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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발톱의 암코양이와 귀여운 재롱동이 햄스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을 낳으면 사진관을 찾아가서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랫도리를 벗겨놓고 사진을 찍었다. 자랑스러운 남아 출산을 자랑하고 싶은 심리의 반영일 테지만, 당사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사진을 보면 과시 효과보다 수치심을 먼저 느끼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그림은 당시 남존여비의 미개한 사회상을 설명하는 좋은 자료라는 점에서 먼 훗날 고가에 팔리는 古書畵의 대열에 한몫 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OECD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서도 불과 반세기 전에 이런 야만적 작태가 있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거의 偶像化되었던 남성이라는 성징 때문에 당시 출생한 딸들은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딸의 출생사진을 이런 식으로 찍어두었다는 부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당시의 풍습으로 여아출산이 자랑거리가 아니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실생활에서 여자가 받는 큰 차별은 재산상속권이 없으며, 결혼해서 자식을 낳지 못하면 시가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女權 運動家들이 薄待 받는 약한 여성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서서 극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이런 넌센스 수준의 푸대접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 듯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스스로 공부하여 얻은 실력으로 남자동등권을 주장하며 투쟁한 끝에 쟁취한 권리란 점에서 부당한 의료보험정책에 대한 함구무언인 의사회 사람들보다 한발 앞섰다고 나는 생각한다.
금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이 여성의 권리 신장에 헌신하고, 내전종식과 민주화운동에 적극나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대에 기여한 설리프, 리머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3인에게 돌아간 것은 여성차별이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反語라는 점에서 입맛이 좀 씁쓸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여성들은 아주 하찮은 일로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아 왔고 또한 지금도 일부가 그런 부당한 대우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웃집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쫓겨난 젊은 부인이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핏덩이나 다름없는 여아를 안고 긴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 여인의 모습은 슬픈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 뇌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무겁게 새겨져 있다. 결혼은 법률에 의해서 보장받는 동거생활의 약속이며 그 가족의 일원이 되었음을 내외에 알리는 일종의 公告행위이다. 따라서 그 남편은 외부적 공격으로부터 아내를 보살피고 사회적 및 경제적 보호의 의무를 만인 앞에 선언하는 의식이 곧 결혼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이혼은 그런 일방적 선언만으로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이승만 정권의 장기독재가 실권하고, 4-19와 5-16 등 수차의 혁명을 통해서 封建의 탈을 벗지 못했던 사회질서에도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 그 옛날 옆집에서 쫓겨난 여인의 딸이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열심히 진료활동을 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딸이 모친의 壽宴을 열어, 많은 하객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모친의 공덕을 기리는 선물로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벤츠 승용차를 증정했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을 몇 바퀴 돌던 끝에 내 귀에까지 그 소식의 일단이 들어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입에서 입을 통해서 전전하는 동안 여러 차례 가필되고 또한 각색되어 한편의 신판 <신데렐라 스토리>로 변했어도, 그 스토리 속에 담긴 ‘착한 딸 하나가 열 아들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 과거에 그러했듯이, 아들들은 부모에게 빛나는 보람이며 확실한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보험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막연하게 反哺之孝에 기대하고 아들을 기른다면 그것은 이제 엄청난 착각이다.
유명한 신문의 칼럼니스트로 수많은 고정 독자를 가진 P씨 부부는 딸을 하나쯤 가졌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사는 유복한 사람이다. 아들만 둘을 연속적으로 낳았으므로 시댁 어른들의 박해를 받을 이유도 없었고, 강남의 작은 아파트에서 얄팍한 월급봉투를 쪼개서 행복하게 살았다. 게다가 부모의 우량한 DNA를 물려받았음인지, 두 아들의 학업성적이 우수해서 학교 담임선생으로부터 미국의 유명 대학으로의 유학을 권유받는 처지였으므로 만인이 우러러보는 지식인 커플이었다. 그 부부는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중류층 가정으로서는 평탄한 삶을 사는 것으로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런 시각은, 명산의 陽地쪽만 보았지, 그늘진 언덕이 자리 잡은 그 산 넘어 풍경은 보지 못한 우매한 자의 단견이었다. 최근 뜨거워진 교육열에 보조를 맞춰서 학생들의 성적이 상승하는 만큼 과외교육비가 더 많이 든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橋頭堡로서 현지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방학으로 귀국하면, 그 짧은 겨울방학 기간에도 강남의 유명 학원에서 原語民 발음으로 강의하는 보수교육을 받고 돌아간다. 그렇지 않고서는 英語文化圈에 살지 않는 학생들은 성생님의 강의가 전량 머릿속에서 소화되지 않는 것이다. 요행히 지망했던 대학에 들어가도, 현지 과외선생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넓고 두뇌가 좋은 학생들은 세계 도처에 엄청나게 많다.’ 는 것이 현지 대학의 사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屋上屋 같은 교육에 드는 학습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면 모르지만 제법 두각을 나타내는 실력이라면 어느 부모인들 그 뒤를 밀어주겠다는 욕심이 없을 것인가.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다.
