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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1 울산의 〈치노기 굿〉
안녕하십니까? 서울 한강의 물을 넘치게 했던 집중호우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남하하여 마침내 부산에 이르러 한반도 남쪽 절반을 물바다로 만들고 지나간 뒤, 이제는 상쾌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해와 추석(음력 8월 15일, 조상을 모시는 날. 일본의 오봉에 해당한다)까지 겹쳐 생채소 값이 치솟았고, 늦가을 김장철(가을 끝 무렵 월동용 김치를 담그는 풍습이 있다)에 올해는 과연 길가에 배추 산을 쌓아 놓고 아줌마들이 부지런히 김치를 담그는 광경을 볼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스러운 가을이기도 합니다.
시장에 다녀온 아내는 시들어버린 듯한 무 한 개를 들고 돌아와 “이게 하나에 400원(약 130엔), 배추는 한 포기에 3천 원(약 980엔)이야” 하고 푸념하며 즉석 깍두기를 담갔습니다. 배추김치가 식탁에 오르지 않게 된 지도 꽤 오래된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일본 천황과 처음으로 공식 회견을 가졌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이쪽 신문과 텔레비전은 연일 일본에서의 환영 분위기와 일본 측 반응을 일일이 전하며, 과장해서 말하자면 숨을 죽이고 그 “역사적 회견”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일본 천황의 “말씀”은 한국인들에게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듯합니다. 공식적인 ‘여론’은 차치하고서라도, “유감” 정도의 표현으로는 참으로 유감스럽다는 식의 냉소적인 칼럼이나 신랄한 풍자 만화도 눈에 띄었습니다. 신문 등 일반적인 논조는 그 “말씀”을 사과 표현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한일 신시대의 개막”이라 방문의 성과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만들어진 여론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냉정한 시각에서는 “사과했다, 안 했다” 하고 고함치듯 따지는 발상 자체가 이미 불모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는 “일본이 사과했다. 이제는 대등한 파트너다”라는 구호에 묻히기 쉽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국의 국가원수가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해 일본 측으로부터 상당히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반 한국인들에게는 호의적인 인상을 준 듯합니다. 이곳에서는 일본 내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다소 과장되어 전해지는 경향이 있어 “일본에서는 아직도 한국인을 ‘조센진’이라고 부르며 업신여깁니까?” 하고 물어 당황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원수’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중계를 주시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 천황이 “말씀” 중에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압도적인 문화 전파에 대해 언급하고,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의 한국 선수 활약을 덧붙인 점은 한국인의 소박한 애국심을 자극했던 듯합니다. “유감” 표현을 제외하면 천황과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조금 격에 맞지 않게 거창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듯합니다. 서두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 편지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은 사실 얼마 전 울산에서 본 치노기(鎮誤鬼) 굿 이야기입니다. 한국에 정착한 뒤로 이것도 봤다, 저것도 봤다 하며 떠들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고 친구에게 웃음 섞인 핀잔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것도 그런 한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침 일본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부산에 와 제 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가 다음 날 부산에 사는 한국 무당 집단의 한 지도자인 김석출 씨의 안내로 치노기 굿을 보러 간다는 말을 듣고 저도 따라가 보기로 한 것입니다.
김석출 씨는 예전에 한 번 뵌 적도 있고, 부산 근교에서 열린 여러 무당 굿에서 몇 차례 본 적도 있습니다. 또 한국 샤머니즘 연구자 최길성 씨의 이야기와 저서, 혹은 『아리랑 고개의 나그네들』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번역된 책(신찬균 '김석출 씨 구술—민중 속의 샤먼들') 등을 통해 대략 그 인물과 이력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분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면 더없이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동래 온천의 다방에서 만난 김 씨는 굿판에서 보던 모습과 달리, 예순두 살이라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고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빗물에 젖은 머리를 빗으로 훑어 넘기는 모습은 마치 멋을 아는 젊은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울산까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갔고, 버스터미널에서 굿판까지는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울산 외곽의 마을을 지날 때 김 씨는 문득 말했습니다.
“나는 이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이 울산 근처 분이었지요. 세 살쯤까지 여기 살았습니다. 어머니도 ‘무당’이었고 여러 곳을 떠돌았지만,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로는 아버지를 따라 굿을 다녔지요. 그래도 어릴 때 가장 오래 산 곳이 여기입니다.”
무당 집단이 말 그대로 떠돌이 가족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책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치노기 굿', 저 마을에서는 생전에 행하는 '생치노기 굿', 바닷가에서는 해난 사고 위령을 위한 '수살(水殺)굿', 또 다른 마을에서는 '재수(財数) 굿' 을 해야 합니다. 단오제나 별신제의 주역도 무당들입니다.
〈치노기·굿〉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일본의 법사(法事) 공양과 같은 것으로, 죽은 선조의 혼을 위로하고 모시기 위해 자손들이 행하는 굿입니다. 물론 주역은 무당이며, 그날의 굿은 앞으로 사흘 밤낮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굿을 주관하는 한 가족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과 같은 마을 사람들, 심지어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구경하러 와서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나누어 마신다. 그래서 그 일대는 어느새 작은 ‘축제’ 분위기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날 굿의 의뢰인은 부동산업자였습니다. 이 일대의 소유지는 한 평에 80만 원으로, 그것만 해도 7천만 원이 된다고 하니 제법 재력이 있어 보이는 주인과, 전형적인 한국의 아줌마 같은 안주인. 거기에 친척 일동까지 모여 있는 모양인데, 이 사람이 장형이고, 저 사람은 차형의 아내이며, 또 그쪽은 동생의 아내의 여동생이라느니 하고 설명을 들어도, 이쪽에서는 한 번에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가계도는 늘 복잡하고, 남의 집안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 번 듣고 다 기억하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당 쪽은, 현지 울산의 ‘할머니’ 무당과 김석출 씨의 맏딸, 그리고 그 남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은 부부가 무당과 그 ‘장단(반주)’을 맡는 한 쌍이 되는 셈입니다. 나머지 장단 치는 사람으로는 김 씨의 세상을 떠난 남동생의 아들이라는 젊은 두 사람이 와 있었는데, 그들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무업을 수업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무당 일도 대학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하고 김 씨는 말합니다. 김 씨의 넷째 딸 역시 무당으로, 현장에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 일을 거들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굿은 계속되기 때문에, 무당과 짝을 이루는 장구, 그리고 징이라는 최소한의 역할을 서로 번갈아 맡지 않으면 몸이 버텨내질 못하는 것입니다.
“무당의 자식은 무당이 된다”는 말은, 일반 사람들로부터 하나의 직업으로 여겨져 온 그들에게 있어 어쩔 수 없는 무업의 세습제를 뜻합니다. 그러나 물론 무당에게는 노래와 사설, 춤의 자질이 요구되며, 장단을 맡는 쪽 또한 악기를 다루는 솜씨의 좋고 나쁨은 물론, 굿에 빠질 수 없는 종이꽃을 만드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재능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김 씨의 다섯 딸 가운데 실제로 무당이 된 이는 두 사람뿐이고, 나머지 딸들은 각각 택시 운전사나 선원과 결혼해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최근 들어 막내딸이 무당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춤도 노래도 잘한다고 한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김 씨는 지금 고심 중이라고 합니다. 무속일을 잇게 하는 것도, 잇지 않게 하는 것도, 어느 쪽이든 마음 쓸 일은 많은 모양입니다. 집안의 전통이란 게, 물려주기도 쉽지 않고 끊기도 쉽지 않은 법이니까요.
이날은 굿의 첫날이었으므로, 먼저 ‘부정(不浄)굿’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굿을 행하는 장소를 정화하기 위한 무의로, 물론 굿의 순서상 반드시 맨 처음에 치러지는 절차입니다. 삼대·사대·오대 조상의 이름을 적은 종이 위패는 아직 제단에 올리지 않고, 문지방 밖에 상을 차려 돼지머리와 말린 명태, 과일, 떡 등의 제물과 함께 놓아두었습니다.
무당은 때때로 주전자에 담긴 탁주를 잔에 옮겨 담아 제장의 땅바닥에 뿌립니다. ‘천왕대’라 불리는, 종이 장식을 단 장대를 처마에 세우고, 문을 활짝 연 방 안에는 형형색색의 종이꽃으로 장식한 제단을 마련합니다. 처마에서 보도 쪽까지 천막을 치고, 구경꾼들은 그 그늘 아래 각자 의자에 앉아 굿을 바라봅니다.
부정굿 다음은 ‘골메기굿’이다. 골메기란 김 씨의 설명에 따르면 성황신과 마찬가지로 그 집락·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산토신)을 가리킵니다. 이 신을 모시지 않으면, 애써 불러들인 조상령이라 해도 이 마을의 경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그 허락을 구하는 의식이 바로 골메기굿인 것입니다. 조상도 ‘입장 허가’가 필요한 셈이니, 마을의 질서란 참으로 엄정합니다.
