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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다섯 번째 시간인 5강은 '루터의 종교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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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Jhon Calvin, 1509-1564)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1618-1619: the Synod of Dordrecht (Dort) in 1618-1619)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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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경회 첫째 날 : 다섯 번째 시간 -
5강 루터의 종교개혁
※ Martin Luther(1483-1546), Martin, ‘마틴’과 ‘마르틴’으로 표기하는데, ‘마틴’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마틴 루터는 농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마가레타 루터(Margaretta Luther)의 아들로 1483년 11월 10일 출생했다. 루터의 부모는 아이슬레벤(Eisleben: 루터의 출생지)의 농부 생활에서 맨스필드(Mansfield)의 광부 생활로 전환하며 성공적인 일생을 이루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엄격한 카톨릭 신앙의 소유자였고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14살 청소년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뛰어났다. 그는 명문 귀족 집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류트(lute)를 연주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부유한 상류 귀족인 우르술라 코타(Ursula Cotta) 부인이 루터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루터는 코타 부인의 하숙생으로서 코타 하우스(Cotta Haus)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광산촌 서민 출신이었던 루터는 부유하고 교양있는 귀족들의 상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으로서 루터는 이곳에서 1498년부터 1501년까지 살았다.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 1501-1505, 22세) 대학에서 인문과학 학사과정을 마쳤다.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윤리학과 형이상학을 공부했고(trivium & quadrivium, 3학4과, 인문학(liberal arts) 7과, 삼학: 문법, 수사학, 변증학(논리학)이고, 사과: 산술(수학), 기하학, 천문학(점성술), 음악) 이곳에서 선생 가브리엘 비엘을 통하여 어거스틴과 신비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인문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루터는 1505년 일반 교양 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1505년 7월 2일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인근에서 도보여행 중 벼락으로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Erfurt)의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갔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내가 어떻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나?”라는 안페히퉁( Anfechtung, 영적시련: 인간의 내적 의심과 절망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공포와 위기) 문제를 풀기 위한 기나긴 영적 투쟁의 시작이었다. 에르푸르트에는 당시 약 2,000여 개의 많은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루터가 입문한 어거스틴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적인 수도원이었다. 또한 어느 수도원보다도 더 엄격한 계율과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1506년 4월 3일, 수도원에 들어온 지 9개월이 지난 후 루터는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약 1468-1524) 원장과 만났다. 슈타우피츠는 중세 수도회의 최고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루터에게 길을 인도하며 많은 영향을 준 중요한 위인이다. 루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슈타우피츠에게 자신의 크고 작은 죄를 고해했다. 슈타우피츠는 일일이 열거하고 고백하고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관심을 개인적인 죄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놓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죄에 대한 고민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서 찾기를 권고했다. 그리고 슈타우비츠는 루터에게 성경 연구에 매진하도록 인도했고 특히 성경 원전으로 씨름하게 했다. 그리고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했다. 루터는 이 수도원 생활하면서 어거스틴 신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후일 루터 신학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론과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은 어거스틴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서 영적 스승이었고 사랑으로 길을 인도해 준 멘토였다.
루터는 1507년(24세) 4월에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5월에 첫 미사를 집례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뛰어난 지력과 종교적 열심을 갖춘 유능한 청년으로 인정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에 교수가 되도록 선제후 프레데릭에게 천거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1502년 설립된 신설 대학으로 당시는 소규모의 대학이었다. 루터는 1508년부터 이 대학 강단에서 강의 사역했다. 1508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를 시작으로, 1509년 3월 신학사(Baccalaureus Biblicus)학위를 수여받은 후에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센텐치아(Sentencia)」 등을 강의했다. 루터는 1509년에서 1511년 사이 에르푸르트에 잠시 거주한 기간 외에 대부분의 생애를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루터는 1510년(27세) 11월에서 1511년 4월까지 로마를 방문했다. 방문의 이유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엄격한 수도원의 규칙을 계속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규칙들을 완화시켜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생겨, 그 문제를 로마 교황청과 논의하는 대표로 파견된 것이다. 그는 다른 동료 한 명과 함께 로마를 방문했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Dokter der Theologie)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Licentia Magistralis)을 얻은 후 정식으로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자유롭게 성경을 교수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때부터 루터의 대부분 강의는 성경신학 분야였다. 그는 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등 주해 강의를 했다.
