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이 일어난 1871년 4월29일(음력 3월10일) 전국의 동학인들이 집결한 우정동 병풍바위입니다.
1871년 최초의 동학혁명은 해월교주가 진두지휘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은 해월최시형 교주가 직접 진두지휘하였다.
동학인 77명이 몸바쳐 희생된 1871년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은 당시 제2대 해월 최시형교주가 직접 진두에서 지휘하여 영해관아에 입성하였어요. 이는 영해부안핵사로 임명되었던 안동부사 박제관이 정부에 보고한 죄인문초기록과 처벌을 승인받은 역사문서에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데 확인해 보세요.(동학학회 후원회장 한광석 선생님께도 순한문 문서 영인본 140쪽짜리 사본을 드렸습니다)
이필제는 일월산에서 관군이 대포를 쏘고 포위되었을 때 해월선생님을 비롯한 동학지도부를 구출하고 민란의 죄를 짊어지고 간 진정한 동학인에 하나임이 안핵사가 사건조사 보고한 정부문서에도 명백하게 결론내리고 있어요.
진실된 역사를 바르게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신원운동"이니 '이필제의거"니 하는 것은 "한반도 최초의 성공한 동학혁명"을 폄하 왜곡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린 얄팍한 수작에서 누군가 만들어낸 것 뿐이고 그날 혁명참가자로 붙잡혀 목이 잘려 죽거나 사지가 찢기어 죽은 33인의 어느 누구도 "교조신원"을 진술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140쪽짜리 순한문 영인본을 잘 해독해 보세요. 그리고 고종의 승정원일기나 역사의 정사로 인정되는 모든 문서를 잘 읽어 보시고 바르게 용어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신중해야 합니다.
제2대 해월교주가 직접 지휘하여 동학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소를 잡아 천제를 지내면서 하늘에 고축하고 영해관아에 입성할 때 당시교주가 직접 지휘를 했고, 그날 참가자 대부분이 수운교조가 포교한 전국의 각도에서 모여들었고 나중에 잡혀죽거나 당일 대포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77명이나 되는 동학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민족의 장래를 위해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을 성공한 후 자진철수를 했는데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는 "신원운동"이니 "이필제의거"니 엉터리 역사왜곡에 사로잡혀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 거룩한 "최초의 동학혁명"을 훼손시켜 뭘 얻고자 하는지를 묻고 싶어요.
최초의 동학혁명 - 코메디 같은 역사왜곡을 훌훌 털어 냅시다.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은 "1871년 신미년 이필제의 난"이라고 배웠다면 저 역시 그런 엉터리 역사를 더러 보아 왔는데 이는 몇몇 엉터리 학자들이나 왜정시대 역사왜곡에 익숙한 용어를 검정함이 없이 답습하여 진실을 폄하 왜곡한 비극의 한 단면으로서 하루 빨리 극복하여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수립한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60년이 다 되도록 엉터리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혀지지 않았다는 산 증거의 하나가 아닐런지요?
1871년 4월29일(음력 3월10일) 전국의 600여명의 동학인들이 몇 백리 밖에서도 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병풍바위 아래로 모여들어 소를 잡아 천제를 지내고 하늘에 고하는 고축문을 낭독하고 동학탄압과 탐학을 일삼은 부사와 수석포교를 처단하고 관청을 접수하여 주민들을 모아 공전을 나누어 주고, 자치적인 통치를 해서 한반도에 최초로 시민혁명에 성공하고 자진철수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제2대 해월교주가 혁명을 직접 지휘를 했고, 이들 대부분은 전국의 동학인들이었고, 나중에 잡히어 죽임을 당한 사람들 77명이 진술한 내용은 역사문서인 승정원일기나 당시 정부가 작성 보관되어 있는 문서에 실명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이를 모르시는 분은 "최초의 동학혁명"이라는 저서에 사건진상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이를 읽어보시면 왜곡된 엉터리 역사교과서에서 주모자로 능지처사된 사람의 이름을 붙여 "이필제의 난"이라고 폄하한 것을 두 눈을 부릅뜨고 앞장서서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도리이겠지요?
