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14 - 발루아왕조 앙리2세 사후 위그노와 피로 피를 씻는 종교전쟁을 벌이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가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1453년에 동로마 비잔틴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 메흐메트 2세의 침공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기사 몇명만 거느리고
말을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는데, 고종황제가 조선군을 거느리고 말에 올라 일본군 진영으로
돌격하다가 죽었다면 여한이 없겠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니 고종은 말을 탈줄 몰랐기 때문 입니다.
프랑스 발루아왕조의 국왕 앙리 2세는 문무를 겸비한 것인지 아니면 국왕 이전에 기사인 때문인지
말을 잘 탈줄 아는 정도를 넘어서..... 결혼식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마상 창시합에서 선수로
나서 말을 타고 돌진하다가 상대 기사의 창에 눈이 찔리니 이 부상으로 죽는데, 선비의 나라
이자 군자의 나라인 조선 군주 와 기사(무사) 의 나라 프랑스의 군주는 이처럼 서로 다른가 합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던 1453년에 프랑스는 영국과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했으며, 1500년
에 이르면 인구 1,500만에 프랑스 대부분의 토지가 봉건 영주가 아닌 프랑스 왕령이 되는
등 중앙집권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이후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쟁하였으나 카를 5세에게 패배하였으며 이 와중에 종교 개혁으로 왕실에 위기가 닥칩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칼뱅파 신자들은 위그노라 불리었는데 16세기 중반에 5% 에 불과했지만
왕실에 대항하는 대귀족들이 신봉하였으니, 발루아 왕조와 위그노(개신교도)의
부르봉 가문, 가톨릭의 기즈 가문은 1562년부터 1589년까지 무려 "8차례" 에 걸친
위그노 전쟁 내란에 돌입하였는데.... 전쟁의 결과로 발루아 왕조가 부르봉 왕조로 교체됩니다.
프랑수아 1세가 1547년에 죽고 왕이 된 앙리 2세는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확고히 했지만
개신교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카를 5세를 견제했는데,
그후 1559년 잉글랜드 및 에스파냐와 함께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었지만 이때
펠리페 2세와 그의 딸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에서 국왕이 마상 창시합 중에 사망합니다.
1. 앙리 2세
앙리 2세는 1547년 28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어린 시절 부왕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로 잡힌후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 맺은 조약에 따라 부왕을 대신
해서 형 프랑수아와 함께 마드리드에 볼모로 잡혀가서 3년 동안 체류했으며 이후 1533년
부왕의 대이탈리아 정책의 일환으로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결혼했습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부친은 로렌초 2세인데 로렌초 데 메디치의 손자로 16세기 초 피렌체
의 통치자이자 우르비노 공작이었으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을 헌정한 사람으로
명한 인물이고, 또한 교황 레오 10세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숙부였는데 하지만 앙리
2세는 그 이듬해 35세의 미망인 디안 드 푸아티에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앙리 2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연인이자 현명한 조언자 역할을 했으며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무시해서 궁정 내에서 외국인 왕비를 무력하게 만들었는데....
앙리 2세는 형 프랑수아가 1536년에, 동생 샤를은 1545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유일한 왕위계승권자가 되었고 부왕이 사망하자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앙리 2세는 즉위 직후 부왕때 파벌을 이루었던 사람들을 멀리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중용하면서
국가 행정체계를 전문화·세분화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또한 프랑수아 1세가 물려준 부족한
국가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과세의 종류를 확장시킵니다.
앙리 2세는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확장되고 있던, 이른바 ‘위그노’ 라 불리던 칼뱅파 개신교 세력에
대한 철저한 탄압정책을 실시했으니, 그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는 1551년 샤토브리앙
칙령을 통해 세속 법정에서도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이단’들을 처결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155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개신교는 민중은 물론 귀족계층에까지 확산되어 가고 있었으니,
특히 이단인 옛 카타르교의 근거지 남부 프랑스 지역은 개신교의 본거지가 되었고 이곳 제후들중
하나인 방돔 공작이자 나바라왕이었던 앙투안 드 부르봉은 개신교를 적극 지원했으며, 궁정 내부
에도 개신교 물결에 심정적으로 동참했고 개신교에 탄압에 저항하는 소요도 곳곳에서 발생합니다.
1557년에는 파리에서도 소요가 일었고 앙리 2세에 대한 암살 시도도 발생했으니 이에 따라 왕의
대응 또한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1559년 6월 앙리 2세는 에쿠앙 칙령을 통해 철저한
개신교 척결을 명령했고 그의 정책을 비판한 파리고등법원 판사들은 모두 투옥되었으며,
앙리 2세는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단으로 왕권에 대한 도전과 공격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은 어디까지나 프랑스내 국가체제 및 왕권의 확립에
연관되는 한에서만 이루어졌으니 앙리 2세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황제에 대립하는
개신교도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원을 계속하는가 하면 이교도인 이슬람 오스만
제국과 군사적 동맹을 맺는등 종교적인 신앙심의 논리에는 배치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앙리 2세는 1551년에는 이탈리아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과 대립하여 파문을 받았는데
양자 사이의 대립은 필리프 4세 당시의 사태와 비슷하게 교황 율리우스 3세의 후퇴로
막을 내렸으니.... 14세기초 필리프 4세부터 시작된 교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 종교 논리에
대한 정치 논리의 우위 개념이 16세기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시기에 노골적으로 강조되었습니다.
2. 이탈리아 정책과 카토-캉브레지 조약
앙리 2세 초기 대외노선은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원정이었으니 1551년부터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에게 선전포고했으며 1552년에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하기 위한 샹보르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교도로 원수 이슬람 오스만제국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오스만 함대가 지중해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동안 앙리 2세는 라인강 건너 제국의 영토를 침공하기도 했는데, 전선은 북부 이탈리아와
구 부르고뉴공국 지역에서 형성되었으니 전쟁의 목적은 실질적인 이탈리아 장악이나 영토
확장이라기 보다는 유럽 세계에서 카를 5세 권력 제약과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에 있었습니다.
