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재, 《굴뚝에 관한 보고서》
이광수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 교수)
어떤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때로는 사회과학의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학의 일이기도 하다. 기록이라는 것은 사실을 그대로 남기는 의미도 있지만, 기록자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고, 그 시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적으로 소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남겨진 기록을 읽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그 해석 작업의 가장 우선적인 일은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의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기록하였을까? 기록을 남긴 당시의 사회적 위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성장 과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이 의문을 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글이 아닌 사진 이미지로 남겨졌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 의문은 사진의 생성 원리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사진 이미지를 만들 때 사진가는 그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결과물인 사진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사진은 과학의 산물인데도 동영상과는 달리 그 맥락이 단절 혹은 소거되어 있고, 그래서, 그 사이 사이를 독자의 해석으로 메꿔야 한다. 결국, 사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사진을 찍고, 독해하고, 감상하고, 전시하는 등의 여러 관련 행위의 중심에 인문학이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자의 시선이 아닌, 기록 자체가 뭘 말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라는 하나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어떤 것을 말하려 하는가? 그의 언어는 다변인가, 눌변인가, 웅변인가? 그는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는가 아니면 스스로 그 여지를 차단했는가?
사진은 모사에서 출발하지만, 재현함으로써 완성된다.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의성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그림이나 글과 같이 창작의 가치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느끼거나 읽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미술의 미학으로부터 철저히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현재의 위치다. 그래서 사진은 여전히 미술에 대한 강박증을 앓는다. 그래서 그림이 갖는 미학적 기준에 따라 한 장의 ‘잘’ 찍은 사진 담론에 혹하는 것이고, 천편일률적으로 ‘빛이 좋은 시각’과 ‘좋은 포인트’에 매달리는 것이다. 결국, 그러다 보니 사진은 소재가 다를 뿐이지, 그 재현된 것은 다분히 천편일률적이고, 독창성이라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는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었을까? 그 작업 중에서 김인재는 시각의 연속과 단절 사이에서 일어난 변증법적 사건을 염두에 둔다.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보는 일이고, 보는 일은 바라봄과 해석함이 연속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사진가 김인재는 작가 노트를 통해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지난 2년간 바라보는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산업문화유산’이다. 그는 ‘굴뚝’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유산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으로 해석하여, 어떤 현실을 창조하려 한다. 굴뚝으로 상징된 그 흘러간 시간의 오브제를 바라보는 일이란, 누구나 보는 어떤 분명한 객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관(官)이나 학문의 언어는 그것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일반화시키지만, 사진가는 그런 획일의 언어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이라는 용어로 치환하여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언어가 담는 품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관이나 학문의 언어가 담지 못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사진가가 끄집어내고 독자가 그것을 자신 개인만의 기억과 이야기로 창조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김인재 작업의 소재인 ‘근대산업문화유산’은 다른 말로 하면, ‘문명’이다. 그런데 그 문명이란 이분법의 소산이다. 어떤 것이 문명이면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게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 문명의 이면에는 야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명과 야만을 경계 짓는 게 보는 이의 시각이다. 김인재는 부지불식간에 이분법 혹은 그에 기초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과학적 혹은 진보적 시각에 관심을 둠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그 진보 담론에 비판적인지 우호적인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 문명과 문화유산의 변주에 관심이 많음을 알 뿐이다. 그 이분법에 따른 존재론적인 의미가 사진술과 닮았다. 정해진 프레임에 들어가 있으면 이미지로 생성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존재 여부는 철저히 사진가의 시각에 따라 달려 있다.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결국 배제되어 버림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버린다. 결국 문명과 사진이란 결국 시각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 이분법의 시각마저 벗어 던져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학문으로는 불가하다. 오로지 감성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감성이니 사진가들이 각자 보는 문명의 존재들을 한 곳에 묶어 놓고 보면 문명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분법적이지도 않고, 우와 열도 없는,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운동과 같은 것이다.
