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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이라고? 난 죄 없어! 단단한 손병호 | ||
[필름 2.0 2005-04-27 05:10] | ||
선 굵은 조연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손병호는 연극판에서 '날아다니는 명배우'였다. 충무로 입성 7년, 그는 지금 영화판에서 '날고' 있다. 장병원 기자 최근작 <엄마>는 개봉까지 곡절이 많았다. 손병호 기왕 늦어진 거 5월에 개봉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엄마>가 가족 영화니까 가족의 달인 5월이 어울리겠다 싶었지. 기자 시사회 후에 안 좋은 말도 많이 들었는데 해남에서 한 일반 시사회 반응은 대박이야. 1천만은 안 되겠지만, 5백만은 너끈해.(웃음) 장병원 기자 이전 영화들에선 무거운 역할이 많았는데 <엄마>에서의 큰아들은 퍽 유순해졌다. 손병호 무겁다기보다는 무서웠지.(웃음) 이전에도 <엄마>의 구성주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은 적이 있다. 죄 준비하다 엎어진 영화들이었지. 구 감독의 데뷔작인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처럼 그 작품들은 형이상학적이었다. <엄마>는 완전히 다르더라. 기본적으로 따뜻한 가족 영화지만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 좋았다. 영화는 시나리오만큼 안 나왔다. 이 영화 시나리오 받은 게 <알포인트> 찍고 있었던 캄보디아다. <알포인트> 공수창 감독한테 물어봤지. 그랬더니 “어, 성주. 좋아요. 아주 둘이 잘 맞을 것 같아” 그러더라. 만나보니 진짜 잘 맞았다. 장병원 기자 뭐가 그리 잘 맞던가? 손병호 인간적인 맥, 생각하는 맥, 그리고 상상력! 현장에서 사람들이 구 감독을 ‘영화감독이 된 성자’라고 불렀다. 우둔하고 바보처럼 보이지만 속으론 계산이 확실하다. 소탈하지만 그 속에 카리스마가 있고 자기 세계가 분명하다. 고두심 선생은 구 감독을 “눈빛 속에서 진심이 보이는 감독”이라고 했다. 장병원 기자 완성 후에도 개봉이 불투명했으니 속이 좀 탔겠다. 손병호 중간에 한 번 엎어질 뻔도 했다. 그 때 배우들이 “모두 감수하겠다, 우리 모두 투자자”라고 뜻을 모았다. 우리 힘으로 완성해 보자고 의기투합한 거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그게 <엄마>의 힘인 것 같다. 만약에 촬영 과정이 힘들었다면 엎어지려고 할 때 ‘에이 잘 됐다’ 하면서 도망갔겠지. 장병원 기자 <엄마>가 영화로 벌써 열한 번째 작품이다. 손병호 그러게. 얼마 전 모 잡지에서 내 필모그래피를 정리해 놓은 걸 봤는데 내가 이렇게 많이 나왔나 싶더라. 장병원 기자 충무로 상업 영화하기 전에 송일곤 감독의 단편 <소풍>으로 시작했다. 손병호 이창동 감독이 <오아시스>에 날 캐스팅하려고 한 번 만나자고 해서 갔는데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묻더라. 난 <파이란>을 얘기했다. 이창동 감독은 <소풍>이 좋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 분이 내 첫 영화를 기억해 주시는구나 싶어서 바로 하자고 했다. 장병원 기자 송일곤 감독과는 어쩌다 인연이 닿은 건가? 손병호 만나게 된 게 재밌다. <소풍>은 원래 방은진이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돼 있었다. 남자 주인공으로 문성근 선배를 하느냐 마느냐 얘기가 있던 차에, <라이방>에 나왔던 조준형이 물망에 올랐던 모양이다. 송일곤이 조준형 연극하는 걸 보러 갔는데 거기서 준형이와 같이 연극하던 내 와이프에게 느닷없이 필이 꽂혔다네. 와이프가 최지연이라는 무용수인데 그 연극이 화가, 시인, 무용가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라 거기 출연하고 있었다. 