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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30;21-30. 여기가 로도스입니다. 여기서 뛰고, 여기서 시작을 하고 2. 2017. 8. 6.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행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시는데 길에서 물어 봅니다. 막8;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노중에서,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노중에서 물으십니다. 길에서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주님께서 친히 반석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이야기한 가이사라 빌립보로 들어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한 길 위에 서있습니까? 그런데 노중에서, 길에서 이 표현이 헬라어로 호도스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든든히 선 사건이 있는데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 출애굽을 영어로 exodus 라고 합니다. 그런데exodus 는 합성어입니다. ex (out of) + thodos , 호도스, 길, way.입니다. 지난 주 설교 제목이 여기가 로도스입니다. 여기서 뛰어라. 입니다. 로도스는 그리스의 한 섬이지만 올림픽이 열리는 로도스이지만 이 로도스가 바로 호도스, 길. way 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딘가에서 끌어내서 길 위에 세운 사건, 이 것이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는 호도스, 길, way 위에 서 있으면서도 제자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 어디로 가지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호도스이고 내가 곧 길이고, 내가 곧 way 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 말은 그러므로 불안해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비전의 길, 비전의 호도스 위에, 비전의 way 위에 있습니까? exodus. 예수님의 부르심에 길 위에 서 있고, 호도스 위에서 뛰고, way 위에서 춤을 추실 수가 있습니까? 확실합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저와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하는 로도스, 길, way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履 歷 書 (이력서)가 있습니다. 이 력 서에서 ‘력’은 역사 할 때 력이고 ‘서’는 책서이고 ‘이’가 바로 미투리 ‘이’자인데, ‘미투리’는 삼, 모시, 실 등으로 만든 신발입니다. 그러니까 이력서는 네 미투리 신을 신고 어디로 걸었는지 역사를 써 보라는 것이 바로 이력서의 뜻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나라의 이력서에 무엇을 기록할까요? 주님과 함께 걷는 길 위에서 어떤 역사를 쓰시겠습니까?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다윗에 관한 말씀입니다.
1. 지난주의 말씀을 대략적으로 다시 상고하면은 여기가 로도스다, 자 여기서 뛰어 보거라. 여기서 춤을 추어라. 라는 제목으로 지난주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철학자 헤겔은 여기가 로도스이다. 여기서 뛰어라. 이 표현을 현재성과 현장성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지금, 로도스, 이 현재와 이 현장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길과 그 길에서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그런가하면 공산당의 이론을 집대성한 카를 마르크스도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 것을 바로 이 자리에서 네 실력을 보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말로만 자랑하지 말고 실제 증거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표현의 배경이 주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당시에 그리스의 희랍 문화가 이미 히브리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호도스 길, way입니다. 그런데 삼상 30; 8절에 네가 쫒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여기가 로도스이다. 여기서 뛰고 여기서 시작하고 여기서 쫒아 가고, 그래야 미치게 되고 도로 찾을 수 있고 춤을 출 수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뛰어라! 여러분, 오늘의 상황이 나의 로도스입니다. 어려움과 고통과 눈물의 현장이 나의 로도스입니다. 현재이고 현장인데 증명을 해야 하는 로도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뛰어야 하고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를 가져오고 춤을 출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현실은 생각이나 추상의 무대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어지고 이겨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은 십자가 위의 장미입니다. 그냥 손을 뻗기만 하면 딸 수 있는 장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6절에 다윗은 크게 군급하였으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절망의 순간, 낙심의 순간, 이 상황이 로도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위에 장미를 얻으려면 여기서 뛰고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 같은 상황에서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는 현장입니까? 피하고 싶은 그런 아득함입니까? 방법이 없습니까? 그래도 여호와를 힘입어서 로도스에서 뛰고 로도스에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을 합니까? 여기에 답이 있고,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잠시 시슬락 성을 비운 사이 아말렉이 쳐 들어와서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크고 작은 모든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다 사로잡아 아말렉의 군사들이 끌고 갔습니다.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도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 한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남은 백성들이 돌로 다윗을 치려고 벌 떼같이 몰려듭니다. 이 현장이 다윗에게 주어진 로도스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로도스에서 시작을 하고 이 로도스에서 뛰고 이 로도스에서 마침내는 춤을 춥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 올까요?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로도스에서 어떤 이력서를 써 내려갈까요?
