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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삼국지 355
(소설삼국지)
제5권 적벽대전
제40장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
4)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
조조는 건안15년(210년) 12월 기해(己亥)일에 또 중대한 의미를 갖는 교령을 하나 발표했다. 장문이지만 조조의 본심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번역해 보았다.
“나는 젊어서 처음 효렴으로 천거되었을 때 나 자신이 본시 암혈(岩穴)에 은거하는 지명인사가 아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평범하고 어리석게 보일까봐 두려워했다. 일 개 군의 군수가 되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펼침으로써 나의 명예를 세움으로서 세상의 선비들이 나를 잘 알 수 있게 하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로 처음으로 제남(濟南)의 상이 되었을 때 남을 해치거나 부정한 자들을 제거하고 공평무사하게 인재를 천거했다. 이로 인해 여러 상시(常侍)들과 등을 지고 원망을 사게 되었다. 힘 센 권력자들을 분노하게 했으므로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같은 해에 효렴으로 출사한 동기들을 돌아보니 나이가 오십이 되어도 늙었다 할 수 없을 터였다. 관직을 떠난 이후에도 아직 나이가 젊었으므로 나는 마음속으로 헤아리기를 이제부터 한 이십 년 동안 물러나 쉬면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린다 해도 동기들을 볼 때 이제 처음으로 관직에 천거된 자와 나이 차이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향리에 돌아가서 초(譙) 현 동쪽 오십 리에 정사(精舍)를 짓고 가을과 여름엔 독서를 하고 겨울과 봄엔 사냥을 하면서 사시사철 땅바닥에 거하고 스스로를 흙탕물로 덮고자 했다. 왕래를 희망하는 빈객들과도 절연하고자 하였으나 뜻과 같이 되지는 못했다.
그 후 도위(都尉)로 징소를 받았다가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국가를 위해 도적을 토벌해 공을 세우는 데 뜻을 두고, 열후에 봉해지고 벼슬이 정서장군에 이르러 연후에 묘비를 지을 때 ‘한(漢)나라 고(故) 정서장군(征西將軍)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게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나의 본심이었다.
그러나 동탁의 난을 만나 의병을 일으켰다. 그 당시 병사를 모으고자 하면 많이 모을 수도 있었으나 나는 항상 자발적으로 병력을 줄여 많이 거느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까닭은 많은 병사들을 얻으면 사욕이 강해지고, 강한 적들과 다투게 되어 별안간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날 변수지전(汴水之戰) 시 나의 병력은 불과 수천 명이었고, 그 후 양주로 돌아가 다시 병사를 모집했을 때에도 역시 다시 삼천 명만 모았으니, 이는 나의 본래의 뜻이 유한했기 때문이었다. 후일 연주목이 되어 황건적 삼십만 명의 병력을 격파해 항복을 받았다.
또 원술(袁術)이 구강(九江)에서 존호를 참칭하면서 그 아래 사람들이 다 칭신하고 자신의 관부 문을 건호문(建號門)이라 칭했고, 의복을 다 천자의 복식에 맞춰 입고 그의 부인 두 명이 미리 황후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황제를 참칭하려는 계획이 이미 정해져 사람들이 원술에게 즉시 제위에 즉위하고 천하에 드러내 놓고 공포할 것을 권하자 원술이 이렇게 답했다 한다.
‘조공이 아직 살아있으니 가능하지 않다.’
그 후 내가 그를 토벌해 네 명의 장수를 사로잡고 병사들을 포획함으로써 마침내 원술은 궁벽한 곳으로 도망쳤으며, 군대가 흩어지고 꺾이자 이로 인해 발병해 죽게 되었다.
원소가 하북을 점거했을 때 병세가 강성했다. 내가 스스로 세를 헤아려 보아도 상대가 되질 않았다. 오직 나라를 위해 자신을 사지에 던질 계책을 세웠으며 의를 위해 몸을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지는 것만으로 족하고자 했다. 다행이 원소를 격파하고 그의 두 아들을 효수했다.
또 유표(劉表)가 스스로 종실로써 간사한 마음을 몰래 품고 형주를 점거하고, 조금씩 공격했다 물러났다 하면서 세상일을 관망했기에 내가 다시 정벌해 드디어 천하를 평정했다. 이 몸은 재상(宰相)이 되어 사람의 신하로서 그 귀함이 극에 달했고 뜻한 바를 이미 초과달성했다.