할머니 무당이 주문을 외우며 종이와 대나무로 만든 장식물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가 좌우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저게 무엇이냐고 김 씨에게 묻자, 저승에서 조상령이 타고 오는 배라고 했습니다. 무당이 그런 ‘연기’를 펼치는 동안, 의뢰인 집안의 형제자매와 일가 친척들은 위패를 놓은 상 앞으로 나아가 천 원짜리 지폐를 올리고, 향을 꽂은 뒤 탁주를 조금 잔에 따릅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은 채 상체를 크게 앞으로 던지듯 숙이며,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립니다. 예를 마친 사람은 벽 쪽으로 물러나 앉아 무당의 연행을 구경합니다. 방의 오른쪽과 왼쪽 벽에는 각각 삼신불과 오방불, 대왕전의 신들이 권청되어 있고, 종이꽃으로 장식된 줄에는 "북방무우세계부동존불(北方無憂世界不動尊仏)" 이라든가 "봉청제이초강대왕(奉清第二初江大王)" 같은 불명과 신명이 먹으로 적힌 종이가 매달려 이습니다.
잔잔하던 비가 굵은 빗방울로 바뀌어 천막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골메기굿은 끝났고, 조상들의 종이 위패는 방 안쪽에 차려진 제단으로 옮겨 다시 봉안되었습니다. 밥이 다 지어지자, 여자들이 오대 조상 부부, 열 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위해 밥을 퍼 담고, 산 사람과 똑같이 젓가락과 숟가락을 한 벌씩 각각의 밥그릇에 곁들여 올립니다.
과일과 떡 같은 제물도 다시 제단에 차려지고, 대대로 이어진 ‘가족’들의 떠들썩한 식사가 그곳에서 시작될 터였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상을 마주하는 순간, 이 집안의 시간은 잠시 한자리에 모여 앉는 셈입니다.
골메기굿이 끝나면 다음은 "초망자(招亡者)
굿"입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조상들의 영을 이 제단에 모셔와 행하는 굿이다. 할머니 무당에게 영이 내려와, 오랫동안 굿을 받지 못한 서운함과 이승에 남겨 둔 자손들을 걱정하느라 저승에서 겪은 고생을 토로하면, 그 자리에 늘어앉은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은 “아이고!” 하고 탄식을 터뜨리며 슬퍼합니다.
돈 문제로 인한 근심을 말하면, 맏언니 격의 할머니가 “내가 돈을 줄게” 하며 치마자락을 걷어 올려 허리끈에 매어 둔 주머니에서 새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무당의 머리띠나 가슴께에 찔러 넣습니다. 종이로 만든 배 모양에 돈을 넣어 흔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왕대(天王台)’의 종이 장식에 지폐를 묶어 다는 사람, 제단을 향해 절하며 그 위에 천 원짜리를 겹겹이 올려놓는 사람도 이습니다. 이런 팁을 ‘별비(別費)’라고 부르는데, 이를 모두 합치면 이번 치노기굿에 350만에서 400만 원(약 117만 엔)이 든다는 말도 그리 과장은 아닌 듯합니다. 조상을 모시는 자리이면서도, 동시에 돈이 오가는 현실의 장면이기도 합니다. 영혼과 지폐가 한 공간에서 함께 흔들리는 풍경이랄까요.
이런 굿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조상 숭배’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씩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습니다. 이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의 가슴에 떠오르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혈맥의 모습과, 점점 가까워져 와 자신들의 얼굴에 겹쳐질 미래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둡고 깊은 세계 너머에서 점점 더 크게, 또렷하게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들 가슴속에 간직된 ‘옹(翁)’과 ‘온(媼)’이라는 두 형상이었고, 언젠가 자기 자신 또한 그 형상 위에 포개어질 존재라는 실감이, 그녀들 안에서 생생히 숨 쉬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서서히 내 마음속으로도 스며들어 오는 듯했습니다.
이제는 할머니라 불러도 좋을 만큼 나이가 든 아주머니가 “어머니!” 하고 부르짖으며 무너져 울 때, 그녀는 자신이 그 ‘계보’의 흐름 속에 단단히 묶여 있고, 과거와 미래를 잇는 길 위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쩌면 달콤한 안도감 속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그것이야말로 조상을 부르는 의식이 품고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1875~1962 민속학자)가 ‘조상 숭배’를 말하며, 지금까지 태어나 온 모든 인간과 앞으로 태어날 인간을 아울러 ‘국민’이라 불렀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계속 노래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는 무당의 목소리와 몸짓 속에서, 나는 이국 취미가 아닌 어떤 노스탤지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M 씨, 이 편지가 두서가 없고 다소 감상적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비로소 그 ‘마음결’의 한 자락에 닿았다고 느낀, 하나의 기념적인 이해의 날—혹은 오해의 날—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동안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보고, 듣고, 맛보고, 느껴온 모든 풍경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죽은 자들과 산 자들, 회상과 현실이 서로 스치고 오가고 있었음을, 나는 이제서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 안에서 신을 보고, 사람 안에서 부처를 보는 아시아 동쪽 끝 정신세계의 뿌리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1984년 11월)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2 내면의 미국, 미국을 향한 끝없는 꿈
―한국에서 본 미국상―
한국에서 아메리카합중국의 약칭은 ‘미국(美国)’이다. 중국어에서 ‘美国’은 ‘아메리카(亜美利加)’의 ‘메(美)’ 소리를 따서 만든 말이지만, 한국어 한자음으로 읽으면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음이 되어버린다. 이는 ‘아메리카(亜米利加)’를 ‘미국(米国)’이라 부르는 일본식과 마찬가지이다.
이 ‘미국(美国)’ 혹은 ‘미(美)’라는 말은 ‘아메리카’라는 표현보다 사용 빈도가 약간 더 높은 듯하다. 외국어학교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미인회화(美人会話)’는 아름다운 여성과의 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 강사가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는 의미이며, ‘미제(美製)’, ‘미군(美軍)’, ‘한미관계(韓美関係)’ 같은 말은 신문·잡지뿐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과연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해서 U·S·A를 ‘미국(美国)’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일까.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한몫 거들어 도와주는 ‘미국’으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조금씩 눈이 뜨이면서, 미국 역시 결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보통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나라든 규모의 크고 작음에 차이가 있을 뿐, 한 나라로서 존재하는 가치 자체는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잡지 「월간조선」이 1985년 7월호에서 실시한 「20대가 본 미국」이라는 설문 특집 가운데, 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여성 사원은 자신의 ‘아메리카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세계 최고 수준의 번영과 발전을 이룩한 나라, 자유주의 진영의 리더로서 ‘북’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을 비호하고 원조하며 지지해 주는 최대의 우방이자 동맹국인 미국 .. . 이러한 종래 한국 사회 속의 미국관이 흔들리고, 변질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 오히려 이런 ‘평범한’ 젊은 여성의 말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이 「월간조선」의 설문에는 20대 남녀 100명이 응답을 보냈는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미국은 한국의 적”이며 “학생들의 대미 의식은 근원적으로는 강자에 대한 저항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이른바 ‘반미적’ 의견을 토로한 서울대 학생이 있는가 하면, “미국은 우리나라의 가장 친밀한 우방”이며 “특히 주한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감사함을 느낀다”고 전통적인 ‘친미’ 관점을 밝힌 식당 종업원도 있는 식이다. 이처럼 한국의 젊은 세대라 해도 대미관이 물론 다양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1985년 5월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보아 지금까지처럼 미국 문명을 무조건적으로 찬미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뢰하고 기대하는 ‘미국관’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려는 분위기가 짙게 감지되었다.
앞서 언급한 그 여성 사원의 답변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일반적이며 집약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상(像)의 변화, 미국관의 변질 --- 이러한 현상은 현재 한국 사회의 저류에서 깊숙이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여러 현상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지만, 그 한 요소로서 ‘반일’ 감정의 풍화와 같은 점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일제’의 한반도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준 존재로서의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반일’과 ‘친미’가 정확히 반비례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드리워진 ‘미국의 그림자’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 저류로서 ‘반일’이라는 동기를 품고 있었던 셈이다.
