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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1년 4월 25일 화요공부방
□ 반야심경 네 번째 강의
□ 교무님 설법 □
【제 1부】
반갑습니다. 지난주에 숙제를 내주었는데 다 해오셨지요? 오늘 또 처음 오신분도 있으니 기본적인 설명을 하면서 숙제를 같이 풀어보겠습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260자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본시 인도의 서가모니 부처 당대에 ( )라고 하는 인도말을 중국의 스님이 번역한 것과 인도 스님이 번역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 “반야바라밀다”의 뜻 ■
1. 반야
반야라는 것은 인도말을 그대로 음역한 것인데 쉽게 말해 진리입니다. 큰 지혜라고도 이야기하고, 또 법신 여래, 진여라고도 하고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름 아닌 반야인 것이지요. 제 법명은 김제원이고 속명은 김세환입니다. 이 두 이름이 서로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와 같습니다. 반야도 여러 가지 말로 불리울 뿐이지 모두 한가지입니다. 반야는 진리의 대명사인것입니다. “법신 = 진리 = 진여”
다 같은 말들입니다.
2. 바라밀다
“바라밀다”란 피안의 세계를 말합니다.
반야바라밀다. 진리의 세계를 가기 위한 중심된 경전 법문이란 뜻입니다.
3. 반야의 속성
1. 진공 : 참으로 비어있다. ---> 대
2. 묘유 : 비어 있지만 그 빈 속에 묘하게 있을 것은 다 있다. ---> 소
3. 조화 : 그 있는 것이 다시 조화를 이룬다. ---> 유, 무
그래서 이것을 원불교에서는 각각 대소유무로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흔히 진리를 “진공이다” 라고 표현하지만 공은 알고 보면 진이면서 공이면서 묘유이면서 조화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도 이 진공 묘유와 같습니다.
이처럼 “반야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공식을 알고서 이제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 그리고 반야심경은 어떻게 쓰이느냐 ? ■
1. 신앙적 (주술)
‘주송’이라고도 합니다. 신앙적으로 경을 외우기만 해도, 즉, 뜻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믿고 외우기만 하여고 경의 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통의 불자는 주로 이 신앙적 독경을 합니다. 이것은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과 위력을 받지 않습니다.
2. 교리적 활용
교리적 활용은 어떤 이치 아니면 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불교인은 주로 주송을 하여서 교리적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절에 몇 년 다녀도 교리를 물어면 잘 몰라 합니다. 그러나 몰라도 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관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입니다. 가치관이면서 인생관입니다.
교리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알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냥 기도만 하고 마냥 천배만배만 해서는 안됩니다. 교리적으로 법문의 내용과 위력을 알아야 자기의 인생의 나아 가는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교리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외부에서 볼때는 불교인들이 자못 미신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교리를 모르고 신앙적으로만 하면 그런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3. 수행적 활용
반야의 세계를 알고 이것을 수행을 통해서 “아 이 자리가 그 자리고 이걸 경계속에서 활용해야겠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분할 때 이대로 해야겠구나” 하면서 그때그때 수행적으로 적용해 내야 합니다. 그냥 받들기만 해도 위력이 있으나, 그것을 공부하고, 알고, 생활속에서 쓰도록 하는 것이 제가 반야심경을 강의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신앙적으로 반야심경의 위력을 점검하고, 내 삶의 방향에 그것을 알고 사용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실제 삶에 적용하는지 반드시 고찰해 보셔야 합니다.
학교 다닐때, “영어공부는 시험보기 위해서 한다.” 는 식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시험 볼때는 영어를 잘하다가 실전에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어차피 같은 시간 공부하는 거라면 시험보고 나서도 써먹을 수 있어야 하겠지요? 반야심경을 실제 생활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고 법회를 보더라도 뭔가를 알고 해야 하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불교 생활을 하면서 복을 굉장히 많이 지었던 어떤 분이 결국 천주교로 갔습니다. 이분은 반야를 모르니까 교무님을 자기 앞에만 두려고 했습니다. 교무님을 욕심을 냈습니다. 예를 들어 교무님께서 팥죽 먹는날 다른 교도집에 갔더니 그것을 서운케 여겨 교무님께 따지고 달라들더랍니다. 교무님은 선약이 되어 있는 집에 갔을 뿐이고 그래서 당일날의 초대에 응하지 못했던 것 분인데 말입니다. 원불교 신앙을 해도 나라는 존재를 모르고, 내가 이 신앙 생활을 왜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니 자기 국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을 모르니 본인에게 은혜가 안되고 결국 은혜되는 바가 없으니 원불교을 떠나기 까지 합니다.