1555년 루터교 제후들로 구성된 슈말칼덴 동맹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에 아우쿠스부르크 화의가
이루어지고 1556년 카를 5세가 양위를 선언하자 사정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와 황제 직위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면서도 번영하는
지역인 네덜란드(구 부르고뉴 공국), 나폴리 왕국, 에스파냐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1557년 전쟁은 소강 국면에 들어섰으니 에스파냐와 프랑스 모두 전쟁으로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두 나라 모두 내부의 개신교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 더욱 시급해졌기 때문이었으니,
앙리 2세 입장은 주적이었던 카를 5세가 사라진 마당에 전쟁을 더 지속할 명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1559년 4월 앙리 2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었으니 엘리자베스 1세에게 칼레시를 반환받는 대신 50만 에퀴를 주기로 약속
했으며 펠리페 2세와 협상으로 앙리 2세가 점령한 부르고뉴 지역 일부를 유지하는 대신
이탈리아 점령 지역들을 원상 복귀시키고 이탈리아 문제에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기로 합니다.
즉 앙리 2세는 칼레시와 부르고뉴 일부 지역을 획득하여 영토적 단일성과 통일성을 제고하는 한편 무익한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며, 엘리자베스 1세는 앙리 2세의 지원금으로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극복할수 있었고 펠리페 2세는 지중해 전역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카토-캉브레지 조약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은 이제 프랑스는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
으로 눈을 돌리겠다는 앙리 2세의 의지였으며 반면 이미 대서양 항로를 장악한 에스파냐는
돈키호테 처럼 여전히 중세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지중해 장악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대서양을 향한 앙리 2세의 새로운 시대는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더 이상 펼쳐지지 못했으니, 카토-
캉브레지 조약의 일환으로 1559년 6월 30일 앙리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펠리페 2세 사이
의 결혼 및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사부아 공작 엠마뉘엘-필리베르의 결혼이 동시에 거행되었습니다.
전쟁의 종식과 두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성대하게 벌어졌고 앙리 2세는 자신이 마상
창시합에 참가했으니 상대는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 드 로르주 였는데.... 가브리엘의
경기용 창이 앙리 2세의 안면을 정통으로 가격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니, 계획된 암살이 아닌
사고였기 때문에 병상의 앙리 2세는 가브리엘을 용서하고 대역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앙리 2세는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다가 7월 10일 사망했는데 그에게는 피렌체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의 사이에 세명의 아들(프랑수아, 샤를, 앙리)이 있었지만 아들
들은 너무 어렸고 대신할 만한 남성 후계자 또한 두지 못했으니.... 어린 후계자들에게
는 종교 전쟁이라는 참혹한 내전과 왕권 실추라는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 프랑수아 2세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3대 왕 프랑수아 2세는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장남으로 결혼 11년만
에야 태어났는데 4세 때 1548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약혼했고, 15세 때인 1558년 결혼했는데
메리 여왕은 부왕 제임스 5세가 급사하자 생후 9개월인 1543년 스털링에서 여왕으로 즉위한 상태
였으며 프랑수아 2세도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하자 1559년 7월 프랑스왕이 됩니다.
메리 여왕은 제임스 5세의 외동딸이었으니 프랑수아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
이 프랑스-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을테고, 거기다가 메리 스튜어트의 증조 외할아버지는
헨리 7세라 그 아들은 잉글랜드 왕위까지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으니 영국 튜더 왕조가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대가 끊기면서 헨리 7세의 후손중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때 메리 여왕이 두번째 남편 단리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의 제임스 1세가 되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의 국왕이 되었으니 만약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튜더 왕조의 대가 끊기는 동시에 프랑수아 2세가 오래 살아 메리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더라면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프랑스 동군연합이라는 광대한 제국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시아로 치자면 우리 한국인 왕자가 한국 + 일본 + 중국왕 이라? 물론 그럴 가능성은 없는게.... 유럽은
기독교 영향으로 국왕도 1부 1처제니 정실 소생 왕비가 아니면 후궁이나 궁녀 소생은 사생아라 왕위
계승권이 없고, 또 서양과는 달리 딸은 왕위계승 자격이 없는지라 촌수가 멀어도 남자 친척을 찾으며
게다가 동양 3국은 서양과는 문화가 달라 티국의 사위가 왕이 되기는 애초 불가능하니 문화의 차이라?
문제는 프랑수아 2세가 15세로 어리고 통치능력이 없었으며, 약골이라 병치레를 자주했다는 것인데....
국왕에 오른지 한해만에 사망하면서 짧은 결혼동안 메리 여왕과 사이에서 자손을 두지 못했으니
또 메리 여왕은 시어머니 카트린을 상인이었던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는데, 이는
자식도 없이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자 되려 카트린에 의해 스코틀랜드로 쫒겨난 원인이 되었습니다.
1559년에 앙리 2세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자 왕비인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 쪽의 친족인
기즈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니 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은 칼레를 잉글랜드로 부터 탈환한
전쟁영웅이었고, 동생 로렌 추기경 샤를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 수장으로 매우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습니다.
한편 개신교도(위그노)들은 부르봉 가문의 당주인 나바르 왕 앙투안 드 부르봉을 맹주로 추대했지만 그는
열성적인 신교도 아내인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나바르 왕비 마르그리트의 딸) 에게 주도권을
내어 준 유약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시 동생인 콩데 대공 루이 드 부르봉이 개신교도들의 중심이 됩니다.