이를 문화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미국적 문화가 직접적으로 한국 사회 안으로 깊이 들어와 정착했다고 할 만한 사례는 비교적 많지 않다. 눈에 잘 띄는 것으로는 ‘미스터 김’, ‘미스 이’와 같은 호칭이나 악수의 습관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종래의 한국어 호칭 체계에는 사회적으로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부를 방식이 거의 없었다는 점, 또 신체 접촉의 정도가 일본인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는 수용의 토양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밖에 예컨대 교육 제도나 순찰차와 경찰관의 제복 스타일, 거리 모퉁이의 우체통과 같은 것들은 일제 지배 시기의 ‘왜색’을 배제하기 위해 ‘미국색’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급히 덧칠해 바꿔 놓은 페인트 담장처럼, 어딘가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빌려 입은 옷’으로서의 그러한 미국 문화를 능숙하게 소화해 내고 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사회의 내재적 이유에 따른 자발적 수용이라기보다는, 강제적으로 이식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예컨대 서울 안의 ‘미국의 거리’라 불리는 이태원이나, ‘텍사스촌’이라 불리는 청색지대 등에서 그러한 ‘이식된 미국’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 일제 지배로부터의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반일’과 그 정신적 대응물이었던 ‘친미’(물론 여기에는 ‘북의 위협’이라는 요소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양쪽 모두가 색이 바래고 풍화되었으며, 오히려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리얼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것이 미국을 특별한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라 ‘보통의 나라’로 보려는 젊은 세대의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의 고도성장을 거쳐 중진국으로 도약해 온 한국의 국민적 ‘자신감’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일’이라는 슬로건(단순한 ‘반일’이 아니라, 일본을 능가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선진성을 배우고 이해하자는 주장)과, 그동안 거의 금기시되어 왔던 반미적 언사와 행동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일(광주, 부산에서의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이번 서울에서의 점거 사건 등)은 그러한 맥락 속에서 서로 연관된 정신적 경향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1985년 5월의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미국’을 둘러싼 사건들의 사상적 배경을 단순히 ‘반미’라고만 단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리얼한’ 인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현 정권을 뛰어넘어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요구하고, 광주 사태에 대한 사과를 촉구했던 학생들에 대해, 한국 내부에서도 미국을 향한 ‘사대주의’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다나카 아키라가 「한국 정치에 있어서의 미국 --- 학생들의 미 문화원 점거 사건에 부쳐」("해외사정" 1985년 7·8월 합병호)에서 이러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체제파이든 반체제파이든 모두가 ‘미국’을 최후의 카드로 활용하려 하는 한국의 정치적 풍토에, 학생들 또한 그대로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미국의 국회의원에게 보호를 받아 한국으로 귀국한 현 체제 비판파의 거물 정치인처럼, 정치적 기회주의적 실용주의와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이상’을 기묘하게 결합시키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미국에 대한 ‘의존적 항의’이며, 큰 틀에서 보면 한국에 드리워진 미국의 그림자 안에 온전히 포섭되는, 일종의 반미처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또 지식인 등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미국행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한 듯 보인다.
거액의 외화를 숨겨 두었다가 미국으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저명한 기독교 목사, 1억 원을 주면 미국 시민권을 사 주겠다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한 중년 여성, 어느 대학에서는 교수의 30퍼센트가 ‘외국 국적’이며 그 대부분이 해외 영주권을 취득한 전직 한국인이라는 사실 등, 신문을 훑어보기만 해도 이 나라의 ‘미국으로의 탈출’ 열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부유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한 스낵바의 아가씨(젊은 여성)는, 반쯤은 진담으로 위장결혼이라도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이야기, 거기서 영어를 공부한 뒤 다시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포부를 열정적으로 털어놓기도 했다. 또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가진 학자가 미국에 건너가 건물 창문을 닦는 일밖에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한국보다 미국이 낫다며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 등이 그럴듯하게 서민들 사이에 퍼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들을 단순히 ‘꿈의 나라,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한국에서의 체감과는 다소 어긋난다. 서민층에서부터 체제의 최상층부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출 욕망’은 일본에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며, 그것이 일본·북한·중국·소련과 같은 주변 국가들에 대한 반발력에서 출발해 결국 ‘미국’ --- 아름다운 나라, 아메리카에 대한 환상으로 수렴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한국 영화 "깊고 푸른 밤"은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전편을 미국 현지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미국 사회에서 시민권을 얻으려는 한국인 이민 청년과, 위장결혼 ― 시민권 취득 ― 이혼이라는 수법으로 동양인들을 상대로 ‘혼인 증명’을 팔아온 한국계 미국인 여성(흑인 병사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으나 이혼한 인물 ― 인기 여배우 장미희가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사이의 복잡하고 뒤틀린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안성기가 연기한 이 한국인 청년은, ‘박’이라는 한국 이름을 ‘그레고리 펙’으로 이른바 ‘창씨개명’하여 미국 시민이 되려 하는, 매우 비애국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설정은 한국인의 대미 열풍을 아이러니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한국에 남겨 둔 아내와 아이를 미국으로 불러들이려 하지만, 아내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미국으로 떠난 채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결별하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청년은 여인에게 총을 맞고, 여인은 그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자살한다…다소 돌연하게 느껴지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는 관객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내면의 미국’에 대한 환멸, 혹은 국가(민족)를 버리려 한 데 대한 당연한 벌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미국이 한국계·일본계 등 동양계까지 포함한 여러 민족이 서로 부딪히는 ‘인종의 용광로’의 나라임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와 거의 같은 시에 개봉한, 재미 한국인이 제작한 "차이나 타운"(유현목 감독)이라는 영화(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한 한국계 이민자 불량배 집단의 항쟁을 그린 폭력 영화)를 보더라도, 한국인들이 먼저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미국을 체험해 버리고, 그 뒤를 따라 ‘아름다운 나라 ---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뒤늦게 덧붙여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한 ‘아메리카’와 ‘미국(美国)’ 사이의 간극 속에서, 한국인의 미국상은 지금 흔들리며 다시금 질문받고 있는 듯하다.
(1985년 9월)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3 '일본어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
- 한국에서의 일본어 교사 경험으로부터 -
한국 일본어 교육의 문제점
우연한 계기로 한국에서 ‘일본어 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일본어 교육에 깊이 관여하겠다는 생각도 그전에는 전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4년은 당혹과 시행착오, 혼란과 갈등, 망신과 반항, 그리고 타성과 체념 속에서 흘러간 시간처럼 느껴진다.
외국어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 외국어 교사를 한다는 ‘내적 갈등’도 문제였지만, 한국에서의 일본어 교육은 안팎으로 그 환경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 하나는 역사적 경위 때문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병합한 일은 나에게는 이미 이끼가 낀 듯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굴욕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젊은 세대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교육을 받고 있다).
‘국어’(일본어) 교육을 ‘내지인’(일본인) 교사에게서 직접 받은 50대 후반, 60대의 사람들이 아직도 교육 현장에 남아 있는 만큼, 이들 가운데에는 일본어에 대한 적대감이 여전히 뿌리 깊게 존재한다. (물론 이것 또한 일면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세대가 일본어와 일본 노래에 대해 지니고 있는 ‘향수’ 또한 만만치 않아서, 술자리에서 옛 일본군 군가나 쇼와 초창기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일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 세대가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을 저질러 놓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식·손자·증손으로서 ‘일본의 침략’에 대해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위축된 처지에 놓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할아버지나 큰아버지가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다는 이야기, 일본군에게 혹독한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 ‘국민학교’에서 일본어 대신 조선어를 썼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 일본어를 뒤에서 ‘게다 소리’라고 부르며 은근히 울분을 삭였다는 이야기 등을 듣게 되면, 바로 그 일본어를 얼마나 정확하게, 얼마나 아름답게 가르칠 것인가 하고 애써 고민하는 일이 어딘지 모르게 허망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일제 36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수업 시간에 지목을 받고도 대답을 하지 못해 곤란해하던 한 남학생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한마디 외치고 자리에 앉았다. 독도란 일본과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다케시마를 말하는데, 당시 이런 제목의 캠페인 가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시끄러웠던 시기에는 일본어과 학생들까지도 ‘극일’(일본을 이겨내자는 구호)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애초부터 단순한 외국어 교육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인 셈이다. 이는 대만·중국·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과거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피해를 입었던 지역들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문제점은 현재의 교육 환경에 관한 것이다. 한국은 고등교육에 있어서 일본 이상으로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마치 “대학에 가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교육 환경이 과도기적 혼란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각 대학에서 일본어·일본문학과를 신설하고 정원을 늘린 결과는 필연적으로 교원 부족, 교사 1인당 업무 과중, 대규모 강의 중심의 교육, 그리고 졸업 후 취업난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으며, 이는 한국 대학에서의 일본어 교육 전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히 취업난 문제는 심각하다. 물론 이것이 일본어과만의 문제는 아니다(독어·불어 등에 비하면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에 유리한 일본어’, ‘실용적인 일본어’라는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격차는 일본어과 학생들에게 적잖은 동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론 학생들 쪽에도 문제가 있다. 단지 ‘일본어는 쉽다’는 이유로 비교적 들어가기 수월한 일본어과를 선택한 동기 빈약형, 다른 지망 학과에 실패해 흘러들어온 좌절형, 일본어 통역이 되거나 무역 관련 직업을 갖고 싶다며 오로지 실용 어학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대학에서는 실용 회화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이른바 ‘비즈니스파’ 유형 등, 반드시 성실하고 순수한 학생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점은, 그들이 ‘일본’과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따라서 무지하기도 하다). 이는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로 한국 사회 전체의 경향이기도 하다. 나는 일문과 학생들에게 일본 문학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물론 번역본으로라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의 "설국(雪国)", 미시마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의 "금각사(金閣寺)" 정도까지는 간신히 나오지만, 그 다음으로는 "대망(大望)" (야마오카소하치-山岡荘八1907~1978 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번역 제목),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1922~1999)의 '빙점(氷点-이 작품은 한국에서 두 차례나 영화화되었다),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는 "오싱", "토토짱" 정도밖에 거론되지 않는다.