장병원 기자 그래서 방은진 대신 와이프가? 손병호 <소풍>이라는 영화가 시나리오는 괜찮았는데, 난 무용수에게 연기를 시킬까 싶어서 안 한다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왔어. 이런 영화 찍었는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며 <간과 감자>라는 단편영화 테이프를 주고 갔다. <간과 감자>를 보고 나니까 난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와이프한테 당장 하라고 그랬지. 그런데 세 번째 만날 때는 와이프 하고 내가 호흡이 잘 맞을 테니 아예 나보고 남자 주인공을 하래. 장병원 기자 부부 동반 출연이라. 손병호 송일곤과는 얼추 10년 가까이 알고 지내지만 정말 놀랍다. 그 좋은 배우들 다 제쳐두고 연기 경험 전무한 무용수를 끌어들이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다. 장병원 기자 <꽃섬>에서 트랜스젠더 역할도 당신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캐릭터였다. 손병호 그렇지. 송일곤 감독이 날 잘 아니까 그런 모습을 잡아낸 거다. <거미숲>에선 잠깐 나오지만, 원래 시나리오에선 내가 1인 9역이었다. 제작사 잡아 들어가면서 다 바뀌었지만. 내 다양한 모습을 아니까 그런 골 때리는 발상도 할 수 있었겠지. 장병원 기자 <소풍> 전까진 영화에 생각이 없었던건가? 손병호 잘생긴 사람만 하니까 내가 할 수 있겠냐 싶었다. 내 꿈은 연극판의 오태석 선생님처럼 되는 것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영화보다 TV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고민은 조금 했다. 먹고살아야 된다는 부담이 있어서 나름대로 노력도 했다. 장병원 기자 어떤 노력을? 손병호 당시 같이 연극하는 멤버들이 있었다. 그중 한 놈이 "야 늬들 재주가 정말 아깝다, 우리도 이러고 있지 말고 직접 찾아 다녀보자" 그러더라. 그래서 멤버들끼리 사진 박고 프로필 만들어 충무로 영화사를 다 돌아다녔다. 그런데 뭐, 영화사 가면 감독 얼굴이나 봐? 운 좋게 조감독 만나도 “아, 예. 거기 놓고 가세요”라는 말만 듣고 돌아오길 몇 번인지 모른다. 찬밥이지, 뭐. 장병원 기자 암담했겠다. 손병호 놀랐던 게 태흥영화사에 갔을 때다. 태흥에서 <미지왕>이라는 영화를 하기 전인데, 마침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님이 계셨다. 연극하는 배우들인데 조그만 역할이라도 있을까 해서 왔다고 하니까 이태원 사장님이 “우리가 찾아가야 할 분들이 오셨네. 정말 고마워”라고 반색을 하시는 거다. 차를 내주시고는 어떤 배우가 되야 하는지 충고해 주시면서 <축제> 시사회 티켓까지 주셨다. 우린 또 공짜는 안 빠진다. 시사회에 갔더니 끝나고 저녁까지 사주셨다. 그런 분이 어딨나? 자기 영화에 캐스팅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역시 거물은 다르다고 생각했지. 장병원 기자 그럼 TV도 했었나? 손병호 군 제대하고 교수님이 너도 돈 벌어야 한다며 당시 제일기획에서 제작하던 장병원 기자 그래, 생계에 도움은 좀 되던가?
손병호 TV 하면서 느낀 건 딱 한 가지, '이건 아니구나'.(웃음) 내 과가 아니다. 이게 무슨 예술이냐, 해보니까 알겠더라. 그래서 바로 현대극단에 들어갔다. 극단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제일기획에서 연락이 왔다. 날 잘 봤는지, 국장님이 PD할 생각 없냐며, MBC 미니시리즈에 넣어주겠대. 그때 갔더라면 인생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첫 마디가, 전 죽어도 연극하겠습니다.(웃음) TV는 완전히 편집의 예술이다. 그래서 돌아보지도 않고 나왔다. 3년 뒤에 후회 많이 했지. 그때 할 걸.(웃음)
장병원 기자 영화도 편집의 예술인데...