4. 앙부아즈의 음모
15세인 프랑수아 2세의 삼촌인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과 추기경 샤를에 의해서 국사가
운영되었는데 이들이 큰 권력을 가지게 되자,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와 그녀의 부군인
방돔 공작 앙투안 및 아우인 콩데 공작 루이 등은 위그노 귀족인 라 노르디를 중심
으로 한 불평 귀족들과 손을 잡고 어린 왕을 꾀어 내어 기즈 집안을 공격할 것을 약조합니다.
1560년 3월 17일 시행 직전에 발각되어 수백명의 관련자들이 처형되거나 구금되었는데 이 사건
을 앙부아즈의 음모라고 부르니, 기즈 형제는 부르봉 가문의 콩데 대공 루이가 흑막이라고
의심해 콩데 공은 11월에 체포되었는데 이 일로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의 대립은 더욱 심화됩니다.
12월 오를레앙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위그노(칼빈파 개신교도)에 대한 심한 규제가 통과
되었고, 콩데 공작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귀에 발생한 농양으로 연기되었고
프랑수아 2세가 1년만인 1560년 12월 5일에 요절하는 바람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위그노들은 가톨릭 교회 성상(聖像)을 1560년 루앙과 라 로셀에서 처음으로 파괴했는데, 프랑수아
2세가 죽은 후인 이듬해에는 20개의 도시에서 위그노(개신교도)들이 성상을 부수자 격노한
가톨릭 도시 주민들에 의한 유혈 복수가 상스, 카올, 카르캉느, 투르 등 각 도시에서 발생했습니다.
왕태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퐁텐블로에서 자문회의를 소집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위그노)의 화합을 의도했지만 기즈 가문은 이단자는 모두 숙청해야 한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으며, 선왕 앙리 2세의 장부(情婦)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억눌려 있었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들 프랑수아 2세 재위 기간을 기점으로 권력 장악에 나섭니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앙리 2세의 교육을 맡게 되었으니 앙리 2세는 아름답고 자상한 디안을 따랐는데,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앙리 2세에게 디안은 어머니이자 기사도 문학에 등장하는 귀부인으로
왕에 오른후 총애를 받았으니, 왕태후 카트린은 남편이 디안에게 준 보석과 아네 성 및 슈농소성을
빼앗는데, 디안을 모델로 그려진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 라는 그림이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습니다.
5. 샤를 9세
샤를 9세는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4대 왕으로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차남인데, 형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자 10세에 왕위에 올라 14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으니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바닥까지 떨어진 발루아 왕가의 왕권을 회복시킬 비책으로 종교를 선택합니다.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이 되었지만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사병을 거느린 대귀족
들과 격렬히 대립하면서 이해관계를 조율해 나가야 했으니 강력한 기즈 가문을
통제하기 위해 위그노(개신교도)의 맹주였던 부르봉 가문을 우선시하여, 나바르 왕
앙투안 드 부르봉을 국왕 총대리관으로 삼고 콩데 공 루이 드 부르봉에게 특사를 단행합니다.
또한 카트린은 협조파 대법관 미셸 드 로비탈을 중용했으니, 1561년 1월 “오를레앙 관용칙령” 을
발표하자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이 반발하는 중에 8월에 사교(司教)회의가 위그노와의
대화를 바라는 왕가의 요청을 받아들이니 생 제르망 앙레 삼부회 안에서 종교회담이 열렸는데,
위그노측은 테오도르 드 베즈를 의장으로 하는 12명의 목사와 20명의 평신도를 대표로 보냅니다.
하지만 가톨릭과 개신교간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1562년에 섭정정부는 궁정내 당파
싸움에 편승한 지방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생 제르망 칙령”을 발표했으니 내전을 피하기
위해 위그노에게 양보해 성벽 바깥 및 집안에서의 에배를 용인했지만 3월 1일 샹파뉴 지방
바시에서 기즈 가문 패거리들이 예배를 보던 칼뱅파 교도들을 습격해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위그노의 장 드 퐁테뉴는...."기즈 공이 다가오기에 신교도들은 칙령에 따라 성벽 바깥에서 예배를
보았다. 몇명의 종자들이 예배자들을 모욕하고, 싸움을 걸면서 우연하게 기즈 공은 자신의
이마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기즈 공의 피를 본 종자들은 격노하여 바시의 주민에 대해 살육을
벌였다." 기즈 가문의 이 도발(바시의 학살)로 인해 가톨릭과 위그노는 충돌을 피할수 없게 됩니다.
1) 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
왕태후 카트린은 가톨릭의 대표 세력인 기즈 공작이 1562년 바시 대학살 이후 위그노 측과 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에 돌입한 정세를 이용해 배후에서 신교도와 구교도를 적절히
농단하며 10여년 사이 왕권을 크게 신장시켰으니 카트린은 무능하고 사치만 일삼는 아들들을
대신해 대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불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입니다.
1562년에 일어난 바시의 학살은 두 종파간에 격렬한 내전을 불러 일으켰으니 개신교 부르봉
가의 콩데 공 루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조직화하고, 루아르강 연안의 마을들을 점령
하며 군대를 주둔시켰으니..... 위그노들은 바시의 학살 이전부터 동원을 개시했지만
루이는 바시의 학살을 칙명이 깨진 증거로 여기고 군사행동의 대의명분으로 이용합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위그노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햄턴코트 조약을 맺고, 원조의 담보로
루앙블, 디에프, 루앙을 인도하는 약속(개신교도들은 나라를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노?) 을 하자
잉글랜드군이 루앙블에 상륙했고 주전장은 주로 루앙과 드루, 오를레앙에서 벌어졌으며
노르망디 루앙 포위전(1562. 5~10)에서 국왕군이 마을을 탈환하자 나바르왕 앙투안이 전사합니다.
드뢰 전투(1562. 12)에선 콩데 공 루이가 기즈 가문의 포로가 되었지만 부르봉군도 적군의 사령관
인 안 드 몽모랑시를 붙잡았으며, 1563년 2월의 오를레앙 포위전에선 기즈 공 프랑수아가
위그노측 볼트로 드 멜레에 의한 총격을 당해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는데
기즈 가문은 이 암살이 적대자였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조종으로 이뤄졌다고 믿었습니다.