지금 나는 이 말을 하고자 한다. 이제 나 자신이 큰 인물이 되어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으므로 숨김없이 말할 뿐이다. 설사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칭제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칭왕을 할지 모른다. 어떤 자들은 사람들이 내가 강성해진 것을 보고 또 천성적으로 천명을 받는 일을 믿지 않으므로 내가 사심을 가졌다고 두려워한다. 말에 불손한 뜻을 품고 망령되이 서로 헤아리면서 매번 이는 명명백백하다 한다.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이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 까닭은 그들의 병세가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능히 주(周) 나라 왕실을 잘 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천하의 삼분의 이를 소유했지만 은(殷) 나라에 복종하고 섬김으로써 주(周) 나라의 덕이 가위 지극한 덕을 이루었도다.’ 라고 한 것은 무릇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악의(樂毅)가 조(趙) 나라로 달아났을 때 조왕(趙王)이 그와 더불어 연(燕) 나라를 도모하러 가기를 원하자 악의가 엎드려 울면서 대답했다.
‘신은 연나라 소왕(昭王)을 섬긴 것과 같이 대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신이 만약 일이 어그러져 포로가 되었다가 다른 나라에 석방되어 세상일에서 떠난 이후에라도 조나라의 노예 무리를 죽일 꾀를 내라하면 차마 못할 일인데 황차 연(燕) 나라 왕의 후예를 어찌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호해(胡亥)가 몽염(蒙恬)을 죽이려고 했을 때 몽염이 말했다.
‘선조 이래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진(秦) 나라에 신임을 받은 것이 삼 대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지금 병사 삼십여 만 명을 거느리고 있어 그 세력으로 배반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당할지라도 반드시 의리를 지킬 것을 저 스스로 알고 있으며, 감히 선왕을 잊고 조상님이 가르침을 욕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슬퍼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의 조부에서 나 자신에 이르도록 다 조정에서 천자께 가깝고 무거운 중책을 맡았으므로 가위 신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식들 형제에 이르게 되면 삼대를 넘게 된다.
나는 단지 제군들에게만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항상 처첩들에게도 이런 말을 함으로써 모두가 다 나의 뜻을 잘 알게 했다.
‘내가 죽은 이후에 너희들은 마땅히 다 출가해서 나의 마음을 전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다 나의 뜻을 알게 해라.’
나의 이 말은 다 진심에서 나온 것이다. 소이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주공(周公)이 금등지서(金縢之書)로서 스스로 충성심을 명확하게 밝힌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불신하는 이유를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손을 위한 계책을 위해서,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전에 조정에서 은총을 베풀어 나의 세 아들을 후로 봉하고자 했으나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지금 다시 받고자 하는 것은 영예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원세력이 되게 하여 만전지계를 삼고자 함이다.
나는 개자추가 진(晉) 나라에 봉해지는 것을 피했고 신포서가 초나라의 상을 피해 달아났다고 들을 때마다 책을 덮고 탄식하며 스스로 반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나라를 받들어 명령을 어긴 자를 큰 도끼를 잡고 정벌해 강한 자를 이겨 약한 자를 받들었고, 큰 자를 사로잡아 작은 자를 보전했다. 내가 뜻하는 바대로 움직여도 법령에 위배되는 사실이 없었고, 마음에 생각하는 바대로 어느 곳을 향하던지 성취하지 못한 바가 없었다. 드디어 천하의 난을 평정하고 군주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가위 하늘이 한(漢) 나라 황실을 도운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네 개의 현에 겸해 봉해 식읍이 삼만 호나 되니 얼마나 깊은 덕을 받았는가!
강호(江湖)가 고요하지 않으니 직책은 내놓을 수 없다. 식읍과 토지에 관해서는 사양할 수 있다. 지금 주상께 양하(陽夏), 척(柘), 고(苦) 세 개 현의 식읍 삼만 호를 반환한다. 다만 무평(武平) 현의 만 호의 식읍만으로 먹고 살겠다. 또 일부분의 손해를 봄으로써 헐뜯고 비방하는 논의에 대해서 나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한다.”
우선 조조가 인용한 몇 가지 고사에 대해서 살펴보자. 주공의 금등지서는 서경(書經)의 금등(金縢) 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주나라 무왕(武王)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 아우인 주공(周公)이 금등지서(金縢之書)를 지어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했다는 하는 고사이다. 주나라 왕실에 대한 주공의 충성심이 잘 나타나 있어 신하로서 임금의 쾌유를 빌거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던 비유이다.