1-1.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 헤세드 안에 모든 회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헤세드는 내 자신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나의 삶과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리고 나의 자녀와 나의 울타리가 회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회복시킬 수 있는 회복의 능력과 치유하심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윗에게, 저나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다. 회복은 하나님의 일이고, 회복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고 자녀의 특권이 동조현상과 커플링 현상으로 우리릐 로도스 현장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로 용기를 얻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커플링. 동조현상입니다. 18-20.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아 왔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아말렉이 탈취하였던 모든 것을, 무리의 자녀들이나 크고 작은 것을 무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 찾아 왔더라. 양 떼와 소 떼도 다 찾아 왔더라. 다윗이 찾아오고 다윗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커플링 현상으로, 동조현상으로 하나님과 함께 다윗이 모든 것을 찾았고, 이전으로 돌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권세에 눌려 있는 로도스, 귀신에 메여 있는 로도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로도스, 두려움이 있는 로도스, 해 받을 것 때문에 두렵고 망설여지는 로도스, 해결할 방법이 없는 로도스입니까? 이모든 것에서 회복시킬 능력과 특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로도스에서 커플링과 동조현상으로 소원하고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이 더 빨리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두 번째는 잃은 뒤에는 돌아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던지면 부메랑처럼 돌아 옵니다. 버리면 다시 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압니다. 여러분, 잃는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시글락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었습니다. 자기를 지켜 줄 아름다운 성을 잃었습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는 모든 여성을 잃었습니다. 가축을 잃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돌아 온 것이 있습니다. 8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기도가 돌아 왔고, 여호와께 묻는 것이 돌아 왔습니다. 사실 다윗은 늘 여호와께 묻고 행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묻지 않습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삽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불레셋의 이방나라 땅, 시글락 성까지 왔습니다. 삼상27;1-2에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여러분, 여기 표현을 보세요.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차선이 아니라,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사울이 절망하리니,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 자기 생각이고 다 스스로 한 행동입니다. 여호와께 묻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슬락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더니 돌아 온 것이 기도이고 돌아 온 것이 여호와께 묻는 것이고, 돌아 온 것이 주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찾고, 에봇을 찾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것 때문에 돌아 온 것이 있습니다. 기도가 돌아 왔고 묻는 것이 돌아왔고 여호와를 주목하는 것이 돌아 왔습니다. 지금 잃어버린 현장이 로도스입니다. 여기서 뛰어야 합니다. 여기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돌아 옵니다.
여러분, 일본의 한 가수가 ここがロドスだ、ここで跳べ! 코코가로도스다, 코코데 토베! 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8절에 쫒아가라, 반드시 미치리라, 정녕 도로 찾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를 노래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된 다윗도 이 세 마디 말씀에 의지해서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주님은 다윗에게 용기와 힘을 얻도록 가장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쫒아가라, 반드시 미치리라, 정녕 도로 찾으리라. 이제라도 낙심하지 말고 추격하면 그들에게 이르게 되고,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찾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들 600명의 동지들은 하나가 되어 전진을 합니다. 하지만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여명과 아말렉을 쫒는 400명으로 나누게 됩니다. 피곤하고 지친 200명은 브솔 시내에 쉬게 하고 400명은 다윗과 함께 아말렉 족속을 뒤쫓아 갑니다. 그런데 용기만 있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믿음과 가족들을 찾아야 하는 책임만 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이 없고, 구체적인 답이 없습니다. 반드시 미치게 되는데 언제인지 모릅니다. 정녕도로 찾게 되는데 어떻게 찾게 될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방법과 대책이 없고, 용기만 있습니다. 의욕만 있습니다. 뒷 받침해줄 그 어느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믿음이 요구가 됩니다. 