종합병원 약사였던 모친은 그 늘어만 가는 학비 때문에 남의 숙직도 도맡아가며 밤을 대신 새웠지만 미국유학은 세계적 고소득자가 아닌, 서울의 보통 월급쟁이 수입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부담을 요구한다.
그녀는 다니던 병원에 사표를 던지고, 친정어머니 밑에서 익혀둔 육포 만드는 노우하우를 활용, 인터넷 판매방법으로 모자라는 자녀들 학비를 조달했다. 그러나 점점 불어나는 학비를 대어 주기에는 육포장사로서는 힘에 겨운 도전이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궁중요리를 만들어서 예단음식으로 판매하는 뉴 비즈니스에 뛰어든다는 것이었다. 한 번에 수천만 원씩 고가의 요리를 제공하는 사업이었던 만큼 큰 회사의 임원 수준의 고액 수입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입맛과 그들의 변덕스러운 취향을 맞추기가 너무나도 힘이 들고 어려웠다.
마침내 두 아들 중에서 큰 녀석이 박사학위를 따고 錦衣還鄕, 누구나 취업하기를 소망하는 S전자에 입사했고 전직 고관의 딸과 결혼도 했다. 귀국해서 직장생활이 안정되어가자 퇴근시간에 모친의 거처이며 동시에 요리공장이기도 한 아파트로 인사차 찾아 왔다. 그 때 마침, 좁은 아파트 거실 바닥에 냉동고를 눕혀놓고, 故障이 난 부위를 제조회사 애프터 서비스맨이 면밀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 기술자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해서 그 수리장면에 몰두하고 있던 모친에게 그 修理工은 이렇게 말했다.
‘냉동장치의 핵심부가 심하게 마모돼서 부품을 갈아야 되는데, 이 모델이 워낙 구형이라 여기에 맞는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보다 큰 용량의 신제품으로 바꾸시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다.’
결국 새것을 하나 사라는 충고를 남기고, 서비스맨은, 다음 방문지를 향해서 떠나버렸다.
아들은 우수에 젖은 모친과의 대화도 변변하게 나누지 못한 채, 대로로 나와서 몇 군데 전자대리점을 찾았다. 내일 오전 중에 딤채 한 대를 모친의 아파트로 배달할 것을 당부하고, 지하철 탑승구에서 하행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그 딤채는 익일 약속했던 대로 모친 댁으로 정확하게 배달되었고, 모친은 이 기쁜 사실을 그녀가 아는 모든 이에게 전화로 알렸다. 아들의 효심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은행카드로 대금을 결재한 내용이 저금통장에 고스란히 프린트되어 나타나는 은행 카드 거래방식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지불하려던 냉동기구입건이 호랑이 같은 와이프 눈에 그만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가정불화로 비화되었다. 사전에 아내하고 상의가 없었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법률적으로 말하면, 이런 식의 남편 단독처리 방식은, 아내와 더불어 서로 숨기는 것 없이 건전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므로 이혼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뜻이었다. 와이프를 속이는 남편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결혼관이라며 대드는 아내를 견디다 못한 남편이, 모친을 찾아가서 이런 부부싸움의 자초지경을 토로하고 그 해결책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사건의 내막을 조용히 경청하던 모친은, 당신의 거래은행에 전화를 걸어서 딤채 대금 70만원을 온라인 입금할 것을 당부하고 아들에게는 당분간 냉각기를 두고 각자 자기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충고했다.
겉으로는 담담한 것처럼 보였으나 자신의 피와 땀으로 고생해서 공부시킨 아들이 암코양이 같은 와이프의 당당한 위세에 눌려서 꼼짝 못하는 햄스터 보이가 된 것에 크게 실망했다.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온 가족이 장한 일을 한 것처럼 떠받들었던 장면들이 번개같이 두뇌 속을 스치고 지내갔다.
