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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가는 길, 가을 숲은 명상에 잠기었다. |
날씬한 침엽수는 줄무늬처럼 죽죽 그어져 있다.
그 뒤로 커다란 막같은, 작은 조각을 꿰어 만든 커다란 커튼같은, 노란 단풍이 있다.
그것은 생선의 비늘처럼 반짝거리면서 오싹오싹하게 따뜻했고,
공기처럼 투명하면서도 광목의 주름처럼 두터웠다.
그 숲으로 들어가자 땅은 늪처럼 물컹했고, 노랗고 커다란 막은
마치 수만 마리의 나비처럼 파르르 날아올라 한 발짝 물러섰으며,
침엽수의 강인한 몸은 ‘자, 여기까지’라며 나를 밀어냈다.
◆ 단풍으로 들어가다, 가을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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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쉴 새 없이 떨어지지만 절집 빗자루는 가끔 쉰다. |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시각인데 그 넓은 직지사 주차장은 이미 북새통이다. 식당가를 지나 직지사로 가는 황악산 길은 노란색이 현란하다. 길가에는 나물 파는 아주머니들이 조르라니 앉아 계신다. 오른쪽에 넓게 펼쳐진 직지 문화 공원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몇 해 전보다 훨씬 풍성해진 모습이다.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라 적혀진 으리으리한 입구를 지나면 그 많은 걸음들, 그 많은 음성들이 일시에 소거되는 느낌이 든다. 큰 절집의 힘일까, 숲의 힘일까, 계절의 힘일까. 숲으로 한 걸음 내딛자, 그 단단하게 뻗은 나무들이 일제히 ‘자, 여기까지’라며 밀어낸다. 명상 같은 숲, 얕은 숨소리에도 흔들리는 고요는 스스로를 지키며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누구도 이 숲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몸의 동의처럼.
멀리 돌담이 가뭇가뭇 보이기 시작하는 산길에서야 호흡은 조금 편해지고 걸음은 가볍게 느려진다. 우아한 빛깔로 물든 나무 속으로, 단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소박한 일주문이 나타난다. 지금 문은 보수 수리 중이라 깁스를 한 아이처럼 애처롭다. 대양문을 지나고 금강문을 지나고 엄청나게 큰 사천왕문을 지나 만세루 앞에서 돌아본다. 문들이 점점 작아지며 곡선을 그리는 건축의 맛을 본다. 소년 유정이 잠들어 있던 나무가 저것일까, 사천왕문 옆 큰나무에도 눈길이 머문다. 소년은 이곳에서 출가한 사명대사다. 만세루 기둥문 지나 오르면 대웅전과 탑이 있는 넓은 마당이 열린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직지’는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터를 가리켜 절을 지었다는 유래도 있고, 능여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손으로 측량했다는 전설도 있지만, 보통 ‘직지인심 견성성불’ 즉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에 이른다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왔다고 본다. 내 것이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마음이라, 부처되기란 가능한 불가능과 비슷하다 싶다.
동국 제일가람이란 수식어답게 보물이 많은 절이다. 대웅전과 두 기의 탑, 삼존불탱화, 비로전 앞의 탑 등이 보물이다. 거느린 말사가 50개가 넘고 불자수가 18만에 이른다는 이 큰절은 왕건의 삼국통일 후 사세가 커졌다.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왕건이 직지사 인근까지 밀려났을 때 당시 주지였던 능여조사의 도움으로 추격을 따돌렸던 것. 왕건은 통일 후 전답을 내리고 능여를 왕사로 삼아 직지사를 크게 중수하게 된다. 이후 임란 때 43개의 전각 중 일주문과 비로전, 천왕문만이 화를 피하고 모두 소실될 만큼 참사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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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서 비로전으로 가는 짧은 단풍길에는 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하는 관광객이 유난히 많다. |
대웅전에서 비로전 가는 길이 유난스레 복작거린다. 머리를 쓰다듬을 듯 낮게 드리운 가지들, 단풍든 이파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차랑차랑하게 흔들리는 가지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오래 떠나지 못한다. 가슴에 등 하나 품은 것처럼 속이 따스해지는 길, 음악이 없어도 어깨가 들썩이는 길이다.
외국인 가족이 비로전 앞에서 오래 서성인다. 아름다운 청색에, 섬세한 꽃 문살에, 천개의 불상에 놀란 것이 틀림없다. 비로전은 천개의 불상이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불린다. 천개의 불상 속에서 벌거숭이 동자승을 첫 눈에 발견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비로전 앞, 황악루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세심천에 한 아주머니가 발 담그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씨익 웃으신다. 대가가 한번에 그린 붓자국같은 세심천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가장 감각적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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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입구에 있는 도자기 박물관. 개인의 수집품을 기증받아 만들었다. |
박물관인 청풍료 앞에서 제하당 가는 중문 담벼락에 빗자루들 기대어 섰다. 은행나무는 노란 조각들을 내내 흩어놓는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도 가진 양 느긋하게도 서있다. 보이는 곳곳마다 노랗고 빨간 단풍들, 가을 직지사로의 걸음은 단풍으로 들어가는 것, 하여 이 가을이 다 지날 때까지 저 빗자루들 잠시 훔치면 어떨까, 유쾌하게 상상한다.
◆세계 도자기 박물관과 백수 문학관
직지사 가는 산길 입구에 도자기 박물관이 있다. 외벽에 커다란 도자기가 장식된 재미있는 건물이 먼저 눈길을 끈다. 전시실에는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와 같은 전통자기에서 영국의 웨지우드, 독일의 마이센,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 등 유럽 자기 명가의 대표적인 작품들 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모두 개인이 기증한 것이라 한다. 전시실은 그리 크지 않지만 형태나 문양, 기법 등을 한눈에 파악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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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박물관 앞마당에는 이름 없고 출처 모를 석조 유물들이 부려져 있다. |
도자기 박물관 뒤쪽에는 백수 문학관이 자리한다. 김천출신의 현대 시조시인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의 작품과 사적인 물건들 등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른 작가들의 엽서도 볼 수 있는데 선생의 시집을 받고 보내온 듯한 김광섭의 글귀가 멋있다. ‘책상위에 가까이 놓고 외로울 때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외롭나 한편씩 골라서 읽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외롭고 어떻게 즐겁나, 이 가을엔 한편 시를 골라 읽는 듯 여행해볼까.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김천 IC로 나와 우회전한다. 영남제일문 지나 5분쯤 가다 903번 지방도로 좌회전하면 된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다. 직지사 입장료는 어른 2천500원, 성보박물관은 따로 1천원이다. 세계도자기 박물관 입장료는 어른 1천원, 학생 500원으로 자동판매기에서 직접 발매해야 한다.
첫댓글 영순 왕태 마을에는 고재방, 고윤배, 고심환, 고윤희, 고귀자, 고주희, 고정화(전학을 갔음)......고귀자가 출가하여 이곳 김천 직지사에 있음.......
고귀자가 출가할때 재방이가 데리러 갔었는데, 귀자가 재방이한테 되레 출가하라고 하여 재방이가 화들짝 놀라서 집으로 돌아 왔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음. 약 20년전의 일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