 [중략]
헌종[憲宗] 2년 12월에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보내와 입조[入朝]하였다. 다음해에 창[淐]이 진영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어 군사들을 호궤[犒饋]하였다. 이에 아모간[阿母侃] 등은 남녘으로 돌아갔다.
야굴[也窟]이 또 다가[多可] 등을 보내어 말하기를, 국왕[國王]이 육지[陸地]에 출영할 때 시중[侍中] 최원[崔沅] 등이 나오지 않았으니 아직 진실로 항복한 것이 아니다. 하니, 철[㬚]이 조방언[趙邦彦] 등을 불러 이를 상의하였다. 이 해에 대군이 통과하며 사로잡은 남녀는 2십여만이었고,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군현[郡縣]은 모두 불에 탔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지[至] 헌종[憲宗] 8년[八年]
至 八年 四月 始遣太子倎 奉表入朝 以李世材·金寶鼎 等四十人 從之 倎至虎川大雨 從者請留 倎不許 遂至東京 東京人曰 大軍明日將赴江華 幸早至一日也 [중략]
헌종[憲宗] 8년 4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태자[太子] 전[倎]을 보내와 표[表]를 올리고 입조[入朝]케 하면서, 이세재[李世才] 김보정[金寶鼎] 등 40명을 따르게 하였다. 전[倎]이 호천[虎川]에 이르렀을 때 큰 비가 내리자 따르는 사람들이 지체하기를 청하였으나, 전[倎]이 허락지 않고 끝내 동경[東京]에 이르니 동경[東京] 사람들은, 대군이 내일이면 아마 강화[江華]로 쳐들어갔을 터인데 다행히 하루 빠르게 도착하였다. 라고 하였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지[至] 헌종[憲宗] 8년[八年]
倎見松吉大王 松吉曰 王京猶在江華 安能罷兵 倎曰 大王嘗言 太子入朝則罷兵 故今日我來 兵如不罷 百姓畏懼逃竄 後雖敦諭 誰復聽大王之言者 [중략]
전[倎]이 송길대왕[松吉大王]을 보자, 송길[松吉]은, 왕경[王京]이 강화[江華]에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군대를 파[罷]한다는 말이오. 하였다. 이에 전[倎]이, 대왕[大王]께서 일찍이 태자[太子]가 입조하게 되면 군대를 파[罷]할 것이라고 한 까닭에 오늘날 내가 온 것이오. 군대를 만일 파하지 않는다면 백성[百姓]들은 두려워서 도망쳐 숨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뒤에 아무리 도탑게 깨우친다 한들 누가 다시 대왕[大王]의 말씀을 들으려 하겠습니까 ? 하였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지[至] 헌종[憲宗] 8년[八年]
松吉等然之 遣使來言墮城之事 於是墮江都外城 使者督役急 百姓不堪其苦 俄又墮內城 使者始返 是年六月 㬚卒 㬚在位凡四十六年 諡曰安孝王 㬚旣卒 其大臣金仁俊以倎入朝 乃戎服率甲士 奉大孫諶入宮 權監國事 遣朴天植來告哀 [중략]
송길[松吉]도 그렇게 생각하고 사신을 보내 성[城]을 헐어내는 일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에 강도[江都]의 외성[外城]을 헐어냈다. 사신이 역사[役事]를 급히 재촉하니, 백성[百姓]들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이윽고 내성[內城] 또한 헐어내자, 그제서야 사신[使臣]이 돌아갔다. 이 해 6월에 철[㬚]이 졸[卒]하니 철[㬚]은 재위[在位] 46년이요, 시호는 안효왕[安孝王]이다.