이처럼 지나치게 착한 성품으로 인해서, 자기가 할 말을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 못하는 못난 아들들이 남녀평등이라는 미명아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 점점 늘어가는 형편이다. 모친의 허무한 감정은 그날 밤 친한 친구와의 장시간 통화로도 진정되지 많았다.
그러나 미국식 생활문화가 수입되고 우리의 고리타분한 재래식 가족구조가 붕괴되면서 남녀평등의 루울이 붕괴된 참으로 해괴한 커플이 이미 등장한 것을 지난여름 제주도 피서여행에서 목격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한 귀부인이 오드리햅번이 즐겨썼던 검정안경을 이마위로 치켜 올려놓고, 접시 안의 수우프를 테이블 스푼으로 우아하게 떠서 마시고 있는, 반대 쪽 의자에 유아를 베이비 벨트에 넣어서 앞가슴 쪽에 껴안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바겟 빵을 뜯어서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어설핀 자세의 사내가 있었는데, 한 눈에 그 미녀의 남편인 것을 감지했다. 그런데, 벨트 속의 아기가 깰까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버터 접시를 끌어당기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아기가 그만 잠을 깨서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자기를 돌봐달라는 아기 울음소리에는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인지, 수우프 마시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우리 같은 평민하고는 다른 문화 속에 사는 신선 세계의 인물처럼 보였다.
참다못한 아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남편은 기저귀 가방을 들더니 허둥지둥 식당을 뛰쳐나갔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남녀의 역할분담이 역전된 커플인데, 21세기 생활형식에서 탄생한 海馬族이라는 별명이 붙은 족속의 일원이라고 한다. 남자는 대학은 물론이고, 대학원까지 수료해도 취업이 잘 안 되는 사회가, 아내가 先就職하여 회사에 출근하고, 할 일없는 남자는 부엌에서 취사작업과 빨래, 청소 그리고 육아와 교육까지 도맡는 이상한 가족생활 방식을 유도했다는 신문기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나는 그날 밤 쉽게 잠들지 않았다.
그 불면의 밤을 보내며 마치 정치인이 된 것같이,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의 급식문제가 아니고, 남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정책의 입안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리고 ‘남자가 남자답게, 그리고 여자는 여성스럽게 사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유토피아라고 믿는 내 생각이 혹시 지나친 봉건적 사상이 아닌가 반성해 보았으나 내 좁은 소견으로는 그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 결말을 도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뉴욕의 월 스트리트 앞에서 시위하는 군중들의 요구도 바로 이런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데,
나의 지나친 自滿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누가 바지를 벗을 차례인가?
내가 어렸을 때, 아들을 낳으면 사진관을 찾아가서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랫도리를 벗겨놓고 사진을 찍었다. 남아 출산을 자랑하고 싶은 심리의 반영일 테지만, 당사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사진을 보면 과시 효과보다 수치심을 먼저 느끼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그림은 당시 남존여비의 미개한 사회상을 설명하는 좋은 자료라는 점에서 먼 훗날 고가에 팔리는 古書畵의 대열에 한몫 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OECD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서도 불과 반세기 전에 이런 야만적 작태가 있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문화수준에서 반만년 문화를 자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의 偶像化되었던 남성이라는 성징의 결손이라는 이유로 당시 출생한 이 세상의 모든 딸들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형유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평등과 기회 균등, 그리고 남자와 더불어 동일한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그 공동체가 제공하는 평등한 권리와 재산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참정권 등에 있어서도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여성의 평등권이 개선된 것은 인지의 발전과, 여성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만큼 지적 발전없이는 달성될 수가 없음을 자각한데서 발단되었다. 여성의 인권 쟁취를 위한 투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남자와 나란히 앉아서 공부하고 거기서 얻은 실력의 향상 이외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여성들은 晝耕夜讀의 방법으로 학업에 정진한 끝에 마침내 남녀평등의 실현에 정진할 준비태세가 마련되었다.
이렇게 되기 이전의 우리 인간사회에서 여성은 재산상속권이 없었다는 것과 아들을 잉태 분만하여 家統을 이어가지 못하면, 가문이 무너진다고 하여, 시집에서 추방당했다. 지금은 그런난센스가 통하지 않는 밝은 사회로 발전했으나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서 완벽한 평등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구석진 곳에 숨어 지내는 사례가 전무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례는 아프리카 후진국에서 여전히 국법을 초월하는 기세로 쉬지 않고 일어난다.
