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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아나키즘 등장하다 ①② ③[이덕일의 事思史]
이장희 추천 0 조회 27 14.05.23 16: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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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좌파 전체주의 모두 공격한 黑旗연맹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① 조직 결성

 

 

아나키즘 연구가 다니엘 게렝은 아나키즘에서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시스트의 관계를 ‘형제이자 적’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형제지만 좌파 전체주의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적이다. 일제는 물론 좌파 전체주의와도 치열하게 싸운 존재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1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로포트킨묘. 1921년 크로포트킨의 장례식이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아나키스트들이 합법적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2 크로포트킨의 운구 행렬 중에 유명한 여성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가운데)도 있다. [사진가 권태균]

 

1920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서울시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스무 명 정도가 모여 무엇인가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시인 김억(金億)이 가르치는 에스페란토(Esperanto)어 강좌였다. 강좌를 마친 이들은 30일 시내 장춘관에서 모임을 갖고 ‘조선 에스페란토 협회’를 결성했는데 회두(會頭)로는 김억, 부회두로는 이병조(李秉祚)를 선출했다. 이 무렵 국내에는 에스페란토어에 큰 관심이 일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24일자에는 투고생(投稿生)이 쓴 ‘청년 제군에게, 에스페란토를 권(勸)함’이란 글이 실렸다. 그는 “에스페란토는 일명 세계공통어라 칭하는 것이요……그 조직이 극히 간명(簡明)하고 그 문법이 극히 단순해 서양 어학(語學) 중 한 개 언어를 조금만 이해(少解)하는 사람은 4~5일 내에 학습할 수 있는 것이외다”라고 말하고 있다.

에스페란토어는 1887년 유대인 안과의사 자멘호프(Zamenhof: 1859~1917)가 창안한 국제어다. 자멘호프는 제정 러시아의 비아리시토크(Bialystok: 현재는 폴란드령)에서 출생했는데 이곳은 러시아인, 폴란드인, 독일인, 유대인 등이 어울려 살던 다민족 사회였다. 그의 모국어는 부친의 언어인 러시아어였지만 모친의 언어였던 유대계 이디쉬어(Yiddish)도 유창했고 폴란드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친이 독일어 교사였던 자멘호프는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영어를 익혔고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리투아니아어에도 흥미를 가졌다. 자멘호프는 각 민족 사이의 언어 불통을 해소하는 것이 여러 민족 사이의 평화를 가져오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생각에서 다양한 언어 실력을 기반으로 에스페란토어를 창안했는데, 1910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어가 현재 국제 공용어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 것은 제국(帝國) 미국의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결과지만 에스페란토어는 모든 국가, 모든 민족이 동등하다는 철학에서 나온 국제 공용어였다. 그런데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는 에스페란토어를 아나키즘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전 세계 아나키스트들은 에스페란토어로 서로 소통했던 것이다. 1902년 도쿄대생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 1877~1954)가 근세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에서 아나키즘(Anarchism)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면서 아나키즘은 동아시아에서 ‘무질서, 혼돈’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 받아왔다.

아나키즘은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말로서 ‘없다(an)’와 ‘지배자(arche)’라는 뜻의 합성인데, 글자 그대로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각 개인, 각 지방, 각 조직이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 속에서 서로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은 아니다.

아나키즘이 억압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이론적 배경은 러시아 크로포트킨(Kropotkin: 1842~1921)이 주창한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에 있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 진화의 한 요인(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에서 서로 돕고 의존했던 생물종들은 진화에서 살아남았고, 서로 협력하지 않고 돕지 않는 종은 도태되고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던 두 사상이 영국 스펜서(Spencer: 1820~1903)의 사회진화론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다.

 

 

3 아나키스트들의 공식 언어였던 에스페란토어를 만든 자멘호프. 그는 1910년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올랐다. 4 김억의 에스페란토어 연재. ‘동광’ 제9호(1927년 1월호)부터 15호까지 연재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해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정치철학이 되었다. 반면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피압박 개인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정치철학이 되었다.

국제노동절(International Workers’ Day: 메이데이)은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8시간 노동제 쟁취 총파업에서 비롯된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노동자들은 헤이마켓(Haymarket) 광장에 모여 대규모 항의시위를 전개했는데, 시위 도중 폭탄이 터지는 아수라장 속에서 다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경찰은 이 시위를 조직한 아나키스트 8명을 경찰 살해 교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7년 후 사건 조작이 드러나면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일리노이 주지사 게르드는 구금되었던 3명을 특별사면했지만 아나키스트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등 4명은 1887년 11월 이미 교수형을 당했고, 한 명은 그 전날 자살한 후였다.

