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북이 심한 대치를 하고있었던 1960 -70년대에 빈부에 대한 비교대상중에 하나는 시계였다. 군중이 모인자리에서 환호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남한사람들은 모두 손목에 번쩍이는 시계가 매달려있는반면 북한사람들의 손목에는 아무것도 매달려있지않았었다. 그것을 가지고 남북의 경제사정을 단편적으로 비교하곤 하던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 내손목에 시계가 없으면 어디서 쉽게 시간을 확인할수가 없었기에 모두의 필수품중에 첫번째는 손목시계였으며 가격또한 천차만별 높기도했다. 그러다보니 학교를 입학해도 시계, 결혼을 해도 시계, 회사를 입사해도, 회사에서 일 열심히한다고 상을 줘도 당연히 시계였다.
그것뿐인가, 결혼을 해서 세간을 내도 우선 벽시계가 필수선물이었고 조그만 구멍가게를 내도 둥그렇고 큰 불알달린 긴 상자모습의 호랑이모양 벽시계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장만해서 매달아놓은 큰 벽시계가 큰불알을 흔들흔들하며 철커덕철커덕 바늘을 돌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세상의 돈다발이 다 내게로 들어온듯한 포만감에 의례이 젖게하였는가하면 신혼살림집에는 어느덧 아들딸에 깨가 쏟아지는 다복한 가정이 꾸려지고 있는듯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살아감의 맛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다. 모든것은 변하고 끝이 있듯 그 시계도 이제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있을뿐 세상사람들의 관심밖에 있게된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알수가 있고 다중이 모이는곳에는 시계탑이 있으며 컴퓨터를 생활속에 함께하며 살아가다보니 시간은 무의식속에 나와 함께 가고있는것이다. 참으로 편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있다.
나도 시계를 처음 차게 된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취밥하는 시간과 등교시간을 맞추라고 부모님께서 시장에서 사주신 내 손목보다도 더크고 둥그런 지금으로 말하면 경노당 시계였으며 이후 1974년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당시에는 신기하기만했던 가볍고 조그만 전자시계를 5,000원 주고 사서 자랑스럽게 차고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이후 1981 년 결혼을 하면서 결혼시계를 선물로 받게 되었는데 그때는 스의스제가 좋다고 매형의 친구댁시계방에서 80,000 원인가를 주고 사서 차고다녔었다. 그 시계는 조금 크고 누런색의 둥그런시계였는데 지금도 유명한 스의스제라고 생각해서였는지 보면볼수록 시간도 잘가는것같았고 내가 꽤 대단한 녀석처럼 보여지기도 했었다. 그래서일까? 누구들 앞에서는 일부러 손목을 쭉 뽁으며 시계를 내놓고 보는 시늉을 하곤했었다. (몇년이 지난후 알았지만 그 시계는 모조품의 가짜시계였다.)
그 이후 시계에 대한 세상살이에서의 필요성은 점점 약해졌기에 나도 그 이후에 시계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마도 핸드폰을 갖게된 약 10 여년전부터 내 손목에는 시계가 없었던걸로 기억된다. 그야말로 핸드폰시계는 정확해서 별도로 시간을 교정할 필요도 없었고 핸드폰은 수시로 열어보게되어있기에 시간은 자연적으로 알아볼수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을 살아가던 내고향 영종도 벌판 오막살이 우리집에는 가보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불알이 한터머지인 긴꼬리의 호랑이 시계였다. 검은색의 긴 상자모습인 이 시계는 왠놈의 소리가 그렇게 큰지 불알이 한번씩 흔들댈때마다 째가닥짹각 째까닥짹각을 반복했으며 매시간이 되면 낮이나 밤이나 사람이 자던지말던지 우렁찬 호랑이소리만큼 큰 종소리를 시간숫자만큼이나 땡그렁땡그렁 내곤하였다.
철로변 집에 애들이 많다는소리가 틀린말이 아니듯 우리도 그래서인지 부모님께서는 나를 포함해 아홉형제나 낳았고 둘을 먼저 못올세상으로 보내기도했었다. 잠들만하면 댕그렁댕그렁을 연발해댔고 째깍소리를 밤새해대고있었으니 언제 깊은 잠을 잘틈이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당시 개구리울음소리만있을뿐인 시골에 다른 오락이 있지도 않았을것이고 -
그러나 우리식구들은 거기 잘 적응을 해서 시계에 대한 고마움은 있었지만 불편함은 전혀 기억에도 없다. 아마도 지금 그렇다면 형제들중 누구인가가 환경공해로 관가에 다가 고발이라도 했을것이다.
오히려 그 시계는 당시 어려웠던 우리집의 구세주였다.