■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
관세음보살,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손이 천개라는 것은 중생의 고통을 다 만져준다, 어디서든지 다 만져준다, 그런 존재시다 하는 뜻이었지요. 천안이란 어떤 어려움도 다 보고 살펴주신다는 뜻입니다.
누가 : 관자재보살이
언제 : 행심반야바라밀다시 -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무엇을 : (조견)오온개공 - 오온이 개공한 것을
어떻게 : 조견 - 비추어 보았다.
결과는 : 도일체고액 - 일체의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나버렸다. - 행복의 길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시겠죠? 관자재보살은 서가모니 부처가 일종의 수행자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는 서가모니 부처를 대신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하나는 우리가 관자재보살이 되자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관자재보살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언제 ? 행하실 때, 조견 오온개공을 했다, 오온이 텅 빈것을 비춰봐서 타파하다, 제도하다, 일체의 고액을 넘어 서버리셨다, 나도 관자재보살같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해서 오온이 개공한 것을 비추어 보아 내 고통을 건너야 할 것 아닙니까? 오온이 개공한 것을 비춰 보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비춰보지 못하면 평생 가난과 아픔 속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아무리 잘생기고 잘나가도 결국은 오온이 개공한 것을 알지 못하면 나이가 많아도 어린애인 것입니다. 인생을 그저 소꿉장난하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여러 가지 경을 모으고 모아서 결국 핵심 260자로 골라 놓으신 것 아닙니까? 그 중에도 조견오온개공이 핵심입니다. 결국 모두가 이 오온개공에 대한 설명입니다. 반야심경 전체가 이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니 진도 끝이네요? ( 좌중웃음 )
이제 오온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공부를 할 때, 똑똑한 학생은 시험 뿐 아니라 앞으로 그것을 활용할 것까지 생각합니다. 똑같습니다. 원불교 갔더니 반야심경에 “오온이 개공이라고 하더라” 라고만 하시면 안됩니다. 오온은 다름아닌 우리의 심신을 말합니다. 내 몸과 마음, 이것이 바로 오온입니다.
색-몸
수상행식-마음
결국은 몸과 마음이 비었다는 것입니다.. 비었다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지금 컵이 있습니다. 이것을 빈 컵이라고 합시다. 지금 이것은 빈 컵이지요?
이것이 법이 아니라 병 이었다면 이것을 공병이라고 불렀겠죠? 이것을 무컵 또는 무병이라고 하면 뭐가 공병 빈컵 이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르죠?
내 몸과 마음이 개공이다라고 했죠? 개공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비었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과 빈 것은 다릅니다. 컵은 컵인데 빈 컵이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온이 개공하다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있는데 비어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면 ‘색’ 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색 - 색은 4대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 수 , 화, 풍 으로 구성이 되어있지요. ‘ 나 ’를 놓고 봅시다. 지금 따뜻하시죠? 이것은 온기입니다. 화 인것이지요 우리 몸안의 것들에서 지, 수, 화, 풍을 찾아법시다.
수 - 피, 땀, 뇨
풍- 호흡
지 -뻐, 피부
그러면 이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가 전부 지,수,화,풍 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풍이 나가고 온기가 나가고 수가 없고 지가 변합니다. 맞습니까?
자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색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온이 개공함은 색이 공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공즉시색-지수화풍이 인연에 의해서 모여졌다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이 색이 나라면, 정말로 이것이 참 실체라면, 이것을 죽은 뒤에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몸은 그 구성을 보니 결국 지,수,화,풍 밖에 안되더라 이겁니다. 이것을 수행적으로 바꾸면 몸은 참 나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엣날 중국의 어느 스님이 열반 전에 제자를 불러서 법당이 무너진다고 하니 제자들이 법당 기둥을 잡고 난리더랍니다. 이 스님이 제자들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법당 무너지는 것에 저렇게 호들갑을 떤다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합니다.