기즈 공 프랑수아의 암살로 폭동과 오를레앙이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트린이 평화협상에 나서
1563년 3월 19일 “앙부아즈 칙령”을 반포했으니 기즈 일파는 “이단자(개신교도)” 와의 타협을
두고 볼수없다며 반대했지만 개신교측 발루아 왕가는 양측간 화합이 잉글랜드군에 점령당하고
있는 루앙블의 탈환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 7월에 잉글랜드군을 축출하는데 성공
하자 8월에 샤를 9세가 성인이 되었다며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섭정은 끝났다고 선언합니다.
2) 2차 위그노 전쟁(1567~1568)
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부르봉 가문의 콩데 공작 루이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불화는 겉잡을수 없이 번졌고, 카트린은 두 세력의 중재자로 왕권을 어느 정도
안정시킬 수 있었는데 샤를 9세 친정선언 이후에도 카트린은 계속 정치의 주도권을 잡아
1564년 부터 1566년에 걸쳐 아들의 국내 순행에 동행하여 국왕의 권위 재흥을 꾀했습니다.
스페인군이 플랑드르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프랑스령을 통과하여
군대를 증강시킨 것도 위그노들에겐 위협으로 여겨져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었고
1567년 9월에 위그노군은 샤를 9세를 납치하여 자신들의 진영에 묶어놓으려 했지만 이
모의는 실패했는데.... 그러나 라 로쉘 등 몇 개의 도시가 위그노측에 가담한다고 선언합니다.
님에서는 가톨릭 신자 성직자와 평민이 학살되었는데 이 사건은 미체라드(Michelade)로 불리웠으니 학살
사건으로 제2차 위그 전쟁이 일어났고 주된 전장인 생 드니 전투에서, 1567년 11월 10일에 국왕군이
승리했으나 사령관이던 안 드 몽모랑시가 전사했으며 위그노는 오를레앙과 블루아를 공략하며 수도
파리를 압박하자 1568년 3월 롱쥬모 협약이 체결되면서 위그노에 대한 신앙의 자유와 권리가 주어집니다.
3) 3차 위그노 전쟁(1568~1570)
1568년 여름에 이 화평에 반대하는 가톨릭 교도들이 각지에서 위그노에 대해 이단이자 사탄이라며 박해
를 가하자 위그노도 보복해 가털릭 교도들을 마귀라고 부르며 살해했으니,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
는 화평파이던 대법관, 미쉘 드 로비탈을 파면했고, 정치는 더욱 더 가톨릭 우세의 경향으로 흘렀습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콩데 공 루이와 콜리니 제독 등 위그노 지도자들은 궁정을 탈출했지만 부하 대부분은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9월에 “생 모르 칙령”이 나오면서 위그노의 예배 자유권이 박탈당했고 11월에
네덜란드 반란군의 지도자인 오라녜 공 빌렘이 위그노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프랑스
를 침공했지만 그의 군대는 충분한 급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금과 안전을 이유로 철수합니다.
위그노는 콩데 공 루이를 사령관으로 하여 프랑스 남서부의 군대와 독일에서 온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
민병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군대를 편성했으니 용병부대는 콩데 공 루이의 전사 이후에도 위그노에
고용되었기에, 위그노는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의 왕관의 보석을 담보로 잉글랜드로 부터 돈을 빌립니다.
위그노의 군자금 대부분이 잉글랜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제공되었기에 이것은 그녀
의 수하인 프랜시스 월싱엄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가톨릭군은 왕의
동생인 앙주 공작 앙리가 사령관이 되어 스페인, 교황령, 토스카나 대공국의 원군을 빌립니다.
위그노군이 라 로쉘 방위전을 위해 푸아투와 생통쥬 지방의 몇개 도시를 포위하고 거기서 앙굴렘과 코냑
을 침공하니 1569년 3월 16일에 벌어진 자르냐크 전투에서 위그노의 사령관인 콩데 공 루이 드
부르봉이 전사하자 매우 기뻐한 국왕의 동생 앙주 공 앙리는 루이의 시체를 장대에 매달아 끌고 갔습니다.
위그노는 콩데 공의 15세 아들인 앙리 드 부르봉을 명목상의 사령관으로 하여 콜리니 제독이 집권하는
형국으로 싸웠는데, 국왕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 나바르 여왕인 잔 달브레의 16세 아들인 앙리
드 베아른(앙리 4세)을 지도자로 삼았는데 위그노는 라 로슈 - 라베이유 전투(1569. 6. 25) 에서
승리했지만 푸아티에를 빼앗지는 못했고, 몽콩투르 전투(1569. 10. 30)에서 국왕군에게 대패합니다.
