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2/30-ᄀᆞᆷ나루백제 동성대왕의 영욕>
대륙정복 ᄀᆞᆷ나루백제 동성대왕의 영욕(榮辱)
☯ 모다 동성대왕, 산둥반도 침공 북위 축출 위업
모다왕[모대왕(牟大王):후의 동성대왕(東城大王)]은 이제 21살의 씩씩한 청년 왕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주체 의식도 분명했고, 담력도 있어서 국제 질서가 혼미했던 그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서기 490년. 중국 중원의 패자 북위(北魏)가 보기군(步騎軍) 10만 명을 동원하여 산둥 반도의 백제 영지와 백제의 제후국인 남제(南齊)를 공격해 왔다.이 급보는 ᄀᆞᆷ나루백제와 나라 백제에 전달되었다.
젊은 모다왕은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출전하였다.
21살의 젊은 모다왕은 스스로 중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라백제의 신군(神軍)과 외백제군의 지원을 얻고, ᄀᆞᆷ나루백제군을 주력으로 하여 대백제연합군(大百濟聯合軍)을 편성하였다. 대연합 군단은 내해(內海:황해黃海)를 넘어서 일단 비사성에 집결한 다음, 그곳으로부터 산둥 반도에 상륙하였다.
이때 모다왕의 출진법은 옛 쥬신 이래 이어져 오던 전통적인 5군제였다.
중군(中軍) 대원수(大元帥): 모다왕[모대왕(牟大王)]
전군(前軍): 건위(建威)장군(將軍)-팔중후(八中候)-부여고(夫餘古)대장(大將)
우군(右軍): 건위(建威)부장군(副將軍)-부여력(夫餘曆)부장(副將)
좌군(左軍): 영삭(寧朔)장군(將軍)-면중왕(面中王)-왕저근(王姐瑾)
후군(後軍): 광무(廣武)장군(將軍)-부여고(夫餘固)
※ 이상의 출전 장수들의 명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때부터 벌써 나라백제 천황계의 진씨(眞氏)들의 명단이 장군에서 탈락하고, 남부여의 부여씨(夫餘氏)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남부여의 확실한 세력교체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산둥반도 지역의 남제와 그 종주국인 백제를 중국 대륙에서 밀어내기 위하여 강군 10만을 동원하여 남제를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하였다.
산둥 반도는 옛 청구(靑丘)로서 우리 동이족(東夷族)의 영지인데, 제 환공과 진시황의 힘으로 간신히 중화의 영토로 탈취하였으나, 어느 새 외백제가 진출하여 다시 점령하였다. 또, 남제도 중원의 각국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백제에게 조공(朝貢)하며 아첨하니, 효문제는 남제를 정벌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강국 백제와의 일전(一戰)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모다왕이 직접 백제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상륙하여 위(魏)군에게 강력하게 반격해 왔으므로,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군은 백제에 대패(大敗)하고 말았다.
그러나 효문제는 이대로 간단히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십만 여 정예병을 파견하여 기어코 백제군을 격파하려고 다시 침공해 왔다. 모다왕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이번에도 여지없이 위군(魏軍)을 격멸하니, 효문제는 비로소 휴전과 강화를 제의하고, 뤄양[낙양(洛陽)]으로 물러갔다.
중국 측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제 2차전의 백제장군들은 다음과 같다.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사법명(沙法名)
안국장군(安國將軍): 설중왕(薛中王)-왕찬수류(王贊首流)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候)-해풍곤(解豊昆)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候)-목우나(木于那)
☯ 동성대왕 이룩한 대백제제국의 영토
두 차례에 걸쳐 대백제전(對百濟戰)에 참패를 거듭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힘으로 강경책을 쓰는 것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정책을 바꾸어 중국 변방의 세력들을 중국인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펴니, 그 때부터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주위의 모든 세력들을 융합한 대동 연합국가로 서서히 변하여 갔다.
백제 연합은 이 때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여 명실 공히 대해양제국(大海洋帝國)을 건설하였다.
《대백제제국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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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영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를 포함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가우리 국경까지,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倭國)을 포함하여 다 백제의 땅이다.
백제는 동, 서 두 곳에 서울을 두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최치원전(崔致遠傳)에 따르면, 백제는 전성기에 백만 대군으로 오(吳), 월(越), 연(燕), 제(齊), 노(魯) 나라를 다 장악했다 하였다.
주서(周書)의 백제전엔, 동진(東晉) 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 나라[나량(奈良)] 때까지 백제는 양쯔강 양쪽을 다 점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따르면 , 금주(錦州), 의주(義州), 애춘(愛瑃)을 포함한 지역을 다 백제의 강역이라 했다.
