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 종이에 채색, 153 × 125cm, 1965
Invocation of the Spirit of the Dead, color on paper. 153 × 125cm, 1965
<초혼>(1965)은 바다에서의 토속적인 제사를 주제 삼은 작품이다. 천경자는 넓게 펼쳐진 광경을 화면에 3단 수직구도로 구성했다. 상단에 위치한 원삼을 입은 귀신같은 환상의 여자에서부터 바닷물 속으로 휘몰아치듯 꿈틀거리는 커다란 물고기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역동적인 화면을 연출한다. 중간층에 멀리 전설적인 배가 떠나고, 아랫부분의 깊은 바다에는 괴기스러운 커다란 물고기가 이빨을 드러내며 용솟음치는 형상이다. 천경자는 전통적 소재를 작품화하면서 조선시대 원삼자락과 샤머니즘에서 색채미를 찾았다. <초혼>에서 작가는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을 작품의 주요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명도 · 채도를 적절하게 사용한 화면은 조화롭게 보색대비를 이루고 있다. 동양적 소재와 색채 사용을 통한 현대적인 화면구성과 정신적인 표현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독자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남 고흥에서 부친 천성욱과 모친 박운아의 1남 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옥자(玉子)였다. ('경자'라는 이름은 천경자가 센티멘털하던 소녀 취미로 스스로 지어 붙인 이름이라 한다)그녀는 여동생 옥희와 남동생 규식과 고흥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수려한 풍경을 가진 고장은 그녀의 유년기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는데 한몫하였다.
그녀는 고흥에서 유치원과 고흥보통학교를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또한 그녀는 보통학교 시절 교정에서 열린 박람회장에서 소록도 나병원 간호부로 있던 선배 길례 언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길례언니는 천경자의 연작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이 되었다.
여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천경자는 동경 유학을 결심하였고, 이듬해인 1940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지금의 동경여자미술대학)에 진학하였다. 동경에서 그녀는 당시 인물화의 대가라고 이름나있던 이토 신스이의 문하생이 되고 싶어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신 고바야가와 기요시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노점>이라는 그림을 처음으로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이듬해 반신불수 외조부를 모델로 한 <조부>가 22회 선전에 입선하게 되었다.
뒤이어 1943년, 외할머니를 모델로 한 졸업 작품<노부>가 마지막 선전에 입선하고, 고바야가와 선생이 소속한 인물화 단체 청금회전에 입선하였다. 유학 시절, 첫 남편 '이철식'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지만(1944) 결혼은 얼마 못가 파경에 이르게 된다. 이후 이철식과는 6.25 전란으로 인해 인연마저 끊어지게 된다.
이 시기의 일은 전남여고 강당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에 처음 만났던 지방 신문기자 김씨(천경자는 그 남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음) 와의 인연, 그리고 여동생 옥희의 이른 죽음(1951년 28세의 나이)과 더불어 첫 결혼의 실패는 천경자의 삶과 작품세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천경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으로서 우뚝하다.
채색화를 왜색풍이라 하여 무조건 경시하던 해방 이후 60년대까지의 그 길고 험난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채색화 붐이 일고 있는 오늘을 예비했던 그 확신에 찬 작가정신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존재는 더욱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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