콜리니 군대는 남서부로 후퇴해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 드 로르쥬와 합류 재편해 1570년 봄에 툴루즈를
약탈하고, 남서부로의 연락로를 차단한 이후 론 계곡을 따라 진군해 파리에서 200km 지점인 라 샤히떼-
슈흐-르와흐에 도달했으니 거듭된 전쟁으로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부담이 급증하자 샤를 9세는 평화적
해결방법을 강구해 1570년 8월 8일 생 제르망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위그노에 대한 양보가 이루어집니다
4)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1572. 8)
왕태후 카트린과 발루아-앙굴렘 왕조에는 적이 나타났는데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였으니, 독실한
개신교도로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을 지원했던 잔은 부르봉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앙리 드 부르봉(앙리 4세) 을 위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카트린은 폭력적 수단을 배제하고 신교도들과 구교도들 간의 분쟁을 중재하여 발루아
왕가를 두 종파 간의 징검다리이자 종파를 초월한 정통 프랑스의 왕조로 만들고자
했으나 프랑스 전역은 다시 종교전쟁에 휩싸였고 거기에 피레네산맥 나바르의 여왕
잔 달브레가 발루아 왕조에 도전장을 내밀자 카트린의 온건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샤를 9세가 위그노의 지도자 중 한명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에게 감화되어 위그노
신앙에 빠져들 기미가 보이자 당황한 카트린은 한때 적이었던 기즈 공작과 손잡고, 위그노
교도를 축출해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으니 그녀는 우선 나바르의 앙리 드 부르봉과 자신의
막내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결혼시킨후 결혼식 하객으로 온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더 나아가 기즈 가문은 집안의 원수를 끝장냄과 동시에 개신교도들을 뿌리뽑고자 했으니 처음에는 한명을
암살하려던 계획이 결국은 신교도 하객 모두를 대학살하는 계획이 되었는데... 카트린은 부르봉 가문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기즈 가문의 학살 계획을 묵인하자, 기즈 가문은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 밤을
기해 수도 파리에서 일제히 위그노 사냥에 돌입했으니 이것이 곧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입니다.
1572년 8월 18일,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그외 위그노(칼뱅파)측 귀족들이 왕녀 마르그리트와 위그노
의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앙리 4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오자 8월 22일, 콜리니
제독을 저격하려 한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니 위그노들에 의한 보복을 두려워한 3대 기즈 공작
앙리 1세 드 로렌과 그 일파는 행동에 나서 8월 24일 아침에 콜리니 제독의 숙소를 기습하여 죽입니다.
콜리니 제독 시체는 창 밖으로 내던져 가톨릭 교도인 파리 시민들에 의해 무수히 찢긴후 조각나버렸으며,
나머지는 교수대에 걸린후 불태워져 센 강에 던져졌고 그리고 5일간에 걸쳐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어
위그노의 남녀노소는 가톨릭교도들에 의해 어린아이까지 모두 살해되었고, 그들의 가옥은 약탈당했습니다.
이러한 만행은 샤를 9세의 허가도 없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무려 5주간이나 계속되어 몇개의
도시는 무질서에 휩싸였으니 결국 수도 파리 및 대도시에서 2,000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되었고,
지방에선 10,000명 이상이 희생되었으니 나바르 왕 앙리와 사촌동생인 콩데 공 앙리는 가톨릭
으로 개종에 응하는 것으로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니 그럼 결혼식에서 신랑만 겨우 살아남은 것입니다?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와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단인 위그노(개신교도)들을
몰살시킨데 대해 만족했지만 유럽 전역의 신교도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으니 프랑스
에서는 위그노들이 공황상태가 되어 공포심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자가 속출
했고,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여 발루아-앙굴렘 왕가에 대항하는 위그노의 힘은 약해집니다.
남겨진 프로테스탄트들은 보다 과격해져 군주를 선택할 권리는 백성에게 있으며, 군주가 폭정을
행한다면 추방시킬수 있다는“폭군 추방론”을 제창했으며 또 법조계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가톨릭 교도들은 가톨릭 과격파의 폭주를 우려하여 국왕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융화에 의한 보다 강한 왕권 확립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폴리티크파' 라고 합니다.
5) 제4차 위그노 전쟁(1572~1573)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은 결국 군사행동을 불러 왔고, 가톨릭군은 둘로 나뉘어 앙리 드
몽모랑시의 군대가 소뮈에르를, 앙주 공 앙리의 군대가 생 시르와 라 로쉘을 포위
하는데 1573년 5월에 앙주 공 앙리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폴란드 의회의
개입으로 라 로쉘의 포위망이 해제되었고, 7월에 “불로뉴 칙령”으로 전투가 종결됩니다.
불로뉴 칙령은 이전 위그노들에 부여된 권리를 축소하는 것으로, 모든 위그노들에게 과거
행동에 대한 사면과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지만 예배는 라 로쉘, 몽트방, 님의 세 도시
에서만 그것도 집안에서만 허용되었고, 상급재판권을 지닌 위그노 귀족들은 결혼식
과 예배식을 올리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가족 이외의 참석은 10명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앙주 공 앙리가 부재중인 사이, 샤를 9세와 막내동생인 알랑송 공 프랑수아가 다투게 되자 많은
위그노들이 보호와 지지를 구하면서 알랑송 공 프랑수아의 주변에 모여들었으니 1574년 2월
생 제르망에서 쿠데타 미수사건이 일어났는데 궁정에 억류된 나바르 왕 앙리 와 콩데 공 앙리의
구출이었으니 동시에 노르망디, 보르도 등지에서 위그노들이 봉기하면서 전쟁은 다시 재개됩니다.
이렇게 앙리 2세의 비극적인 사고사 이후 조금씩 몰락하기 시작한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왕권은
샤를 9세의 치세에 이르러 크게 훼손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두 종파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카트린의 행동은 결국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원래 샤를 9세는 건장한 육체에 승마와 사냥을 즐겼으나, 외가인 메디시스(메디치) 가문으로 비롯된
유전성 폐결핵으로 고통스러워했고,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곧잘하여 정신이 불안정했으며
폐결핵이 악화되어 동생 앙주 공 앙리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한지 3개월 후인 1574년 5월,
23세 나이로 요절하니...... 왕태후 카트린은 앙리가 귀국하기 전까지 섭정에 취임한다고 선언합니다.
샤를 9세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16명의 자녀 중 다섯째이자 차녀로 외숙부가
스페인왕 펠리페 2세였고, 동시에 형부이기도 했는데 1559년부터 프랑스의 왕자
샤를과 혼담을 나누다가 결혼이 결정됐지만, 프랑스어를 열심히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독일어, 스페인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유창했던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어만큼은 잘하지 못했고,
프랑스 왕실에서 고립되어 외롭게 지냈는데 샤를 9세가 사망하자 아들을 낳지 못했던
엘리자베트는 친정인 합스부르크가로 돌아왔고, 4번째 왕비를 잃은 형부인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 제안되었지만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의 왕비는 다시 결혼하지 않는다" 고 거절합니다.