로도스에서 믿음이 요구되고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400명에게 방법이 없었는데 출발하고 나니까? 그대로 순종을 하고 나니까? 방법을 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마침 아말렉 족속들이 버린 애굽의 종을 만납니다. 그의 안내로 아말렉 족속을 손쉽게 따라잡습니다. 용기만이 있었고 당위성만 가지고 나아가는데 아말렉이 버린 사람을 만납니다. 단지 병들었다는 이유로 아말렉 사람들이 버렸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그렇습니다. 필요하면 옆에 두지만 짐이 되면 거추장스럽고 힘들고, 지겨우면 버립니다. 귀찮으면 버립니다. 매정하고, 냉정합니다. 지극히 계산적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상을 의지하지 마시고, 사람을 찾지 마시고, 되도록이면 주께 묻고, 주를 찾고 신앙인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려울 때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아말렉은 애굽의 종을 단지 병든 것 때문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이 애굽의 종이 로도스사태를 해결하고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것을 도로 찾아오는 데에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아말렉은 그냥 우연히 버렸습니다. 단지 귀찮아서 짐 덩어리이가 되어서 쉽게 손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 우연은 다윗에게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상황을 보십시오, 3일 밤, 낮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애굽의 종에게 가장 필요하게 공급 되어져야 할 것이 먹고 마시고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윗이 해결하여 주고 애굽의 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루어야 할 일에 친히 나서게 합니다. 다윗은 모든 상황의 해석을 항상 신앙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고, 주어진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회복의 시간을 줄이고 회복의 능력을 배가시키고 약속한 말씀을 빨리 이루게 됩니다. 쫒아 가고, 반드시 미치고, 정년 도로 찾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시작을 했더니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도로 찾고 쫒아가고 미치게 되는 그래서 가지고 돌아 올 수 있는 그런 결과가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찾은 것으로, 회복된 것으로, 되돌린 것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이미 로도스에서 시작을 했고, 그래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 왔는데, 돌아 온 이 로도스에서 또 다시 시작을 합니다. 하지만 3가지를 다짐하면서 새로운 일을 향하여 마음의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마음의 보따리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고 있던 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방나라 불레셋의 한 성 시글락에서 지금도 살지만 그 옛날 사무엘이 기름 부으실 때 주셨던 성령의 감동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을 다니면서도 그 감동 때문에 버티었습니다. 10년 이상의 도피 속에서도 비전과 기대와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복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속에 깊이 담아 놓았던 그 비전 , 그 꿈을 ,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이 로도스에서 비전의 일의 시작을 다시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본문이 다윗에게 결론부분이기도 하지만 다윗은 승리에 도취하지 않고 다시 내 자신이 감당할 중요한 부분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다시 로도스에서 마음의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그러면 풀어 놓는 그 보따리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2-1. 아말렉을 보면서 로도스에서 또 다시 뛰고 또 다시 시작을 합니다. 여러분, 너무 일찍 승리와 행복의 잔을 들면 아니 됩니다. 지금 아말렉은 죄송합니다만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 트렸습니다. 너무 일찍 축하를 하고 너무 일찍 영광에 취해 대열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다윗 군대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일찍 터트린 샴페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아말렉 입니다. 아말렉을 통하여 주는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진멸하고 사로 잡혔던 가족들과 잃어버린 모든 물품들을 되찾은 것은 물론, 그 동안 그들이 강도질하며 탈취했던 가축들까지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다윗과 일행 400여명이 수고하고 마음고생하고 괴로웠지만 이전 보다 더욱 많은 것을 가져옵니다. 여러분, 일찍 터트린 영광은 적들이 틈타고 경쟁 상대에게 쓸데없는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일을 아말렉을 통하여 교훈을 받고 이후로 다윗은 조그만 잘됨 앞에서 절대로 자만하지 않습니다. 아말렉을 통해서 보고 경험을 했습니다. 아말렉이 하는 모습을 보고 다윗은 절대로 먼저 삼페인을 터트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사람들과 축배를 들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에 바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될 때는 여러 가지를 실수합니다. 아말렉은 애굽의 종을 버렸습니다. 일찍 승리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헛점을 노출하고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다윗은 로도스에서 이 것을 다짐합니다. 승리 후에 시험이 오고 선 줄로 생각될 때 넘어질까 조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가지 실수가 연결되고 헛점이 노출이 되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다윗처럼 주님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계속해서 앞만 보고 전진하시는 그래서 이 예배 가운데 이호도스 가운데 다짐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비전을 이루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것은 줄이는 다윗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다윗이 마음에 품고 있는 비전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야기가 될 말도 줄이고 문제가 될 행동도 줄입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줄입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행복은 공동체의 일치됨은 낙오된 삶들까지 챙겨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법이고, 거룩한 방법입니다. 