1515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연구실에서 결정적 경험, Turmerlebnis(탑경험)을 했다. ※ 탑경험의 구체적인 날짜는 정확하지는 않는데, 1512-1529년 사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마서 1:17이기 때문에, 로마서 강의를 시작할 무렵부터 가능할 것이다. 그는 로마서 1:17 말씀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구원의 방식을 확증했다. 로마서 1:17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구원의 근원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시편 말씀(시 31:1, 71:2)의 도움을 받아 결정적으로 깨달았다. 곧 롬 1:17의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의(義)’”를 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주의가 얼마나 복음을 왜곡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 때 공포된 면죄부 판매령을 시행하여 1515년부터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1517년 초 신성로마제국 지방에 뛰어난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수도사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이 교황의 휘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그는 비텐베르크 주변에서 왕성하게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특유의 언변으로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주장했고, 마인쯔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와 브란센부르크의 대주교 슐츠(Schultz)에게 서면(書面)으로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나 변화가 없자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성격, 효과, 부당성, 문제의 심각성 등에 대한 토론을 제시하는 95개조 반박문(The Ninety-five Theses(95 Theses) or Disputation on the Power and Efficacy of Indulgences)을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게시했다. 루터가 게시한 95개조 반박문은 인쇄물로 인쇄되어 유럽에 확장되었다. 로마 교황청이 주도적으로 행했던 면죄부에 대해서 결정적인 비판이 되었다. 결국 1567년 면죄부 판매를 금지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자의 통공, 연옥, 림보(limbo, 선조림보(Limbus Patrum)와 유아림보, 유아림보는 2007년에 폐기됨)등은 유지하고 있다.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 theologia gloriae)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 theology of the Cross)을 대조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자비 신학 구조를 구축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면죄부 비판)과 함께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토론”(Disputation Against Scholastic Theology)을 출판했다. 1518년의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십자가 신학, 이신칭의 등을 구체적으로 형성시켰다.
교황 레오 10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V세는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시도했다. 결국 루터는 이단으로 기소되었고, 황제는 교황청과 함께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했다. 교황은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협박했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청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랐다. 그리고 루터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다. 황제와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보호하는 루터를 물리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1520년 8월, 10월, 11월에 루터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교회의 바벨론 유수(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크리스찬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의 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Luther’s 3 famous dissertation).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논문은 독일어로 작성해서 신성로마제국 전역에 유포되었다. 이 책에서 만인제사장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무너뜨렸다. 두 달 후 그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논문에서는 성례전-화체설-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씌여지게 되었다.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자 그의 손자 카알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는 1521년 보름스(Worms) 국회를 소집하는데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루터는 황제와 의회 앞에 출두하게 되었다. 황제는 루터에게 저술과 주장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고 했고, 하루의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었고, 루터는 다음날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여기에 서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결국 마틴 루터는 교황청과 황제로부터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파문을 당했다. 황제 카알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사람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선제후이며 프리드리히 4세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부르크 (Wartburg) 성으로 보냈다. 루터는 그곳에서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경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다. 1522년 루터는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그는 1534년까지 외경까지 포함하여 성경 완역본을 완성했다. 루터는 이 번역된 성경을 해를 거듭하면 번역을 수정했고, 1545년에 <독일어 성경전서(die gantze Heilige Schrift Deudsch)>를 발간했다.