일본 문학의 고전이나 명작이 전혀 번역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서판으로 "도연초(徒然草)"나 "근대소설선"(아쿠타가와나 소세키 등의 작품)이 나와 있고, 아베코보(安部公房1924~1993), 오에 켄자브로(大江健三郎1935~2023), 구라바시 유미코(倉橋由美子1935~2005) 등의 현대 소설, 더 나아가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 Edwin O. Reischauer의 "일본의 역사" 같은 일본 문화론 관련 저서도 번역·출판되어 있다.
[*徒然草(つれづれぐさ)는 가마쿠라 말~남북조 시대의 승려 吉田兼好(요시다 겐코)가 쓴 수필집. 대략 14세기 초반 작품으로, 일본 고전 수필의 ‘3대 걸작(徒然草 枕草子, 方丈記)]
그러나 애초에 그들(학생들)에게는 교과서나 참고서 이외의 책을 읽는 습관이 그다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입시 경쟁을 뚫고 올라와, 대학에서도 군 복무와 더불어 학사 경고, 졸업 정원제 등에 묶여 책상에 단단히 붙들려, 마치 말(馬)처럼 1점, 2점을 다투고 석차를 경쟁하는 그들에게 독서의 여유란 애초에 없다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도서관에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새벽 다섯 시에 집을 나선다는 여학생, 도시락을 두 끼나 싸 와 밤 열한 시까지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는 남학생. 물론 그들은 도서관 장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져온 교과서와 참고서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일본어 교육 내부의 문제점이다. 솔직히 말해 현장 교사의 능력 부족(이는 한국인 교사와 일본인 교사를 막론한다), 교재 부족, 빈약한 커리큘럼, 그리고 교사나 관계자 등 담당자 측의 ‘열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전(戰前)의 ‘국어’ 교육을 답습한 듯한 ‘읽기’ 중심의 편중, 발음·청취 교육의 부재, 학교 문법의 고수 등은 연배가 높은 교사들에게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보이는 경향이다. 또한 교재에 관해서는, 한국이라는 특수성(문법상의 유사성, 한자 사용의 공통성)을 무시한 채, 주로 영어를 모어로 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제작된 일본 교재를 그대로 전용하거나 약간 각색한 수준의 것을 당당히 ‘자저(自著)’라 하여 출판하고 학생들에게 사용하게 하는 현실이 있다.
오자·오문·오용 예, 그리고 오탈자가 눈에 띄는 교재가 수십 종이나 출간되어 있지만,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갈고 닦음)하여 더 나은 교재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교재 채택을 통해 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악습의 소문도 종종 들려오며, 교정·색인 작성은 물론 집필과 예문 작성까지 대학원생이나 학부생에게 맡겨 교재를 꾸며내는 교사, 부업으로 교재 제작에 힘쓰는 교사 등의 존재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과연 ‘교재 개발’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실한 노력이 얼마나 기울여지고 있는지 다소 의문이다.
더 나아가 대학 내 ‘교수’ 평가의 실적주의는 일본의 국어학·국문학 논문을 ‘번역’이나 ‘번안’한 수준의 글을 다수 양산할 뿐, 현장의 일본어 교육에 관한 성실한 언어교육적 성과나 경험의 축적을 효과적으로 활용·평가하지 않는 시스템이 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물론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도 일본인의 시각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독특한 관점에서 쓰인 논문들이 있다는 점은 덧붙여 두어야 하겠지만).
‘일본어’, ‘일본문학’이 과연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타 학과의 보수적, "반일"적 학자들의 의심 어린 시선, 일본어학과 신설 붐을 두고 “곤란한 일이다”라고 표현한 어느 국립대 문학부 학장의 감각(그 대학에도 일어일문학과가 있음에도!) 등, 주변으로부터의 바람 또한 거센 것이다.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4 일본어의 논리와 비논리
어쩌다 보니 지난 4년 동안 쌓여 있던 푸념을 조금 쏟아내는 모양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이러한 문제들이 한국의 ‘일본어 교육’에만 특유한 것이라고는 아무래도 생각할 수가 없다. 일본의 매스컴에서 가끔 보도되는 ‘해외에서의 일본어 붐’ 기사들 말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하고, 또 ‘보람 있는’, ‘멋진’ 직업으로서의 ‘일본어 교사’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해왔지만, 거기에는 최근의 일본어론 붐과 마찬가지로 일본어, 혹은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일에 대한 진정한 자기성찰적 탐구도, ‘외부’로부터의 비판적 시선도 없이 그저 ‘붐’으로서 유통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컨대 일본어론 쪽에서는 ‘일본어 특수론’이나 ‘일본어 무문법(無文法)·비논리론’으로부터의 탈피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GNP 세계 제2위라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어(일본인)의 자신감 회복이라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어는 사용 인구로 보아 세계 몇 위의 대언어다”라는 식의 주장 역시, 유엔 분담금 액수를 배경으로 “일본어를 유엔의 공용어로”라는 주장과 쉽게 결합되기 쉬운 성격의 것일 것이다.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가 그 자체로 본래부터 명석하고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어 자체가 ‘비논리적’이며 애매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일본어에는 일본어 나름의 논리가 있으며, 그 체계 안에서는 충분히 명확하다 …
이러한 ‘정론’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선 일본어 문법론, 일본어학 내부에서 과연 일본어의 논리가 진지하게 탐구되고 있으며, 그것이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논리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
일본어가 논리적이라는 점이 자명하다고 하더라도, 서구 근대 언어들이 그 논리를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해 온 것과 같은 의미에서, 조선어·몽골어 등 인접 언어와의 비교·대조 속에서 ‘범(汎)일본어의 논리’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일본어 특수론’이나 ‘일본어 비논리론’으로부터의 탈피 역시 결국은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가 ‘힘’에 의해 세계 공통어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어 또한 ‘경제력’에 의해 국제화하려는 일본어 내셔널리즘의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측면에서 다시 바라보자. 혼다 카츠이치(本多勝一1932~)의 "일본어의 작문기술"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뛰어난 일본어 작문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책 속에는 모리 아리마사(森有正1911~1976)의 글을 도멘코•라가나가 비판적으로 인용한 대목을, 다시 혼다 씨가 끌어와 모리 씨식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글자 들여쓴 부분에서 「」 안은 라가나 씨의 글, 그 안의 「」는 모리 씨의 글, 한 글자 들여쓴 부분은 혼다 씨의 글이다.)
「“프랑스 대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중략)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어려움은 일본어가 문법적 언어, 즉 그 자체 안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원리를 지닌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상, 모리 씨의 글)
테니오하(조사)의 쓰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모리 씨의 주장은 독단처럼 느껴진다. … 모리 씨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그러한 단정의 이면에는 일본인을 유니크한 존재로 만들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생각으로는 어떤 언어든 그 자체 안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원리, 법칙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이상, 라가나 씨의 글)
참으로 ‘그 자체 안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원리를 지니지 못한’ 사람은 모리 아리마사 씨 자신일 것이다. (중략) 도대체 모리 아리마사 씨에게 일본어를 프랑스어로 옮길 초보적인 능력이나 과연 있는 것일까. (중략) 그런 모리 아리마사 씨가 파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일본어를 가르쳐 왔다니, 이는 한 학자의 무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일불 양국의 공적 문화 접촉에서의 중대한 미스캐스트(mis-cast)라 할 것이다. 이 역시 식민지형 지식인의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이상, 혼다 씨의 글)
굳이 모리 아리마사(森有正)의 편을 들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모리 씨의 ‘심정’이 이해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라가나 씨나 훈다 카츠이치(本多勝一)가 말하듯, “일본어는 … 그 자체 안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원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라는 모리 씨의 말은 틀렸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형 지식인’으로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동경하던 파리에 살며, 프랑스어라는 외국어에 둘러싸인 채 그곳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게 되었을 때, 모리 씨가 ‘일본어’를 “그 자체 안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원리를 지니지 못한” 언어라고 욕하고 싶어지는 심정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나 역시 강단 위에서 몇 번이나 말문이 막혀 서 있었던가.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예를 들어 「閉めています(*닫고 있습니다)」와 「閉めてあります(*닫혀 있습니다)」의 차이에 대해 설명할 때 말이다. ‘いる(*진행)’와 ‘ある(*상태)’의 차이를 존재 주체가 생물인가 무생물인가에 따라 구분할 뿐 의미 차이는 없다고, 편의상 그렇게 가르쳤더니, 그렇다면 두 문장은 의미상 같은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버린 것이다.
