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건호 宋建鎬 (1927~ 2001)】 "해직기자의 대부, 역사를 되살리는 생명의 기록"
'한국 언론의 사표', '해직기자의 대부', '민족지성' 등의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로 한국 언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언론인이다. 나는 한국현대인인물사론을 통해서 원칙과 정도를 지키려는 언론인의 인식을 직시할 수 있었다.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비야마을에서 아버지 송재찬(宋在瓚)과 어머니 박재호(朴在鎬) 사이의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대대로 충청도 회덕군 동면에 살았으나, 증조부 대에 이르러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증조부께서 가솔을 이끌고 옥천 비야곡으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대전욱정공립심상소학교, 한성사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곧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문부를 거쳐 1956년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3년 『대한통신』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으로서의 첫발을 떼었고, 이어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신문사를 거쳤다.
한국전쟁 당시 말기에는 철도청으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으나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사임했다. 그 후 역사학 집필에 전념하여 '민족지성의 탐구',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국현대사론', '한국현대인물사론' 등 역작을 연이어 출간하며 저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9년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공동저자로 참여했고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옥살이를 하며 고문을 당했다.
유신의 칼바람에도 직필로써 언론인의 직분을 다하고자 했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대량 해고되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편집국장이 스스로 해직의 길을 선택했다. 자유언론 실천을 외친 젊은 기자들을 해직하라는 사주의 압력에 저항하여 후배 기자들이 해직되기 전날 스스로 사임의 길을 걸었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하 민언협)를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월간지 『말』을 창간해 정부의 언론보도 가이드라인인 보도지침을 세상에 내놓았으며(1986년 보도지침사건),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해 초대 사장과 발행인을 역임했다. 하지만 의외로 민언협 관련 자료와 한겨레신문 관련 자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으로 인한 잦은 이사와 감시와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압수당하고 분실했기 때문이다.
같은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천관우와도 천관우가 5공에 가담하기 전에는 각별한 사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동아일보 기자직을 사임하고 고서점을 찾아다니며 역사 연구에 매진했던 송건호에게 1977년부터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하자고 권유한 인물이 천관우였다. 이후 송건호가 1979년에 <한국현대사론>을 펴냈을 때도 천관우는 <창작과비평> 제52호에 서평을 싣고 "송건호 형의 이 새 저술은 정통사학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현대사 개설'이라는 중요한 부분에 훌륭하게 선편(先鞭)을 지은 것이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정통 사학계에도 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하고 싶다.", "1979년의 현재로, 우리 현대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국현대사론'에 필적할 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 저술은 성공적이었고 또 그만큼 축적된 근고(勤苦)의 산물이었다."라며 송건호를 극찬했다.하지만 천관우가 제5공화국에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을 맡게 되자 송건호는 이를 변절이라 비판하면서 천관우와의 교류를 끊었다. 나중에 천관우에 대해 회고하기를,
1984년 해직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를 결성, 초대 의장을 지냈다. 특히 월간지 말을 창간해 제도권 언론이 외면하는 노동자·농민의 실상과 민주화운동 등을 소개하는 한편, 1986년에는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이듬해 6월 항쟁의 불씨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어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을 이끌었고 초대 사장 및 회장을 지냈다. 그는 이 시기에 편집권의 독립, 냉전보도의 자제 등을 위해 힘썼다.
선생은 “언론이 특별히 정부의 탄압을 받지 않아도 권력 순응 체질로 변신하는 것도 이 같은 인사권의 본질적 성격에 언론인들의 보신주의가 빚어낸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일선 기자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래도 언론을 언론답게 하는 것은 평기자들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일선 기자들은 사회의 파수꾼인 동시에 언론의 파수꾼이기도 합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선생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에서 당한 고문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인터뷰 당시 왼쪽 다리는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고 발음도 부정확했다고 한다. 기자협회보는 “쟁이는 신문 얘기만 나오면 핏발이 오른다. 청암 역시 너무 흥분했던 탓일까. 아무래도 마음에 비해 몸이 못 따르는 듯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전했다. 그리고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떻습니까. 과연 기자는 한번 해볼 만한 직업입니까.” 선생은 얼굴에 화색을 띤 채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럼. 죽었다 깨나도 이 길을 가야지. 그렇구 말구.”
그러나 신군부에게 받았던 고문 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했고,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2001년 12월 21일 사망하였다. 정일형자유민주상(2000) 등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