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암에서 400m 오르면 천마봉에 다다른다. 천마봉에서 바라본 도솔암 전경. 가운데 바위 위에 도솔암 내원궁이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보물 제1200호 도솔암 마애불.
천마봉 모습.
도솔암 오르는 길.
내원궁 모습.
보물 제280호 선운사지장보살좌상.
‘기암괴석 사이 만산홍엽’
도솔천이 바로 여기로세
선운사를 지나 5리 남짓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도솔암을 찾았다. 선운사만큼이나 유명한 도솔암엔 커다란 마애불도 있지만 기도영험 높기로 알려진 내원궁이 있다. ‘천인암’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자리잡았다. 무작정 기도처로 발길을 옮기면 곤란하다. 말 형상을 띤 ‘천마봉’이란 거대한 바위를 만나야 한다. 도솔암에서 약 400m 떨어진 천마봉에 오르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잠시 할 말을 잊고 절경에 취하기 마련. 가파른 언덕길이 약간 힘겹지만 짧은 발품으로 얻어지는 호사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천마봉에 오르니 안타까운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아! 너무 빨리 왔구나.’ 기암괴석 사이로 단풍나무들이 이제 막 물들기 시작했다. 한 주만 더 늦게 왔다면 가을단풍의 정점에 서서 장관을 지켜볼 수 있었을텐데…. 아쉬움이 있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광은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게 했다. 내원궁이 있는 천인암은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도솔천, 미륵부처님의 정토라 불린다. 상상속의 영상이 펼쳐진다. 호남의 내금강이라고도 불리는 선운산 도솔계곡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암석들이 거대한 수직암벽을 이루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지난 6월 명승으로 지정예고되기도 했다. 천마암에서 보면 내원궁이 있는 거대한 바위 아래 마애부처님이 어렴풋이 보인다. 보물 제1200호 도솔암 마애불로 높이만도 무려 15m다. 내금강에 있는 묘길상 마애불의 크기 못지않다.
천마암을 내려와 도솔암으로 향한다. 마애부처님을 제대로 친견하고 참배할 수 있었다. 마애불 가슴에는 사각형의 홈이 메워져 있는데 사리나 경전과 같은 불구를 넣었던 감실로 보이는 곳에 비결(秘決)이 들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 비결은 1892년 8월, 동학조직의 대접주였던 손화중의 포접(包接)에 의해 탈취됐다고 문헌은 말해준다. 마애불을 옆으로 하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천인암 위에 위치한 도솔천 내원궁에 오른다. 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 선운사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형형색색 단풍은 그 장관만으론 빼어나지만 겨울을 앞둔 나무가 모두 버림으로써 생을 다하는 가슴시린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선운사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일심으로 합장하며 다음 생을 꿈꿔본다.
세상의 시간이 뒤로 물러섬이 있을까마는 새벽은 새로운 날로 나아감이 있으니 이것이 새벽의 미덕이다. 그러나 새벽에는 한밤중보다 더 짙은 어둠과 추위가 있는지라 여기에 이르면 중생은 늘 아침을 의심한다. 이렇듯 새벽의 징검다리는 물밑에 잠겨 있으나, 그 물밑에 잠긴 하루를 밝은 눈으로 알아보는 것이 여래의 눈빛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수미산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도솔천兜率天이다. 이미 중생의 걸음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불보살은 한시도 중생을 잊는 때가 없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한 날로 치더라도 오고감이 있는 시간은 아닐 것이며, 그 하루를 위한 때를 준비할 만한 곳이리라. 석가모니가 사바세계로 내려오기 전 머물던 곳이 도솔천이며, 미륵 보살이 부처가 될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선운사 도솔암 큰 바위 위에는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을 모신 곳이 도솔암이라 이 부처님이 용화세상을 기다리는 미륵 부처님인지, 혹 항마촉지降魔觸地의 수인手印에 좌정한 부처님이니 석가 부처님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엄격해 보이는 눈매에 중생을 위한 마음을 가득 담고 있는 것은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도 비춰 알 수 있다.
이 부처님이 선운산에 모셔진 것은 고려가 막 시작되던 때이다 . 모두가 마음은 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 속에 있었을지라도 현실은 새벽만큼이나 춥고 어두웠다. 산마다 사찰마다 그 희망만큼이나 거대한 부처님들이 속속 모셔졌고, 은진미륵같이 왕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미륵 부처님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대신하였다. 그러니 이곳에 모셔진 여래가 같은 희망과 발원이 모인 미륵불이 아니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고려는 그 시작을 불심佛心에 기대어 백성들의 어지러움을 여래의 마음으로 다독이고자 하였다. 이는 고려를 시작한 태조의 발원이었고 백성들의 손길이 이를 만들어 내었다. 그저 세상의 어려움이 중생들의 불심을 엮어 내었다고 하면 그 또한 허망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오래 된 인연과 근기 없이 어찌 그것이 또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니 눈에 보이는 부처님을 새겨 모신 그 손길을 두고 탓할 일은 아니요, 그 부처님의 모습에 천년의 세월을 두고 희망을 되새기는 중생의 마음을 따뜻하게 바라볼 일이다. 여래의 머리 위에는 세월의 풍상을 조금이라도 덜 겪기를 바라면서 만든 누각이 있었으나 그 나무기둥은 바람과 비에 더 쉽게 무너졌으니, 중생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아 누각으로 감추고 덮을 것이 아니라 바위에 새겨진 여래와 같은 마음 속의 불성만이 비바람을 견딜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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