참고로 한국어에서는 이 두 문장을 “닫고 있습니다”, “닫혀 있습니다”처럼 ‘닫다’ 쪽의 형태를 바꾼다. 그래서 한국인 학생들에게는 이 ‘います’와 ‘あります’의 차이로 인한 의미 변화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내가 의지하는 것은 "일본어교육사전"과 미카미 아키라(三上章1903~ 1971), 오쿠츠 케이이치로(奥津敬一郎1926~ 2017)의 문법서이지만, 안타깝게도 학생들에게 납득이 가도록 설명할 방법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こうした場合、 私は自らの中の日本語の"論理的なもの”がガタガタと音をたてて崩れてゆくような気がするのである。むろん、こうした事例は私の「無知」と「不勉強」によるものにしかすぎないのだが、それにしてむ、日本語は日本人同士で語り、論じるときは論理的であっても、外国語にとりまかれる環境では、その論理性を証明し、説明することは難しいのだ。
이런 경우 나는 내 안에 있던 일본어의 ‘논리적인 것’이 덜컹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결국 나 자신의 ‘무지’와 ‘공부 부족’ 때문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어는 일본인끼리 말하고 토론할 때는 논리적으로 기능하더라도, 외국어에 둘러싸인 환경에서는 그 논리성을 증명하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요컨대 그것은 우리 일본인들이 일본어의 논리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이미 ‘식민지형 지식’에 물들어 있어, 주어·서술어, 동사·형용사·명사, 자동사·타동사, 과거·현재·미래와 같은 문법 용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언어 구조를 설명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또 하나는 ‘일본어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일본인, 혹은 ‘일본문화’의 문제라는 점이다(결국은 ‘일본어’로 귀착될지도 모르지만). 혼다 씨는 앞서 인용한 부분 근처에서 “세상 사람들은 프랑스어의 명석함과 프랑스적 명석함을 혼동하고 있다”는 샤룰 바이이의 말을 공감 어린 태도로 인용하고 있다.
이에 빗대어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은 ‘일본적 비논리’를 ‘일본어의 비논리’와 혼동하고 있을 뿐이며, ‘일본어’ 자체는 논리적일지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일본인이 ‘비논리적’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적 비논리가 여러 장면에서 ‘국제적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까.
모리 아리마사(森有正) 씨의 ‘비극’은 일본 문화가 지닌 타 문화에 대한 ‘동화 경향’이 낳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외국 문화, 외국어에 둘러싸이게 되었을 때 일본인의 대응은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갈라지는 듯 보인다. 하나는 외국 문화를 한없이 수용하고 흡수하여, 이른바 주체성을 잃고 완전히 동화되어 버리는 유형이다.
또 하나는 외국 문화에 대한 반발을 ‘일본문화’ ‘일본어’라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한사코 경계 태세를 취하고 결국 자기 안에 틀어박혀 버리는 유형이다.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하여 ‘적당히’, ‘중용의 길’을 걸으며 균형 있게 외국과 관계를 맺어 갈 수 있는 일본인은 의외로 적은 것처럼 보인다.
모리 씨가 어느 쪽 유형이었는지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파리라는 공간 속의 이방인으로서, 일본어·일본문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몸에 걸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는, 그와 같은 인물이 “파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사실이 문제(일불 양국의 문화 접촉에서의 미스캐스트라는 의미에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그 사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5 "일본어"라는 이데올로기
해외에서 일본어 교육에 종사하는 일본인 교사는 대개 ‘고립’되어 있다. 외국에서 외국인들 속에 살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밖에도 그에게는 우선 의지할 만한 교재가 없고, 방법론도 없으며, 자신이 한 수업에 대해 조언이나 위로, 혹은 비평조차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더욱 큰 심리적 부담이 되는 것은 “학생들은 왜 일본어를 공부하는가”, “나는 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아닐까.
최근에는 ‘일본어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국어학자, 문법학자, 언어학자 등이 참여하여 여러 문제를 다룬 일본어 교육 관련 전문 잡지와 전문서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한 논문들이 공연히 문법적 미로와 난문(難問)의 숲 속으로 헤매 들어간 것처럼 보일 뿐이다.
국제교류기금은 해마다 한 차례 해외 일본어 교사(외국인에 한함)를 일본으로 초청해 연수회를 열고 있다. 그런데 그 연수에 참가했던 어느 중년의 한국인 교사는, 전문서나 잡지에서 이름을 보아 온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실제로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곤란을 겪고 있는 문제나 의문점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도 배울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장’의 일본어 교육과 ‘이론’ 차원의 일본어 교육 사이의 괴리 ――.진부한 주제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 지점에야말로 "일본어 교육"의 문제점이 드러나 있다. 요컨대 거기에서는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가 언제나 비켜가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왜 일본어를 좀처럼 잘 익히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일본어 교사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질문은, 곧이어 그들이 왜 일본어를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일본어 교육 참고서나 논문을 읽어도 적혀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왜 일본어를 계속하는가?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고 있는가?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 1년. 이제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슬슬 답을 내놓아도 될 때가 아닌가 싶다. … “왜, 무엇을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장래를 위해서”, “일본은 경제 대국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야 하므로, 그를 위해…”, 혹은 “일본어를 살려 일하고 싶어서” 같은 답을 이 나라에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곳을 방문하는 일본의 교육 관계자나 언론인들이 거의 반드시 던지는 이런 종류의 질문에, 말재주 좋은 학생들은 겉으로는 모범생다운 답을 한다. 그러나 일본 기업도 아직 많지 않고, 그들이 취직할 가능성도 거의 없는 이 나라의 현실 속에서, 대학의 사정에 떠밀려 일본어를 공부하도록 운명지어진 그들을 4년 동안 떠받쳐 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화를 알아가는 재미’, 그리고 ‘언젠가는 일본에 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만 꿈뿐일 것이다.
“그것만을 위해 대학 4년을? 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적 호기심’과 ‘꿈’이라는 것을 그렇게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튀니지의 튀니스에서 청년해외협력대원으로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던 키타가와 에리(北川エリ) 씨가 쓴 글의 한 대목이다(파나링가학원 편(編)『일본어교사분전기(日本語教師奮戦記)』)
그렇게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몇 권 참고해 본 일본어 교육 관련 서적·잡지 특집·논문들 가운데,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언급하고 있던 것은 이 기타가와 씨의 글 한 편뿐이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문제일 뿐, 왜 가르치는가, 왜 배우는가라는 질문 따위는 교사로서 실격이거나, 낙제생(낙오 학생)이 품는 ‘불건전한’ 의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했다. 내가 접한 일본어 교육 관련 글들은 하나같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제 교류’, ‘문화 교류’라는 구호만으로 무언가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편이야말로 더 ‘불건전’한 태도일 것이다. ‘지적 호기심’과 ‘꿈’ ― 이것은 튀니지에서 ‘배우는’ 쪽 학생들의 ‘왜’에 대한 답이지만, ‘가르치는’ 쪽에 대해서도 아마 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리(實利) 면에서 말하자면, 내 경험으로 보아 해외에서 일본어 교사라는 직업은 결코 수지가 좋은 장사는 아니다(특히 국제교류기금 파견이 아닌 개인 계약 교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엔고 등 환율 변동으로 수입이 한꺼번에 20~30% 줄어든 적도 있다).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했던 선교사들처럼, 일본어를 세계에 보급하기 위해 사명감에 불타는 일본인 교사라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귀착점은 해외 생활이나 외국인과의 접촉에 대한 ‘지적 호기심’, 그리고 ‘꿈’이라는 데로 모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가적 의지를 등에 업고 전개되려 하고 있는 "일본어 교육"('국문학해석과 감상' 1985년 3월호의 ‘일본어 특집’에는 공교롭게도 '국제사회에로의 비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에 대해, 그것을 떠맡고 있는 일본어 교사 쪽이 단지 ‘호기심’과 ‘꿈’에만 근거―정점(定点)을 두고 있다면, 어쩐지 쓸쓸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니, 단지 쓸쓸하다는 문제만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비상’하려는 ‘일본어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런 개인적 환상에 가까운 근거만으로는 결국 그 ‘이데올로기’에 빨려 들어갈 뿐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일본어 교사는 전전(戰前)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쇼비니즘적(국수주의적적) 해외 진출을 떠받치는 선봉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나에게는 일본어라는 언어가 일본인이 몸에 걸치고 다니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으며, 일본어 교육이 일본적 논리를 성찰하지 않은 채 해외로 ‘수출’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의지를 대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조금 과장된 말일까.