또 일개 접주가 지휘하여 봇물싸움에 물세 못 내겠다고 싸운 것도 무슨 혁명이니 하는데 동학교주가 직접 지휘를 해서 이념과 명분을 뚜렷이 하여 하늘에 천제를 지내고 고축을 한 후 혁명을 지휘하여 성공한 후 잡혀서 희생된 동학인이 77명이나 되는데 "신원운동"이라느니 누구누구의 난이니 하는 역사왜곡은 바로 잡아야 겠지요?
다시 한번 "이필제의 난"이니 "신원운동"이니 하는 표현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유 일곱가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당시 제2대교주 해월선생이 직접 진두에서 지휘하여 영해관아에 입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천도교 노선인 비폭력 운동에 배치된다는 고정관념을 깔고서 1871년 최초의 동학혁명을 해석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이와는 전혀 별개라는 점에서 진실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둘째, 이날 혁명에 참가자들은 수운교조가 동학을 포덕하고 전국의 접주를 정한 지역에서 몇백리 밖에서도 골고루 모여들어 참가했다는 것은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광범위한 지역대표성까지를 갖춘 근대 시민혁명으로서 서양의 불란서혁명과도 견줄 수 있는 위대한 혁명을 한반도에서 최초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요?
셋째, 참가자들을 나중에 추적하여 몇달 후에 잡힌 사람도 있는데 대부분이 동학교도들이었고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동학교도들이라는 사실이 역사문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심한 고문으로 물고된 옥사자들이 12명이나 되는 점은 일단 동학인을 주로 잡아들여 인권도 없던 시대에 동학탄압의 압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겨우 무슨 운동으로 폄하될 일인가요?
넷째, 1915년 왜정 때 발행된 시천교종역사에도 영해동학혁명을 "신미사변"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6.25전쟁도 예전에는 6.25사변이라고 표현했는데 국민이 주인인 지금 세상에 "이필제의 난"이라고 폄하해서 표현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그런데 후대에 와서 "이필제의 난"이니 '신원운동"이니 폄하하여 오도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왜곡이 되겠지요.
다섯째, 죄인 문초기록에 33명이 죽어가면서도 동학의 이상세계가 도래하기를 하늘에 고축하고 도록에 서명했다는 진술은 있어도 "신원운동"이라는 진술을 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역사문서에 확인해 보십시오.
여섯째, 이필제는 동학지도부 주요인물을 일월산 포위망에서 구출하여 울연전으로 탈출한 후 성공한 동학혁명을 자축하고 단양의 친구인 정기현의 집으로 피신하였고 진정한 동학인임을 정부문서에도 결론내리고 있어요. 그런데도 이필제의 난이라고 역사 왜곡하는 것을 여과 없이 동조할 수는 없겠지요.
일곱째, 이필제는 해월교주 등 동학지도부를 구출해서 단양으로 피신한 후 관의 촉수가 동학지도부에 다가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해 8월 동학과 관계없는 유생들 모임에 뛰어나가 허술하게 잡히어 해월교주와 동학지도부를 보호하고 능지처사의 형을 받은 진정한 동학인입니다. 언젠가는 그가 능지처사된 서울시청 뒤에 동상을 세워야 하겠지요.
이 모든 것이 역사문서와 정부보관 문서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전하는데도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을 함부로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표현을 쓰면 안되겠지요. 왜곡된 역사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진실된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로 볼 줄 알아야지요.
[최초의 동학혁명에 참가한 불멸의 영웅들]
최초의 동학혁명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 1871년도에 잡혀서 33명은 효수형을 당하고 12명은 물고(옥사)된 것이 왕조실록인 고종의 승정원일기(1871년 6월23일 및 12월23일 자)와 안핵사 박재관의 보고문서에 확인되고 있고,
그 후에 잡혀서 죽임을 당했거나 교전으로 죽은 사람이 32명이 확인되는데 이는 1879년도에 동학측이 기록으로 남긴 도원기서 및 1915년에 간행된 시천교종역사에 기록된 것으로서 정부 보관문서(구 정신문화연구원 영인본 간행)에 있는 진실된 역사문서입니다. 이 사실은 어느 누구도 왜곡이나 부인할 수 없는 불멸의 영웅들입니다.