<우신예찬>(愚神禮讚, Stultitiae Laus. 1511년), 헬라어 신약성경 편집(1516년)을 하여 종교개혁의 길을 닦은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와 루터가 같은 길이 아님을 확인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적 기독교를 추구했고, 루터는 구원 이룸의 기독교를 추구했다. 에라스무스가 밝힌 <자유의지론>(1524년)에 대해서 루터가 <노예의지론>(1525년)으로 반박하면서, 인문주의적 기독교와 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두 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 진영에 있음을 확인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종교개혁을 더 이상 확대하는 것을 금지했다(“Protestant”(항거자, 항로파)라는 명칭 생김). 슈파이어 의회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인 루터파는 서로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오스트리아 빈까지 침략해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성로마제국의 양측은 화해와 타협을 피할 수 없었다. 멜랑톤이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 28조항)를 작성하고, 루터가 인정하면서, 루터파 진영이 구축되었다. 카알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거부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최초의 개신교 신앙고백서이지만, 신성로마제국에서 루터파의 중심을 잡은 신앙의 요체였다.
신앙고백서는 개신교의 신앙집단의 믿음의 요체를 고백하며 종파를 형성했다. 1536년에 바젤에서 작성한 [제 1 스위스 신앙고백서(First Helvetic Confession)], 1566년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작성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59년 프랑스 신앙고백서, 1560년 귀도 데 브레(Guido de Bres)의 주도로 작성한 [벨직 신앙고백서]가 있다. 1563년에 잉글랜드 국교회가 작성한 [39개조 신앙고백], 1619년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알미니안을 배격하면서 작성한 도르트 교령, 런던에서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년)이 있다. ※ 'Helvetic'(헬베틱)은 스위스(Switzerland)의 라틴 이름이다. 1658년에 사보이 선언(청교도 독립파)이 작성되었고, 1689년에 2차 런던신앙고백서(침례파)가 작성되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루터파의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 체결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사라진 1540년대에 이르자 양측 제후들에서 군사적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1546년 카알 5세는 루터파를 완전히 박멸할 목적으로 5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영을 구축했다. 반면 루터파 측 제후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휘 체계와 규율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황제의 군대가 승리했고, 1548년 매우 어수선했다. 1548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임시 협정(Augsburger Interim) 덕분에 루터파는 두 가지, 즉 성직자 혼인과 성찬 때 평신도도 빵과 포도주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황제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은 마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초청으로 이주했다. 마틴 부써는 잉글랜드에서 죽었다. 부써는 메리 여왕이 즉위(1553년)하기 전 소천했고, 이 때 함께 초청된 피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1499– 1562)는 다시 스위스로 귀환했고,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유럽으로 도피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쓰게 되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인해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1546년에 루터는 소천되었다. 루터가 세상에 없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루터파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다시 전쟁이 게시했다. 1555년 9월 25일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의 명의로 공표되어 루터교회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받게 되었다. 협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지배자의 종교가 그 영내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을 천명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영주들의 연합체인데 영주의 신앙에 의해서 신앙이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한 제국에 두 종교(루터파와 로마 카톨릭주의)가 공존하게 되었다. 제국에서 남쪽은 로마 카톨릭주의가 북쪽에는 루터파가 세력을 확보했다. 종교 정세는 카톨릭이 가장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1577년 <일치방식>(Formula of Concord)으로 루터파의 두 진영, 순수루터파(Gnession-Lutheran)와 필립파(Philippisten)가 한 루터파로 형성하게 되었다.
※ 1524-1525, 토마스 뮌쳐(Thomas Muenzer, 1489-1525), German Peasants' War(독일 농민 전쟁). “마틴 루터는 농민전쟁을 비난하고 귀족의 편에 섰다”고 평가한다. 뮌쳐는 재새례파적 경향의 위인으로 천년왕국을 주장했다. 루터는 “강도질하는 농민 폭도에 대하여”으로 신학적 문제성을 지적했다.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 루터, 츠빙글리, 칼빈 모두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다. 로마 카톨릭은 당시 로마 카톨릭에 반기를 든 뮌쳐에 대해서 “혁명의 신학자”로 복권시켜야 한다고 제언한다.(조영규, “살길 찾기 위한 어설픈 타협으론 아무도 살리지 못한다”, <카톨릭프레스>, 2016-05-27)
※ 1534년 뮌스터 반란(Täuferreich von Münster), 재세례파의 반란으로 재세례파의 방향을 전적으로 전향하게 된 파괴적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