조조가 주공의 금등지서를 거론한 까닭은 이 영을 내리는 본뜻이 자신의 한실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표시하고 자신을 의심하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개자추(介子推)와 신포서(申包胥)의 고사는 둘 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억울한 신하의 사례이다.
개자추는 진문공 중이의 충신으로 중이가 19년 간 긴 망명 생활을 하던 기간에 변함없이 그를 수행하면서 충성을 다했다. 유랑생활 중 먹을 것이 떨어지자 허기에 지친 중이를 위해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끓여 주기까지 했다. 중이가 진나라 문공으로 즉위한 후 공신들 간에 논공행상에 끼기 위한 다툼이 일었다. 가만있었던 개자추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 개자추는 혼탁한 세상에서 살지 않고자 면산 깊숙이 들어가 살았다. 나중에 문공이 잘못을 깨닫고 직접 면산으로 가 개자추를 불렀지만 개자추는 일부러 피하며 나오지 않았다. 문공이 산에 불을 질러 개자추를 나오게 하려 했으나 개자추는 끝까지 몸을 드러내지 않고 버드나무를 끌어안고 불에 타죽었다고 한다.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날은 음력 3월 5일로 24절기로 치면 청명절(淸明節)에 해당하는 때이다. 진나라 사람들은 개자추가 불타 죽은 일이 생각나서 그때가 되면 차마 불을 땔 수가 없어 찬 음식을 그대로 먹었다. 여기에서 한식(寒食)이 유래되었다 한다.
신포서는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의 충신이다. 오자서가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해 수도가 함락되었다. 신포서는 단신으로 진(秦) 나라로 가 원병을 요청했으나 진 애공은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신포서가 진나라의 궁정에 서서 7일 밤 7일 낮을 먹지도 않고 통곡하니 이에 감동한 진 애공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초나라가 비록 무도하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충신이 있으니 어찌 망하게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진정지곡(秦庭之哭)이라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진나라는 곧 전차 500대를 파견하여 초나라를 구원했다. 초나라가 회복된 후 초소왕은 신포서를 포상하고자 하였으나 신포서는 신하된 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음을 이유로 포상을 피해 달아났다고 한다.
조조는 개자추와 신포서의 고사를 인용해 이들을 애석히 여기며 자신은 그와 같이 어리석은 결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면 조조는 어찌하여 이런 교령을 발표해야만 했을까? 영의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대 그 당시 조조가 큰 공을 이루었고 지위가 극에 달했으므로 병권과 승상의 직위를 내어 놓고 초야로 돌아가 아름다운 이름을 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공공연연하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론의 형성자는 당연히 당시의 지식층인 사족계급이었다. 조정의 관리를 중심으로 한 사족층에서는 은근히 조조의 권력이 비대해진 것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여론 조성을 통해 그를 퇴진시키고 헌제에게 권력을 반환케 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조조는 이러한 여론에 일침을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힘으로서 더 이상의 공론을 막고자 했다.
사실 사족 출신의 관료계층과의 이러한 갈등은 조조가 천자를 허도에 영접했을 때부터 예견할 수 있었다. 천자가 자리를 잡게 되면 천자를 중심으로 한 조정이 실권을 회복하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천자의 이름으로 조령을 내려 권신을 통제할 수도 있었다. 원소는 이런 결과를 우려해 천자를 영접하라는 저수의 건의를 거절했다.
조조와 사족 계층을 중심으로 한 조정 관료들 간의 권력 갈등은 건안 초기부터 있었다. 조조가 태위 양표를 제거한 것이 바로 그런 맥락이었다. 양표가 황제를 참칭한 원술과 사돈지간이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 내면에는 태위 양표로 대표되는 조정 신료들의 기를 꺾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양표는 헌제의 조정에서 중심적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사족계급 사이에서 널리 중망을 얻고 있었다. 조조는 양표를 숙청함으로써 여타 신료들에게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저항을 용납할 의사가 없다고 분명하게 표시했다.
조조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시도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원술이 천자를 참칭하고 원소가 하북을 석권했을 때에는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조조와 천자를 비롯한 조정신료들은 사실상 공동운명체였기 때문이었다. 그 중간에 동승의 의대조 사건이 있었지만 동승 자신이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군벌세력의 한 파벌이었지 사족계급을 대변하지는 못했다.