어떤 장소와 거기에 있는 오브제가 산업유산이라고 규정하고 전하고자 하는 일은 기록 차원의 일이다. 그 기록을 영상(image)로 남기려면 아무래도 동영상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면 당신은 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가? 굳이 맥락이 소거되고, 상황이 은닉되고, 어떤 부분을 배제하면서 네모난 박스 안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규격화하는 사진 행위를 한다면, 당신은 이미 기록을 넘어 해석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사진가 김인재는 매우 적극적인 해석의 지평 안으로 들어간다. 대상을 과학과 객관으로 범주화하여 그 안에서 어떤 분류와 분석이라는 과학의 일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분류를 넘어 섞임의 세계를, 보이는 외형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석을 넘어 해석을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굴뚝과 공장이 있지만, 그것들과 함께 낡고 손때 묻은 기계, 막힌 벽, 깨진 유리창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를 옭아맨 ‘태극기’ 액자가 있다. 사람은 세월의 무게 바깥으로 다 사라져, 카메라로는 담아내지 못하였지만, 그가 담은 그 부재 안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는 기록을 넘어, 소재주의를 넘어, 기억으로 쓰는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카메라라는 기계로 대상을 재현하는 일이 기록을 넘어, 해석으로 가는 것은 그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입체적이고 맥락적인데, 그것을 한 평면의 이미지로 고착화해 버리는 무모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시공간에서 행위 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품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데, 그래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막상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굴뚝’으로 대표한 지표가 주를 이루고, 간간이 그 시기의 공간이 재현된다.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지만 ‘굴뚝’이라는 이미지로 대변할 수 있으니, 하나의 표상으로서 ‘굴뚝’은 탁월하다. 그런데, ‘굴뚝’으로 단순화한 지표는 당시 그것을 둘러싸고 벌인 사람들의 여러 행위와 그 여러 행위 속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끌어내지는 못하게 한다. ‘굴뚝’이라는 지표가 너무 문화유산이라는 문명적 이미지가 강하고 그 굴뚝 주변의 여러 표상된 지표도 거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이 담지 못하는 그 잡다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을 상상 속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뭔가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하고자 한다. 이는 사진가가 벗어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다. 메타(meta)로서의 커뮤니케이션 말이다. 뭔가 분화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고, 정돈할 수 없는 원초적 세계다. 광주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공장, 목포 조선내화 벽돌공장, 문경 쌍용양회 공장, 서천 장항 제련소의 사택, 수원 영신연와 벽돌공장, 연천 신중앙요업 전곡공장, 예산 충남방직 공장, 오산 계성제지 공장, 의성 성광 성냥공장, 전주 쏘렉스 스폐공장, 조치원 한림제지 폐공장, 춘천 육림연탄 공장 ... 이미지에 달린 텍스트, 그 여러 고유명사가 이미지들 사이에서 단절된 역사의 기억을 메꿔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진들에는 텍스트가 들어가야 한다. 이 공장들이 지내온 영욕의 시간의 숫자도 기재해야 한다. 짧고 굵게. 그 숫자들 속에서 우리는 그 ‘문명화’를 둘러싼 기억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명사와 숫자로 된 캡션은 단지 역사적 기록성을 담보하는 것이라서 아니고, 그것이 얽힌 우리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대상이란 그 본질이 무엇이든지, 대상을 대하는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그 대상이 눔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상이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의 축적물이면, 기억의 서사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자신이 믿는 어떤 신격체의 상(像)이라면 존귀와 숭례(崇禮)의 현현(顯現)으로 다가서게 할 것이고, 그래서 초월의 소통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 대상이 자신과 별다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라면, 그저 그렇게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는 저 ‘굴뚝’으로 표지되는 저 시공 속의 여러 공장 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진 피사체들은 무슨 의미로 기억되는가? 우선, 사진가에 의해 마치 어떤 행위자인 것처럼 위치하게 되고,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는 그 사진가에 의해 관중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라는 기계로 우리 각자의 흘러간 기억을 어떤 형태로 박제하여 각 개인 앞에 내놓는 사진가는 기억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영매(靈媒)가 된다. 사진가는 무의미하듯 가만히 존재하는 피사체에게 어떤 의미의 옷을 입혀 그 상(像)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여 제시하는 저 ‘굴뚝’들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이제 당신이 사진가의 ‘보고서’에 화답할 일이다. 당신의 화답은 그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찾는 시간과 우주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사진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일이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사진가에게만 달린 게 아니고, 독자에게도 달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사진의 세계다.
문경 쌍용양회 /의성 성광성냥
예산 충방방적 /춘천 육림연탄 공장
연천 신중앙요업 /조치원 한림제지
수원 영신연와 벽돌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