그 나라 대신 김인준[金仁俊]이 전[倎]이 입조[入朝]하여 몽고[蒙古]에 있는 까닭에, 융복[戎服]에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태손[太孫] 심[諶]을 받들어 궁궐에 들어가 임시로 국사[國事]를 살피는 한편 박천식[朴天植]을 보내와 부음[訃音]을 아뢰었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명년[明年]
明年 世祖自鄂班師 倎赴憲宗行在 道過潼關 官吏迎於華淸宮 請浴溫泉 倎謝曰 此唐元宗所浴者 雖異代人 臣安敢褻乎 중략]
이듬해에 세조[世祖]가 악[鄂]으로부터 군사를 회군하였다. 전[倎]이 헌종[憲宗]의 행재소[行在所]로 갈 때에 동관[潼關]을 지나는데, 그 지방의 관리가 화청궁[華淸宮]으로 맞아들이고 온천에 목욕할 것을 청하자, 전[倎]은 이를 사양하며, 이 온천은 당[唐] 원종[元宗]이 목욕하였던 곳이다. 비록 시대가 달라졌다 하지만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어떻게 더럽히겠는가. 하였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명년[明年]
至六盤山 聞憲宗崩 遂南謁世祖 於襄陽 世祖 驚喜曰 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 不能服之 今其世子自來歸我 此天意也 命倎從車駕 至開平府 及聞㬚卒 及命達魯花赤東里帶等 護送倎返高麗 [중략]
육반산[六盤山]에 이르러 헌종[憲宗]이 붕[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남쪽으로 가 양양[襄陽]에서 세조[世祖]를 알현하니, 세조[世祖]가 놀라고 기뻐하며,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요, 당[唐] 태종[太宗]이 친히 정벌하고서도 항복받지 못하였다. 이제 세자[世子]가 스스로 찾아와 나에게 귀부[歸附]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하고 전[倎]에게 자기의 거가[車駕]를 따르도록 하였다. 개평부[開平府]에 이르러 철[㬚]이 졸[卒]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동리대[東里帶] 등에게 명하여 전[倎]을 호송하여 고려[高麗]에 돌아가게 하였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대덕[大德] 11년[十一年]
大德 十一年 謜奉皇太子命 遷昛於慶壽寺 自是國政復稟命於謜 五月 昛歸國 明年 卒 昛在位三十五年 年七十三 賜諡忠烈 謜又名璋 蒙古名曰益智禮普化 齊國大長公主子也 [중략]
대덕[大德] 11년에 원[謜]이 황태자[皇太子]의 명[命]을 받고 거[昛]를 경수사[慶壽寺]로 옮기니, 이로부터 국정[國政]을 다시 원[謜]에게 품명[稟命]하게 되었다. 이 해 5월에 거[昛]가 본국으로 돌아가 이듬해에 죽으니, 재위[在位] 35년에 나이 73세[歲]이다. 충렬[忠烈]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원[謜]은 또 하나의 이름은 장[璋]이고 몽고[蒙古]명은 익지례보화[益智禮普化]인데,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이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지정[至正] 11년[十一年]
至正 十一年 帝又以江陵大君祺爲國王 遣斷事官完者不花來 封倉庫宮室 取國璽以歸 眂遜於江華 未幾 遇鴆而卒 在位三年 年十四 後賜諡忠定 [중략]
지정[至正] 11년에 순제[順帝]가 또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로 국왕[國王]을 삼고, 단사관[斷事官] 완자불화[完者不花]를 보내어 창고[倉庫]와 궁실[宮室]을 봉하고 국새[國璽]를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다. 제[帝]가 강화[江華]로 손위[遜位]하였다가 얼마 아니되어 짐살[鴆殺]을 당하여 죽으니, 재위[在位] 3년에 나이 14세[歲]이다. 뒤에 충정[忠定]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중략]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지정[至正] 11년[十一年]
祺蒙古名伯顔帖木兒 尙魯國公主 旣嗣位 命李齊賢攝政丞權征東行省事 齊賢綜覈名實 進賢黜佞 聲譽翕然 [중략]
기[祺]는 몽고명[蒙古名]이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인데, 노국공주[魯國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왕위[王位]를 이어받고 나서 이제현[李齊賢]에게 명하여 정승[政丞]을 겸대하고 정동행성사[征東行省事]를 권서[權署]케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명성과 실제를 잘 파악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고 간사[奸邪]한 자를 물리치니, 명성과 예찬의 소리가 드높았다. [중략]
지정[至正] 19년[十九年]
至正 十九年 冬 紅巾賊 渡鴨綠江 陷義州 又陷靜州 麟州 及西京 二十年 祺卜遷都避之 不吉 仍營白岳宮闕爲新京 移居之 [중략]
지정[至正] 19년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州]를 함락하고 또 정주[靜州], 인주[麟州] 및 서경[西京]을 함락하였다. 20년에 기[祺]가 도읍[都邑]을 옮기면 불길[不吉]함을 피할 수 있다 하여, 백악[白岳]에 궁궐을 짓고 신경[新京]으로 삼아 옮겨 살았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년[四年]
12월[十二月]
十二月 丁未 崔忠獻信術人李知識之言 壞乾元寺 以禳北兵 移成宗神御于開國寺 戊申 設消災道場于宣慶殿五日 庚戌 始營新闕于白岳 從知識之言也 庚申 親設四天王道場于宣慶殿 壬戌 幸賢聖寺 設文豆婁道場 戊辰 宣州防戍將軍趙敦 朴蕤等 棄城而還 流于島 壬申 移御賢聖寺 盖信術者之說 欲以延基也 [중략]
정미[丁未]일. 최충헌[崔忠獻]이 술사 이지식[李知識]의 말에 따라 건원사[乾元寺]를 부수고 거란군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다. 성종[成宗]의 초상을 개국사[開國寺]로 옮겼다.
