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행(琵琶行)
심양강 가에서 밤에 나그네를 배웅할 때 潯陽江頭夜送客
단풍잎 갈대꽃 위로 가을바람 소슬하다 楓葉荻花秋瑟瑟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손님은 배 안에 있어 主人下馬客在船
술잔 들어 이별주를 마시려 해도 풍악이 없구나 舉酒欲飲無管絃
취한 마음 기쁘지 않고 이별의 슬픔만 처절한데 醉不成歡慘將別
헤어질 때 망망한 강에는 달빛만 어려 흐른다 別時茫茫江浸月
홀연 강물 위에 비파 소리 들려오니 忽聞水上琵琶聲
주인은 돌아올 것 잊고 나그네는 떠나가지 않았다 主人忘歸客不發
소리를 찾아 타는 이 누군가 몰래 물었으나 尋聲暗問彈者誰
비파 소리만 끊기고 말은 머뭇머뭇 琵琶聲停欲語遲
배를 옮겨 서로 가까이 가서 만나 달라 요청하며 移船相近邀相見
술 더하고 등불 돌려 다시 주연을 베푸네 添酒回燈重開宴
천 번 만 번 불러서야 겨우 나왔건만 千呼萬喚始出來
여전히 비파 안고 얼굴 반을 가리고 있다 猶抱琵琶半遮面
축(軸)을 돌려 두세 번 줄을 퉁기니 轉軸撥絃三兩聲
곡도 타지 않은 소리건만 벌써 정이 담겼네 未成曲調先有情
줄마다 억누르듯 타니 소리마다 애틋하여 絃絃掩抑聲聲思
마치 한평생 못 다한 뜻을 호소하는 듯하다 似訴平生不得志
눈썹 떨구고 손 가는 대로 이어서 퉁기고 低眉信手續續彈
가슴속에 사무친 무한한 정을 덜어 놓는 듯하다 說盡心中無限事
가볍게 눌렀다가 살짝 꼬집듯이 눌렀다가 둥둥 퉁기며 輕攏慢撚抹復挑
처음에는 ‘예상우의곡’을 타고 뒤이어 ‘육요’를 연주하니 初爲霓裳後六么
굵은 줄은 조조하게 소나기 내리는 듯하고 大絃嘈嘈如急雨
가는 줄은 절절히 속삭이는 듯하다 小絃切切如私語
조조 절절 엇섞어 연주하니 嘈嘈切切錯雜彈
크고 작은 진주가 옥쟁반에 떨어져 구르는 듯하네 大珠小珠落玉盤
꽃 사이를 나는 앵무새 노래같이 부드럽다가 間關鶯語花底滑
얼음 밑 흐르는 개울물같이 목메어 흐느끼듯 幽咽泉流氷下灘
물줄기 차갑게 얼어붙은 듯 줄이 끊어지며 水泉冷澀絃凝絕
굳어 버린 비파는 소리 내지 못하고 잠시 죽은 듯 凝絕不通聲漸歇
새삼스레 가슴 깊이 묻혔던 슬픔과 원한이 복받치는 듯 別有幽愁暗恨生
이 순간 소리가 없음은 소리보다 낫다 此時無聲勝有聲
은 항아리 홀연 깨지고 술 쏟아지듯 銀瓶乍破水漿迸
철갑 기병 돌연 나타나 창칼 소리 울리듯 鐵騎突出刀鎗鳴
곡이 끝나자 채를 거두어 가슴 앞에 그리고 曲終收撥當心畫
네 줄을 한 번에 퉁기니 비단 폭 찢는 듯하다 四絃一聲如裂帛
동쪽 배 서쪽 배에는 숙연히 말이 없고 東船西舫悄無言
오직 강물 속 창백한 가을 달만 보인다 惟見江心秋月白
침울히 채를 거두어 줄 가운데 꽂고 沈吟放撥插絃中
옷을 가다듬고 일어나 용모를 바로잡는다 整頓衣裳起斂容
스스로 하는 말이 본래 경성 여인으로 自言本是京城女
하마릉 아래 살았는데 家在蝦蟆陵下住
열세 살에 비파를 배워 十三學得琵琶成
명성이 교방에서 제일이었고 名屬教坊第一部
곡을 끝내면 일찍이 비파의 명수들도 탄복했으며 曲罷曾教善才服
꾸민 모습에 미녀들의 질투도 받았답니다 妝成每被秋娘妒
오릉의 젊은이 다투어 예물 내었고 五陵年少爭纏頭
한 곡조마다 붉은 비단 헤아리지 못했어요 一曲紅綃不知數
금비녀 은비녀 가락 따라 맞추느라 부서졌고 鈿頭銀篦擊節碎
붉은 비단 치마 술 쏟아 얼룩졌지요 血色羅裙翻酒汙
올해도 즐겁게 웃고 다음 해도 그렇게 今年歡笑復明年