손병호 그래도 영화는 매력이 있다. <소풍> 찍으면서 너무 재미있고 신이 났다. 이건 연극과 같은 ‘식구’ 개념으로 가는구나. 이것저것 경험하면서 느낀 게, 매체도 매체지만 팀워크가 중요하다. 사람이 좋으면 작품이 좋고 사람이 힘들면 작품이 힘들다.
장병원 기자 몇 년 전 <좋은 사람>이라는 TV드라마에도 나오지 않았나?
손병호 그때 다시 한 번 확인했지. 역시 내 체질 아니네. 돈 벌려고 연기 시작한 놈이 체질 따지는 게 우습지만. 연기하게 된 게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다가 쫄딱 망하고 나서였다. 연극 포스터 선전 문구에 ‘즉시 출연, 출연료 얼마’라는 문구를 보고,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 순진했지. 그거 보고 바로 연기 학원에 갔다. 나름대로 '끼'는 있었다고 생각했거든. 학창 시절 내 꿈은 이소룡이 되는 거였다. 연기 학원 다니다가 연기 선생님이 너 극단에 한번 들어올래라고 해서 처음 연극을 봤다. 충격이었지. ‘이건 내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장병원 기자 벌겠다던 돈은 못 벌고?
손병호 돈 벌고 있잖아, 지금.(웃음) 내겐 두 분의 스승이 있다. 극단 목화의 오태석 선생과 안민수 교수님. 안민수 교수님은 최민식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다. 연극계에선 “손병호가 오태석과 안민수를 모두 접해봤다는 게 배우로서 큰 행운”이라고 말하곤 한다.
장병원 기자 어떤 가르침을 받았나?
손병호 대학 졸업할 무렵, 안민수 교수님이 연출하시는 동랑레퍼토리극단의 마지막 작품 <리어왕>에 운 좋게 출연하게 됐다. 최종원, 박영규, 이희도, 정승호, 윤승원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고 난 막내였다. <리어왕>을 하면서 지금의 손병호가 존재하게 된 모든 공부를 다 했다. 안민수 교수님께 작품 분석을 통한 ‘논리’를 배웠다면 오태석 선생님께 ‘놀이’로서 연극을 배웠다. ‘논리’와 ‘놀이’를 겸할 수 있는 자양분을 거기서 얻었다.
[[0]]장병원 기자 남을 연기할 때 어떻게 인물에게 접근해가는가?
손병호 연기는 흉내가 아니다. 토막 살인범을 연기한다고 생각해 보자. 난 성선설을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 이는 어떤 번뇌가 있어서 저런 지경까지 갔는가를 파고든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지금의 상태로 존재하게 만든 환경을 이해하려 한다. '만약 나라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내 속에서 그 인물을 찾는다. 연기는 기교를 통해 나오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장병원 기자 경험을 중시하는 쪽인 것 같다.
손병호 경험, 중요하지. 여자도 경험하고 술도 먹어보고 할 거 다해봐야 한다. 사람 죽이면 안 되지만.(웃음) 술을 죽도록 마셔봐야 오바이트하는 방법론도 얻어진다. 지가 못 먹으면 먹는 걸 쳐다보기라도 해야 한다. 인간의 행동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관찰을 통해서든, 직접 경험을 통해서든 이해해야 한다.
장병원 기자 극단 목화의 풍은 어땠나?