무신[戊申]일. 선경전[宣慶殿]에서 소재도량을 닷새 동안 열었다. 경술[庚戌]일. 술사 이지식의 말에 따라 새 궁궐[宮闕]을 백악[白岳]에 짓기 시작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19년[十九年]
是年 移葬世祖大祖二梓宮于新都 [중략]
이 해에 세조[世祖]와 태조[太祖]의 재궁[梓宮]을 새 도읍[都邑]인 신도[新都]로 이장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고종] 19년[十九年]
6월[六月]
乙丑 崔瑀脅王 遷都江華 丙寅 瑀發二領軍 始營宮闕于江華 [중략]
을축[乙丑]일. 최우[崔瑀]가 왕[王]을 협박해 강화[江華]로 도읍[都邑]을 옮겼다.
병인[丙寅]일. 최우[崔瑀]가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해 강화[江華]에 궁궐[宮闕]을 짓기 시작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고종] 19년[十九年]
7월[七月]
壬午 安南判官郭得星招撫白岳等處 賊魁二十餘人來投 遣內侍尹復昌 往北界諸城 奪達魯花赤弓矢 復昌到宣州 達魯花赤射殺之 乙酉 王發開京 次于昇天府 丙戌 入御江華客館 [중략]
임오일. 안남판관[安南判官] 곽득성[郭得星]이 백악[白岳]등지의 반적들을 회유하자 그 수괴 20여 명이 투항해 왔다. 내시 윤복창[尹復昌]을 북계의 여러 성[城]들에 보내 달로화적[達魯花赤]의 무장을 해제시키게 했는데 그는 선주[宣州]에 도착하자마자 달로화적[達魯花赤]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을유[乙酉]일. 왕[王]이 개경[開京]을 떠나 승천부[昇天府] 에 도착했다. 병술[丙戌]일. 왕[王]이 강화[江華] 객관[客館]에 유숙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21년[二十一年]
2월[二月]
癸未 燃燈 王如奉恩寺 以故叅政車倜家爲奉恩寺 撤民家 以廣輦路 時雖遷都草創 然凡毬庭 宮殿 寺社號 皆擬松都 八關 燃燈 行香道場 一依舊式 丁亥 以營宮闕 移御大將軍宋緖家 [중략]
계미[癸未]일. 연등회 참석차 왕[王]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전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奉恩寺]로 고치면서 민가를 헐어 진입로를 확장했다. 당시 도읍[都邑]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격구장과 궁전[宮殿]과 절의 이름을 모두 송도[松都]의 원 이름대로 붙였다. 또한 팔관회와 연등회, 행향도량[行香道場] 등도 다 예전의 법식을 따랐다. 정해[丁亥]일. 궁궐[宮闕]을 짓는다고 왕[王]이 대장군 송서[宋緖]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21년[二十一年]
7월[七月]
秋七月 甲子 遣內侍李白全 奉安御衣于南京假闕 有僧據讖云 自扶踈山 分爲左蘇 曰阿思達 是古楊州之地 若於此地 營宮闕而御之 則國祚 可延八百年 故有是命 [중략]
갑자[甲子]일. 내시[內侍] 이백전[李白全]을 시켜 어의[御衣]를 남경[南京]의 임시 궁궐[宮闕]에 봉안하게 했다. 어떤 중이 도참[圖讖]설을 들먹이며, 부소산[扶踈山]에서 갈려나온 좌소[左蘇]를 아사달[阿思達]이라고 하는데 바로 옛날 양주[楊州] 땅입니다. 그곳에 궁궐[宮闕]을 짓고 주상께서 거처하신다면 국운[國運]이 8백 년까지 연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부추겼기 때문에 이렇게 분부한 것이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22년[二十二年]
윤7월[閏七月]
秋閏七月 丙子 西北面兵馬使報 蒙兵侵安邊都護府 壬午 命前後左右軍陣主知兵馬事 沿江防戍 又令廣州·南京 合入江華 [중략]
병자[丙子]일. 서북면병마사로부터 몽고군[蒙古軍]이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를 침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오[壬午]일. 전, 후, 좌, 우군[前後左右軍]의 각 진주[陣主]와 지병마사로 하여금 강화[江華]의 강[江] 연안을 수비하게 하는 한편, 광주[廣州]와 남경[南京]의 백성[百姓]들을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오게 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24년[二十四年]
동10월[冬十月]
冬十月 丁酉 葬于碩陵 是歲, 築江華外城 [중략]
정유[丁酉]일. 전 왕[王]을 석릉[碩陵]4)에 장사지냈다. 이 해에 강화[江華] 외성[外城]을 쌓았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0년[三十年]
8월[八月]
八月 庚午 宥重刑十六人 流于島 移葬世祖太祖于江華盖骨洞 [중략]
경오[庚午]일. 중죄수 16명의 형량을 감형해 섬으로 유배보냈다. 세조[世祖]와 태조[太祖]의 유해를 강화[江華] 개골동[盖骨洞]으로 이장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7년[三十七年]