그러나 ‘닫힌 언어’에서 ‘열린 언어’로, 더 나아가 ‘아름다운 일본어’, ‘올바른 일본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속에서 일본어라는 이데올로기의 향방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내가 한국에서 4년 동안 악전고투하며 부딪쳐 온 ‘나의 일본어’와, 그것을 잠식하려는 외국어의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이 역시 꽤 과장된 표현이지만)을 거의 무화(無化)해 버리는 형태로 실현되어 가는 ‘일본어 교육’의 진로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 자체가 이데올로기다. 한국인들에게 둘러싸여, 한국어가 빗발치듯 쏟아지는 좌담의 자리 한가운데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늘 그렇게 느끼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의 일본어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을 새삼 자각하게 만들었다.
상대에게 일본어로 말해 달라고 하고 싶다. 일본어의 미묘한 뉘앙스, 그 감정의 음영을 받아들여 주었으면 하고 싶다. 나는 몇 번이나 그렇게 소리쳐 외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야말로, 일본어라는 이데올로기로 상대를 끌어들이지도, 동시에 나 자신도 그 속에 빠져들지도 않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과연 내 일본어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혹은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작용하는 하나의 ‘자장(磁場)’ 속에서, 나 역시 모리 씨의 "비극(悲劇)"을 또 다른 형태로 연기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6-0 무당·기생·광대
예로부터 단 하나, 가슴에 새겨 지녀온 금언이 있다. 그것은 “사람은 여행을 떠나도, 가져간 것만을 가지고 돌아온다”라는 말이다. 괴테의 말이라고 한다. 고등학생 때 명언집에서 발견해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물론 말 자체는 꽤 변형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건너와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네 해를 살고 돌아온 지금도, 나는 다시 이 괴테의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다.
결국 사람은 “가져간 것만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물론 시간과 비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은 도쿄에서 삿포로나 오키나와로 가는 것보다 오히려 더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외국’이다. 여름과 겨울 방학마다 여러 번 왕복을 거듭했으니, 이제는 ‘갔다’ ‘돌아왔다’는 감각도 희미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일본어 교사 일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왔어도, 귀국했다는 실감은 그다지 크지 않다.
택시에 왼쪽에서 타는 일도, 버스가 와도 뛰지 않고 기다리면 된다는 사실도, 길가에서 함부로 가래나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금세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회의 빠른 템포와, 여유 없는 획일적인 생활 패턴과는 어딘가 조금 ‘어긋나 버렸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 역시, 실은 내가 이쪽으로 ‘가지고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보고 들은 일을 여기서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내가 무엇에 가장 끌렸고, 무엇을 보고자 했는지는 말할 수 있다.
“무당” “기생” “광대” — 마치 삼제(三題) 이야기처럼 나란히 늘어놓아 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6-1 무당
“무당”이란 민간 신앙에서의 샤먼을 말한다. 일본으로 치면 ‘아즈사 미코(梓巫子:일본 동북지방의 무당)’나 ‘이타코(일본 동북지방의 무녀)’처럼, 영매(霊媒)적 계시나 가호·기도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무당’이라는 말에는 다소 차별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신내림을 통해 무(巫)가 된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의 차이, 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역, 호남(전라도), 동해안(경상도·강원도) 등 지역적 분화(分化)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 서민층의 정신 저류를 이루는 샤머니즘—현세의 복을 기원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죽은 이를 위로하는 신앙으로서 유교·불교·도교적 요소가 뒤섞인 혼합 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을 핵심으로 삼는, 상당히 예능화된 직능 집단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게 된 ‘무당’ 일행은 부산을 중심으로 동해(=일본해)를 따라 삼팔선 가까운 강릉과 속초까지 ‘굿(巫祭, 巫儀)’을 순회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장인 K씨를 리더로, 아내와 딸이 무당을 맡고, 사위와 조카가 추임새를 넣으며 악기(장구, 동라, 징 등)를 연주하는 한 무리였다.
나는 몇 차례 그들과 함께 굿판에 따라가, 망자의 혼을 달래는 진오기굿을 구경하기도 하고, 대기실에서 장식용으로 쓰는 종이꽃—종이 오리기 세공—을 만드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결혼이나 취직 등에서 지금도 ‘피차별(被差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는 무당 종사자들이지만, 그들의 꾸밈없고 너그러운 삶의 한 자락을 접하며 나는 눈이 씻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엔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울타리가 있어, 나 같은 인간은 거기서 튕겨 나가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구를 두드리고, 동라를 울리며, 판소리의 원류라 일컬어지는 무가(巫歌)를 부르면서 동해안의 어촌과 농촌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천막 아래에 주저앉아 그 장구의 리듬과 무가에 흠뻑 잠겨 있는 노인들… 그런 순간 나는, 이 사람들을 지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내 태도의 오만함과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마음 깊숙한 곳, 감정의 근원에서 솟구쳐 올라 주위의 열기와 함께 흔들려 나오는 그 감정을, 그저 그대로 맛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 한국 체험의 가장 기층을 이루는 부분이 될 터이니까.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6-2. 기생
“기생(妓生)”이라는 말에는 여러 오해가 따라붙기 마련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일본인식 발음으로 말해지는 ‘키얀(キーヤン)’을 떠올리고 있다. 한국에서 ‘접대부’라 불리거나 ‘술집 여자’라고 불리는 여성들 말이다.
여행지에서 문득 술 한잔하고 싶어질 때면, 나는 종종 이런 여성들이 있는 가게에 갔다. 커튼으로 칸을 나눈 박스석에서 오징어를 씹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 무료함을 달래려는 그녀들이 몇 명씩 번갈아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나는 내 한국어 실력을 총동원해 그녀들의 일상에 대해 묻는다. 몇 시에 일어나는지, 쉬는 날은 언제인지, 무엇이 즐거운지, 수입은 어느 정도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부모는 어떤지, 그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하고. 그녀들의 솔직함은 비길 데 없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해진 휴일이 없다는 것, 한 달에 한두 번 쉬는 날에는 빨래를 하거나 장을 본다는 것, 시골에 돈을 부치고 있다는 것, 즐거움이라면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화투를 치는 것이라는 말까지 모두 거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지방 출신이고 형제가 많다. 장녀인 경우가 많으며, 아직 학생인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반드시 있다. 수입은 손님에게서 받는 팁뿐이고, 이른바 가게에서 주는 월급은 없다. 숙식 제공 형태로, 거의 몸 하나만 달랑 집을 나와 되도록 고향에서 먼 도시에서 일한다.
이런 상투적인 ‘여급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이 나라 역시 예전 일본과 마찬가지로 ‘여동생’이나 ‘누나’의 미약한 힘에 의해 절반 이상이 떠받쳐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녀들 또한 사회의 하층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윤락 여성’이라는 위협적인 명칭과 ‘술집 아가씨’라는 호칭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맞닿아 있다. 보통 가정의 아들이 그녀들과 결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내 지인은 단언했다. 그것은 어느 쪽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녀들은 남자 못지않은 거침과 심성의 다정함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매력’은 자신들도, 주변의 남자들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결국 버려진 꽃처럼 시들어가고 마는 것일 것이다…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6-3. 광대
“광대(広大)”의 본래 어의는 떠돌아다니는 유랑 예인을 가리킨다. 가면극을 하거나 줄타기, 인형극을 공연하고, 판소리를 부르며 각지를 떠돌던 사람들이다. 물론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이 ‘광대’라는 옛 명칭에 걸맞은 예능을 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좋다. 가면극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학생들이거나 뜻 있는 시민들이고, 판소리의 명창은 ‘인간문화재’로서 명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마치 광대의 말예(末裔)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예컨대 그것은 ‘병신춤’의 공옥진 같은 예인이기도 했고, 썰렁한 천막 안에서 줄타기를 하는 초라한 서커스단의 예인이기도 했으며, 또 지방의 축제에서 가설무대를 세우고 공연하는 민속무용단의 무희들이기도 했다.
혹은 길거리 약장수의 구호에 귀를 기울이거나, 거지 부자(*각설이)가 부르는 우렁찬 유행가에 넋을 잃고 듣기도 했다. 이들을 현대의 광대들이라고 불러도 좋을 텐데, 그들의 예능은 결코 세련된 것도,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를 매혹하는 ‘뿌리의 깊이’가 있었다.
