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고백
수아가 17살이 되던 해 늦가을 어느날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성심당 골목을 휘돌아온 시린 바람이 유리창에 와 부딛쳐 슬프디 슬픈 신음소리를 내면서 큰길가 쪽으로 숨어듭니다.
이 바람이 지나면 길게 늘어선 프라타나스 가지는 벌거벗은 채 하얀 속살을 들어내겠지 - - - -
한줌 햇살이 모여 있는 창가 모서리에 몇일을 굶은 듯 시들해진 파리 두 마리가 서성입니다.
앞발을 들어 연신 비벼대는 모습이 세상을 슬프게만 살아온 자신의 앞발바닥에 묻은 시련의 응어리들을 털어내느라 저러는 것이 아닐까 하여 조금은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 때쯤 수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찌 머해”
“응”
“언제 올거야?”
“응”
“아니 언제 올거냐구?”
“응 그래 조금 있다가.”
“빨리 와야 돼”
“응”
아마도 수아내 집에도 제법 바람이 부나 봅니다.
혹시 여기서 벗어난 시린 바람이 거기까지 간 것은 아닐까?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사무실 문을 나갈 때쯤에도 게슴츠레 눈을 뜬 빚 바랜 햇살이 성심당 지붕 꼭대기에 묻어 있었습니다.
5시가 조금 넘어 수아네 집에 도착했습니다.
대사동 성당 뒤쪽에 있는 수아내 집은 구청에서 마련해준 조그만 집인데 방이 두 칸이고 화장실과 주방이 있는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얼마 전 장애인 복지 후원회에서 수아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들어오는 현관문과 화장실 그리고 주방을 고쳐 주셨습니다.
좌변기에는 다리가 불편한 수아가 쓰기 편하게 조금 낮은 변기로 바꾸고 손잡이를 좌우로 달아 놓았습니다.
주방도 수아 혼자 조리하고 밥 쨍겨 먹을 수 있도록 방바닥 높이로 낮추어 놓고 냉장고 문도 앉아서 손이 닿는 곳에 새로 손잡이를 달아 지내기 좋게 꾸며 주셨습니다.
아참 목욕탕도 혼자 쓸 수 있도록 주변에 손잡이를 둘러놓았으며 수건함도 밑으로 내려놓아 주셨습니다.
제가 제일 맘에 드는 것이 수아 혼자 목욕을 할 수 있도록 고쳐주신 일입니다.
“아찌 어서와”
“추웁니? 보일러좀 올릴까?”
“아니”
오늘따라 왼지 수아의 눈빛이 서글퍼 보였습니다.
멀리 창가 쪽 벌어진 틈으로 힛부연 하늘을 내다보는 수아의 눈가엔 작은 이슬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아 답지 않게 말이 없습니다.
수아는 나랑 있으면 자기가 묻고 대답하고 혼자 왼 장을 다 치는 아이였습니다.
전에는 한나절을 같이 있어도 나는 고작 응, 그래, 그러니? 알았어, 등 이런 말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수아를 위해 내가 더 많은 말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이 수아의 17번째 생일이거든요.
“수아야 나좀 나갔다 와도 되겠니?”
“응”
“그래 금방 올게”
어둠이 찾아온 성심당 골목은 찬란한 빛과 젊은 사람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의 천국 이였습니다.
수아는 단 한번도 저 젊은이들과 어깨를 마주하고 이 길을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이붓날 누구의 등에 업힌채 이곳에 와 성심당에서 빵을 사먹었다는 슬픈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수아입니다.
빵집에 들어 수아 생일 케익을 하나 주문했습니다.
빨갛색 생크림으로 전체를 도배한 후 케익 위에다가는 연한 갈색의 향이 나는 초콜렛으로 만든 장미꽃 두 송이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트모양의 사탕 판에 이렇게 써넣었습니다.
*수아 내 사랑*
한 시간 후에 오라는 빵집 아가씨의 말을 뒤로 하고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하려고 거리를 어슬렁 거렸습니다.
예쁜 머리핀을 하나 사줄까하여 가게에 들렀습니다.
이렇게 많은 머리핀들을 누가 다 사갈까?
정말 많았습니다. 색상이며, 모양이며, 천가지 만가지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언젠가 수아에게 한 말이 생각나서 연한 하늘색이 돋는 머리띠를 하나 삿습니다.
지금은 수아 머리가 많이 길었지만 전에는 머슴아 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관리하기가 어려워 짧게 짤랏다고 생각은 들지만 왼지 여자아이 머리치고는 어색해 보였거든요.
“수아는 머리만 보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어.”
수아가 깜짝 놀라며
“정말?”
조금은 민망했습니다.
“아니 그냥”
“아찌 미워”
그 뒤로 수아는 머리를 길렀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풍선과 예쁘게 생긴 양초 그리고 폭죽도 두개 삿습니다.
서둘러 왔는데도 7시가 다 되었습니다.
어둠침침한 방에서는 오래된 형광등 혼자 열심이 울고 있었습니다.
수아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어디 갔을까? 두리번거리는데 수아 엄마 방에서 수아가 나오는 것입니다.
참 수아엄마는 앞을 못보는 장애인 입니다.