6월[六月]
庚子 蒙古使多可 無老孫等六十二人來 審出陸之狀 到昇天府館 責王出迎江外 王不出 遣新安公佺 迎入江都 乙巳 宴蒙使于壽昌宮 壬戌 親設華嚴神衆道場於本闕 [중략]
경자[庚子]일. 몽고[蒙古]사신 다가[多可], 무로손[無老孫] 등 62명이 와서 우리가 출륙[出陸]하는 상황을 살폈다. 이들은 승천부관[昇天府館]에 당도하자, 왕[王]더러 강[江] 밖으로 나와 영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왕[王]은 나가지 않고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을 시켜 강도[江都]로 맞아들이게 했다. 을사[乙巳] 일. 몽고[蒙古]사신을 위하여 수창궁[壽昌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임술[壬戌]일. 본궐에서 왕[王]이 친히 화엄신중도량(華嚴神衆道場)을 열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7년[三十七年]
8월[八月]
八月 戊戌 東界兵馬使報 狄兵入高 和州古城 甲辰 樞密院副使崔椿命卒 己酉 宥死囚十人 配有人島 辛亥 王如奉恩寺 設慶讚法席 庚申 築江都中城 [중략]
무술[戊戌]일. 동계병마사가, 북쪽 오랑캐군사가 고주[高州]와 화주[和州] 의 옛 성[城]을 침입했다고 보고해 왔다. 갑진[甲辰]일. 추밀원부사 최춘명[崔椿命]이 죽었다. 기유[己酉]일. 사형수 열 명을 감형해 유인도[有人島]로 유배 보냈다. 신해[辛亥]일. 왕[王]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경찬법석[慶讚法席]을 열었다.
경신[庚申]일. 강도[江都]에 중성[中城]을 쌓았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7년[三十七年]
12월[十二月 ]
丙辰 蒙古使洪高伊等四十八人來 止昇天館曰 俟王出迎, 乃入 己未 王迎于梯浦宮 是日 大風寒甚 百官皆凍縮失容 王命撤輦上帷帳曰 法從百官 寒凍如此 朕獨暖耶 [중략]
병진[丙辰]일. 몽고[蒙古]사신 홍고이[洪高伊] 등 48명이 와서는 승천관[昇天館]에 멈춘 채, 왕[王]이 직접 출영해야만 들어가겠다고 뻗댔다.
기미[己未]일. 왕[王]이 제포궁[梯浦宮]으로 나가 사신들을 영접했다. 이 날 바람이 세게 불고 추위가 심해 백관[百官]들이 모두 얼어붙어 제대로 예모를 차리지 못했다. 왕[王]이 어련[御輦] 위에 덮었던 휘장을 걷게 하고는, 시종하는 백관[百官]들이 이처럼 추위에 떠는데 짐만 혼자 따뜻해서야 되겠는가 ? 라고 말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8년[三十八年]
춘정월[ 春正月]
三十八年 春正月 壬戌朔 王在梯浦宮 宴洪高伊 高伊謂王曰 國之北鄙 殘破已甚 如家無藩籬 何可復都舊京 宜據江以自固 我當歸奏皇后 無令東擾 王悅待之彌厚 [중략]
임술[壬戌]일. 왕[왕]이 제포궁[梯浦宮]에서 홍고이[洪高伊]를 위해 잔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홍고이[洪高伊]가 왕[王]더러 이렇게 말했다. 나라 북쪽 국경[國境]지대가 심하게 파괴되어 마치 울타리 없는 집과 같으니 어떻게 다시 옛 도읍[都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 강[江]을 의지해 방어태세를 굳게 해야 할 것이니 제가 귀국하면 황후[皇后]께 아뢰어 고려[高麗]를 더 이상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왕[王]이 기쁜 나머지 그를 더욱 후하게 대접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8년[三十八年]
9월[九月]
九月 甲子 幸賢聖寺 壬午 幸城西門外大藏經板堂 率百官行香 顯宗時板本 燬於壬辰蒙兵 王與群臣更願 立都監 十六年而功畢 [중략]
갑자[甲子]일. 왕[王]이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했다. 임오[壬午]일. 왕[王]이 도성[都城]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분향했다. 현종[顯宗] 때에 새겼던 판본[板本]은 임진[壬辰]년 몽고[蒙古]와의 전쟁 때 불타버렸으므로, 왕[王]이 신하[臣下]들과 함께 다시 발원[發願]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16년 만에 일을 마쳤던 것이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38년[三十八年]
10월[十月]
乙巳 蒙古使將困 洪高伊等四十人來至昇天館 戊申 王出迎于梯浦 皇帝新卽位 詔國王親朝 及令還舊京 庚戌 將困等入江都 [중략]
을사[乙巳]일. 몽고[蒙古] 사신 장곤[將困], 홍고이[洪古伊] 등 40명이 승천관[昇天館]에 도착했다. 무신[戊申]일. 왕[王]이 제포[梯浦]에 나가서 몽고[蒙古] 사신을 영접하자 사신들은 왕[王]이 친히 몽고[蒙古]에 입조할 것과 옛 도읍[都邑]으로 환도[還都]할 것을 요구하는 새 황제[皇帝]의 조서[詔書]를 전달했다. 경술[庚戌]일. 장곤[將困] 등이 강도[江都]로 들어왔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0년[四十年]