가을 달 봄바람 따라 한가히 보냈어요 秋月春風等閒度
남동생 군대 가고 계모 죽고 弟走從軍阿姨死
밤 지나 아침 되니 얼굴색도 시들었더군요 暮去朝來顏色故
문 앞 썰렁하고 말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드물어져 門前冷落車馬稀
나이 들어 시집가 상인 아내 되었지요 老大嫁作商人婦
상인은 이로움만 중히 여기고 이별을 가벼이 하니 商人重利輕別離
지난달 부량으로 차 사러 떠났지요 前月浮梁買茶去
강가를 오가며 빈 배 지키는데 去來江口守空船
배를 감싼 밝은 달빛에 강물은 차갑네요 繞船月明江水寒
깊은 밤 홀연히 소년 때의 일을 꿈꾸어 夜深忽夢少年事
꿈속에서 우니 화장 섞인 눈물 붉은 뺨으로 흐릅니다 夢啼妝淚紅闌干
나는 비파 소리 듣고 이내 탄식했고 我聞琵琶已嘆息
또 이 말 듣고 거듭 탄식했네 又聞此語重唧唧
똑같이 하늘가에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同是天涯淪落人
서로 만났으니 지난날을 서로 알아 무엇하리 相逢何必曾相識
나는 지난해에 장안을 떠나 我從去年辭帝京
심양성에서 귀양 사는 병든 몸이건만 謫居臥病潯陽城
심양은 외진 곳이라 음악도 없어 潯陽地僻無音樂
일 년 내내 관현 소리 듣지를 못했네 終歲不聞絲竹聲
사는 곳 분강 가에 가까워 땅 낮고 습하니 位近湓江地低濕
누런 갈대와 억센 왕대가 집을 에워싸고 자라네 黃蘆苦竹繞宅生
그 사이에서 아침저녁으로 듣는 소리가 무엇이겠는가 其間旦暮聞何物
두견새 피 토하듯 우는 소리 원숭이 애절한 울음소리 杜鵑啼血猿哀鳴
봄 강물에 꽃 핀 아침이나 달 밝은 가을밤 春江花朝秋月夜
때때로 술 사다 홀로 비스듬히 기울였네 往往取酒還獨傾
어찌 산 노래와 마을의 피리 소리 없었으랴만 豈無山歌與村笛
난잡하고 저속한 소리 듣기 어려웠네 嘔啞嘲哳難爲聽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今夜聞君琵琶語
신선의 음악 듣는 듯 귀가 잠깐 사이에 밝아졌다네 如聽仙樂耳暫明
사양하지 마시고 다시 한 곡 더 타시면 莫辭更座彈一曲
그대를 위해 비파의 노래 지으리라 爲君翻作琵琶行
나의 이 말에 감동하여 오랫동안 서 있다가 感我此言良久立
물러나 앉아 줄을 재촉해 점점 빨리 타니 卻坐促絃絃轉急
처절하기가 이전 소리 같지 않아 淒淒不似向前聲
앉아 있는 모든 사람 듣고는 얼굴 묻고 울었네 滿座重聞皆掩泣
그중에서 누가 가장 많이 눈물 흘렸는가 就中泣下誰最多
강주사마의 푸른 옷이 흠뻑 젖었네 江州司馬青衫濕
백거이(白居易)의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거이(居易)’는 편히 산다는 뜻이고, ‘낙천(樂天)’은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는 뜻이다. 백거이는 772년 태어나 75세의 일기로 낙양에서 별세할 때까지 왕성하게 시를 지었다. 백거이의 시는 3,800여 수이며, 여덟 차례에 걸쳐 자신의 시문집을 편찬했다. 그리고 그것의 보존을 위해 절에 보관하는 등 자신의 창작물이 세월이 흘러가도 후대에 유전될 수 있도록 애썼다. “이 세상의 부귀는 나와 연분이 없으나, 사후 나의 문장은 분명 명성을 얻으리라. 기세가 거칠고 말이 거창하다고 탓하지 마오. 내 이제 막 시집 15권을 엮었노라.”라고 읊기도 했다.