6. 앙리 3세
앙리 3세는 프랑스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5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죽은후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앙리 4세에 의해 부르봉 왕조가 개창되었으며 아들 루이 13세로 이어집니다.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4남으로 큰 형 프랑수아 2세, 작은 형 샤를 9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이 되었는데 형들과 동생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를 제치고
모친 카트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으니 발루아 왕조의 전통인 사냥과 운동에는 흥미
만 가졌고, 검술에 능한 것 외에는 예술과 독서등 메디치 가문의 취향들을 더 선호했습니다.
1) 제3차 위그노 전쟁(1568~1570)과 폴란드 왕위 계승
15세인 1566년 앙주공작이 되었으며, 1568년 제3차 위그노 전쟁때 왕실 군대 지휘관으로 1569년
3월 자르냐크 전투에서 콩데 공작 루이 드 부르봉을, 같은 해 10월 몽콩투르 전투에서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위그노(신교) 군대를 격파해 군사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위그노 지도자 콩데공 루이 드 부르봉을 죽이고 모욕한 일로 위그노들의 증오를 사게 되었으며
1570년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약혼이 오갔으나, 요즘
한일 관계 처럼 백년전쟁 이후 골이 깊어진 양국간의 민족 감정으로 인해 없던 일이
되었으며 이 혼담은 나중에 남동생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에게도 갔으나 끝내 무산되었습니다.
1572년 7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하자 모후 카트린은 공석
인 폴란드 왕위에 앙주 공작 앙리를 내세웠으니 당시 폴란드는 선출제였으므로 가능했는데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에른스트와 경쟁하여 폴란드 국왕에 선출되었습니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후 제4차 위그노 전쟁(1572~1573) 중 프랑스를 떠나려 하지않자 샤를 9세의
최후 통첩을 받고서야, 1574년 측근 몇명만 대동한채 폴란드로 떠났으니 개신교 세력이었던 팔츠 선제후
들을 비롯한 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위협을 받았지만 1월 25일 폴란드령 크라쿠프에 도착했고, 2월 21일
바젤 대성당에서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인 '헨리크 발레지' 로 즉위하나 실권은 의회에 있었습니다.
2) 프랑스 국왕 즉위와 제5차 위그노 전쟁(1574~1576)
앙주공 앙리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3개월 후인 1574년 5월 30일,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로 큰 충격을 받아 와병중이었던 형 샤를 9세가 사망하자 왕태후 카트린이 앙리가 귀국하기 전
까지 섭정에 취임한다고 선언하니 앙리는 제5차 위그노 전쟁(1574~1576) 중이었던 프랑스
의 왕위 계승을 위해 6월 폴란드 왕위를 버리고, 급히 서둘러 크라쿠프의 왕궁에서 도망칩니다.
1575년 2월 랭스에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앙리 3세는 이틀 뒤 로렌 가문의 루이즈 드 보데몽과 결혼
했는데 똑똑하고 지적이라 모후 카트린이 총애했었지만 왕위에 오르면서 '미뇽' 이란 불린 총신
들에 대한 총애, 동성애적인 취향, 과도한 사치로 비난을 받았으며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로
인식되어 미움을 받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프랑스 를 종교전쟁의 대혼란으로 몰고갑니다.
앙리 3세는 1575년 4월에 협상을 모색했지만 9월에 알랑송 공 프랑수아가 파리의 궁정에서 탈출
해서 자신의 영지 드뢰로 도망쳐, 지지자들을 모은후 폴리티크파의 영수가 되어 가톨릭계
신성동맹의 수장인 3대 기즈 공작 앙리 1세 드 로렌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독일 팔츠 선제후였던 요한 카시미르까지 위그노들을 돕기 위해 4,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침입하자 앙리 3세는 황급히 프랑수아와 7개월간의 휴전을 협상해 독일 침략군을
라인강 동부에 묶는 조건으로 500,000 리브르의 지불을 약속했지만 화평은 확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576년 2월 3일 나바르 왕 앙리와 사촌동생인 콩데공 앙리 드 부르봉이 파리에서 탈출해 위그노로 복귀
하며 나바르 베아른에서 세력을 결집하니, 3월 앙리 3세는 알랑송 공 프랑수아와 위그노측의 조건을
받아들여 '왕제 전하(王弟殿下)의 화친' 이라 불린 “볼리유 칙령” 을 공표했으니 수도 파리 성벽 외의
모든곳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식적인 예배가 인정되었고, 위그노의 안전보장 도시가 8개로 늘어났습니다.
3) 가톨릭 동맹(신성동맹) 과 제6차 위그노 전쟁(1576~1577)
“볼리유 칙령”은 위그노, 즉 칼뱅파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한 것이어서 반대하는 가톨릭
과격파인 기즈 공 앙리가 가톨릭 동맹을 결성했기에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기즈 가는 오랫동안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청했고, 기즈 공 앙리와 친족들은 가톨릭
동맹에 충성을 맹세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으며 도시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나바르 앙리가 탈출한 사건 후에는 사치에만 몰두하는 앙리 3세 드 발루아-앙굴렘, 가톨릭 동맹의 수장이자
카롤루스 왕조의 후예라 주장하며 프랑스 왕위를 노리는 앙리 드 기즈, 발루아-앙굴렘 왕가와 먼 친척
관계이자 앙리 3세의 매부였던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 등이 서로 혈전을 벌인 위그노 전쟁이 재개됩니다.