4월[四月]
甲寅 原州民 被擄蒙古者還言 阿母侃 洪福源詣帝所言 高麗築重城 無出陸歸款意 帝命皇弟松柱 帥兵一萬 道東眞國 入東界 阿母侃 洪福源領麾下兵 趣北界 皆屯大伊州 [중략]
갑인[甲寅]일. 몽고[蒙古]에 포로로 잡혀갔던 원주[原州] 사람이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모간[阿母侃]과 홍복원[洪福源]이 황제[皇帝]를 찾아가, 고려[高麗]가 이중으로 성[城]을 쌓는 등 육지로 나와 항복할 뜻이 없다고 일러 바쳤습니다. 이에 황제[皇帝]가 자기 동생 송주[松柱]로 하여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동진[東眞]을 거쳐 동계로 진격하게 하고, 아모간[[阿母侃]과 홍복원[洪福源] 등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북계로 진격하게 하니, 현재 그들은 모두 대이주[大伊州]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0년[四十年]
8월[八月]
八月 戊申 習水戰于甲串江. 辛亥 親設華嚴神衆道場. 癸丑 校尉大金就率牛峯別抄三十餘人, 與蒙古兵, 戰于金郊·興義閒, 斬首數級, 獲馬·弓矢·氈裘等物.
무신[戊申]일. 갑곶강[甲串江]에서 수전[水戰]훈련을 실시했다. 신해[辛亥]일. 왕[왕]이 친히 화엄신중도량[華嚴神衆道場]을 열었다. 계축[癸丑]일. 교위[校尉] 대금취[大金就]가 우봉별초[牛峯別抄] 30여 명을 지휘해 금교[金郊]와 흥의[興義] 사이에서 몽고군[蒙古軍]과 싸워 적군 여러 명의 목을 베고, 말과 활, 화살 및 갑옷 등을 노획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0년[四十年]
11월[十日月]
蒙古大謂王曰 自大軍入境以來 一日死亡者 幾千萬人 王何惜一身 不顧萬民之命乎 王若早出迎 安有無辜之民 肝腦塗地者乎 也窟大王之言卽皇帝之言 吾之言卽也窟大王之言也 自今以往 萬世和好 豈不樂哉 遂酣飮而去 王還江都 [중략]
몽고대[蒙古大]가 왕[王]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군사가 고려[高麗] 땅에 들어 온 이후 하루에 수천 수만 명이 희생되는데도 국왕[國王]께서는 어찌해 자기 한 몸만 생각하고 만백성[萬百姓]들의 생명은 돌아보지 않았습니까 ? 진작 나오셔서 우리를 영접했다면 어찌 무고한 백성[百姓]들이 처참하게 죽어갔겠습니까 ? 야굴대왕[也窟大王]의 말은 곧 황제[皇帝]의 말이요, 내 말은 곧 야굴대왕[也窟大王]의 말입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화친을 맺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몽고대[蒙古大]는 술에 취해 돌아갔고 왕[王]은 강도[江都]로 되돌아 왔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43년[四十三年]
추8월[秋八月]
庚辰 遣將軍宋吉儒 徙淸州民于海島 辛巳 車羅大 永寧公 洪福源等到甲串江外 大張旗幟 牧馬于田 登通津山 望江都 退屯安亥縣 [중략]
경진[庚辰]일.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시켜 청주[淸州] 백성[百姓]들을 바닷섬으로 이주시키게 했다. 신사[辛巳]일. 차라대[車羅大], 영녕공[永寧公], 홍복원[洪福源] 등이 갑곶강[甲串江] 주위까지 와 깃발을 가득 벌여놓고 들판에서 말을 먹이는 한편, 통진산[通津山]에 올라 강도[江都]를 살핀 후, 수안현[守安縣]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6년[四十六年]
6월[六月]
壬午 王引見客使于時御宮 周者等諭以壞城之事 癸未 始壞江都內城 客使督役甚急 諸領府兵 不堪其苦 泣曰 若知如此 不如不城 乙酉 城郭摧折 聲如疾雷 震動閭里 街童巷婦 皆爲之悲泣 [중략]
임오[壬午]일. 왕[王]이 임시 처소에서 사절을 접견하자 주자[周者] 등은 성[城]을 허는 문제를 설득했다. 계미[癸未]일. 강도[江都]의 내성[內城]을 헐기 시작했는데 사절이 너무 심하게 재우치자 각 부대의 장병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될 줄 진작 알았더라면 차라리 성[城]을 쌓지 않을 걸 그랬다. 고 불평했다. 을유[乙酉]일. 성곽[城郭]이 부서지면서 천둥소리와 같이 온 거리를 진동시키자 거리의 아이들과 아녀자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6년[四十六年]
6월[六月]
己丑 命安慶公 餞客使 贈金銀 布帛甚多 庚寅 客使聞外城不壞曰 外城猶在 可謂誠服乎 盡壞乃還 國家賂以重寶 卽令都房 壞外城 時 都人以謂 內外城盡壞 必有以也 爭買船 船價湧貴 [중략]