지금 로도스에서 뛴 승리의 결과 전리품이 있습니다. 전리품은 전투에 참가한 용사들과 지휘자의 몫입니다. 로도스에서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다윗과 400명입니다. 나머지 200명은 브솔 시내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손실도 수고도 없고, 얻는 것도 없습니다. 이들 200명은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서 용기주시는 하나님의 세 마디 약속 앞에서도 일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명은 브솔 시내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400명이 승리와 함께 전리품을 어마어마하게 가져 오는데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승리와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몫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고 합당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모든 전리품을 도중에 힘에 겨워 대열에서 낙오한 200명의 연약한 동지들과도 똑같이 분배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실적 위주로, 결과 위주로, 공적에 따라서, 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요? 오늘 400명의 용사들 속에도 일부 용사들의 반발이 있습니다. 안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들의 요구는 당연한 권리 아닙니까? 당연한 요구이고 마땅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문제를 줄이고, 불평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행동을 줄입니다. 이 때 다윗은 23-25,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문제를 줄이는 사람입니다. 문제 될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앞 선 사람은, 문제를 줄여야 합니다. 왜냐고 묻지 마세요. 불평하지 마세요. 일을 만들지 마세요.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렇게 하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알고 싶으면, 그렇게 한 다윗에게 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때 마다 주님께서 어떻게 일을 만드시는가 보라고 합니다. 지금은, 당장은 모르지만 나중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은 이 사람들을 설득했고, 문제를 줄입니다. 그 이 후로 공동분배의 원칙은 이스라엘 대대로 이어가는 법이 됩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고 비전과 꿈을 이루는 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마음속에 깊이 품었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빈틈이 없는 다윗을 봅니다. 그 것은 동역과 동참입니다. 400명 중에 반대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로도스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당연해도, 말이 맞아도, 경우에 합당하더라도, 지도자가 가르치고 이끌면 그대로 순종을 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 400명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다윗의 결정에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이 순종을 하고 따라간 사람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용사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악한사람이나 비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당연한 권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22절은 악인이나 비류라고 표현을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악인이고, 합당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이 비류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윗에게 순종하고 따라 갔더니 이들이 악인이나 비류가 아니라, 위대한 이스라엘의 용사가 됩니다. 방금 전까지 불평을 하고 이유를 묻고, 왜냐고 했던 사람들이 순종하고 따라 갑니다. 사람에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묻고 다윗을 따라 갑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다윗은 600명의 공동체를 하나로 만듭니다. 시글락 성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칭송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 다시 자기의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하여 로도스에서 뜁니다. 사역도 나누고 공도 나눕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사회법을 지키고 이루는데 이것은 장차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에 자기와 함께한 모든 용사로 더불어 확신과 믿음과 신뢰를 주기 위해서 지금 로도스에서 실천합니다. 왕이 될 때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국을 번성 시키는데 그 들이 흔들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당연한 원칙보다도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가는 다윗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말에 견물생심이라는 4자성어가 있습니다. 어떤 실물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 그래서 조금 전 까지도 마음에 없었는데 실물을 보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비일 배재 하지 않습니까? 지금 그럴 수 있습니다. 현장을 보면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을 보면 달라지는 것이 견물생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베풀 때는 세상의 기준을 들이대고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같이 있고 손해보고 낙마할 것 같으면 같이 안 가잖아요? 