남성과 동등한 수준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남성들로부터 가해지는 다양한 박해를 뚫고 완벽한 평등을 성취할 수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여성 인텔리 등이 여성의 권리 신장에 헌신하고, 그동안 남성들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었던 자국 내 부족 간의 전쟁과 내전종식에 여성들이 뛰어들면서 세계평화 수립에 공헌한 여성전사들에게 노벨상을 비롯한 각국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2011년도 노벨평화상은 설리프, 리머보위, 타우왁클 카르만 3세 등 세 명의 여전사에게 돌아간 것은, 자기 동족 간에 일어난 내전종식과,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여성의 권리 신장에 헌신, 그리고 그 사회적 역할 증대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세계인의 공감과 표창 이라고 볼 수 있다.
불과 50년 전에도 스스로 선진국에 산다는 지식인 남자들조차도 여성, 즉 자신의 조강지처가 될 수 있으며 또는 영애가 될 수도 있는 여성들에게 완전한 평등권은 부여하지 않고 살았다.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보면 차별대우를 받는 여성들은 아직도 많으며 그런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지 못하고 묵묵히 순종하는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웃집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쫓겨난 대학출신의 미녀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종로의 부자촌에서 성실하게 시집살이를 하다가 덜컥 딸을 순산하자, 무남독녀 출산이 며느리의 자궁 기능이 허약하여 생긴 결과라며 그녀를 가정에서 내쫓았다.
핏덩이나 다름없는 여아를 안고 긴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어왔던 그 여인의 모습은 슬픈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 뇌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무겁게 새겨져 있다. 결혼은 법률에 의해서 보장받는 동거생활의 약속이며 그 가족의 일원이 되었음을 내외에 알리는 일종의 公告행위이다. 따라서 그 서약을 준수하여, 남편은 불법적으로 일어나는 집안 내외의 압박으로부터 아내를 보살필 의무가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 및 경제적 보호와 지원의 의무가 뒤따르는 것인데, 당시 시집으로부터 추방당한 그녀에게는 돈 한푼 없이 명문가의 큰 며느리 위치에서 쫓겨났다.
그 후 세월은 흘러서 국정은 4-19 의거, 그리고 5-16 군사혁명에 이어 현대적 자유민주국가로 그 형태가 바뀌면서 두껍게 덮였던 온갖 부조리와 봉건의 딱지들이 하나씩 둘씩 벗겨졌다. 그후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 여의사가 분당에 ‘하꼬방’ 크기의 의료기관을 장만하고, 동네 사람의 질병과 상처를 진료하는 두개의 직업에 뛰어들면서 더블잡(double jobs)이 성공, 마침내 강남의 H아파트를 구입, 모친을 편안하게 모시고 산다는 속보가 들어 왔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강남의 논현동으로 직장을 옮긴 후 로컬 의사회 총회에 참석하여 칵테일 파티 장소에서 우연한 상봉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해방의 소요 속에서 사회가 어지러웠던 시절에 이웃에 살았던 인연으로 그 여의사가 자기의 모친 回甲宴에 나를 초대하는 초청장을 직접 손에 들고 내 오피스로 찾아왔다. 그 잔치에서 축사를 해 달라는 부탁이 뒤따른 것이지만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수용하고 파티 장소로 찾아갔다. 남의 慶事에 시집에서 축출된 과거사는 입 밖으로 발설할 수도 없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두루 뭉수리같은 이야기로 겨우 주어진 임무를 겨우 마쳤다. 그런데, 그 壽宴의 말미에 자기를 잘 길러주신 모친의 공덕을 기리는 선물로서 연회장 입구에 진열되어 있던, 눈부시게 반짝이는 벤츠 승용차를 증정한다는 아나운스가 있었다. 남은 인생동안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독일제 승용차를 받게 된 그 모친은 딸의 효성에 감격하여 ‘고맙다’는 인사말도 발성하지 못하는 어색한 순간, 그 空寂을 깨고 호텔 컨밴션 홀이 떠나갈 듯한 雨雷와 같은 박수소리가 어느 누구의 제의조차 없이 터져 나왔다.
매우 단순한 이 소문이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전하는 동안, 여러 차례 가필되고 또한 각색되어 한편의 신판 <신데렐라 스토리>로 변모했어도, 그 스토리 속에 담긴 ‘착한 딸 하나가 열 아들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 과거에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절에 그러했듯이, 아들들은 부모에게 빛나는 보람이며 확실한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보험인가 하면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예전에 막연하게 反哺之孝에 기대하고 아들을 기른다면 그것은 이제 엄청난 착각이다.