백거이의 삶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은 그가 815년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된 일이었다. 사마는 군무(軍務)를 맡던 관직이었다. 백거이는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는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의 직위에 한때 있기도 했으나 이후 간언하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서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강주사마라는 외직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권신들의 비방과 질투도 그의 좌천에 한몫을 했다. 이때의 심경을 백거이는 “어둠 속 강둑에 올라/ 홀로 서 있노라면/ 서리 기운 머금은 밤,/ 강바람은 몹시도 싸늘하다.// 나루터 깊숙이 배 대어 놓은 곳/ 뒤돌아 바라보니/ 갈대꽃과 물억새꽃 너머/ 한 점 등불 외로이 켜져 있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비파행(琵琶行)’은 강주사마로 좌천된 이듬해인 816년 창작되었다.
‘비파행’은 ‘장한가(長恨歌)’와 더불어 백거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잘 알려진 대로 ‘장한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과 그 사랑의 비극적 종말을 다룬 시이다. 이 시로 백거이는 명성을 떨쳤다. 기녀들 사이에서도 ‘장한가’를 욀 줄 아는 기녀는 귀하게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비파행’은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을밤 이별을 하는 심양강 강가에 문득 비파를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비파를 안은 채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무용곡인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등을 연주하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 여인은 자신이 살아온 가긍(可矜)한 삶을 하소연하듯 가슴속에서 꺼내 풀어 놓는다.
열세 살에 비파를 배워 교방에선 으뜸이었고 모자람 없이 살았지만, 가족과 생이별하고 시름은 깊어져 늙은 몸이 되어선 장사하는 이의 아내가 되었다고. 남편은 이익이 되는 실속만 밝힐 뿐 사귀어 얻게 되는 기쁨은 가볍게 여겼다고.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백거이가 “피 토하는 두견새와 애절한 원숭이 울음소리”밖에 들을 수 없는, “심양으로 귀양 와 병들어 누워” 지내는 강주사마인 자신을 위해 다시 한 곡조 비파를 타준다면 화답의 뜻으로 시를 짓겠노라고. 그러므로 이 시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의 궤적과 강주사마로 좌천된 자신의 낙망한 심경뿐만 아니라 ‘비파행’을 짓게 된 연유를 동시에 밝히고 있는 시이다. 그리고 이 시를 백거이는 ‘장한가’와 함께 감상시의 대표적 작품으로 스스로 분류했다.