장애자 보호 쎈타에서 안마를 배워 지금은 대흥동 사거리에 있는 찜질방에서 안마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수요일과 금요일 두 번은 밤새워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이 수아엄마가 밤새워 일을 하러 나가신 날입니다.
곱게 빗은 머릿결 뽀얀 얼굴 거기에 살짝 립스틱도 칠한 것 갔습니다.
그리고 수아에게서는 풋풋하고 싱싱한 향기가 납니다.
아마도 내가 나갔다 온 사이 목욕도 하고 화장도 한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많이 밝아 보입니다.
“수아 엄마 방에서 뭐 했니?”
“후훗”
“뭐 했냐니까?”
“화장”
“예쁘다”
“정말?”
“응”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조용해지면 질수록 형광등은 더 열심이 울어댑니다.
갑자기 수아가 긴 한숨을 내 쉽니다.
평소에는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수아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한번도 단 한번도 투정하거나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늘 밝게 웃으며 조잘거리고 히히덕 거렸거든요.
그런 수아가 정말 좋았는데 오늘은 왼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아 생일 축하해”
“응”
“아찌가 케익 사왔다”
“응”
“자 우리 촛불 켜고 케익 자르자, 축하노래도 불러 줄게”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수아를 위해 열심히 노래도 부르고 케익도 나누어 먹고 했습니다
마침 장애자 보호 쎈타에서 보내주신 떡이며 과자등 생일 선물들이 있어서 함께 먹었습니다.
주섬주섬 먹고 난 음식을 치우고 났는데도 여전히 수아는 무슨 엄청난 사건을 저지를 순간처럼 엄숙하고 진부한 자세로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 많던 말 대신 물끄러미 처다 보고 빙긋이 웃어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 - -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아찌 나 피곤해 자도 될까?”
“그래 네가 오늘 많은 생각을 했나 보구나 너 답지 안게”
“나 다운게 먼데”
“넌 항상 웃고 많은 말을 할 때가 정말 예쁘거든”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 되는데?”
엄마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수아를 본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여름에 태국을 다녀오면서 수아를 위해 사온 씰크 잠옷을 선물 했는데 윗도리는 평범한 잠옷을 삿지만 아래는 하체가 없는 수아를 위해 남자들이 입는 트렁크 팬티 중에서 제일 작은 걸로 사 왔었습니다.
그 잠옷을 입고 나온 것입니다.
한번도 입지 안아 특유의 실크천 냄새와 함께 수아의 진하지 않은 체취가 함께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아찌 나 침대에 좀 데려다 줄래?”
“응”
형광등 울음소리보다 더 진한 수아의 힘들어하는 작은 심장이 콩당 콩당 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간간히 제 심장의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아찌 나 여자야?”
“응”
“어떻게 여자인 줄 알아?”
“네 옆에 있으면 내 심장이 뛰거든”
“후훗 아찌 심장 뛰는 소리 나도 들려”
한참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찌 불 끄면 안돼?
형광등 소리가 시끄러워서 아찌 심장 뛰는 소리가 잘 안 들리잖아”
세상은 조용해 젔습니다.
누구의 것이랄 것 없이 심장의 뛰는 소리와 가끔씩 한숨 같기도한 숨쉬는 소리가 들릴 뿐 입니다.
수아의 손길이 내 손을 잡아 자기 가슴 위로 올려놓습니다.
수아의 봉긋한 젖가슴은 금방 따 놓은 목화 솜털처럼 부드러웠으며 물길을 따라 계곡을 치고 올라오는 연어의 살 비늘처럼 싱싱했습니다.
코 끝에 와 멈춰선 그녀의 머릿결에서 역겹지 않은 향이 묻어납니다.
나는 그 향기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 손끝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아찌 왜 그래?”
“응”
“왜?”
“응 네가 여자라는 걸 느끼고 있는 거야 손끝으로 가슴으로”
“그래!! 나두 아찌한테서 남자 냄새가 나거든”
가끔씩 주소 없는 바람이 몰려와 유리창을 흔들곤 합니다.
그 바람소리는 이내 수아의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에 파묻혀 버립니다.
세상이 이렇게 조용해서 좋고 두려운 걸 처음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읍니다.
더 이상의 생각은 죄악이고 위선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가슴은 주체할 수 없는 요동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있던 수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습니다.
“아찌 나 여자이면 안되나?”
“응?”
“나 여자이고 싶은데 - - - ”
“그게 뭔데”
“나 아찌 여자이고 싶어”
“ !! ”
“아찌 나 아찌 여자 될래”
천둥과 번개 사이로 세상이 멈춰 버렸습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민들레꽃이 홀씨 되어 하늘로 날라 오릅니다.
암흑이었습니다. 온통 세상이 깜깜했습니다.
빛이었습니다.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
희망이었습니다. 아주 오래도록 바라고 기다려온 희망이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영원히 깨울 수 없는 깨워서는 안 될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었습니다.
주소를 몰라 되 부칠 수 없는 바람이었습니다.
첫댓글 다독다독 감싸주는 따듯한 바람이군요. 아름다운 그림을 대하는 듯...... 묘사한 단어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황홀한고백이십니까, 바람이 부는 건 우리의 희망을 말씀 하시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