여름철 몇달을 제외하고 어머니는 인천 만석부두로 수시로 장사를 나가셨다. 장사라야 집에서 만들어놓은 김치와 농산물등을 장사꾼들이 항상 나와있는 첫배(아침 7 시)에 맞춰 내다가 팔고오시거나 가까운 동인천부근마을에 개인집들을 방문하여 팔고오시는것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운북동 벌판에서 구읍부두까지를 새벽 2 시간전에 일어나 짐을 머리에 이시고 동강마을 뚝방을 거쳐 붉은목을 지나 돌박재를 거쳐 구읍으로 나가야하는것이었다. 머리짐의 고통도 고통이셨겠지만 충분한 시간을 맞춰 새벽에 집을 출발해야하는것은 필수이기도 했다. 그때 바로 이 불알시계는 그 몫을 톡톡히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 시계도 가끔 기름을 주지않으면 고장이 나거나 태엽을 제때 감아주지않아 굶어죽어버리는 날이 있었다. 그런날은 어머니는 안절부절이셨다. 어떤 날은 밤 10 시에 잠자리에 누우셨다가 새벽 2 시에 일어나 구읍뱃터로 집을 출발하시는가하면 어떤날은 제 시간을 놓쳐 고생을 두세배하시는 경우도 있으셨다. 그럴때 대체로 시간을 가늠하는 방법은 흔한예로 동네의 첫닭이 우는소리를 듣는것과 동네의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것, 달이 뜨는 밤에는 그 달의 위치를 보는법, 그리고 가장 유치한 방법은 물을 잔득먹고 잠자리에 드는것등이었으나 어느것도 마땅한 대안은 되지못했다.
뭐니뭐니해도 항상 요란을 떠는 큰 불알을 흔들어대는 시계가 최고였던것이다. 시계가 4 번을 치는 새벽이면 주섬주섬 일어나셔서 옷을 갈아입으시고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 당신보다도 큰 김치통을 머리에 이시고 약 8 키로의 구읍을 걸어나가셨던것이다. 그렇게 바꾼돈으로 나도 그랬고 내 형제들도 그랬고 학교를 다녔고 결혼도 했었다. 그것이 몇십년이었는지 .......
그리고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우리집에 어느날인가 가보로 여겨오던 시계가 없어지고 종소리도 경쾌하고 밤에는 울리지도 않으며 특히 바늘가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도않는 시계로 아버지께서 바꿔놓으셨다.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골동품수집상에게 새로운 시계를 거져받고 넘겨주셨다는것이었다.
그 이후 어느날 아버지께서도 다시 못오실곳으로 떠나셨고 나 또한 결혼후 몇년만에 분가하여 어린시절을 살아오던 벌판을 떠나고말았다. 떠나던 그날 장독대에서 먼산을 바라보시며 앉아 눈물을 흘리시던 결국 홀로 남으셨던 엄마, 그때 김치통으로 짖 이겨진 머리 정수리에는 머리카락 몇개만이 남아있을뿐 허연 살만이 내눈에 보이고있을뿐이었다. 그렇게 나또한 내부모를 밟고넘어 오늘을 살아왔던것이다.
이제 세상은 변하고 내 형제들도 모두가 흩어져 자신들의 오늘을 살아가고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는 지금이나 벽시계를 보며 살아가던 그 시절이나 다를바없는 시간들을 살아가고있으련만 그러나 그 시절이 더 그립고 행복해 보이는것은 왜인지 모를일이기만하다.
오늘이 불행한것은 아닐진데 .........
불알시계가 우리집을 떠나면서 찾아온 우리집의 변화, 시계를 바꾸신후 받아들이셨던 아버지의 돌아가심과 엄마의 혼자 남으심 그리고 찾아온 중풍으로의 20 여년 누워계심, 그리고 형제들중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던 나의 분가살이, 왠지 우리집을 떠나버렸던 그 불알시계는 우리집의 행복이었었던것처럼 그립기만하다.
긴꼬랑지의 시계불알이 흔들거림과 시간에는 어김없이 울렸던 땡그렁소리가 그 시절 그러했듯 앞으로 나에게 찾아올 어떤 무지개빛 행복의 예고인듯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기만한다.
* 비발디 - "사계"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8의 2 "여름" * |
출처: 허허벌판 원문보기 글쓴이: beolpan
첫댓글 우리는 우둔하게시리 시계 겉모양만 항상 보고 살았지 그안의 시간을 알고 살았으면 순간순간의 중요함을 일찍 꼐닮고 좀더 나은 삶을 영위 할수 있었을텐데, 추억의 소중함을 이제부터라도 알아야겠지 ...진백아!! 일접었다는 얘기 뭔말이냐? 휴직했니.퇴직했니...
건강관리가 힘들어서 장기휴가를 내고 쉬는중이야. 8 월 달에 퇴직을 하기로 결정했어.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젠 휴식하면서 버리며 살아야지. 건강때문이야.
그래, 잘선택했다. 우선 건강이최고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가족과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잖아...
항시 당신의 글 앞에서는---, 고맙다, 편안한 맘으로 건강에 유념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