아돌프 피셔는 “아나키스트라면 누구나 사회주의자지만 사회주의자라고 반드시 아나키스트는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양자를 가르는 기준은 좌익 전체주의에 대한 입장 차이에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던 바쿠닌이 ‘과도적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 “마르크스처럼 총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상식과 역사적 경험에 어긋나는 사설(邪說)이다”라고 비판한 것처럼 아나키즘은 우익은 물론 좌익 전체주의도 강하게 비판했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론은 좋지만…”이라고 말하지만 아나키즘은 공산주의 이론 내에 전체주의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사상이다.

바쿠닌은 1870년대에 “(극도로 과격한 혁명가에게) 러시아 인민 전체 위에 군림할 왕좌를 주거나 독재권을 줘 보라…1년도 못 가서 그는 차르(황제)보다 더 악독한 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스탈린 집권 50~60년 전에 이미 좌파 전체주의 출현을 예견했다.

러시아 혁명에 참가했다가 서유럽으로 망명했던 볼린(Volin)이 “정치권력은 불가피하게 관료적 강제기구를 만들어낸다…(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일종의 새로운 귀족·지도자·관료·군인·경찰관·여당…을 산출한다”고 비판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좌파 전체주의에 인민들이 극도의 고통을 겪었던 러시아나 중국, 그리고 지금의 북한 현실을 예견한 것이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국내에서 실력양성론이란 민족 개량주의 노선으로 나타난다. 이에 한계를 느낀 재일 유학생들은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1920년 1월 도쿄에서 결성된 조선고학생동우회(苦學生同友會)는 아나키즘 색채가 짙은 단체였다. 1921년 10월 김약수·박열·김사국 등이 조직한 ‘흑도회(黑濤會)’도 아나키즘 색깔인 흑색(黑色)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나키즘 조직이었지만 결성 직후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김약수 등과 노선갈등을 겪다가 박열·정태성·홍진후 등이 따로 흑우회(黑友會)를 결성했다. 흑우회 기관지가 강한 조선인(太い朝鮮人)인데, 강한(太い: 후토이)의 발음이 불령(不逞: 후테이)과 비슷했다는 이유니 실제 명칭은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이었다.(새 사상이 들어오다②사상단체의 등장 참조)

1920년 4월 서울 황금정(을지로) 광무대(光武臺)에서 발족한 조선노동공제회는 선언에서 “만일 우리 인류가 진정한 평화세계와 복지사회를 동경하고 원구(願求)한다면 정복민족과 피정복민족이 없는 세계, 특권계급과 노예계급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고로 약소민족은 강대민족으로부터, 천자(賤者)는 귀자(貴者)로부터, 빈자(貧者)는 부자로부터 각각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 강령 중에 “각종 노예의 해방과 상호 부조를 기(期)함”이라는 내용도 있어서 조선노동공제회도 아나키즘에 경도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총독부와 일경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아나키즘 조직이었다. 직접행동을 주창하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30일자는 청주경찰서 고등계가 교사 신○○를 연행해 취조 후 비밀리에 경성 경찰서로 보냈는데 ‘사건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부쳐서 알 수 없으나 탐문한 바에 의하면 흑기연맹(黑旗聯盟) 사건과 맥을 통한 혐의’라고 보도하고 있다. 일제의 예심(豫審) 종결 전문(全文)에 따르면 1925년 4월께 서울 낙원동 수문사(修文社)에서 조직한 흑기연맹은 “일본의 현재 정치 및 경제 제도 변혁(變革)을 목적으로 한 무정부주의자 결사조직”이라고 전하고 있다.

흑기연맹은 조직 결성 혐의로 이창식(李昌植), 서상경(徐相庚), 홍진유(洪鎭裕) 등 9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 중 서상경·홍진유는 재일 아나키스트 박열(朴烈) 등이 1923년 4월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그해 10월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이었다. 서상경·홍진유는 예심에서 석방되자 귀국해 이창식·신영우(申榮雨)·서정기(徐廷夔)·한병희(韓昞熙)·이복원(李復遠) 등과 흑기연맹을 결성했던 것이다. 흑기연맹은 비록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일경의 검거로 와해되었지만 이는 국내에 직접행동을 주창하는 아나키즘 조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② 박열 부부 대역사건

 

아나키즘의 특징은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직접행동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독재도 부인하고, 혁명의 결정적 순간까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목숨을 던져 직접행동에 나서기에 일제는 아나키즘을 두려워했다.