이 육신은 말이지요 부처가 아니라 부처님을 모신 법당밖에는 안됩니다. 어때요? 맞습니까? 그런데 아까 제가 공은 무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몸은 있기는 있되, 인연으로 모였다, 흩어졌다만 반복합니다. 이 몸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몸은 생로병사 합니다. 만물은 성주괴공합니다. 생로병사를 저는 둥글게 쓰고 싶습니다.
생로병사는 마치 춘하추동과 같습니다. 몸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색이 제대로 공한걸 아는 사람은 죽으면서 '봄이 되면 이 몸이 또 나겠지' 합니다. 색이 공한 것을 알면 생로병사의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상행식 - 수는 감각입니다. 그리고 상은 사고입니다. 행은 의지작용이며
식은 하나의 판단입니다.
수 - 안이비설신에 의해서 받아들이고 이것에 의해서
상과 의 를 합니다. 안이비설신의를 육근이라고 합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의해서 감각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분을 보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들어서 “이쁘다” 라고 했다고 합시다. 이쁘다고 할 때 싫은 사람 없지요?
다 좋아하지요? 제가 말할 때,
수 ? 들었을 때, 그 들은 바 감각을 받아들여서
상 ? ‘기분이 좋다’ 하고 생각한 다음에는 ‘교무님 빵좀 사다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행 ? 교무님께 빵을 사다드리고
식 ? 빵을 사다주니 교무님이 좋아하더라 하는 생각을 하죠? 이것을 업식이라고 합니다.
수상행을 하면서 이 업식을 쌓습니다. 이것을 상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했네, 누구를 도왔네, 봉사를 했네” 하는 상을 쌓으면서 업식을 쌓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g네”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온 이개공이다라는 것은 이러한 나라는 상을 없애는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지만 ‘ 나 ’ 라고 하는 내가 어디있냐?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보통은 ‘ 나 ’라는 것이 있어서, 즉 실체가 생겨서, 죽을 때는 없어지고 꿈 꿀때는 내가 없다가 지금은 내가 있어서 느끼고, 생각하고, 실행해서 계획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경에 오온이 개공하니 우리는 생사를 해탈하고 희노애락에 끌리지 말자” 하는 것들에 대한 내용 그 자체는 얼마든지 책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오온이 개공함을 깨쳐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려면 가장 중요한 첫째로서 먼저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스승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혼자서 깨쳐 알려고 해도 되질 않습니다. 스승을 믿고, 성자를 믿으면서 지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지 깨쳐 가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승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자기 혼자 며칠 낑낑대면서 깨치려다 맙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깨치려는 노력보다는 먹고 살기 바빠합니다.
‘나’라는 실체를 알지 못하면 육근이라는 것이 묘하게 우리를 걸려 넘어뜨립니다. 육근이라는 녀석은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기도 하고 또 오온이 공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스승이 없으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아에 꼭 묶여서 살고 경계에 휘둘리게 됩니다. 불심이나 구도심에 교당에 나오다가 경계에 의해 교당에 안나오고, 그러다 보면 백발백중 자기상에 빠지고 탐진치 세상에 빠져 삽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명 때문입니다. 무명을 타파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스승에게 맥을 대고 있어야 하는 방법입니다. 오온이 참 나가 아님을 알아서 ‘나’는 ‘공’이라는 것을 안 사람이 바로 삶의 진정한 방향을 잡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은 ‘색’에다만 공을 들입니다. 수술하고, 좋은것 먹고 사고, 없어질 육체를 가꾸느라 헬쓰 다니기에 바쁘고 그럽니다.
수상행식이 실체가 있는 줄 알고 계속 수생행식만 쌓아 갑니다. 업식을 쌓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나이 먹으면 한만 쌓입니다. 수상행식만 쌓고 항상 자기의 존재는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대종사님도 불생불멸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과를 왜 말하셨냐? 인과를 신앙하지 않으면 자기 욕심껏 삽니다. 그러다 원불교 만나면 그 순간에는 뭔가 반성이 돼서 울긴 하지만 그래도 원불교를 신앙하고 인과를 알면 죄업이 적고 인과를 모르면 그렇게 울며 참회하던 사람도 결국 거의 악업만 짓고 삽니다.