백거이는 자신의 시를 풍유시(諷諭詩), 한적시(閑適詩), 감상시(感傷詩), 잡률시(雜律詩) 네 종류로 분류했다. 풍유시는 ‘천하를 두루 구제한다(兼濟天下)’는 차원에서 창작된 시로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여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운율의 제한을 받지 않고 쉬워서 일반 백성들이 듣고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 시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의 시의 ‘천속(淺俗)’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빌미로 삼았다. 백거이가 한 편의 시를 완성할 때 이웃 노인에게 사전에 들려주어 조언을 구했다거나, “소를 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렸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 붙여지기도” 했다는 것은 백거이 시의 민중 지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적시는 ‘자기 자신을 수양한다(獨善其身)'는 차원에서 창작된 시들로 욕망의 조절과 마음의 수양을 추구한 작품들이다. 다음의 시 ‘흰 구름과 더불어(白雲期)' 같은 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서른 나이엔 혈기가 너무 왕성해/ 가슴속에 시비(是非)가 많고/ 예순이 되면 몸이 너무 늙어/ 사지를 지탱하기도 쉽지 않은 법.// 그러나 마흔에서 오십까지/ 이때는 바로 물러나 한거할 시기./ 나이가 들어 천명(天命)을 알게 되고/ 마음은 게을러져 하는 일도 적어진다.// 술을 보면 여전히 흥이 나고/ 산에 올라도 힘은 쇠하지 않으니/ 다행히 내 지금 바로 이 나이/ 나 이제 흰 구름과 더불어 지내리라.” 감상시는 외부의 사물과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창작된 시들로 삶의 비애와 감상을 드러냄으로써 이해와 화해에 도달하려는 시들이고, 잡률시는 이 이외의 것으로 백거이 자신도 특별히 그 내용을 분류하지 않은 시편들이다.
백거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음주시인(飮酒詩人)이기도 하다. “한 말의 술을 마시고 백 편의 시를 읊고 장안의 거리에 쓰러져 자며 천자(天子)가 불러도 갈 생각을 않고 자신은 술주정뱅이 신선(神仙)”이라고 노래한 이백(李白), 많은 음주시를 남긴 도연명(陶淵明)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음주시인이 바로 백거이다. 백거이는 호를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짓게 된 배경을 밝힌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재능과 품행은 고인보다 훨씬 못하지만, 검루(黔婁)보다 부유하고 안연(顔淵)보다 장수하며, 백이(伯夷)보다 배부르고 영계기(榮啓期)보다 즐거우며, 위숙보(衛叔寶)보다 건강하니 심히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도다. 이 밖에 무엇을 또 추구하리오! (…) 옛말에 ‘술로써 보전함을 얻는다(得全於酒)’라고 하였으므로 스스로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호를 지었다.” 시 ‘술잔을 앞에 놓고 2(對酒 其二)’에서 그는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을 다투는가./ 부싯돌 번쩍이듯 찰나에 맡긴 이 몸/ 부귀는 부귀대로 빈천은 빈천대로 즐기리./ 입을 벌려 웃지 못하면 그가 곧 바보라네.”라고 취음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백거이는 어린 아들과 딸을 잃었다. 게다가 그는 잦은 병치레를 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그는 100일의 휴가를 얻는 등 자주 병가를 냈다. 특히 안과 질환은 그에게 젊은 시절부터 줄곧 따라다닌 고질적인 병이었다. 병치레로 인한 육체적 고통, 가족과의 이별 등으로 인한 정신적 우환, 강주사마로의 폄적 등의 개인사는 그의 시가 민중적인 지향에서 낙천적인 한적시로 이행되는 데에 한 원인을 제공했다. 안사(安史)의 난(당나라 현종 때의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이후의 혼란한 사회와 지배 계층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의 시가 동시에 달관과 초월을 노래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백거이(白居易, 772-846)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했으며 36세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ㆍ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을 썼다. 그러나 한림학사로 성공을 거둔 것도 잠시, 807년부터 815년까지 항명에 의해 유배를 가야 했다. 다시 항저우의 지사로 재직한 백거이는 822년부터 824년까지 항저우를, 825년부터 827년까지 쑤저우를 다스렸다.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주제로 하는 그의 시는 무거운 느낌이 강한 반면 문장이 짧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시어를 추구한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 부를 정도로 대중 친화적이었다. 현재 전해지는 작품으로 3,800여 수가 있으며 백거이를 당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만들어 준 ‘비파행’과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는 그중에서도 불멸의 걸작으로 꼽힌다(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