기축[己丑]일. 안경공[安慶公]을 시켜 사신[使臣]을 전송하게 하면서 금은[金銀]과 포백[布帛]을 매우 많이 선물했다. 경인[庚寅]일. 외성[外城]이 아직 헐리지 않았다는 말을 사절이 듣자, 외성[外城]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진심으로 항복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 외성[外城]을 마저 헐어야만 우리가 돌아가겠다. 라고 하였다. 나라에서 그들에게 귀중한 보배를 뇌물로 준 후, 곧 도방[都房]에 명하여 외성[外城]을 헐게 했다. 당시 강도[江都] 사람들은 내[內], 외성[外城]을 모조리 헐어버리는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다투어 도망갈 배를 사 들이는 바람에 배 값이 폭등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6년[四十六年]
6월[六月]
壬寅 王薨于柳璥第 大將軍金仁俊欲奉安慶公嗣位 兩府議曰 元子繼体 古今之通義也 况今太子 代王入朝 而以弟爲君, 可乎 [중략]
임인[壬寅]일. 왕[王]이 유경[柳璥]의 집에서 죽었다. 대장군 김인준[金仁俊]이 안경공[安慶公]을 추대해 왕위[王位]를 계승시키려 했다. 그러나 양부[兩府]에서는, 맏아들이 왕위[王位]를 잇는 것이 고금[古今 ]에 통용되는 원칙이다. 하물며 현재 태자[太子]가 왕[王] 대신 입조[入朝]해 있는 터에 그 동생을 군주[君主]로 세우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 라고 하며 반대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46년[四十六年]
6월[六月]
王在位四十六年 壽六十八 謚曰安孝 廟號高宗 陵曰洪陵 忠宣王二年 元贈謚忠憲 [중략]
왕[王]은 46년간 재위[在位]했으며, 향년은 68세[歲]였다. 시호[諡號]는 안효[安孝],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며, 능호[陵號]는 홍릉[洪陵]6)이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원[元]나라에서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원종[元宗] 5년[五年]
6월[六月]
六月 乙巳 王如奉恩寺 丙午 幸三郞城五星道場 庚戌 移御妙智寺 又親醮于磨利山塹城 辛亥 移御神泥洞假闕 設大佛頂五星道場 壬子 設大日王道場于穴口寺 乙卯 親幸行香 丙辰 還御長峯宮 宥境內二罪以下 [중략]
을사일[乙巳]. 왕[王]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병오일[丙午], 왕[王]이 삼랑성[三郞城]에서 열리고 있는 오성도량[五星道場]에 행차했다. 경술일[庚戌]. 왕[王]이 묘지사[妙智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또 친히 마리산[磨利山]의 참성[塹城]에서 초제를 지냈다. 신해일[辛亥]. 왕[王]이 신니동[神泥洞] 에 있는 임시 궁궐[宮闕]로 거처를 옮겨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열었다. 임자일[壬子]. 혈구사[穴口寺])에서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을 열었다. 을묘일[乙卯]. 왕[王]이 친히 분향[行香]했다. 병진일[丙辰]. 왕[王]이 장봉궁[長峯宮]에서 그 지역 죄수 중 참형과 교수형을 제외한 사람들을 사면해 주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원종[元宗] 5년[五年]
7월[七月]
己亥 宣旨曰, “自祖聖以來, 全仗佛敎, 密護延基. 夫仁王般若, 偏爲護國安民, 最勝法文, 如經所說百師子等, 法寶威儀, 乃道場之急具也. 往者, 移都時, 師子座, 不能輸入, 及乎法筵, 儀不如法. 金俊爲寡人親朝, 欲設仁王法會, 印成是經新舊譯各一百二部
기해[己亥]일. 왕[王]이 다음과 같은 교지[敎旨]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태조[太祖]이래로 오직 부처의 가르침에 의존해 왔으며 그 내밀한 보호로 국가[國家]의 기업을 연장해 왔다. 특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은 호국과 안민에 있어 가장 뛰어난 법문[法文]으로 그 경전[經典]에서 말하고 있는 백사자[百獅子] 같은 사방 승물은 법보[法寶]의 위의[威儀]를 상징하는 것으로 도량을 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장식물인 것이다. 전번 도읍[都邑]를 옮길14) 때 사자좌[獅子座]를 가져가지 못하는 바람에 법연[法筵]을 열면서도 법식에 따른 의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번에 김준[金俊]이 친히 입조하는 과인을 위해 인왕법회[仁王法會]를 열고자 이 경전[經典]의 옛 번역본과 새 번역본 각 102부씩을 박아 내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원종[元宗] 15년[十五年]
6월[六月]
癸亥 王薨于堤上宮 在位十五年 壽五十六 [중략]
계해[癸亥]일. 왕[王]이 제상궁[堤上宮]에서 죽으니 15년간 왕위[王位]에 있었고 향년은 56세[歲]였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원종[元宗] 15년[十五年]