옛날에 중국의 순치황제가 황제를 하며 권세를 누리다가 느낀바가 있어서 옷을 벗고 산속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궐령포 입고 지낸 18년보다 승복입은 반나절이 더 행복했다” 며 쓴 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18년은 왕의 권좌에서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를 호령하며 살았던 시간이지만, 그렇게 살아도 그 순간은 결국 자기 모습과 자기 존재를 모르고 무명에 의해서 산 시간이라는 겁니다. 왕의 자리에서 지낼때에는 인과도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에세 출가한 이후의 반나절은 자기도 알고 인과도 알고 그랬던 시간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차입니까? 아무리 돈, 명예가 많고 하바드나 예일대학을 나온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존재를 모르면 인생의 방향을 모르고 잘못 사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세상 모든 지식 다 배워도 자기를 모르다니요?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자기를 모르니 무엇을 위해 삽니까? 결국 자기가 아닌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숙제 낸 것을 질문하고서 쉬겠습니다. 제가 두 가지를 물었지요?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그것이 과연 있습니까?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라는 장치를 통해서 듣고 아는 것이 있습니다. 있긴 있지요? 그것이 마음이라는 것인데 꿈도 없이 잘 때는 그 마음... 이것이 어디에 갔을까요? 제가 그래서 설명을 드렸죠?
꿈도 없이 자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듣고 있는 마음이 있는데 아침에 다섯시 반에 맞춰둔 알람 벨이 울립니다. 이때 시계소리구나 하고 듣고 아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때는 그 녀석이 나타났는데 알람 벨이 울리기 전, 그 때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지금 그 경계에도 그것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
시계소리를 듣고 아는 마음, 듣기 바로 직전 , 그 때는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실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휴식과 연주】
ㅇ 과수원길
【제 2부】
뭐가 들어서 잘 들으셨습니까? 간식으로 나누어 드린 고구마를 보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드셨습니다. 그랬더니 “아 맛있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식”입니다. 그리고 방금 연주한 음악을 들으면서도 “아 좋다”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바이올린을 했으면 저렇게 했을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좋다’고 하는 그 식을 느끼는 것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좋다는 것을 느끼는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몸속에 있다고 한다면 그럼 몸이 불에 타버리거나 땅 속에 들어갔다면 같이 묻어져 버려야 할 것 아닙니까? 예를들어, 죽비를 제가 이렇게 들어 보이면, 죽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죽비를 감추고서 죽비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다면 분명히 보이지는 않지만 있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뉴욕이 지금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묻는다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다고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꿈도 없이 잠들었을 때,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나는 없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 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다’ 가 정답입니까. ‘없다’가 정답입니까? 사실 둘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중간 질문 : 마음이 있긴 있는데 우리 눈에 사실 안 보일 뿐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바람을 느끼되 보지는 못하는 것처럼, 마음도 있긴 있는데 안 보이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교무님 답변 : 그러나 “마음이 있다” 하고 말하면, 이만한 것 하나라도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있다면 그것이 언제 생겼는가. 사이즈, 색깔, 맛, 향기같은 것은 어떠할까? 이런 것들이 분명 답이 나와야 할 거 아닙니까? 제가 답을 말하여 볼까요?
도대체 그 마음이라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그래서 크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만큼 크다고 할 것입니까? 국한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뭣보다 크다 하는 국한 말이지요. 작으면 또 얼마만큼 작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또한 국한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있기는 있되 형체가 없습니다.
정답을 말하자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언어도단”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노장사상에서도 “도가도면 비상도요 명이명이면 비상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일원상을 일원상이라 이름지어 일원상이지, 일원상이 그 말이냐. 언어로 말할 수가 없다. 말이 떨어져버렸다. 그래서 원불교에서 일원상 서원문을 독경할 때 처음 시작이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라고 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와 무도 초월하였고 그래서 능히 초월하여 유도 있고 무도 있고 천지부모 동포법률도 다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런지 아닌지 계속 확인해 나가 봅시다.