조조는 조정대신으로 사족계급의 중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초빙함으로써 사족들의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초기에 조조는 조온(趙溫)과 순욱(荀彧)처럼 명망이 있으면서도 처신이 신중하고 항상 예절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조정에 중용했다. 재능은 있으나 돼먹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조정의 요직에 배치했다가 사족들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조온은 사도로서 조정의 어른 역할을 했고 보다 연소한 순욱은 상서령이 되어 조정의 일을 실질적으로 처리했다.
조온과 순욱은 근신충후(勤愼忠厚)라는 사족 계급의 덕목을 체화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족들에게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예형과 같은 이단아가 문상이나 다니고 손님이나 접대할 사람이라고 혹평을 받은 것도 이런 겉모습을 위선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순욱이 한나라의 시중(侍中) 겸 상서령(尚書令)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삼십 사세였다. 그럼에도 순욱은 항상 바른 자세로 신중함을 유지했다. 순욱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자신을 굽히고 예의로 대했으며 심지어는 자주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는 실질적으로 조정관료들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었지만 사적인 감정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순욱에게 집안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런대로 재능은 있었으나 행실이 가벼웠다. 어떤 사람이 순욱에게 말했다.
“그대는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데 모씨에게 의랑 자리 하나쯤 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순욱이 웃으면서 말했다.
“관리된 자는 재능을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오.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에 대해 말하기를 간사하다고 하겠소!”
그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다 이와 같았다.
건안9년(204년)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기주목을 겸직하자 조조에게 옛날의 구주제도를 복구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자가 있었다. 아마도 동소였을 것이다. 곽가, 정욱의 조조의 군사참모이고 순욱이 행정참모라면 동소는 전형적인 정치참모였다. 그는 조조의 의중을 살펴 조조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마땅히 옛 제도를 복구해 구주를 설치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기주가 다스리는 곳이 광대해져 천하가 복종하게 됩니다.”
후한 당시 한나라의 지방 조직은 13개 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나라 초기의 9개 주로 돌아가면 유주와 병주가 기주에 속하게 되어 황하 이북이 거의 다 기주에 속하게 된다. 조조가 기주목이 되었으므로 그의 관할 구역을 넓히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 때 한나라 조정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미치는 지역은 위의 3개 주를 제외하면 청주, 연주, 예주, 서주 등에 불과했다. 관중 지역은 간접적인 영향력만 미치고 있었고 양주는 구강군만 통치력이 미치고 있었다. 연주와 예주는 원래부터 조조의 본거지였고 나머지 지역에도 믿을 만한 사람들을 심어놓았으므로 나머지 지역만 직접 장악하게 된다면 천하는 사실상 조조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조조가 장차 이 말을 따르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순욱이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그렇게 하게 되면 기주(冀州)는 하동(河東), 풍익(馮翊), 부풍(扶風), 서하(西河) 및 유주(幽州)와 병주(並州)의 땅을 다 차지하게 되어 땅을 빼앗기는 지역이 많아집니다. 일전에 공께서 원상(袁尚)을 격파하고 심배(審配)를 잡자 해내(海內)가 다 몸을 벌벌 떨며 놀라고 있습니다.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영토를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병력을 일으켜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지역들을 나누어서 기주에 소속시키면 그들은 장차 다 마음이 흔들릴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관우(關右, 관중)의 여러 장수들에게 관문을 닫아거는 계책을 건의하고 있는데, 저들이 지금 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음 순서에는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게 될 것으로 예상할 것입니다. 일단 변란이 발생하면 선량함을 유지하던 자들조차도 서로 협박하여 악당들에게 가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원상은 느슨해진 틈을 따 죽기까지 버틸 것이고, 원담도 두 마음을 품게 될 것이며, 유표는 장강과 한수 사이를 지키려 들 것이니 천하는 쉽게 도모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급히 병사를 이끌고 먼저 하북을 평정하시고, 그 후에 옛 수도(낙양 및 장안)를 수리해 복구한 후, 남쪽으로 형주에 임해 공납의 의무를 하지 않은 죄를 문책하시면, 천하는 다 공의 뜻을 알게 될 것이고 사람들이 스스로 안심할 것입니다. 천하가 크게 안정이 되면, 그 때가서 옛 제도에 대해 논의하십시오. 이것이 사직을 위해 장기적으로 이로운 일입니다.”