 

 

도쿄대지진 때 불타는 도쿄경시청. 일본은 도쿄대지진의 혼란을 한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해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사진가 권태균]

 

일본에서 고학 중이던 아나키스트 홍진유(洪鎭裕)는 1922년 도쿄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인노동조사회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일본 니가타현(新潟縣)에서 발생한 한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계기가 되어 창립된 단체였다. <새 사상이 들어오다③ ‘일본유학생과 북풍회’ 참조>

홍진유는 “나는 그날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방청하러 가서 보니 조선인 공산주의자인 김약수가 그 모임의 사회를 보고 있었다. 내가 보니 노동조사회에 노동자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고, 김약수 일파가 매우 뻐기면서 노동자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해서 나는 야유를 퍼부었다”(홍진유 제2회 신문조서)고 전하고 있다. 이때 신영우(申榮雨)가 주소를 가르쳐 달라면서 “노동자의 일은 노동자 자신이 해야 한다. 저들은 야심으로 한다”고 말하고, 반 달쯤 후에 찾아와 박열(朴烈)을 알게 되고 흑우회(黑友會)를 만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재일 유학생들이 만든 흑도회(黑濤會)는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사이의 노선투쟁인 ‘아나-볼 논쟁’을 거치면서 아나키즘 계열은 흑우회가 되고 공산주의 계열은 북성회(北星會)로 갈라섰다.

박열·홍진유 같은 20대 초반의 고학생들이 흑우회를 결성하고 김약수·김종범 같은 20대 후반~30대의 유학생들이 북성회를 만들었다는 특징도 있다. 흑우회에는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 같은 일본인 아나키스트들도 함께했다. 박열은 흑우회 기관지 ‘후테이 센징(太い鮮人)’을 1923년 3월부터는 보다 온건한 제목의 ‘현사회(現社會)’로 바꾸어 발행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직접행동가’였다.


 

1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부인이자 아나키스트였다. 23세에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2 박열과 가네코. 옥중에서 찍은 이 사진은 일본에 큰 여파를 일으켰고 사진 촬영을 허가한 판사가 파면당하고 와카쓰키 내각도 무너졌다

 

그는 일왕(日王) 및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곳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았다. 박열은 무산자동맹회의 초청으로 니가타현 한인 노동자 학살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1922년 9월 서울에 와서 김한(金翰)을 만났다. 박열은 김한이 의열단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폭탄 구입을 요청했다. 박열은 11월 다시 서울로 되돌아와 김한에게 “늦어도 1923년 가을까지는 폭탄을 인계해 달라”고 요청했다. 1923년 11월로 예정되어 있는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식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박열 부부는 1923년 4월 정태성·홍진유·육홍균·이필현, 구리하라 가즈오,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등과 도요타마군(豊多摩郡) 요요하타초 요요기도미카야 1474번지 2층 셋집에서 따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박열이 ‘불령사’라는 나무 간판을 집 밖에 내건 것처럼 비밀조직은 아니었다. 정태성은 “불령사에서는 아나키즘 연구뿐만 아니라 직접행동도 논의되었지만 직접행동은 회원들의 자유의지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역시 직접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은 박열이었다.

박열은 1921년 12월 외항선원 모리다(森田)를 통해 외국에서 폭탄을 구입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고, 약국 수백 군데에서 폭약 판매 허용치인 0.02g씩을 사 모아 폭약을 제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박열은 서울의 기생 이소홍(李小紅)을 통해 여성용 손수건에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한 암호편지를 김한에게 보내 폭탄 구입을 재촉했다. 그러나 김한이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서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박열은 포기하지 않고 김중한(金重漢)에게 ‘조선에 돌아가 폭탄을 구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중한은 ‘귀국하면 수행해 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박열은 훗날 일제 신문조서에서 “다른 방법에 의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생각을 굳히고 있어서 김중한에게 부탁했던 것을 거절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자 김중한과 애인 니야마 하쓰요는 불령사 모임 때 박열에게 크게 항의하고 8월 31일 도쿄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인 9월 1일 낮 12시 도쿄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10만5000여 명이 사망하고, 10만9000여 동이 무너지고, 21만2000여 동의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일본인들이 공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그날 오후부터 돌연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일본 각의는 이날 밤 계엄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본 내무성은 ‘어딘지 모르게 흘러나온 조선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다.