“사리자야”
부처님의 수기
뒤를 이을 사람을 이렇게 정해 놓았다.
1. 사리불
2. 마하가섭
3. 수보리
반야심경에는 사리불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내 정법안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 사리불은 철학자였으며, 나름대로 회상을 꾸렸던 사람입니다. 사리자의 제자도 26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리자가 어느날 “앗삭”이라는 사람을 만나보니 너무 훌륭하더랩니다. 그래서 “당신이 모시는 분은 어느 분입니까” 하고 앗삭에게 물으니 “석가모니불이다” 라고 하더랩니다. 그래서 이 사리자는 목건련과 자기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 회상에 입교하게 됩니다. 이 사리자를 지혜제일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사리자는 석가모니불보다 먼저 열반했습니다. 석가모니불이 이 사리자의 열반에 대해 무척이나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마치 공자가 안회의 죽음을 두고 슬퍼했듯이 말입니다.
앗삭이 사리자에게 말하기를 “나의 스승님 서가모니 불은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멸한다’ 고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리자는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대오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 오온이 개공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정을 해도, 혜를 해도, 계를 해도 자성의 정, 자성의 혜, 자성의 계가 됩니다. 오온이 개공한 것을 보지 못하면 자성의 계가 아닙니다.
좌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공한 것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좌선입니다. 지혜도 마찬가지. 보통은 이해하고 쌓는 지혜만 지혜라 생각하시만 자성의 지혜광명에 비쳐보는 지혜는 정말 다릅니다. 자성의 지혜광명에 비춰보는 것은 완전히 상을 녹여버리는 일입니다. 찌꺼기도 남질 않습니다. 반드시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상행식이 전부 업식이 됩니다.
그러면 못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되나. 교전에서 하라고 한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설사 지금은 못 깨쳤더라도 반드시 깨침의 길로 가게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시키는 대로 가장 잘 하는 것입니까? 상시훈련주의사항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산다면 원불교 일과표대로 가장 잘 사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으니 자꾸 비교하고 힘들고 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이 없으면 내가 나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나 오온이 개공한 것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은 끌려있는 자기가 자기를 자꾸 쥐어짭니다. “아이고 나 죽겄네” 하고 삽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 사람은 똑같이 밥먹고 살면서도 뭔가 다릅니다. 삶이 다르게 된다 이겁니다.
□ 새로오신 분
ㅇ 이명훈 씨, 네브라스카대학을 나와서 선생님을 하다가 한국에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 여러분들 보니 얼굴도 밝아서 마음이 참 좋다. 확실히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나와보겠다. ”
( ^ ______ ^ )
첫댓글 정말 마음이 놓이는(?) 후기 입니다. 혜은 교우님 감사해요~ ^^
우옹~~ 감사해용~~~ ^□^
개공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비었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과 빈 것은 다르다라.... 이 말이 머리에 남는군요 후기 감사합니다.
아... 저도 화요 공부방 너무너무 가고 싶어요 ...
조견 오온 개공....참 자기를 아는것...자성의 지혜광명...지혜제일 사리불이 대오 각성한것은 인과법...불생 불멸의 이치...찌거기도 남지 않은 이 공부를 해야 수상행식의 업식, 즉 상이 녹는답니다. 아~~ 상이 녹아버리면...우리는 자유자재하여 '날개' 를 달고 천상을 나를 것이고, 중생을 건질 대자재비를
갖추어 '환한 얼굴' 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만 된다면...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않은 이유도...모태 중에서 이미 중생 제도하기를 마쳤다는 의미도 확실히 깨닫게 될 겁니다. 아~~이런 연관된 감상이 떠 오를 수 있게 됨은 스승의 핵심 설법 때문이고, 우리의 마당이 건재 해야 할 이유 입니
다. 이제 이 법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써야 할 것인가 가 각자 맡은 임무가 됩니까? 저는 이제야 교전에 있는 말씀이 확연히 떠 오르는가 합니다. 오~ 사은이시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