이 ‘뿌리의 깊이’라는 말은, 나는 조선의 고전 가요집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나오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근원이 깊은 샘은 마르지 않는다〉라는 노랫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선진 조국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근대화를 향해 곧장 달려가는 현대 한국에서, 유난히 ‘뒤처진 것’, ‘남겨진 것’, ‘사라져야 할 것’에 내가 집착해 보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뿌리 깊은 나무〉와 〈근원 깊은 샘〉을 한국 안에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근대화, 선진국화의 도상에서 너무나 쉽게 버려버린 것들이다. 그것을 다시 찾아내려는 일은 단순한 향수나 잃어버린 공동체의 꿈을 회상하는 일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발자취를 더듬어 되돌아가, 자신의 정신적 기반을 찾아내려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다듬어지지 않았고 거칠지만, 그러나 따뜻함이 있는 것… 현대의 광대들의 예능을,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렇게 말해 보자. 그것은 나를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살갗이 스치며 부딪히는 시장의 소란 속으로, 장터 인파의 북적임 속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말을 주워 모아, 비평의 언어를 길어 올리려 하는 것이다…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8-7 한일 문학의 가교
얼마 전 방일한 한국의 기예 넘치는 소설가 황석영 씨가, 이회성 씨와의 대담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문학을 가끔 접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아무런 흥미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별로 읽지 않습니다. 추리소설이나 유행소설 같은 것들이 가끔 여학생이나 OL들 사이에서 해적판으로 읽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향상실과 민족문학' '군상(群像)' 1986년 4월호)
현역 40대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황 씨의 이 말을 접하고, 나는 현재 일본 문학과 한국 문학 사이에 접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일본 문학이 화제가 될 때, 그것이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한국어 번역 제목은 '대망')이거나,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氷点)이지, 결코 시마오 토시오(島尾敏雄1917~1886), 오에 켄자부로(大江健三郎1935~2023), 후루이 요시키치(古井由吉1937~2020) 같은 작가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1543~1616)나 빙점(氷点)을 폄하하려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영화화되기까지 한 오싱(おしん)까지 포함해, 이들 작품이 동아시아 세계에 공통으로 흐르는 사회적 인습성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회 계층의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문학으로서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의 최전선에서 서로 불꽃을 튀기듯 맞부딪치는 접촉이, 일본어와 한국어라는 서로 인접한 언어 사이에 있다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앞서 황 씨의 말처럼, 거의 서로에 대한 무관심, 무관계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가끔 「왠지 크리스탈(なんとなく、クリスタル :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의 1980년 발표 데뷔작 소설)」이나 「사가와군의 편지(佐川君からの手紙-가라쥬로-唐十郎의 1983년 발표 소설)」 같은 작품이 “일정한 편집 방침 아래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황 씨), 변덕스럽게, 상업주의적으로 출판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재일한국인 문학에 대해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의 예를 들면, 김학영(金鶴泳재일작가)의 「얼어붙은 입(凍える口)」, 李良枝의 「가즈키메(かずきめ)」(번역 제목 「해녀」), 「도키(刻-시간)」, 이기승(李起昇 재일작가)의 「제로한(ゼロはん-무명씨)」 등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양지의 「かずきめ」를 제외하면, 한국 문단이나 일반 독자에게 크게 호소력을 갖지 못했던 듯하다.
이양지(李良枝1955~1892-재일작가)의 「나비 타령」과 「해녀」는 일본에서 민족 차별을 겪는 ‘동포의 딸’이 민족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정형화된 ‘이야기’로 읽히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모국’에서의 생활의 위화감을 그린 「도키(刻)」가 큰 반향을 얻지 못한 것은, 한국에서 재일한국인 문학을 읽는 방식이 상당히 편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물론 김석범(金石範), 이회성(李恢成-재일작가) 같은 정치색이 짙은 작품은 출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선을 돌려 일본에서의 한국 문학 소개를 보아도 문제는 많다. 앞선 황·이 두 사람의 대담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일부 일본 문학 연구자들이 “문화적 쇼비니즘”(이 씨의 표현)에 의해 한일 ‘문학 교류’를 기획하기도 하고, 또 한국의 반체제 문학을 소개할 때 정치적 의도가 앞서 문학적 평가와 가치 판단이 뒷전으로 밀려난 경우도 적지 않다.
구체적인 예로, 70년대 한국 문학을 시인 김지하와 함께 대표한다고 일컬어지는 황 씨의 소설이, 앤솔러지 속 단·중편 몇 편으로만 번역 출간되었을 뿐, 독립된 단행본으로는 일본에서 소개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70년대 한국 문학을 시인 김지하와 함께 대표한다고 하는 황 씨의 소설 작품이 앤솔로지(선집-選集) 중 한 편으로 단편, 중편이 번역 출판되었을 뿐, 독립된 단행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황 씨의 저작으로는 ‘광주 사태’에 관한 르포르타주 『줌음을 넘어서, 시대의 어둠을 넘어서(死を越え、時代の闇を越えて)』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을 서로 다른 판본으로 두 차례나 낼 수 있는 힘이 일본 출판계에 있다면, 황 씨의 『어둠 속의 아이들(暗がりの子供たち)』, 『장길산(張吉山)』, 『무기의 그늘(武器の陰)』 같은 장편들이 번역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겠는가.
또한 황 씨의 방일과 그가 지도한 『마당굿(マダン・クツ)』 공연을 계기로 『군상(群像)』『세계(世界)』『신일본문학(新日本文学)』 등 여러 잡지가 각각 대담·인터뷰·특집을 꾸몄지만, 어느 한 곳도 그의 소설 작품을 번역해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 눈에 기묘하게 비친다. 이것은 소설가를 대하는 태도로서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닐까.
일본과 한국(조선)의 근대문학이 서로 밀접한 관련 속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분명하다. 이광수(李光洙), 김동인(金東仁), 이상(李箱) 같은 근대 문학자들의 일본과의 관계는, 한국 근대문학 성립 과정을 해명하는 데 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비록 오늘날 한국 문학이 이광수에서 시작되는 근대문학을 부정적 매개로 삼아 극복하려 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학사적 문제로 남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근대 문학 성립기의 문제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식민지 지배한 시기(일제 시대)의 '친일 문학'(일부 조선인 문학자가 일본 군국주의, 황국주의에 협력하여 쓴 문학). 일본인 문학자가 그것을 강제)의 문제가, 한일 간의 『문학 교류』 사이에 암초처럼 가로놓여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문학사적’ 문제를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서로의 ‘문학’ 교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본 문학에게도, 근대문학 100년이 결락(欠落)시켜 온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부산 (1968 가와무라 미나토)
III 한국에서 생각한 것
● 09 부산으로의 편지... 후기로 갈음하며
S先生、お元気ですか。釜山を離れ、はや半年という時が過ぎました。朝、まだうつらうつらと夢見心地の布団の中で、「ソグム、サイッソオ!(塩、買わんかねえ)」という塩売りのおばさんの声や、 「コグマ、サグァ、トマド(サツマイモ、リンゴ、トマト)」といった物売りの声をさぐりあてようとしている自分に気がつくということもしだいに少なくなり、キムチやニンニクの匂いが自分の休のうちから、だんだん消えてゆくようで、少し寂しい気もします。
S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부산을 떠난 지도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침에 아직 몽롱한 꿈결 속 이불 안에서 “소금, 사잇소오!―소금 사세요!" 하고 외치던 소금 장수 아주머니의 목소리나, “고구마, 사과, 토마토” 같은 행상들의 소리를 더듬어 찾고 있는 자신을 문득 깨닫는 일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김치와 마늘 냄새가 내 몸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듯해,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유라쿠초에 가서 신상옥 감독의 「춘향가(春香歌)」를 보았습니다. 납치니 망명이니 하며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던 그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작품이라, 오랜만에 보는 북한 영화라는 점에서 꽤 기대를 하고 갔던 것입니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농민들과 서민 아저씨·아주머니들의 얼굴을 보면서, 아, 역시 한반도 사람들의 얼굴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며 문득 그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이게 과연 전설적인 거장 신상옥의 작품인가” 싶어 다소 기대에 못 미친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과 푸른 들판, 탁 트인 듯 높고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러 간 보람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춘향 역 여배우의 맑고 단정한 아름다움, 향단의 은은한 요염기 같은 것에 가슴이 문득 죄어 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도, 단순한 호색 때문은 아니라고 서둘러 스스로에게 변명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 상영회장에서 신상옥이 기획·총감독을 맡고 최은희가 감독했다는 「돌아오지 않는 밀사」 비디오테이프를 샀습니다. 남한에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필름이겠구나 싶으니, 조금은 묘한 감회도 일었습니다. 귀국 직전에 부산 국제시장과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마구 사들였던 영화 비디오테이프들에 또 한 편이 컬렉션으로 더해진 셈입니다.