‘도쿄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9월 3일자에 “불령선인(鮮人) 각소(各所)에 방화, 제도(帝都)에 계엄령 선포”라고 보도했다. 아이치현(愛知縣)의 ‘도요하시(豊橋)일일신문’ 9월 5일자는 “대화재(大火災)의 원인은 지진도 있지만 일면에는 불령선인 수천 명이 폭탄을 투하하고 시중에 방화한 데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대지진의 공포를 한인과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 등으로 돌리려는 일본 극우세력의 조직적 음모였다. 이 때문에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부부 등이 헌병 장교에게 살해되고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도 살해되었다.

가장 집중적인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재일 한인들이었다. 재향군인 등으로 구성된 자경단(自警團)은 무차별 한인 학살에 나섰다. 살해된 한인들의 숫자에 대해서 일본 사법성(司法省)은 23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도쿄대 교수를 역임한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가 2613명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실상을 축소·왜곡한 숫자였다. 상해 임정의 ‘독립신문’은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한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된 일본인이 59명에 달했으니 얼마나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9월 3일부터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인들을 검속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9월 3일 새벽 세다가야(世田谷)경찰서로 연행된 것을 비롯해 정태성·장상중·최규종·홍진유 등 불령사 회원들이 일제히 검속되는 등 모두 6200여 명의 한인이 검속되었다. 박열을 연행한 일본 경찰이 집주인에게 “영구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집을 빌려주는 게 좋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의도적 검속이었다.

일본 정부는 10월 16일에야 한인 대학살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를 해금시키는 한편, 10월 20일 느닷없이 불령사 회원 16명을 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검사국에 기소했다. 일경은 불령사를 “무정부주의 경향의…사회운동 및 폭력에 의한 직접행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단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령사는 간판까지 내건 공개 조직이란 점에서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였다.

박열 부부에게는 왕세자 결혼식 때 일왕 등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형벌이 사형 하나뿐인 대역죄(大逆罪)를 적용했다. 그 유일한 근거는 김중한의 애인 니야마 하쓰요가 그런 말을 전해 들었다는 진술뿐이었다. 일제 검찰은 1924년 2월 14일 박열 부부와 김중한에 대해 ‘천황 폐하와 황태자 전하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대역 예비죄’라고 예심을 종결지었지만 폭탄 구입에 관해 논의한 것을 대역죄로 모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예심 종결과 함께 1924년 6월 방면돼 이 가운데 홍진유와 서상경은 귀국해서 흑기연맹을 만들었다.

박열 부부 재판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국가 사회제도를 ‘제1계급-황족, 제2계급-대신 및 기타 실권자, 제3계급-민중’으로 나누고 “황족은 정치의 실권자인 제2계급이 무지한 민중을 기만하기 위해 날조한 가엾은 꼭두각시이자 나무인형이라고 생각한다”고 진술해 큰 충격을 주었다. 박열도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앞에서 박열이 “다른 방법에 의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생각했다”고 서술했는데, 해방 후 흑우회원 최영환(崔英煥)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상해에서 도쿄까지 실제로 폭탄을 운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쿄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아서 예정대로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면 폭탄을 투척했을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26년 3월 판결공판 때 사형을 선고하자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라면서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태연했고, 가네코는 판결 순간 “만세!”라고 외쳐 재판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가네코는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대역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로 감형되어 각각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도치기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로 이감된 가네코가 1926년 7월 23일 갑자기 사망했다. 형무소 측은 자살로 발표했지만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와 원심창(元心昌) 등 흑우회원들의 사인 규명과 시신 인도 요구를 모두 거절해 ‘타살 의혹’이 짙어졌다. 옥중에서 “한 번은 저버린 세상이지만/글 읽으니/가슴에 솟는 가여운 슬픔”(나는 어디까지나 불행했나이다)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던 가네코는 23세에 불과했다. 박열은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에야 아키다(秋田) 형무소에서 22년 만에 석방되었다.