1576년 블루아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앙리 3세에게 원조금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
졌고, 12월엔 푸아티에와 기엔에서 위그노들이 무장봉기했으며, 기즈파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로 부터 확고한 지원을 얻은 한편으로 위그노들도 남서부에 강력한 세력기반을 구축합니다.
잉글랜드와 독일 신교 제후국들이 소수의 군대만을 파견한데 비해 왕제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와
당비르 등의 폴리티크파가 가톨릭 동맹에 참가하여 전황은 위그노에게 불리해지자 결국
앙리 3세와 위그노는 “볼리유 칙령”에서 얻은 양보를 철회하고, 가톨릭 측은 동맹을 해체하는
베르주라크 평화조약(1577) 을 체결하여 6일 후엔 확인하는 “푸아티에 칙령”이 발효되었습니다.
4) 제7차 위그노 전쟁(1579~1580)
하지만 왕제인 앙주 공 프랑수아와 지지자들이 네덜란드의 대스페인 반란에 개입해 전쟁을 치루자
발루아 궁정은 다시 혼란속에 빠져들었으며, 지방레서는 가톨릭과 위그노가 자위권을 위해
무장하여 무질서한 상황이 계속되었는데 1579년 11월에 콩데 공 앙리 드 부르봉이 라 페흐
를 함락하여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고 '연인들의 전쟁' 이라 불린 제7차 위그노 전쟁은
1580년 11월에 앙주 공 프랑수아와의 협상에 의해 르 플룩스 조약이 체결되어 종결됩니다.
5) 제8차 위그노 전쟁(세 앙리의 전쟁, 1587~1589)
1584년 2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네덜란드의 '국부' 오라녜 공 빌렘에 의해 네덜란드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안트워프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동생 프랑수아가 죽으면서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 과정이 새로운 국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앙리 3세는 아들이 없었고, 다른 형제들도 후사가 없었으니 왕위계승권은 앙리 3세의 매부이자 위그노
의 지도자 나바르의 왕 앙리 드 부르봉에게 넘어가이, 가톨릭은 프랑스의 왕위가 개신교도 나바르
의 앙리에게 넘어가는 것에 반발했고, 가톨릭 동맹을 일으켜 나바르의 앙리의 숙부이긴 했지만
가톨릭 신자이던 노르망디의 루앙 추기경 샤를 드 부르봉을 환속시켜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내세웁니다.
급기야 1585년 7월 18일 가톨릭 동맹과 손을 잡아 발루아 왕가의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태후 카트린의
설득으로 위그노들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으나 선포 이후 군중들의 환희에
답하지 않고 떠났기에 가톨릭의 경멸을 받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의 자유을 박탈당한 위그노
로 부터도 반발을 불러 일으켜 나바르의 앙리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로부터 경고를 받게 됩니다.
결국 1년 6개월이 지나 프랑스 전역이 다시 한번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고, 이 내전이 세 앙리의 전쟁
이라 불린 제8차 위그노 전쟁(1587~1589)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앙리 3세는
사치와 애완견에 새 수집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쿠트라 전투에서 총신인 국왕군 총지휘관인
주아이외즈 공작을 비롯 국왕군 8,000명이 궤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전쟁에서 불리해집니다.
1587년 앙리 3세는 주아이외즈 공작에게 보병 6천, 기병 2천에 포 6문을 딸려 루아르강을
도하해 푸아투로 진격시키니 앙리 나바르는 보병 3,500에 경기병 1,500 그리고 대포
3문으로 쿠트라 Coutras에서 맞서는데 위그노군의 대포가 불을 뿜자 가톨릭군 기병이
공격해 오니 숫적 열세로 무느지려는 순간에 스코틀랜드 보병 소대가 결사항전을 합니다.
좌익 위그노 보병대대가 국왕군 연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고 우익 보병대는 적 보병대와 싸우면서 공격해
온 국왕 경기병 연대에 총탄을 퍼부었으며 중앙의 본진은 나바르가 콩데 공작과 수아송 백작등 2명과
포진했는데 국왕군 중기병이 돌진해오자 군목이 시편 128장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를 암송하자 위그노군 전체가 합창하며 가톨릭 국왕군을 맞받아칩니다.
나바르 부대의 아르퀘부스 총이 불을 뿜자 국왕군의 중기병이 무느지면서 위그노군의
중기병대는 국왕군을 돌파하니..... 이 전투에서 국왕군 8,000명 중 2,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000명 넘게 포로로 잡히니 전투는 "신교도 위그노군의 대승" 으로 끝납니다.
한편 프랑스 북부 전투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과 덴마크 프레데릭 왕이 돈을 대어 독일
개신교도군 1만 5천과 스위스 개신교도군 5천이 프랑스 북부로 침입하니 가톨릭군의
총사령관 기즈공작 은 1587년 11월 11일 오뉴를 급습해 독일군 2천여명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자 국왕 앙리 3세는 스위스군은 같은 스위스군 용병으로 막으면서 돈을 주어 귀향시킵니다.
승리한 기즈공작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때 앙리 3세는 리옹에 가서는 10만 크라운 금화를
들여 예쁜 강아지 를 수집하고 그외 원숭이와 앵무새 수집에 열중해 비난을 자초
하는데 신성동맹의 영수 기즈가 파리에 세력을 심자 앙리 3세는 불안을 느끼는 중에
1588년 5월 8일 기즈공작이 파리에 입성하니 가톨릭 파리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합니다.
기즈 공작이 내켜하지 않는 카트린을 앞세워 루브르 궁전으로 앙리 3세를 방문하자 위험을 느낀
국왕은 연대장들에게 민병대 소집을 지시하나 파리 시민의 저항으로 실패하자 이에 국왕은
파리 교외에 주둔중인 4천명의 근위연대와 스위스 용병을 시내로 불러들이니 1588년
5월 12일 파리 시민들이 총궐기해 바리케이트를 쌓고 시가전 끝에 "국왕군은 항복" 합니다.