구주제 복구는 본시 조조의 뜻이었을 것이다. 북방정벌로 영토가 광대해졌으므로 기주목의 직위만으로는 여러 지방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조조는 일단 장악한 지역을 남의 손에 전적으로 맡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순욱의 지적도 일리가 없는 바가 아니었다. 아직은 적이 많았고 천하의 민심이 다 자신에게 귀복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하에 대해 확실히 자신의 통치권을 확립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적을 양산할 수 있었다.
조정 내에도 그를 경계하고 견제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전통적인 사족계급이 그들이었다. 우선 순욱부터 이를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조조는 한 발 물러나 구주제도 도입 논의를 중지시켰다. 조조와 순욱의 정치적 이견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조는 결국 천하의 패권을 쥐고자 했으나 순욱은 조조가 조정을 대신해 조정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다스려 천하를 다시 안정시키는 역할만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때의 이견은 방법론적인 차이였을 뿐이지 근본적인 방향의 차이는 아니었다. 조조와 순욱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정의 이름으로 천하를 평정한다는 목적 달성을 위해 서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건안12년(207년) 조조는 하북을 다 평정하고 나서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할 때 순욱의 공을 제 일등으로 쳤다. 비록 전장에 나서 직접 싸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인 전략 방향을 제시하고 계책을 건의한 공이 더 크다고 평가했다. 순욱에게 식읍 일천 호를 더해 주어 이전에 받은 것과 합해 도합 이천 호가 되었다. 이어서 조조가 표를 올려 순욱을 삼공(三公)의 직위에 임명하려 했으나 순욱이 순유(荀攸)를 시켜 십여 차례에 걸쳐 극구 사양했다. 조조가 마침내 그만두었다.
또 조조가 유표를 토벌하고자 했을 때에도 먼저 순욱에게 좋은 방안이 있는지 물었다. 순욱이 방안을 제시했다.
“지금 화하(華夏)가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남방은 곤궁한 처지를 잘 알 것입니다. 완(宛) 현과 섭(葉) 현을 내버려 두고 지나쳐 가면서 몰래 날랜 병사를 진격시키면 유표가 생각지도 못했을 때 저를 엄습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진군을 시작하자 때마침 유표가 병사했다. 조조는 순욱의 계책대로 바로 완현과 섭현을 공략하지 않고 바로 형주로 진격하자 유종이 주를 들어 항복했다.
조조는 이 영을 발표하기 전 중요한 정치적 반대자 하나를 제거했다. 바로 소부(少府) 공융을 죽인 일이었다. 공융은 조정 내에 있으면서 널리 사족들의 여론을 주도했다. 매번 조회에서 정사를 논의할 때 공융은 오로지 명분에 입각해 의론을 전개했다. 공경대부가 다 그의 명성에 눌려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못했다. 그는 항상 기성의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조조가 처음으로 원소에 대해 대항하고자 했을 때에도 원소의 강성함을 선전하며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란 여론을 조성했던 것도 공융이었다. 공융은 변양, 예형 등 소위 비판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조조의 공적과 권위에 흠집을 내는데 열심이었다. 공융은 그 우월한 학문적 지식을 이용해 틈만 보이면 조조를 비방하고 훼예했다.
한번은 조조가 술 만드는 일을 금지시킨 일이 있었다. 공융이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조롱했다.
“하늘에는 주기지성(酒旗之星)이 있고, 땅에는 주천군(酒泉郡)이 있으며, 사람들은 술의 덕을 아름답다 칭찬합니다. 그러므로 요(堯) 임금도 천종(千鍾)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성스러움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걸주(桀紂)가 여색을 좋아해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지금 영을 내려 남녀간의 결합을 금지시키시지요.”
공융이 조조를 대놓고 비판한 것은 그가 워낙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주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항상 감탄하며 말했다.
“좌상에 손님들이 항상 가득 차고 술잔에 술이 비어있지 않으면,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랴.”
공융은 조조가 태위 양표를 죽이려 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만류했었고 업성을 함락시킨 직후 조비가 원희의 부인 견씨를 취했을 때에도 조조를 조롱한 적이 있었다.
건안13년(208년) 초 조조는 조정의 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도입했다. 전래되어온 삼공의 제도를 폐지하고 승상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대치했다.
삼공제도의 폐지를 가져온 계기는 사도 조온의 면직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조온은 건안10년(205년) 조비가 나이 열아홉이 되자 사도부(司徒府)의 연속으로 초빙했다. 조조가 표를 올려 조온을 탄핵했다.