6월[六月]
甲子 百官上謚曰順孝 廟號元宗 [중략]
갑자[甲子]일. 백관[百官]이 순효[順孝]라는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원종[元宗]이라 하였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원종[元宗] 15년[十五年]
9월[九月]
九月 乙酉 葬韶陵 忠宣王二年七月乙未, 元贈謚忠敬 [중략]
을유[乙酉]일. 왕[王]을 소릉[昭陵]에 장사지냈다.
충선왕[忠宣王] 2년 7월 을미[乙未]일에 원[元]나라에서 죽은 왕[王]에게 충경[忠敬]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2년[二年]
3월[三月]
甲申 達魯花赤詰之曰 稱宣旨 稱朕 稱赦 何僭也 王使僉議中贊金方慶 左承宣朴恒 解之曰 非敢僭也 但循祖宗相傳之舊耳 敢不改焉 於是 改宣旨曰王旨 朕曰孤 赦曰宥 奏曰呈 [중략]
갑신[甲申]일. 달로화적[達魯花赤] 왕[王]에게, 선지[宣旨]라느니 짐[朕)이라느니 사[赦]라고 칭[稱]하는 것은 분수에 넘는 일이 아닙니까 ? 라고 힐문했다. 이에 왕[王]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감히 분수에 넘는 짓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다만 조종[祖宗] 때부터 전해오는 관례[慣例]에 따랐을 뿐이니 당장 고치겠소. 라고 해명한 후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각각 고쳤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4년[四年]
3월[三月]
三月 丁亥 太白晝見. 壬辰 以譖元者, 皆籍叛入江華 故命罷船兵 甲午 印侯還自元 帝召還洪茶丘 又命王入朝 [중략]
정해일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진[壬辰]일. 원[元]나라에 참소하는 자들이 다들 고려[高麗]가 원[元]나라에 반역을 일으켜 강화[江華]로 다시 들어갈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다기에 왕[王]이 아예 수군을 폐지하라고 지시했다. 갑오[甲午]일. 인후[印侯]가 원[元]나라에서 돌아왔는데 그 편에 황제[皇帝]가 홍다구[洪茶丘]를 소환하는 한편 왕[王]의 입조[入朝]를 명하였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4년[四年]
7월[七月]
壬辰 王與公主 赴宴于外兀朶 王上書中書省曰 小邦姦佞之人 欲釋宿憾 飾辭妄告 或投匿名文 至謂之謀叛 管軍官 達魯花赤 因而拷問 騷擾一國 [중략]
임진[壬辰]일. 왕[王]이 공주[公主]와 함께 외올타[外兀朶]에서 열린 잔치에 참석했다. 왕[王]이 원[元]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전달했다.
저희 나라의 어떤 간사[奸邪]한 자가 평소 품고 있던 감정을 풀고자 거짓말을 만들어 고발하거나 투서[投書]하는 일이 있었는데, 심지어 반역[反逆]의 음모까지 들먹이는 바람에 관군관[管軍官]과 달로화적[達魯花赤]이 고문까지 하여 온 나라가 소란해졌습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4년[四年]
7월[七月]
今後 如有似前告訴者 請自窮究事由 申覆上司 無令官軍 驚動百姓 又有惡人 謀撓國家 每以遷都江華 藉口騰辭 請使種田軍 入處江華 以塞讒言之路 [중략]
금후로 만약 과거와 같은 고소자[告訴者]가 있을 경우 우리 측에서 스스로 그 일의 전말을 철저히 조사해 상국의 해당 관청[官廳]에 통보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상국의 군대 때문에 백성[百姓]들이 놀라 동요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또 어떤 악[惡]한 자가 나라를 곤경[困境]에 빠트리려고 늘 우리가 강화[江華]로 도읍[都邑]을 옮기려 한다고 참소하여 떠들고 다니니 종전군[種田軍]을 강화[江華]로 이동시켜 아예 근본적으로 참소의 핑계거리를 막아주십시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17년[十七年]
6월[六月]
六月 丁卯朔 王及公主 還江華 [중략]
정묘[丁卯]일. 왕[왕]과 공주[公主]가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17년[十七年]
6월[六月]
癸酉 遣郞將高世如元 請親賀聖節 幷奏復都開京 甲申 元遣使 運江南米十萬石來賑 乙未 頒米于七品以下 [중략]
계유[癸酉]일. 낭장[郞將] 고세[高世]를 원[元]나라에 보내 왕[王]이 친히 황제[皇帝]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겠다고 청하는 한편 개경[開京]으로 돌아가겠다고 보고했다. 갑신[甲申]일. 원[元]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강남[江南]의 쌀 십만 석을 운반해 와서 우리 백성[百姓]들을 구휼하게 했다.