유명한 신문의 칼럼니스트로 수많은 고정 독자를 가진 P씨 부부는 딸을 하나쯤 가졌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사는 유복한 사람이다. 아들만 둘을 연속적으로 낳았으므로 시댁 어른들의 박해를 받을 이유도 없었고, 강남의 작은 아파트에서 얄팍한 월급봉투를 쪼개서 행복하게 살았다. 게다가 부모의 우량한 DNA를 물려받았음인지, 두 아들의 학업성적이 우수해서 학교 담임선생으로부터 미국의 유명 대학으로의 유학을 권유받는 처지였으므로 만인이 부러워하는 지식인 커플이다. 그 부부는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중류층 가정으로서는 평탄한 삶을 사는 것으로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런 시각은, 명산의 陽地쪽만 보았지, 그늘진 언덕이 자리 잡은 그 산 넘어 풍경은 보지 못한 우매한 자의 단견이었다. 최근 뜨거워진 교육열에 보조를 맞춰서 학생들의 성적이 상승하는 만큼 과외교육비가 더 많이 든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橋頭堡로서 현지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방학으로 귀국하면, 그 짧은 겨울방학 기간에도 강남의 유명 학원에서 原語民 발음으로 강의하는 보수교육을 받고 돌아간다. 그렇지 않고서는 英語文化圈에 살지 않는 학생들은 성생님의 강의가 전량 머릿속에서 소화되지 않는 것이다. 요행히 지망했던 대학에 들어가도, 현지 과외선생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넓고 두뇌가 좋은 학생들은 세계 도처에 엄청나게 많다.’ 는 것이 현지 대학의 사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屋上屋 같은 교육에 드는 학습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면 모르지만 제법 두각을 나타내는 실력이라면 어느 부모인들 그 뒤를 밀어주겠다는 욕심이 없을 것인가.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다.
종합병원 약사였던 모친은 날로 증가하는 학비 때문에 남의 숙직도 대신 도맡아가며 밤을 새웠지만 미국유학은 세계적 고소득자가 아닌, 서울의 보통 월급쟁이 수입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는 학업이다.
그녀는 다니던 병원에 사표를 던지고, 친정어머니 밑에서 익혀둔 육포 만드는 노우하우를 활용, 인터넷 판매방법으로 모자라는 자녀들 학비를 조달했다. 그러나 점점 불어나는 학비를 대어 주기에는 육포장사로서는 자식에게 좋은 품질의 교육을 시켜주기에는 힘에 먹찬 도전이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궁중요리를 만들어 예단음식으로 판매하는 뉴 비즈니스에 뛰어든다는 것이었다. 한 번에 수천만 원씩 고가의 요리를 제공하는 사업이었던 만큼 큰 회사의 임원 수준의 고액 수입이 보장되었으나 그런 주문은 자주 받는 행운이 아니었다. 지방색에 따라 각기 다른 입맛과 그들의 변덕스러운 취향을 맞추기가 너무나도 힘이 들어서 주문은 매번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두 아들 중에서 큰 녀석이 박사학위를 따고 錦衣還鄕, 누구나 취업하기를 소망하는 S전자에 입사했고 전직 고관의 딸과 결혼도 했다. 귀국해서 직장생활이 안정되어가자 퇴근시간에 모친의 거처이며 동시에 요리공장이기도 한 아파트로 인사차 찾아 왔다. 그 때 마침, 좁은 아파트 거실 바닥에 냉동고를 눕혀놓고, 故障이 난 부위를 제조회사 애프터 서비스맨이 면밀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 기술자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해서 그 수리장면에 몰두하고 있던 모친에게 그 修理工은 이렇게 말했다.
‘냉동장치의 핵심부가 심하게 마모돼서 부품을 갈아야 되는데, 이 모델이 워낙 구형이라 여기에 맞는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보다 큰 용량의 신제품으로 바꾸시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다.’
결국 새것을 하나 사라는 충고를 남기고, 서비스맨은, 다음 방문지를 향해서 떠나버렸다.
