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장가로 ‘월상계택(月象谿澤)’을 든다.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을 줄여 부른 말이다. 이 중에 신흠이 남긴 시로 ‘동천년로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월도천휴여본질(月到千虧餘本質) 유경백별우신지(柳經百別又新枝)’가 있다. 오동은 천 년 묵어도 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춥게 지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들은 백 번 꺾여도 새순이 올라온다.
내가 예전에 살았던 명서동 가까운 도계동 개울가 ‘청석골’이라는 민속주점이 있었다. 주인여자는 내보다 나이가 한두 살 더했지 싶다. 얼굴로나 교양으로나 따르던 남정네가 있었지 싶은데 독신이었다. 가게 벽에 앞서 소개한 시 두 구절을 예서체로 써서 걸어두었더랬다. 상촌의 시는 선비의 지조를 자연물에다 비유한 절창이다. 그런데 술집 벽에 표구작품으로 걸렸으니 여인의 절개로 봐도 되지 싶었다.
주인여자는 이후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소답동 빌라지하로 옮겨 가게이름을 ‘장터목’이라고 바꾸어 장사했다. 생활권이 다르고 하니 오랫동안 가 보질 않아 지금은 떠났는지 그만두었는지 모르겠다. 예년과 달리 크리스마스캐럴송이 잠잠했다는 성탄절 아침 등산화를 신었다. 도계동 지나 소답동 곁의 동정동에서 내 산행의 출발점을 삼았다. 남해고속도로 동마산요금소 가까운 굴다리를 지나면 갓골마을이다.
관음사 지나 텃밭에 아침햇살 받아 꽃눈이 부푸는 매실나무 몇 그루가 보였다. 솔밭 길 따라 올라 천주암에서 약수를 한 모금 들이키었다. 법당 뜰 왼쪽 느티나무와 오리나무가 지상 3미터쯤에서 연리지처럼 ×자로 만나 자라고 있다. 이어 천주산 마루에 섰더니 전망대와 정상 길로 갈라졌다. 나는 둘 다 택하지 않고 허리로 난 임도를 따라 계속 걸었다. 심어 가꾸는 잣나무를 가지치기한 무더기가 보였다.
며칠 전 내린 비가 산에선 눈이었나 보았다. 응달이라 아직 다 녹지 않아 길바닥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잣나무와 절로 자라는 소나무만이 푸름을 간직했고 나머지 수풀들은 수액이 모두 말라버렸다. 응달엔 잎이 진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생강나무와 다래넝쿨이 엉켜 자랐다.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나중 시듦을 안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나는 이 길로 봄이면 산나물을 채집하러 다녔다.
함안 경계지점에서 다시 천주산 길과 청룡산 길로 갈라졌다. 나는 산으로 오르질 않고 임도 따라 계속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십 리 넘게 한참 내려가니 칠원 산정마을이 나왔다. 마을회관과 함께 쓰는 경로당은 적막했다. 나는 아랫담 길가에서 장작 패는 어르신 한 분을 만나 몇 마디 여쭈었다. 먼저 산정마을의 ‘정’자가 한자로 무슨 글자인지 궁금했다. 정수리 정(頂)도 아니고 우물 정(井)도 아니었다.
뜻밖에도 정자 정(亭)자를 쓴다고 했다. 예전에 산중 깊숙한 곳이라 절이 있었고 풍광 좋은 자리 정자가 있었다고 했다. 근래 마을 앞에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길 아래 산정분교 터가 있었다. 슬레이트지붕의 낡은 건물이 흉가처럼 보였다. 본관이 진주인 강씨 노인은 객지로 떠난 이들은 다 성공했다고 했다. 조금 전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간 사람은 현대계열사 부사장이라 했고 박사도 여러 명 있다고 했다.
산정마을에서 면소재지까지는 길이 멀어 분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 4학년부터 본교로 다녔다고 했다. 내가 다녔던 고향의 초등학교도 재 너머 강마을 분교 아이들은 4학년부터 본교에서 같이 만나 공부했다. 나는 산정분교 터로 내려가 보았다. 천정이 뚫린 낡은 교사의 칠판엔 낙서가 남아있었다. 은행나무와 벚나무는 밑둥치가 제법 굵었다. 아이들은 떠나고 없어도 나무들은 해마다 나이테를 둘렀다.
칠원으로 나오면서 상주 주씨 종가에 들렸다. 영조 때 의병을 일으켜 이인좌 난을 평정한 주재성이다. 무기연당은 그의 공을 기려 관군이 내려와 만들어준 정원이었다. 숙종을 이는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승하해 독살설이 분분했다.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영조는 정권초기 취약했던 지지기반을 극복하고 문예부흥을 일으킨 최장수 임금이 되었다. 가족사의 아픔이 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