을미[乙未]일. 7품 이하 관리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18년[十八年]
춘정월[春正月]
丁巳 移置先代實錄于禪源寺 庚申 復都開京. [중략]
정사[丁巳]일. 선대[先代]의 실록[實錄]을 선원사[禪源寺]에 옮겨 보관했다. 경신[庚申]일. 개경[開京]으로 도읍[都邑]을 다시 옮겼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18년[十八年]
2월[二月]
二月 丙寅 還宗廟社稷於開京 己丑 以卜奎知西京留守 [중략]
병인[丙寅]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개경[開京]으로 옮겼다. 기축[己丑]일. 복규[卜奎]를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로 임명했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34년[三十四年]
추7월[秋七月]
秋七月 丙寅 王疾篤 遣禮賓尹韓連 以報瀋陽王 己巳 王薨于神孝寺 是夜 殯于淑妃第 [중략]
병인[丙寅]일. 왕[王]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예빈윤[禮賓尹] 한연[韓連]을 보내 심양왕[瀋陽王]에게 알리게 했다. 기사[己巳]일. 왕[王]이 신효사[神孝寺]에서 죽자 이날 밤 숙비[淑妃]의 집에 빈전[殯殿]을 차렸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34년[三十四年]
10월[十月]
十月 葬于慶陵 忠宣王二年 元賜謚忠烈 恭愍王六年 加景孝 [중략]
경릉[慶陵]에 장사지냈다. 충선왕[忠宣王] 2년 원[원]나라에서 충렬[忠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으며, 공민왕[恭愍王] 6년에는 경효[景孝]를 덧붙였다. [중략]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강화현[江華縣]
本高句麗穴口郡 一云甲比古次 在海中 直貞州之西南 通津縣之西 新羅景德王 改爲海口郡 高麗初 更今名 顯宗九年 置縣令 [중략]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혈구군[穴口郡]이며, 이르기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해중[海中] 에 있으며 정주[貞州]의 바로 서남[西南]쪽이자, 통진현[通津縣]의 서[西]쪽에 위치한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해구군[海口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중략]
高宗十九年 避蒙古兵入都 陞爲郡, 號江都 三十七年 築中城 周回二千九百六十餘閒 元宗元年 復還松都 府東十里松嶽里 有故宮基 忠烈王時 倂于仁州 尋復舊 [중략]
고종[高宗] 19년에 몽고[蒙古] 군대를 피해 들어가 도읍[都邑]으로 삼으면서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강도[江都]라 이름하였다. 37년에 중성[中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960여 간[閒]이다. 원종[元宗] 원년[元年]에 다시 송도[松都]로 환도[還都]했다 부[府]의 동[東]쪽 10리에 위치한 송악리[松嶽里]에 옛 궁궐[宮闕]터가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 인주[仁州]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후에 예전대로 복구시켰다. [중략]
辛禑三年 陞爲府 有摩利山 在府南 山頂有塹星壇 世傳, 檀君祭天壇 傳燈山一名三郞城 世傳 檀君使三子 築之 有仇音島 巴音島 今音北島 買仍島 屬縣三 [중략]
신우[辛禑] 3년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마리산[摩利山] 부[府]의 남[南]쪽에 위치[位置]하며 산정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천단[祭天壇]이라 한다. 전등산[傳燈山] 일명 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 한다. 구음도[仇音島], 파음도[巴音島], 금음북도[今音北島], 매잉도[買仍島]가 있다. 속현[屬縣]이 3개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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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침 <최남선>님의 태조 왕건릉인 "영릉"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는데........아주 적절한 타이밍이 되었네요.
조선사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잃어버린 조선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세조[世祖]와 태조[太祖]의 유해를 강화[江華] 개골동[盖骨洞]으로 이장했다. [중략]
이 구절이 중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