 

 

 

 

“죽음으로 맹약하고 폭력으로 조선혁명 완수”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③민족을 초월한 한·일 연대

 

아나키즘은 국제 연대조직이었다. 그래서 한국 아나키즘 사건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동지로 참여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피압박 민족의 견지에서, 일본인들은 피압박 민중이란 견지에서 사물을 바라보니 민족의 틀을 넘어서 동지로서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동대지진 때의 계엄사령관 후쿠다 마사타로를 암살하려 했던 사건의 공판 결과가 실린 1925년 동아일보의 지면이다. 한국 여성과 일본 아나키스트가 연계된 사건이다. [사진가 권태균]

 

 

1923년 9월의 도쿄대지진, 곧 관동(關東)대지진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계엄사령관은 군부 실력자 후쿠다 마사타로(福田雅太郞·1866~1932) 대장이었다. 일본 극우파는 대지진 때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재일 한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그중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가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衫榮)와 동지 이토 노에(伊藤野枝) 및 일곱 살짜리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橘宗一)를 죽여 시신을 우물에 던지는 ‘아마카스 사건(甘粕事件)’을 일으켜 큰 충격을 주었다(새 사상이 들어오다② 사회주의 단체 조직 참조).

저명한 사상가 오스기 사카에가 처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은 큰 물의를 일으켰고 후쿠다는 계엄사령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 아나키스트 와다 규타로(和田久太<90CE>·1893~1928) 등이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던 9월 1일 전 계엄사령관 후쿠다를 저격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1924. 9.2~5) 등에 따르면 와다 규타로는 오스기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비록 후쿠다의 목숨을 끊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본 극우파의 무차별 테러행위에 대한 응징이란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와다 규타로는 기로틴(ギロチン)사의 나카하마 데쓰(中浜哲)·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90CE>) 등과 손잡고 후쿠다 저격에 나선 것이었다. 나카하마 데쓰는 1922년 8월 ‘자유노동자동맹’을 결성하고 박열과도 만나서 니가타 현에서 발생했던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을 함께 조사했던 아나키스트였다. 단두대를 조직 명칭으로 삼은 기로틴사는 22년 결성된 직접 행동조직이었는데, 나카야마 데쓰가 박열의 동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무렵 한인과 일본인 아나키스트들은 서로 동지였다. 일왕(日王)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석방된 서동성(徐東星)은 25년 9월 대구에서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는데 진우연맹은 기로틴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단체인 진우연맹 관련 기사를 다룬 당시 동아일보의 지면이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이 대구로 함께 호송됐다는 제목이 눈에 띈다.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요사(要史)는 25년 11월 진우연맹이 방한상(方漢相)을 오사카·나고야·도쿄 등에 몰래 보내 일본의 자아인사(自我人社)·자연아연맹(自然兒聯盟)·기로틴단(團)등과 교섭했다고 전하는데, 기로틴단이 바로 기로틴사를 뜻한다. 기로틴사는 학살자였던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도 습격하고 후쿠다 자택에도 폭탄을 보내는 등 계속 응징에 나서 일경이 대대적인 수사를 전개하는데 그 와중에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났다. 함북 명천(明川) 경찰서 고등계는 한인 여성 김선희(金善姬)와 전정화(全鼎花)를 체포하는데 기로틴사의 후루타와 그 동지 타카시마(高島三次)와 접촉한 혐의였다.

25년 12월 청진 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따르면 후루타와 다카시마는 23년 서울 견지동에서 전정화를 만나 권총과 폭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정화는 후루타와 다카시마를 김선희에게 소개하는데, 간도 출신의 김선희는 남편 황돈(黃敦)이 제령 위반으로 징역 8년의 중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으며, 그 부친은 간도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살해당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때 후루타 등이 요구한 것은 의열단의 폭탄 10개와 권총 5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무기 구입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선희와 전정화는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일본 아나키스트들도 박열 못지않은 탄압을 받아 24년 9월 체포된 기로틴사의 나카하마 데쓰는 이듬해 5월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되었고 후루타 다이지로는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해 26년 4월 교수형을 당했다. 이처럼 일본인 아나키스트도 사형시키는 판국이니 이들과 연결된 국내의 진우연맹이 무사할 리 없었다. 일경은 26년 8월 11명의 진우연맹원들을 검속했다.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보통 1년 이상 구속 상태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면서 신문받았는데, 이 기간은 판결 때 구속 일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동아일보 27년 2월 28일자는 “진우연맹원들이 대구형무소 벽을 두드리면서 ‘구속 1년이 넘은 현재까지 예심도 종결하지 않고 가족 면회도 시키지 않는다’면서 22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일항쟁기 때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단식투쟁은 묻혀 버리기 일쑤였지만 진우연맹원들의 단식투쟁은 세상의 이목을 끌었고 일제는 부랴부랴 재판을 진행해 3월 8일 예심을 종결했다. 방한상·신재모(申宰模) 등 9명의 한인들과 도쿄에서 압송당한 구리하라(栗原一郞) 등 2명의 일본인들이 피고였다. 27년 5월 대구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는 수백 명의 방청객이 쇄도했는데 용수가 벗겨지자 연맹원들은 서로 악수하면서 방약무인한 태도를 지었다고 전한다. 야마자와(山澤) 검사의 방청 금지 요청을 가네다(金田) 재판장이 받아들이자 구리하라가 “공개 금지 이유를 말하라”면서 재판장을 크게 꾸짖어 소동이 벌어졌다. 기자도 내쫓고 피고 가족 10여 명만 입석시킨 채 재판이 속개되자 변호사들이 항의 퇴정했다.

