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의논도 없이 나눔님과 선뜻 약속을 해버렸다. 아마도 맘속에 항상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 그리 쉽게 허락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결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족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자기야 나 나눔님과 소록도 가기로 약속했는데..." 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남편은 아주 편안한 목소리로 "그래 자네가 가고싶으면 다녀와" 하고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고마움과 기쁨은 잠깐 또다시 다른 걱정을 하게되었다. 남을 위해 봉사를 한다는 것이 그것도 몸이 불편한 그 사람들을 위해 내가 얼마나 웃을 수 있을까하고 또다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렇게 약속한 그 날이 왔다. 가을 여행가는 여인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호남 쪽으로는 올 봄 남편과 결혼10주년 기념여행으로 변산반도와 여수 쪽을 여행한 이후 두 번 째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눈에 익은 이정표도 보인다. 밤을 꼬박 새워 목적지인 녹동항에 도착했다. 설마 아니겠지... 하고 생각한 눈앞에 보이는 아주 초라한 그곳이 소록도라고 큰샘물님이 일러주셨다. 배를 탔는가 싶더니 내리라고 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입구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허락을 받고 통행증을 차에 부착하고 난 후에야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처음 소록도에서 만난 사람은 차를 타고 지나오면서 집앞에 서있으면서 우리 차를 보고 마치 황제라도 만난 듯 머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를 한 남자 분이었다. 언덕 위를 약간 지나 작은 십자가와 동성교회라는 글씨가 보였다.
함께 봉사할 천사들과 인사를 하고 짐을 풀었다. 오늘 아침메뉴는 라면이다. 밥상에 둘러앉았는데 라면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가 않았다. 괜히 그 사람들이 쓰던 그릇들이랑 그 사람들의 그곳에 있다는 것이 목메게 했다. 다른 천사들은 맘이 고와서인지 맛있게들 잘도 먹어댔다.
의자를 조립하고 셋트대에서 앞치마를 꺼내 입고 처음 오신 할아버지의 머리를 잘랐다. 예쁘게 웃으면서 맘을 가다듬으며 정성껏 잘랐다. '자 지금 내 손을 필요로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은 화성시 남양에 있는 헤어드레서에 오신 아주 고귀한 손님들이야. 담에 꼭 우리 집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하는 맘으로 정성을 다했다. 몇 분을 그렇게 대하고 나니 맘이 좀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분들과도 어느새 가까워 졌다. 머리를 다 자르고 드라이로 잘 마무리를 하고 난 후 거울을 보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드라이를 하니 이렇게 예쁘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드라이여..."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퍼졌다. 어느 할아버지는 앞을 볼 수가 없나보다. 지팡이로 더듬더듬 찾아오셨다. 다행히 할머니가 안내를 해주셨다. 할머니는 손가락이 없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일어서게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손이 없는 분은 눈이 없는 분의 눈이 되고, 눈이 없는 분은 손이 없는 분의 손이 되어 주었다. 두 다리와 두 손 그리고 앞도 못 보는 분도 계셨다. 어떻게 살아가시나 무척 궁금했다. "할머니 밥은 어떻게 해요? 빨래는 누가 해주나요?" 계속되는 내 질문에 할머니는 편안한 미소로 "아가씨처럼 봉사 오는 사람들이 해 주기도 하고 그냥 내가 해먹기도 한다."라고 말씀 하셨다. 그렇게 스무명정도 계속머리를 잘랐다. 또 내 질문은 계속 이어져갔다. "할머니 머리 자른 지 얼마 안되셨네요. 그런데 왜 자르세요?" 라는 질문에 할머니는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자를 수 있을 때 잘라 두어야 해." 라는 할머니의 대답에, 가슴이 저 밑에서 작은 울렁임이 일어난다. 700여분의 머리를 다 잘라야 한다는 나눔님의 말씀에 죽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며칠 전 광주에서 봉사자들이 다녀간 뒤라 그다지 머리를 잘라야 할 분이 많지는 않았다.
내가 머리를 자르는 동안 주방에선 내일 소록도 주민들에게 나눠줄 음식을 만드느라 부산스러웠다. 간간이 춘화언니의 노래 소리와 웃음소리가 고요한 소록도의 적막을 깨기도 했다. 저녁이 훨씬 지나 우린 예배당에 둘러앉았다. 낮에 해 둔 음식을 모두 펼쳐 놓고 말이다. 한분이라도 빼지 말고 다 나눠주자는 나눔님의 목적달성을 위해서였다. 다리가 불편하여 내일 공연장에 참석을 할 수 없는 분들까지도 배려하는 맘에 도시락포장을 했다. 여러 명의 천사들이 힘을 합치니 700여 개의 도시락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힘들어 보이는 우리를 위해 나눔님은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열심히 하모니카를 불어주셨다. 고요와 적막을 깨고 나눔님의 하모니카소리가 소록도 전역에 울려 퍼져 나갔다.
또 다른 아침은 어김없이 우리 앞에 방긋이 미소지었다.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눈부신 태양은 우리를 향해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 녹동항에서 떡을 찾아오고 남자 분들은 공연장에서 상을 펴고, 자리도 깔고 모두들 분주하였다. 미처 준비가 다되기도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셨다.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춘화언니의 예쁜 자태와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많은 분들이 흥에 겨워 둥실둥실 춤을 추신다. "맛있는 진수성찬에 기생까지 오늘 누구 환갑잔치 했으면 딱 좋겠네" 하는 어떤 할머니의 말이 내 귀를 스쳐 지났다. 그러는 동안 난 여전히 춘화언니가 공연하고 있는 무대 뒤에서 열심히 머리를 잘랐다. 춘화언니가 함께 춤추고 노래하자는 제의에 어떤 할아버지가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시던가 싶더니 이번엔 마이크를 잡고 '꽃을 든 남자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그런데 주책 같은 눈물은 소록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무던히도 꿀꺽꿀꺽 침을 삼키면 잘도 참았었는데 나도 모르게 주르르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래 비록 겉모습은 일그러지고 잘려나가고 삐뚤어져있지만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맘은 다 똑같구나...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저들만의 삶에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이 작은 빚이라도 될 수 있다면...
모든 공연과 식사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모든걸 접었다. 손가락이 없는 팔목에 숟가락을 묶고 그분들이 가꾸었다는 중앙공원과 가끔 보이는 텃밭 마냥 조용하기만 한 그곳을 뒤로하고 우린 차에 올랐다.
올 때는 어둠이 짙게 깔려 바깥풍경을 전혀 볼 수 없었는데 마음도 가벼워진 후라 그런지 차창가로 보이는 가을풍경이 마냥 풍성하기만 하다. 장거릴 달려왔는데도 잠깐만에 온 것 같았다. 춘화언니의 간증과 흥겨운 찬송가 덕인 것 같다. 나눔님이 수고한 일행들에게 저녁을 사주신다고 하셨다. 이틀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오늘도 종일 굶고 일만 했는데 갑자기 잊었던 시장기가 몰려왔다. 정신없이 먹고 콜라 한잔을 마셨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한잔의 물도 그렇게 달게 마셔 보긴 처음이었다. 아주 머 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헤어드레서 가족과 남편, 내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내 두 손과 두 다리 훤히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한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었던 내 건강에게도 감사한다. 또한 내 뜻과 함께 해주시면서 후원금을 기꺼이 내어주신 남양 한의원 원장님, 매니아 오현준 사장님, 내가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해 준 효진이와 영미 친구에게도 감사를 하고싶다. 다음엔 내가 감사 드린 모든 이들과 함께 동행하고 싶다.
-남양에서 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