살기 위해서 다른 생각하잖아요? 힘이 없어질 것 같으면 재빠르게 발을 빼잖아요? 같이 동행하지 않습니다. 계산하며 사는 세상입니다. 나에게 이득이 있나? 손해가 있나? 계산해서 삽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나중의 일이 어떻게 되든지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600명의 용사 아니 200명의 용사 또한 다윗을 평생 떠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다윗이 명령하면 그 어느 곳이든지 갑니다. 다윗을 위해서 적진에 솔선하여, 자원하여 다윗이 마셔야 할 생수를 떠 옵니다. 죽음의 현장에서 죽으라고 해도 죽는 자리에 까지 갑니다. 전쟁터의 맨 앞에 서라면 섭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용병 우리아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다윗에게 충성 맹세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모든 사람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속을 때도 있지만 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속이는 사람의 몫입니다. 속은 것 때문에 단념하지 말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그렇게 동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곁에 많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다윗이 전리품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26절에 이스라엘, 전국에 있는 유다 장로에게 전리품을 보냅니다. 유다 장로를 친구로 표현합니다. 전리품을 분배할 때에 다윗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600명과 그의 가족들, 또 시글락 성민들, 모든 사람에게 배분하되 유다 장로들을 다윗이 기억하고 그들에게 전리품의 일부를 보냅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계산하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人生의 순간을 마구 소비하지 않고 할 수 있을 때에 최선을 다해 계산하면서 살았습니다. 꿈과 비젼까지도 人生 계산속에 넣었습니다.인생 로도스에서 비전을 생각하고 실천을 합니다. 다윗은 그의 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다윗은 그 의 꿈과 비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 나라에서, 망명 생활 가운데서, 시글락의 회복과 전리품의 분배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분위기 가운데서도 그의 꿈과 비전을 잊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고 흐린 때도 비가 오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욱 비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에 찬성표를 던질 장로들을 곁에 두고 장로들을 생각하고 장로들에게 관심을 갖고 전리품을 나누어 줍니다. 다윗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치밀하게 자기의 인생의 길을 갑니다. 특별히 장로를 생각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통치는 이원화 되어 있었는데 왕권 퉁치의 사울 왕과 민간 지도자 장로들입니다. 백성들 사이에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사울왕은 끝나갑니다. 사울왕의 통치가 끝나면 사람들은 이제 나의 것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두 손 놓고 거져 들어오는 떡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손 놓고 있잖아요. 그런데 거져 들어오는 그 순간에도 이 로도스에서, 다윗은 장로들에게 잘 보이고 진심으로 친구처럼 대합니다. 전리품을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이 일이 지금까지 의아해 하던 장로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게 됩니다. 장차 다윗이 왕이 될 때에 다윗의 자격을 논 할때에 시비하지 않습니다. 역시 다윗 이였구나 하는 마음들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꿈과 소망을 위하여 그 꿈과 소망을 이루는 그 순간 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최선을 다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5. 유다의 장로뿐이 아닙니다. 각 지역과 다윗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전리품을 분배합니다. 기쁨의 로도스에서 이 일을 합니다. 다윗이 참으로 대단 합니다. 27-30, 도망 다녔던 모든 곳, 인기 끌었던 모든 곳, 관심 가졌던 모든 곳,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곳 헤브론까지 분배합니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왕이 기름부음 받고 왕이 등극할 때 이곳에서 합니다. 중요한 곳입니다. 갈렙이 요구했던 유다 한가운데 입니다. 이렇게 세세한 곳 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계획적으로 세밀하게 살아가는 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다윗은 막살지 않았습니다. 막무가내로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건성건성, 대충대충 떼우면 살잖아요. 오늘 안 되면 내일 하지 그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미래를 위해서 하루 이틀 하다가 한 달 두 달 하다가 일 년 이년 하다가 그만 두잖아요. 아, 내 몫이 아니구나. 나는 이룰 수 없구나. 이곳도 괜찮은데 하면서 시글락에서 편히 살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주님이 부르신 그 호도스에서 미투리 신을 신고 자신의 생의 역사를 써 내려 갑니다. 한 순간도 이 것을 잊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비전은 받은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 그 비전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뚜벅 뚜벅 다가갑니다. 결국은 그의 시간이 다가오는 일 앞에서 절대적으로 다윗을 참을 수밖에 없도록 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다윗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어 가시지만 자기의 몫은 자기가 만들어 가는 다윗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세밀하게 계획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하고 실천 하시되 로도스에서 길에서, way에서 세밀하게, 계획적으로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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