6) 앙리 3세 암살로 발루아 왕조 끝나고 부르봉 왕조로!
승리한 기즈 공작이 국왕을 압박하자 앙리 3세는 말을 타고 루브르궁전을 나와 세느강변 튈르리 정원을
산책하는듯 하다가 별안간 도망쳐서 파리 서남쪽 사르트르로 도주했으며 이후 양측은 협정을 맺고
10월 16일 루아르 강변 블루아성에서 3부회를 소집하니 실권을 빼앗긴 국왕 앙리 3세는 12월
23일 마침내 "기즈 공작을 암살" 했으며 동생인 루이 또한 살해한후 기즈의 측근들을 체포 합니다.
가톨릭의 영수 기즈 가문의 본가는 로렌(로트링겐) 가문이었는데 훗날 합스부르크 황실의 신성로마 황제
카를 6세가 로렌 공작 프란츠 1세 슈테판을 사위로 맞이한 이유 중 하나가 로렌 가문이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 후손이라는 점이었으니 기즈가문도 발루아 왕가를 제치고 프랑스 왕위에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1589년 1월 5일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하면서, 암살당한 앙리 드 기즈와 루이 드 기즈
의 동생이었던 마옌느 공작 샤를을 비롯한 가톨릭 동맹에 의해 왕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며
대도시 대부분이 국왕 앙리 3세에게 적대감을 표했고, 삼부회마저 등을 돌렸으며 파리의
가톨릭 교도들은 기즈 공작을 죽인 국왕 앙리 3세를 가톨릭의 탈을 쓴 악마로 생각했습니다.
표면적으로나마 충성을 표하던 파리의 대법원 또한 1월 16일, 16인 위원회에 의해 해산되고 가톨릭
동맹을 대변하는 새 대법원이 세워지면서 프랑스 전역의 고등법원마저 가톨릭 동맹편에 서는
등 앙리 3세의 모든 권력과 명예가 실추되었고 가톨릭 동맹에 완전히 버림받은 앙리 3세는
그나마 손을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위그노의 수장인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 밖에 없었습니다.
기즈공의 동생인 바옌느 공작이 5월 8일 신성동맹군을 이끌고 블루아성을 공격해오자 앙리 3세는 신교도
영수 앙리 나바르와 동맹을 맺고 맞서는데 가톨릭군 공세에 대해 앙리 나바르가 신교도군을 이끌고 구원
하여 위기를 넘겼으며 앙리 3세는 나바르의 앙리와 함께 수도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7월 말에 42,000명
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후 파리 서쪽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합니다.
1589년 8월 1일 파리가 포위되는 와중에 브레앙 백작이 보낸 자라고 말한 도미니코회의 수도자
자크 클레맹(Jacques Clément)을 맞이했는데 앙리 3세가 자크 클레맹이 갖고 온 편지에
주의를 팔고있는 사이, 자크가 꺼내서 휘두른 단검에 복부를 심하게 찔리는 부상을 당했고,
급히 달려온 의사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앙리 3세는 심한 중상을 입었기에 병상에 누웠습니다.
문병온 후계자 앙리 드 부르봉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권했으며 사람들에게 앙리 드 부르봉에게 충성
할 것을 명령한뒤 구술로 왕비와 아직도 자신에게 복종하는 지방의 총독 및 제후들에게 편지를 보낸후
다음날 오전 2시경에 숨을 거두었으니 이로써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오던 발루아 왕조가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매부였던 나바르의 앙리 드 부르봉이 즉위해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국왕 앙리 4세가 됩니다.
7) 왕비 로렌의 루이즈
왕비 로렌의 루이즈는 로렌 공작의 차남이자 메르쾨르 공작이었던 로렌의 니콜라와 첫 번째 아내
에그몬트의 마르그리트의 막내딸이었는데 루이즈가 한살때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사망하면서
니콜라는 사부아-느무르의 잔느와 재혼했으니 계모는 루이즈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켜주었고,
이후 루이즈가 10세가 되었을 때 낭시의 궁에 사교계 데뷔를 시켜줄 정도로 의붓딸을 아꼈습니다.
루이즈를 아껴주던 잔느도 루이즈가 15세 때 사망하고 이후 니콜라는 5촌 조카인 로렌-기즈-
오말의 공녀 카트린과 재혼하니 의붓딸 루이즈 보다 고작 세살 연상이었던 카트린은 자신과
동년배인 의붓자식들을 매우 경계했고, 아버지도 전처 소생의 자식들을 모질게 대했으니
구박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다가... 앙리 3세의 왕비가 되면서 동화 속 신데렐라가 되었습니다.
니콜라는 후처 카트린의 당숙부였으며 카트린과 의붓딸 루이즈는 같은 항렬인 6촌 자매였는데, 그러니까
루이즈는 로렌 공작 르네 2세의 장남의 손녀였고, 카트린은 르네 2세의 차남 기즈 공작 클로드의 손녀
였으며 또한 카트린의 고모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왕비이자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인
가톨릭의 영수 기즈 가문의 딸인 마리 드 기즈였으니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카트린과는 고종사촌 입니다.
왕위에 오른 앙리 3세는 예전에 봤던 로렌의 루이즈에게 갑작스럽게 청혼하니 루이즈는 귀족
이긴 했지만 왕비가 될 정도의 고위 귀족은 아니었기 때문에 앙리 3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물론 당대의 호사가들까지 이 결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그래도
앙리 3세와 루이즈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무난한 결혼 생활을 영위 했습니다.
루이즈는 자신을 불행한 처지에서 구해주고 왕비로까지 만들어 준 남편을 매우 존경했고, 야심만만한
친정식구들을 말리며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에 시어머니 카트린을 흡족케 했지만 루이즈는
앙리 3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남편이 암살당하자 루이즈는 프랑스 왕비 상복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남편의 죽음을 기리며 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