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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테오11-28.) 이 성경 말씀을 나는 아주 좋아했다. 휴전직후 포로 신세를 벗어나 서울에서 홀로 살 때 직업도 없고 배는 고파서 외롭고 힘들 때 나는 내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종로3가 성당을 자주 찾아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성당 안에 홀로 앉아서 나는 제단 뒤에 높이 걸려있는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나의 고달픈 삶이 너무 서러워 위의 성경구절을 생각하면서 당신이 나를 편케 해줄 날이 언제입니까 하고 한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성당 안에서 하느님께 한참을 하소연 하다가 성당에서 나오는 데 저 쪽에서 오시는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런데 아이고 이를 어쩌나! 공교롭게도 그 분이 바로 나의 대부 신부님이 아닌가. 나는 영세 대부님은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시어 기억에 없고 견진 대부님만 있는 데 바로 이계중 신부님이 나의 견진 대부시고 이 성당 본당신부로서 이 날 뜻밖에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견진을 태평양 전쟁 발발 이듬해에 덕원 분도 수도원 대 성당에서 수도원의 압바스이신 신 보니파시오 주교님(독일인. 1949년에 덕원 수도원이 공산 정권에 압수 당하면서 북으로 끌려가시다가 순교하심.)으로부터 받았다. 이 때 나의 대부님은 당시 덕원 신학교에서 신품성사의 첫 품인 삭발례를 갓 받은 신학생으로 그 때 대부님은 내게 기념으로 "소년 달지우스 성인의 전기"란 일어판 성인전을 주셨고 책 앞장에 일어로 "이 기쁜 날에, 친애하는 나의 대자 노렌조에게. 대부 이계중 요한"이라고 글귀까지 남겨주었고 대부님은 고향도 나와 같은 황해도이고 그 후 1946년에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으므로 이리하여 나는 심부님을 대부로 가지게 된 것이다. 대부님은 그 후 나를 무척 사랑해 주셨다. 무엇보다 고향이 같은지라 대부님이 방학 때 집에 오면 꼭 한 번씩 만나주었다. 지금도 나는 해방 전 해 여름 방학 때인데 대부님과 그리고 대부님의 동창으로 같은 은율출신 신학생인 전 덕표 안드레아, 그리고 나와 한 본당의 대부님의 후배인 최석호 바오로 신학생이 황해도의 유명한 구월산을 등산할 때 나도 불러주어 같이 동행하여 즐겁게 보냈던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내가 형처럼 따르던 최석호 신학생은 서울 교구 사제로 순탄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으나, 전덕표 안드레아 신학생은 대부님의 동창으로 1946년에 같이 사제품을 받았으나 이북 황해도 사리원본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아 공산치하이지만 참 전교도 많이 하시고 특히 청년사목에 열을 다 하셨는데 6.25전쟁 때 인민군이 후퇴할 때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셨다. 그렇다 무참하게 죽으셨다!. 왜냐하면 국군의 진입과 함께 사리원 본당 신자들이 신부님의 행방을 찾아 정치보위부에 가서 지하실 콘크리트 바닥에 신부님께서 모진 고문으로 온몸에 상처를 입고 목구멍으로는 솜이 틀어박혀서 질식사하여 죽어있는 것을 신자들은 보고 통곡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신부님 나이 31 세였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원통하다. 무엇보다 나는 내 본당 신천하고 사리원이 이웃 본당이기 때문에 전덕표 신부님을 자주 만났고 6.25가 일어나기 직전에 나는 신부님으로부터 일본 "이와시다 소이찌" 신부의 "신앙의 유산"이란 신학서적 3권과 "칼 ,아담"의 "가톨릭의 본질"이란 일어판 책을, 합해서 4권을 빌려 읽고 돌려주지 못했는데 생각하면 젊은 신부님의 순교가 너무나 기가 막힌다. 나는 종로성당에서 나의 대부 신부님을 만나게 되므로그 날부터 먹을 것 걱정을 면했다. 