손병호 오태석 선생은 사람을 흔들어 놓는 방법을 썼다. 인생이든 연기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준다. 그리고 얼마나 버텨내는가를 본다. 연기의 공력이 쌓아지는 동안 견디기 힘들 만큼 몰아쳐서 포기하게 만든다. 안 되면 떠나라, 잔인하리만치 배우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 당시엔 상처지만 결국 옳은 방법이다. 연기 못 하니까 상처 받는 거다. 당하면 미치지.
장병원 기자 호되게 당한 적이 많은가 보다.
손병호 지금 생각해보면 음, 그냥, 아름답다.(웃음)
장병원 기자 연극으로 손병호의 존재를 처음 알린 게 <심청이는 인당수에 왜 몸을 던졌나>에서의 취객 역이었다.
손병호 맞다. 그 작품과 동시에 난 깨달았는데,(웃음) 그 후로 오 선생은 한 번도 내 연기를 연출하지 않으셨다. 완전히 맡겼다. 연극계의 선후배들도 ‘손병호’라는 배우를 알게 됐다. ‘취객 역할은 손병호’라고 각인이 됐다. 문제는 그렇게 한 경지에 도달하면 그게 다인 줄 안다는 거다. 그게 또 한계인 줄 모르고. 그 위에 또 다른 차원이 있는데.
장병원 기자 또 다른 차원?
손병호 난 인간에겐 계급이 아니라 등급이 있다고 본다. 누가 잘났는가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한계와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있다는 거다. 한 등급을 넘어서면 그 위에 상위 등급이 있고 그 한계를 초월하면 더 상위 등급이 있다. 가장 높은 층에는 성자가 있겠지.
장병원 기자 당신 등급은 어느 정도인가?
손병호 난 우리 형을 못 넘어선다. <엄마>에서 장남 역할 하면서 모델로 삼았던 게 우리 형이다. 아버지 사업 망하고 방황을 많이 했다. 그때 형은 군에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매일 싸우지, 집안은 뒤숭숭하지, 대학은 못 가고 재수하고 있지, 매일 술 먹고 집에 들어와서 깽판을 쳤다. 어느 날 형이 휴가를 왔는데 그 전까지 분위기 살벌했던 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다. 내가 있을 땐 살벌하다가 형이 오니까 웃음꽃이 피어? 기분이 묘했다. 내 한계가 너무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밥상 앞에서 온 가족이 화기애애한데 나만 불행하게 느껴져서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나더라. 밥상을 박차고 나가 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그때 형이 한 말이 있다. “병호야, 인간에겐 모두 한계가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한계가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한계가 있다. 넌 아버지가 못 넘은 그 한계를 넘어야 하지 않겠니.” 삐딱하게만 나가던 놈이 형이 한 말뜻을 어떻게 알아. 지는 잘났다고 멋있는 말만 한다 이거지. 그래 좋아. 더 엿 같아.(웃음) 그 후 얼마 안 돼서 형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병호야, 네 신발을 보니까 너무 낡아보여서… 이 걸로 신발이나 하나 사 신어라.’ 그 편지가 꼬깃꼬깃해진 2만 원 지폐와 같이 왔는데, 어머니하고 나하고 그걸 보고 통곡을 했다. 다시 한번 내 한계를 절감했지. 연기도 마찬가지다.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때 배우의 폭도 시선도 넓어진다.
장병원 기자 연기를 통해 성자가 되겠다는 얘긴가?
손병호 누구를 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거다. 날 이겨내지 못하면 누구도 이겨낼 수 없다. 나한테 기회가 안 온다고 화를 낼 필요도 없고 일이 안 된다고 분노하거나 원망할 필요도 없다. 누굴 원망하고 누구에게 분노하나? 결국은 나다. 일이 안 풀리면 내가 아직 모자라고 그릇이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해야지. 내가 악역만 한다고? 그럼 내가 악역 같이 생겨 먹었구나. 어떻길래 내가 악역처럼 보일까를 또 알아야지. 그럼, 눈빛 때문이구나. 분노를 삭혀야겠다. 그러는 거지 뭐.(웃음)
장병원 기자 분노가 많은가?