영화는 아껴 두었다가 아직 보지 않고 있습니다.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작품을 연달아 두 번쯤 보고 나니 조금 질려버려서, 이번 것은 천천히 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는 한국 영화를 그렇게 마음 편히 보러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까요.
한국에서 사 모은 유행가 테이프도 꽤 많이 갖추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틀어 보니 금세 다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같은 테이프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이 역시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듣고 싶은 곡이 달라집니다. 위스키를 홀짝이며 남포동 뒷골목을 떠올리고 싶을 때는 역시 김수희입니다. 「멍에」, 「너무합니다」, 「남포동 블루스」 같은 노래는 조용히 감상에 잠기기 딱 좋은 배경음악이지요.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1985년 발표)」 같은 곡은 술에 취해 돌아오는 밤길에,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부르며 걷기에 알맞고, 상쾌한 오전 시간에는 이선희(李仙姫)의 노래를 틀어 놓고 일을 합니다.
혜은이나 양희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워드프로세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말하지 않았만, 일본에 돌아온 뒤에는 문명화의 물결에 뒤처지지 않겠다며 워드프로세서로 원고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저 넋을 잃고 듣고 맙니다. 반도호텔이나 부산호텔 위층의 노래방 바에서 노래 연습을 좀 더 해 둘 걸 그랬나 하고, 이제 와서 조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서울 올림픽을 앞둔 분위기 탓인지, 이른바 ‘한국 붐’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산으로 떠났을 무렵만 해도 어딘가 어둡고 그림자가 드리운 나라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런 이미지는 말끔히 사라지고,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한국을 치켜세우는 경향까지 보입니다. 참으로 일본인의 한국 인식이라는 것이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모양이구나 하고,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한국인의 일본 인식에 담긴 스테레오타입(고정관념)에 대해 S 선생님과 토론하던 일을, 이제는 우리 일본을 향해 되풀이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어, 조금은 쑥스럽기도 합니다.
이 한국 붐 덕분인지, 한국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유명한 사람들’을 몇 분 뵙게 되었습니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선우휘(鮮于輝1922~1986) 씨(일본에서 귀국 직후 부산에서 별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황석영(黄皙暎) 씨, 공연 때 인사를 나눈 심우성(沈雨晟) 씨, 공옥진(孔玉振) 씨 등입니다.
또 일본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훈아(羅勲児), 김수희, 김추자 등이 출연해 각각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일본의 매스 저널리즘에 약간의 얄미움 같은 감정도 느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부산 광복동 일대를 떼를 지어 가로로 늘어서서 활보하던 일본인 단체 관광객과도 닮아 있습니다. ‘매스(단체)’의 힘만을 믿고 밀어붙이는 듯한 인상이니까요.
일본의 국제무역 흑자, 곧 ‘엔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나야 했던 우리 같은 사람들로서는, 반년이나 1년 사이에 손에 쥔 원화의 가치가 (엔화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져 버리는 일본의 대외 경제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안에서는 ‘엔고 차익’ 덕분에 거의 전국이 들떠 있는 분위기이고, 그 이면에 있는 ‘엔고 차손’에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니, 그 점에서도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은 참으로 제멋대로이고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민족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분통스럽게 느꼈습니다.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자계(自戒)를 담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국민학교 뒤편 아줌마 집에서 마셨던 동동주와 낙지볶음의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회춘장(回春荘)의 파전 ‘돌고래집’의 해산물 전골도, 다시 한 번 ‘진로’나 ‘선’을 한 손에 들고 맛보고 싶습니다.
어쩐지 나의 분신을 그 동대신동의 미로 같은 골목 어딘가에 두고 온 듯한, 그런 쓸쓸함과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쯤 내 분신은 남포동 ‘석류(술집이름)’ 카운터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マダムとおしゃべりをしながらS先生を待っているという図を思い浮かべるわけですが、でも考えてみれば約束の時間には、 いつもぼくの方が遅れていましたね。想像の中では、人間は自分に都合のいいように考えてしまうものです。さて、らちもない話を続けてしまいました。今夜は韓国歌曲の「待てる心」や「去り行く舟」を聞きながら、眠ることにします。
마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S 선생님을 기다리는 장면을 떠올려 보지만, 생각해 보니 약속 시간에 늘 늦었던 쪽은 나였지요. 상상 속에서는 사람은 자기에게 편한 대로 생각해 버리기 마련입니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군요. 오늘 밤은 한국 가곡 「기다리는 마음」과 「떠나가는 배」를 들으며 잠들 생각입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시차가 없지만, 실제로는 일본 쪽이 삼십 분쯤 더 빨리 밤이 깊어지는 느낌입니다. 부산에 있었다면 아직 아이들 목소리가 거리에서 들려올 시간(그것도 밤 열 시, 열한 시까지 들리다니, 왜 그랬을까요?)에 벌써 졸음이 쏟아집니다. 내일 아침에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을 들으며 상쾌하게 눈을 떠볼 생각입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1986년 10월 S 선생님에게--- 카와무라 미나토
● 初出一覧
I アンニョン・ハシムニカ
01 釜山で出会った人びと・書き下ろし
02 ソウルのコカコーラ. すばる1986.6月号
03 先駆者の歌が聞こえる. 宝石1986.8月号
04 ソウルの"通過儀礼”・書き下ろし
II 釜山通信・一九八二~一九八六
05 韓国の中の日本語. 南海日日新聞820526
06 市場と言語. 南海日日新聞820717
07 河口の人びと. 南海日日新聞821120
08 巫と儒. 早稲田文学1983.1月号
09 銀幕の美女たち. 早稲田文学1983.2月号
10 見つけれない鳶. 早稲田文学1983.3月号
11 空と風と星と詩. 早稲田文学1983.4月号
12 飲む・食べる・酔う. 早稲田文学 83.7月号
13 カモメとヒマワリ 早稲田文学 83.8月号
14 子供たちのいる風景. 同 1983.10月号
15 釜山の昼と夜. 同 1983.11月号
16 流れゆく歌. 同 1983.12月号
17 黒山島にて. 同 1984.1月号
18 洛東江の冬. 同 1984. 3月号
19 'ついに'あるいは'しかし,まだ' 同.5月号
20 韓国の日語科学生. 読売新聞1983 09 08
21 ハングル世代. 朝日新聞 1984 03 22
22 韓国映画に新しい波.無署名記事84년4月
23 江陵端午祭. すばる 1984. 7月号
24 教養としての日本語. 朝日新聞 84 08 03
25 金芝河の'おはなし集' 'めし' 無署名84 06
26 韓国の映画事情. 読売新聞1984 08 29
27 韓国の大河小説'張吉山'完成. 無名 84 10
28 街の底へ. 現代コリア 1985年 3月号
29 わが街釜山. 柿の葉 1985年 秋季号NO52
30 金鶴泳'凍える口'韓国語版出版. 未発表
31 韓国からの焼酎通信. 焼酎通信84-8月号
32 韓国映画はなぜ面白くないか. 現コ85-5
33 韓国、強まる文化面の自由化. 無名85-5
34 韓国の祭り. 共同通新系 各紙 85年9月
35 消えた街. 現代コリア 1985年 11月号
36 伝統芸能. 基礎ハングル1985年12月号
37 市場. 基礎ハングル1986年1月号
38 東新国民学校一学年七班. 現コ86-1月号
II 韓国で考えたこと.
39 蔚山のチノギ・クッ. 群像 84年11月号
40 内なる美国,アメリカへの見果てぬ夢. 翻訳の世界 1985年9月号
41 '日本語教育'というイデオロギー. 翻訳の世界 1985年12月号
42 巫堂・妓生・広大. 図書新聞1986 03 22
43 日韓文学の架橋. 毎日新聞1986 04 21
44 釜山への手紙. 未発表
※(本文中に使用した写真は特別な註記がないかぎり著者撮影のものです)
[著者略歴】川村 湊(かわむら みんなと)
1951年2月23日 北海道 網走市生れ。
法政大学法学部政治学科卒業。1982~1986年 韓国釜山市の東亜大学校 文科大学日語日文学科で講師・助教授として勤務。
著書・「異様の領域」「批評という物語」(国文社)「酔いどれ船の青春」(講談社)「韓国という鏡」(鄭大均と共編 東洋書院)
現住所・千葉県浦安市当代島1-23-14
[わたしの釜山]
1986年12月15日 第1刷発行 定価1,500円
著者 川村 湊. 発行者 稲垣喜代志
発行所 名古屋市中区上前津2-9-14 久野ビル 電話052-331-0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