“조온이 신의 자식을 초빙함으로써 관리를 선발하는 일이 불공정하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조온의 이 행위에 좋지 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때 이미 조조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꿈꾸고 있었던 듯하다. 새로운 나라의 대를 이을 유력한 후보인 조비를 조온이 자신의 연속으로 쓰고자 했다는 것이 조조의 비위를 거슬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조는 충성심이 강한 시중(侍中) 겸 광록훈(光祿勛) 치려(郗慮)에게 지절(持節)을 내려 주고 이 일을 처리하게 했다. 치려는 조온을 잘못을 문책해 그의 관직을 면직시켰다. 조조는 당분간 조온의 후임을 임명하지 않고 사도를 공석으로 비워 두었다. 태위 양표도 일찌감치 정치적으로 제거되었으므로 조정에 삼공의 지위에 있는 대신은 사공 조조만이 남게 되었다. 뭔가 정쟁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삼년 뒤 하북을 완전히 평정하고 난 후에 삼공의 권한을 모두 합쳐 신설된 승상직에 몰아주고 관리들을 감찰하는 역할 만 떼어내어 어사대부에게 맡겼다.
승상에는 조조가 취임했고 어사대부에는 치려를 임명했다. 어사대부는 관원들에 대한 감찰 기능을 총괄했다. 치려는 조정 내에서 조조의 뜻을 추종하는 인물이었다. 또 공융처럼 비판에 능한 사람을 눈엣가시처럼 싫어했다. 치려(郗慮)는 자가 홍예(鴻豫)이고 산양(山陽) 군 고평(高平) 현 사람이었다. 젊어서 정현(鄭玄)에게 학업을 전수받았으며 건안(建安) 연간 초기에 시중(侍中)이 되었다.
헌제(獻帝)가 한번은 특별히 치려와 소부 공융을 불러 접견한 일이 있었다. 헌제가 공융에게 물었다.
“홍예는 우수한 장점이 무엇이오?”
공융이 대답했다.
“그에게 도리와 관련된 일을 맡기는 것은 가능하나,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치려가 홀(笏)을 치켜들고 말했다.
“공융은 지난 날 북해태수로 있으면서 정치가 산만해 백성들이 다 흩어져 떠돌게 했습니다. 그가 권력을 편안히 가졌겠습니까!”
치려는 공융과 서로의 장단점을 비난하며 사이가 극히 나빠지게 되었다. 조정대신들 간의 불목함이 지나칠 정도가 되자 하는 수 없이 조조가 편지를 보내어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치려는 이 일로 광록훈(光祿勛)에서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좌천되었지만 공융은 오히려 장작대장이 되었다. 치려는 공융에 대해서 매우 깊은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겉으로는 비록 공융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속으로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어사대부 치려가 이를 알고 법에 걸어 공융의 관직을 면직시켰다. 비록 공융이 면직되어 집에 있으면서 세력을 잃었어도 빈객들이 매일 그의 집안을 가득 메웠다.
일 년 남짓 지나서 공융은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손권이 사절을 보냈는데 공융이 그를 응대하면서 대놓고 조조를 흉보고 비방했다. 치려가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다. 공융을 탄핵하고 그 죄를 물어 공융을 기시에 처했다.
공융이 처형된 것은 조조가 적벽에서 패하고 돌아온 이후의 일이었다. 치려가 어사대부에 임명된 것이 건안13년(208년) 팔월이었으므로 아마도 건안14년(209년) 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조조가 치려를 어사대부로 임용한 자체가 이 날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융이 체포되었을 때 그의 두 아들은 큰 아이가 불과 여덟 살이었다. 두 아들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 공융이 체포되어 잡혀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융의 아들들은 단정히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아버지가 체포되었는데 어찌 달아나지 않는가?”
공융의 아들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집이 부서지는데 알이 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융의 자식들도 다함께 잡혀 죽었다. 공융은 명성이 높고 맑은 재능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애통해 했다. 조조는 전국적으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염려했다. 여론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바로 영을 내려 공융을 죽인 이유를 밝혔다.