일제가 재판을 비공개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진우연맹원들의 혐의 때문이었다. 이들의 혐의는 ‘대구 부내의 관청과 회사·은행·우편국·신문사 등을 폭파하려는 음모’였다. 대구 지방법원장과 대구 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언도공판에서 김정근(金正根)과 구리하라 등은 징역 10년, 방한상·신재모 등은 징역 5년 등이 구형되었는데 피고들이 재판장에게 노호(怒號)해서 주위가 크게 소란했다고 전하고 있다.

26년 새해 벽두인 1월 4일에 서울 시내 곳곳에 허무당(虛無黨) 선언이란 인쇄물이 배포돼 일경에 비상이 걸렸다. 신문은 “시내 각 경찰서에서 비상하게 놀라서 각 서 고등계가 서로 연락하면서 대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동아일보(1926년 1월 8일)는 “허무당 선언에 관한 기사는 당국이 일체 게재를 금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경은 1월 12일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 윤우열(尹又烈)을 체포하는데 신문은 ‘모 중대사건’이라고만 표현해야 했다. 훗날 밝혀진 허무당 선언은 “우리를 박해하는 포악한 적에게 선전을 포고하자!”며 “우리가 부인하는 현세의 이 흉포악독하기가 사갈(蛇蝎·뱀과 전갈) 같은 정치, 법률 및 일체의 권력을 근본으로부터 파괴하자!”라고 덧붙이고 있다.

일제가 허무당 선언에 겁을 먹은 것은 “이 전율할 광경을 파괴하는 방법은 직접행동이 있을 뿐인데 혁명은 결코 언어와 문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라고 직접행동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과 폭탄으로 일제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직접행동’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혁명 노선이었다. 허무당 선언은 “합법적으로 현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능아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맹약하고 폭력으로써 조선혁명의 완수를 기하고자 허무당을 조직한다”고 주장했다. 허무당 선언은 “우리를 착취하고 학대하고 살육하는 포악한 적에 대해 복수의 투쟁을 개시하자! …포악한 적의 학대에 신음하는 민중들이여, 허무당의 깃발 아래 모이자!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허무당 만세! 조선 혁명 만세!”로 끝맺고 있다.

이처럼 직접 혁명을 주창하는 아나키스트들의 동향을 일제가 주시하는 와중에서도 27년 평안도 지역에서는 관서흑우회가 만들어지고 29년 11월에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출범했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평양의 여성 사회사업가였던 ‘백선행(白善行) 기념관’에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려 했지만 일제가 집회를 불허하자 평남 대동군 기림리 공설운동장 북쪽 송림에 전격적으로 모여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이 평양으로 집결하자 일경은 역과 여관 등지를 대대적으로 검문해 타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하거나 평양 밖으로 추방했다.

이처럼 국내에서 일제의 그물 같은 경찰망 때문에 활동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자마자 와해되는 것도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국외에 근거지를 둔 채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하는데 그런 대표적인 조직이 19년 11월 10일 길림 파호문(巴虎門) 반씨객점(潘氏客店)에서 결성된 의열단(義烈團)이었다. 동아일보 23년 4월 20일자는 “지난 19일 아침에 경기도 경찰부를 위시해서 시내 각 경찰서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빛을 띄우고 각 기관 내를 엄중히 경계하는 동시에 모 중대 범인의 자취를 엄중히 추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의열단원 한 명이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했다는 정보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듯이 의열단은 일제에 공포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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