이상의 역사서들의 기록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백제는 중국의 황해안과 라오닝성[요녕성(遼寧省)], 그리고 나라[나량(奈良): 왜백제(倭百濟)]를 포함하여, 서양의 로마제국과 견줄 만한 동양 최대의 해양제국을 건설하였으니, 백제(百濟)라는 나라 이름을 앞세운 비류천황(沸流天皇)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 모다 동성대왕 중국에 주저앉아 타락
일단 산둥 반도의 고도(古都) 내주(萊州)를 중국 대륙 식민지 통치를 위한 수도로 정한 모다왕은 그곳에 새 왕궁을 짓고, 이번 전쟁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 남제(南齊)로부터 감사의 뜻으로 진상해 온 아름다운 여인들에 취하여 그곳을 떠날 줄 몰랐다.
《당시 대륙, 반도, 왜를 차지한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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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ᄀᆞᆷ나루백제는 나라가 일어난 후 두 번째로 군주 없는 나라가 되어 국가의 정무를 일일이 바다 건너 모다왕이 있는 내주와 천황이 있는 나라[나량(奈良)]의 결재를 받게 되는 이상한 현상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서기 500년 봄. 모다왕은 임시 궁궐 대신에 임류각(臨流閣)이라고 하는 호화로운 새 궁전을 지었으니, 높이가 다섯 길이 넘었다. 또 연못을 파고 이상한 새들을 길렀으며, 아름다운 여인들에 취하여 세월을 잊고 지냈다.
☯ 귀국 거부 모다왕, ᄀᆞᆷ나루 대신(大臣) 손에 욕된 최후를 맞아
모다왕이 산둥 반도의 임류각(臨流閣)에서 돌아올 줄 모르자, ᄀᆞᆷ나루 정부의 대신들 사이에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ᄀᆞᆷ나루의 옹진성에서는 심각한 의논을 거듭한 끝에 가림성(加林城)성주(城主) 백가(苩加)를 대표로 산둥의 모다왕에게 파견하였다.
♬(말풍선)
“아! 과연 소문 듣던 대로 임류각은 굉장하구나! 흠, 저런 별천지 속에서 ᄀᆞᆷ나루를 잊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대왕은 이미 옛날의 임금님이 아닌 것 같아” (내주 도착 백가)
가림성주 백가(苩加)는 즉시 임류각으로 들어가 모다왕과 담판을 지었다.
♬(말풍선)
“대왕! 그 동안 위(魏)군을 무찌르고 이 땅 위에 백제의 식민정부를 세워 친히 정사를 보살피셨으므로, 이곳 외백재는 훌륭하게 그 뿌리를 내렸사옵니다. 그러나 본국 ᄀᆞᆷ나루의 정무는 이미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밀려 있나이다.” (백가의 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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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 백가(苩加) 좌평! 먼 길을 항해하여 오느라고 피곤할 터이니, 오늘은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술이나 한잔 나누면서 쉬도록 하오.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내일이나 언제든지 시간을 내서 천천히 하기로 하고...,” (모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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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만약 ᄀᆞᆷ나루로 되돌아가시는 게 싫으시다면, 차라리 ᄀᆞᆷ나루의 왕위를 제게 넘겨 주시옵고, 대왕께선 외백제의 대왕으로 계실 수 없겠나이까?” (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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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라고? ᄀᆞᆷ나루 백제의 왕위를 내어 놓으라고? 흠, 결국 너는 왕위를 탐내어 이곳까지 찾아왔구나! 고얀 놈!” (모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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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옵소서. 대왕!” (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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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대왕은 이미 ᄀᆞᆷ나루로 돌아갈 마음이 없으면서도 ᄀᆞᆷ나루의 왕위는 계속 움켜쥐고 이곳에 앉아서 바다 건너의 ᄀᆞᆷ나루를 통치하겠단 말이지, 그러나 그건 안 돼! 그것은 나라의 천황도 할 수 없었던 일이야. 결국 누군가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백가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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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어쩔 수가 없소이다. ᄀᆞᆷ나루 백제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는 그 백성을 버리고 떠난 대왕을 필요로 하지 않소이다. 소신(小臣)의 불충(不忠)을 용서하소서. 그러나 이 백가는 대왕의 신하이기에 앞서 백제의 신하이옵니다. ᄀᆞᆷ나루를 위하여 죽어 주소서. 에잇!” (모다왕을 시해하는 백가)
조국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하던 왕은 위사좌평(衛士佐平: 국내주둔군 사령관) 가림성주(加林城主) 백가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중국 땅에 대식민지를 건설했던 백제의 영웅은 이리하여 명예롭지 못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으니, 그 나이 불과 37세였고,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인 서기 501년 12월이었다. §
※ 모다왕은 시호를 동성왕(東城王)이라 햐였다. 동성왕의 무덤은 중국 산둥반도에 있다.
2020.6.2.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