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도유(한도유)
[생졸년] 1659년(효종 10)~1717년(숙종 43) / 향년 58세
[진사] 숙종(肅宗) 9년(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進士) 3등(三等) 31위(61/100)
[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남원(南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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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진사 한공 묘표(進士韓公墓表)
한후(韓矦) 도유(道愈) 제여(濟汝)는 대대로 남원의 어은곡(魚隱谷)에 살았다. 죽고 난 뒤에 성의 남쪽에 장사 지내고 11년 뒤 정미년(丁未年,1727, 영조 3) 순창(淳昌)의 율북(栗北)으로 이장하여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를 합장하였다.
처음에 한후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택성(宅成)에게 당부하기를,
“우리 부모님은 무덤을 따로 썼고 묘소도 좋지 않으니, 훗날 하나의 언덕을 구해 내 뜻을 이루어주고, 나도 그 아래에 묻어다오.”
하였는데, 결국 그의 말대로 해주었다.
얼마 뒤에 택성이 묘소 앞에 묘표를 세우려고 한천(寒泉)으로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니, 내가 사양할 수가 없었다.
듣기로 한후는 지극한 행실을 타고나 병든 모친을 시봉할 적에 자신의 몸에 부스럼이 있어 전염시킬까 염려하여 별도로 자리를 마련하여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자리를 치웠으니, 당시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정축년(丁丑年,1697, 숙종 23) 큰 전염병이 돌아 연거푸 상화(喪禍)를 만났고 한후 역시 거의 죽다가 살아났으나, 오히려 제힘으로 죽을 먹으며 염(斂)과 장례를 모두 예법에 따라 거행하였다. 얼마 뒤에 전염병이 더욱 극성을 부려 동서로 피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반드시 먼저 방 한 칸을 마련하여 부친의 연궤(筵几)를 받들었다. 또 뒤이어 아내와 누이의 상을 당했는데도 하루도 전(奠)을 빠트린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평생토록 어린아이처럼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매일 새벽에 사당을 배알하고 심한 병이 아니면 그만두지 않았다. 제사 때가 되면 집안사람들을 신칙하여 목욕재계하도록 하고 모든 제수(祭需)를 정갈히 마련하였으며, 사당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선인의 필적을 보면 역시 눈물을 흘렸다.
과부가 된 누이가 자식을 데리고 와서 의지하자 모친처럼 섬겼고, 누이가 죽자 이어서 조카를 길러 혼인시켰으며, 또 제전(祭田)을 마련하고는 막내아들에게 맡겨 서모(庶母)와 유복자로 태어나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죽은 이의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어려서부터 병에 걸려 독서를 하지 못하였으나, 깊이 생각하여 묵묵히 알았으며, 평상시 분수를 지키며 세속을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 성품은 검약을 즐겨 절대로 사치스러운 물건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할 때는 각기 조리가 있었다.
자식들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효제(孝悌)를 먼저하고 학문을 뒤로 하였다. 한번은 말하기를,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마음 쓰는 곳이 없고, 술 마시고 바둑 두며 우스갯소리를 하느라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으면, 이는 군자의 죄인이다.”
하였다.
또 자식들이 일정한 생업에 힘쓰지 않는 자와 교제하는 것을 통렬히 금지하니, 이 때문에 자제들이 모두 몸가짐을 삼가는 데 힘썼다. 또 마을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잘 가르쳐 성취한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는 한씨(韓氏) 집안과 대대로 우호가 있었으나 미처 한후를 알지 못했는데, 택성에게 한후의 일과 행적을 들은 것이 이와 같다.
택성이 또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부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길 ‘지금 사람들은 부모를 위해 행장(行狀)과 지문(誌文)을 지으면서 과장하고 부풀리기만 하니, 본분에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어찌 죽은 자가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으니, 제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감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아, 그의 말이 더욱 믿을 만하다. 한씨는 청주(淸州)의 큰 성씨로 태위를 지낸 란(蘭)의 후손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청성군(淸城君) 종손(終孫)이 있고, 청성군의 증손 복(輹)은 문과에 장원하여 승지를 지냈으니, 한후의 고조이다. 그 뒤에 첨정 응문(應文)과 판관 경생(慶生)이 모두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부친 석량(碩良)은 생원으로, 고을에서 행실로 칭송되었다. 한후는 숙종 계해년(癸亥年,1683, 숙종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택성 역시 진사이다. 3대가 문장으로 집안을 이었으니, 또 귀하게 여길만하다. 한후는 기해년(己亥年,1659, 효종10) 8월 1일 태어나 정유년(丁酉年,1717, 숙종 43)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부인 김씨(金氏)는 진사 중현(重鉉)의 따님으로 부인의 덕을 잘 갖추었는데,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택성이 장남이고 차남은 영성(永成)이다. 사위는 김중후(金重后)이다. 덕성(德成) 및 정수익(鄭受益)과 정익주(鄭翊周)에게 출가한 두 딸은 측실 소생이다. 택성의 아들은 방로(邦老)이고, 영성의 아들은 방걸(邦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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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 진사 한공 묘표 :
이 글은 한도유(韓道愈, 1659~1717)의 묘표이다. 한도유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제여(濟汝)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