손병호 여기까지 왔는데 왜 없겠나. 한때 죽음까지 생각해 봤는데. 지금은 이 눈빛마저 감사한다. 이 눈빛이 있으니까 <파이란> <알포인트>를 찍었지. 없었으면 그거 찍었겠냐고. 처음엔 주변에서 하도 악역만 한다고 해서 나도 한 때는 악역 아닌 다른 걸 찾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지금은 악역도 두렵지 않아.(웃음)
장병원 기자 그래서 <야수>에서도 당당하게 악역을…
손병호 난 한 번도 악역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치열하게 사는 놈들이지. 흥부와 놀부에서 놀부가 악역인가? 일반적인 잣대로 놀부를 악역으로 보지만 놀부는 악한이 아니다. 욕심이 많은 것뿐이지. 흥부는 선인인가? 흥부는 노력을 안 하고 게으르고 바보 같은 인물이다. <파이란>에서 강재와 용식의 처지를 뒤집어보면 강재도 악역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알포인트>에서도 진 중사보다 감우성이 연기한 최 중위가 악역일 수 있다. 진 중사는 애들 고생 그만 시키고 빨리 철수하자는 거고 최 중위는 제 고집대로 끝까지 가겠다는 거니까. 난 죄 없어. 난 당한 놈이야!(웃음)
장병원 기자 그런 해석의 차이가 캐릭터를 구현할 때 있어서도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낼 것 같다.
손병호 난 아무리 악한이라도 저 이에겐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정당성을 주고 싶어하는 쪽이다. 삶을 해석하는 차이, 인간을 이해하는 차이가 인물을 바꾸고 연기를 바꾼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고 '정당성'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 정당성끼리 부딪히는 것이 ‘드라마’다.
장병원 기자 한때 직접 연극 연출도 했었는데, 연출 욕심은 버리지 않았나?
손병호 ‘짓’이라는 극단 만들어서 두 작품 연출했는데 망했다. 지금은 접은 상태고 좀 더 여유가 있을 때 다시 해보고 싶다. 잘되면 영화 연출도 할 생각이 있다. 남들이 연기할래, 연출할래 물어보면 연출하고 싶다고 말한다. 연기한 만큼의 값어치가 있을 것 같다. 뭔가 찾아갈 미지의 영역이 있다는 건 늘 즐겁다.
장병원 기자 연출의 즐거움은 어떤 건가?
손병호 작품을 분석하고 상상력을 발휘하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표현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대장이잖아. 내가 보스 성향이 좀 있다.(웃음)
장병원 기자 아직 자신을 연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손병호 떡 장사를 29년 하던 사람이 잘 안 돼서 꽃 가게로 업종 전환을 했는데 1년 만에 꽃 장사가 무지 잘 됐다고 치자. 그 사람은 꽃 장사인가? 난 연극하는 사람이지. 무대에서 배운 게 전부고 언제나 무대를 열망한다. 영화도 배우로서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무대는 원초적 고향이다. 내 에너지를 송두리째 폭발시킬 수 있는 곳은 여전히 무대라는 거다.
장병원 기자 <야수>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조폭 역할이라고.
손병호 <파이란>의 용식이가 양아치라면 <야수>는 ‘대부’다. 용식이의 20년 후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맞을 거다. 내가 연기할 인물은 권력과 힘을 신봉하는 야수 같은 남자다. 날렵하고 샤프한 모습으로 가고 싶어서 운동도 열심히 한다.
장병원 기자 그래서 얼굴이 좀 야위었나?
손병호 살을 좀 뺐다. 배에 왕 자 새기는 게 목표다.(웃음)
프로필 1962년생 |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블루 사이공> <백마강 달밤에> <클로저> 등 | 영화 <소풍> <꽃섬> <파이란> <오아시스> <튜브> <효자동 이발사> <알포인트> <거미숲> <엄마> 등 출연
사진 김춘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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