아들은 우수에 젖은 모친과의 대화도 변변하게 나누지 못한 채, 대로로 나와서 몇 군데 전자대리점을 찾았다. 내일 오전 중에 딤채 한 대를 모친의 아파트로 배달할 것을 당부하고, 지하철 탑승구에서 하행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그 딤채는 익일 약속했던 대로 모친 댁으로 정확하게 배달되었고, 모친은 이 기쁜 사실을 그녀가 아는 모든 이에게 전화로 알렸다. 아들의 효심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은행카드로 대금을 결재한 내용이 저금통장에 고스란히 프린트되어 나타나는 BC 카드 거래방식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지불하려던 냉동기구입건이 호랑이 같은 와이프 눈에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가정불화로 비화되었다. 사전에 아내하고 상의가 없었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법률적으로 말하면, 이런 식의 남편 단독처리 방식은, 아내와 더불어 서로 숨기는 것 없이 건전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므로 이혼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뜻이었다. 자기 아내를 속이는 못된 남편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결혼관이라며 대드는 아내를 견디다 못한 남편이, 모친을 찾아가서 이런 부부싸움의 자초지경을 토로하고 그 해결책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사건의 내막을 조용히 경청하던 모친은, 당신의 거래은행에 전화를 걸어서 딤채 대금 70만원을 온라인 입금할 것을 당부하고 아들에게는 당분간 냉각기를 두고 각자 자기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충고했다.
겉으로는 담담한 것처럼 보였으나 자신의 피와 땀으로 고생해서 공부시킨 아들이 암코양이 같은 와이프의 날카로운 발톱에 겁을 먹고, 어떻게 할지 갈피를 못 잡는 햄스터가 된 것에 크게 실망했다.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온 가족이 장한 일을 한 것처럼 떠받들었던 장면들이 번개같이 두뇌 속을 스치고 지내갔다.
이처럼 지나치게 착한 성품으로 인해서, 자기가 할 말을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 못하는 못난 아들들이 남녀평등이라는 미명아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 점점 늘어가는 형편이다. 모친의 허무한 감정은 그날 밤 친한 친구와의 장시간 통화로도 진정되지 많았다.
그러나 미국식 생활문화가 수입되고 우리의 고리타분한 재래식 가족구조가 붕괴되면서 남녀평등의 루울이 붕괴된 참으로 해괴한 커플이 이미 등장한 것을 지난여름 제주도 피서여행에서 목격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한 귀부인이 오드리햅번이 즐겨썼던 검정안경을 이마위로 치켜 올려놓고, 접시 안의 수우프를 테이블 스푼으로 우아하게 떠서 마시고 있는, 반대 쪽 의자에 유아를 베이비 벨트에 넣어서 앞가슴 쪽에 껴안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바겟 빵을 뜯어서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어설핀 자세의 사내가 있었는데, 한 눈에 그 미녀의 남편인 것을 감지했다. 그런데, 벨트 속의 아기가 깰까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버터 접시를 끌어당기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아기가 그만 잠을 깨서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자기를 돌봐달라는 아기 울음소리에는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인지, 수우프 마시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우리 같은 평민하고는 다른 문화 속에 사는 신선 세계의 인물처럼 보였다. 아기울음에 긴급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남편이 바보같이 보였던지 참다못한 아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남편은 기저귀 가방을 들더니 허둥지둥 식당을 뛰쳐나갔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남녀의 역할분담이 역전된 커플인데, 21세기 생활형식에서 탄생한 海馬族이라는 별명이 붙은 족속의 일원이라고 한다. 남자는 대학은 물론이고, 대학원까지 수료해도 취업이 잘 안 되는 사회가, 아내가 先就職하여 회사에 출근하고, 할 일없는 남자는 부엌에서 취사작업과 빨래, 청소 그리고 육아와 교육까지 도맡는 이상한 가족생활 방식을 유도했다는 신문기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나는 그날 밤 쉽게 잠들지 않았다.
이렇게 남녀의 사회적 비중과 역할이 전도되는 생활방식을 목격하고 나니까 이제 남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아들이 하의를 벗어던지고 기념사진을 찍게 될 날이 곧 다가올 것 같아서 공연히 가슴이 벌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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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런경우를 나도 여럿 보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저런자도 아들낳았다고 며역국 끌여먹고 좋아 했겟네~~부자집이 아니고 몸만 달랑 시집온 여자들도 요지음 그런경우가 허다 하니
이런것도 여권신장의 일환으로 보기엔 마음이 편지 않다. 요지음 유행어가 된 소위 SNS 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계몽(?)되여 그런것인가? 딸을 낳으면 자식도 잃지 않고 사위란 아들 하나를 더 얻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