대부님은 나를 보는 순간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척 아시고 나를 창고로 데리고 갔는데 창고 안에는 구호물자 밀가루 포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노렌조야 너 필요한대로 가져가" 그리고 "빨리 지장을 구해야지"하고는 집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그 후 무시로 밀가루를 퍼 날라서 배고픔을 면했던 옛날을 생가하면 나의 대부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다. 그런데 이 일을 또 어쩌랴! 나는 지난 3월12일에 나의 대부 신부님이 94세로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보훈병원 성당에서 신부님위해 연미사를 올려드리면서 위의 이야기들을 회상하며 눈물을 닦아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게 지난 날 정신과 영혼에 많은 영향을 주신 세분 신부님들은 다같이 나의 신앙의 스승이며 대부님 들이시다. 대부 대자 관계를 신친 관계라고 교회는 가르친다. 영신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대부가 훌륭하게 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 대자를 영적으로 잘 돌봐 준다면 그 대자는 세례 때의 하느님과의 약속을 죽을 때까지 잘 지키는 훌륭한 신자로 성장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얼마 전에 둔촌동 본당에서 영세한 한 신자에게 무심코 "성당에 열심히 나가시죠?." 하고 인사했더니 그의 얼굴 색이 확 바뀌면서 "나 이제 그 교회에 안 나가요 나 지금 다른 교회에 나갑니다." 그 때 정말 화가 났다. 그럴 것을 왜 영세했을까? 본당은 왜 그런 사람에게 영세를 주었을까? 이제부터라도 영세준비 기간을 3년이나 적어도 1년은 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성신강림후 백성들을 한 30분 가르치고 영세 주신 것을 생각하면(사도행전 2장) 아이고 나는 모르겠다 본당 신부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교회가 영세 때 대부모를 세우게 된 것은 4세기 경부터라고 한다. 대부 대모는 대자 대녀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큰 사명을 가진다. 대부 대모는 예비자 교리를 시작할 때부터 세워서 에비신자 때부터, 영세 후에는 물론 더욱 더, 신자생활에 대한 모든 것, 여러 가지 의문이나 걱정거리의 상담 상대가 되어주고, 개인 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복음정신으로 살아가도록 대자 대녀를 가르쳐 주고 기도해 줄 의무가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영세 때 대부모가 대자녀에게 촟불을 주는 것도 이런 뜻 때문일 것이다.. 방금 위에서 말한 영세하자마자 냉담한 신자의 경우에도 대부모가 자기 대자녀를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돌봐 주었더라면 냉담하는 불행은 없었다고 믿고있다. 사실 그의 대모에게 당신 대녀가 개신교에 나간다더라 했더니 대모 왈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거죠, 나종에 성당에 나오고 싶으면 또 나오겠죠 뭐," 하고 무책임한 대답을 하는 데는 유구무언이었다. 대모의 책임도 모르면서 아니면 알면서도 안 할 것이면 대모도 서지 말아야지. 지난 주일 주보에서 둔촌동 본당 영세식이 있었다고 보았다. 축하할 일이다.그리고 이 번 영세자의 대부모들께서는 대자 대녀의 신앙생활에 대해 신경을 써주어서 잘 돌보아주는 가운데, 특히 대자 대녀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세례일이 되면 같이 축하해 주어서 감사하는 날이 되도록 도와주고, 영명축일에도 자기 주보성인을 본받고 기도하면 성인께서도 도와주신다는 것을, 대자녀의 영명축일 날 잊지 않도록 일깨워 준다면 신앙생활이 크게 성장하게 될 것이니 대부모들께서는 유념하고 실천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본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나의 대부 신부님 이계중 요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둔촌동본당 김 형보 노렌조 1968-1975년 지벨라도 신부와 강요한신부 밑에 전교회장과 사무장으로 근부, 장위동 본다의 변한모습 보고 싶으나 늙고 병들어 갈 수없어 대신 전에 쓴 글로 대신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