[몸 바친 영웅들 77명]
영해부 21명
효수형 10명 : 권두석, 권석중, 권영화, 박기준, 박영각,
박영수, 박한용, 박한태, 신화범, 한상엽,
물고자 5명 : 권재일, 박영관, 박종대, 신택순, 장선이,
교전사망 8명 : 박사헌형제, 권일원부자, 박양언, 박지동,
권덕일, 김씨(이름 모름)
(박사헌 형제는 박영관 박영각 동일인)
영덕현 6명
효수형 1명 : 임영조, 교형 1명 : 강사원(1885년)
교전사망 4명 : 임만조, 구일선, 강문, 김기호,
영양현 9명
효수형 4명 : 이군협, 이재관, 최기호, 최준이,
물고자 3명 : 신성득, 우대교, 이정학,
교전사망 1명 : 김용운, 교형1명 : 최시형(1898년)
진보현 1명, 효수형 : 정창학
울진평해 10명 (당시 강원도)
효수형 5명 : 남기환, 손경석, 전인철, 전정환, 황억대,
물고자 2명 : 김귀철, 남두병, 자진1명 : 전영규,
교전사망 2명 : 남기상, 김씨(이름 모름)
(전동규는 전인철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큼)
경주부 14명
효수형 7명 : 김덕창, 김창복, 박명관, 이기수, 이병권,
임욱이, 허성언,
교전사망 7명 : 이기섭, 이사인, 김만춘, 정치선,
김씨(이름모름) 숙질, 김경화의 백형,
안동부 2명, 효수형 : 김천석, 장성진,
청하 3명, 교전사망 : 이국필 형제, 안씨(이름모름)
흥해 2명, 교전사망 : 박황언, 백씨(이름모름)
연일 2명, 교전사망 : 박씨, 천씨 (2명 이름모름),
장기 1명, 입성시 사망 : 성씨(이름모름)
밀양 1명, 효수형 : 김일언,
영산(지금은 경남) 1명, 물고자 : 송지,
충청노성 1명, 효수형 : 박춘집,
충청홍주 1명, 능지처사 : 이필제,(1871년 12월)
전라남원 1명, 물고자 : 하만석,
서울 1명, 교형 : 김낙균(년도미상),
[정배형(귀양)을 받은 영웅들 21명]
영해부 6명 : 권기상, 권양일, 김만근, 박순종, 박유태, 박응춘,
영양현 7명 : 곽진봉, 김명북, 안대제, 안소득, 안평해,
이도천, 이성중,
평해현 3명 : 전세규, 전제옥, 전종이,
칠원(경남) 2명 : 설영구, 윤준식,
안동 1명 : 정계문, 상주 1명 : 김천일, 울산 1명 : 서군직,
[600여명 참가자중 피신확인 영웅들 66명]
영해23명 : 박춘서, 이수용, 백갑이, 김소천, 김여수, 박군행,
박군서, 권일언, 권공필, 권이목, 이인언, 전윤오,
김경화(金慶和), 전덕원, 김계익, 김양언, 임근조,
임인조, 유성원, 전성문, 김용여, 박영목, 김성길,
영덕3명 : 구계원, 김씨성을 가진 두명,
영양11명 : 정치겸, 정학이, 최갑대, 초대접주 황재민(黃在民),
김대복, 김치국, 김윤백, 백현원, 김성진, 신성화, 배감천,
경주3명 : 최보관, 이원대, 김경화(金景和),
안동5명 : 김화춘, 김문옥, 김진경, 황재명, 김영순,
청하1명 : 이직보(李直甫 본명 이도한,李道漢),
흥해2명 : 김경철, 손흥준,
영일1명 : 이춘대(李春大),
울산2명 : 초대접주 서군효(徐君孝), 전윤경,
평해5명 : 전윤환, 황윤구, 전윤조, 전한규, 전서규,
상주7명 : 김경화(金敬和), 김형노, 김오실, 김순측, 이군강,
임익서, 권성옥,
대구3명 : 김성백, 강기, 정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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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친 날짜 : 2006.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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