“태중대부 공융은 이미 그 죄로 인해 복주되었으나 많은 세상 사람들은 그의 허명만 알지 듣고서 그의 실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공융은 부박하고 겉은 번드르 하게 보이나 이면에서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찔할 정도였다. 그가 풍속을 어지럽혔음은 다시 조사할 것도 없다. 우리 주 사람이 고발하기를 공융이 주장했던 다음과 같은 말들을 평원 출신의 예형이 받아들여 널리 퍼트렸다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친함이 없다. 생선그릇에 비유하자면 그 안에 잠시 보관했을 뿐이다.’
또 공융의 말에 이런 말도 있었다고 한다.
‘만약 기근을 만났는데 아버지가 늙고 쇠약하면 차라리 나머지 사람들을 넉넉하게 먹여 살려야 한다.’
공융은 하늘의 도리를 위반하고 윤리를 해치고 어지럽혔다. 비록 지금 저자거리에 기시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늦은 것이 한스럽다. 이 사례를 다시 여러 군의 수령과 관리들에게 널리 알려 다 그 진상을 알게 하라.”
공융의 죽음이 늦었던 것이 가장 한스러웠던 사람은 조조였다. 조조는 공융이라는 거물을 죽여 뒷공론을 벌이는 사족들의 입을 막고자 했다. 다만 그의 명성이 높고 구실이 없어 죽일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비록 공융은 죽었지만 조조를 의심하고 견제하려는 여론몰이는 계속되었다. 재야의 사족들은 물론이고 조정내의 심지어는 조조의 측근들 중에서도 조조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언젠가는 참람한 생각을 품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여론을 조성해 조조를 아름답게 퇴진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양현자명본지령은 이러한 움직임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를 누르고자 나왔다.
적벽에서 패전해 조조의 위신이 상당히 실추되었던 바로 이 무렵이 조조의 퇴진을 거론하기에 매우 적합한 시기였다. 조조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힐 필요를 느꼈다.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음해한다면 그것은 드러내놓고 자신을 해치려 하는 것으로 간주해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는 엄포도 되었다.
아무튼 이 글을 읽고 나면 조조가 대단히 진솔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조의 입장에서라면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아름다운 이름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과 후손의 안전을 선택했다. 명예를 버리고 실리를 택한 셈이다. 조조가 항상 명분보다 실리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조조를 상당히 왜곡, 폄훼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조조는 누구보다도 대의를 위해 몸 바친 열혈투사였다.
큰 공을 이루고 나니 상황이 바뀌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적을 세우고 국가의 권력이 한 손에 쥐어졌을 때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왕조체제 하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었다. 모든 직위와 권력을 반납하고 초야로 돌아가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과 제위를 찬탈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것. 전자는 주공이 모범을 보인 바가 있으나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권력을 계승한 자가 악덕한 경우에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었다.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주공조차도 말년에 수모와 고초를 겪었다. 금등지서가 없었더라면 그도 역시 일신의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마다 한탄하고 안타까워하게 되는 대목들은 대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의 사례이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이루었으나 결국은 배신당해 일신에 화가 미쳤을 뿐더러 심한 경우에는 일족의 씨까지 말려버리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후세에 충신, 열사로 추모될 뿐 일신의 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주공에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되었던 곽광 같은 이조차도 그의 사후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반면에 찬탈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경우에는 일신의 안전과 영화는 물론 대대로 후손들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 왕조가 오래되어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 역시 대를 이어가게 되고 보면 찬탈의 기억은 사라지고 창업의 위업만이 남게 된다.
조조는 헛된 명예보다는 오명으로 점철된 영광을 남겼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충성하고도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떨어지게 하는 일은 그로서는 수용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의 가족 사랑이 유별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세에 칭송받기 위해 가족의 안전까지도 볼모로 삼는다면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조조의 불행은 그가 창업한 왕조가 너무 짧았다는 점에 있다. 후세에 그를 위해 변명해줄 사람들이 충분히 축적되기도 전에 그의 왕조는 절멸되었다. 후세의 명분론자들에 의해 지탄의 대상으로 악인의 전형으로 거명되기에 좋은 사례만 남겨준 꼴이 되었다.
이리하여 조조는 영웅이 되지 못하고 찬탈자가 되었다. 영웅은 민중의 여망을 달성하는데 실패하고 산화하거나 성공한 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람들이다. 그래야 당대와 후세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이 추모의 정이 쌓였을 때 영웅의 이미지로 승화되게 된다. 조조는 영웅이 아니었다. 조조는 비극적 영웅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범인임을 밝혔다. 이로 인해 그는 온갖 악평과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은가.
조조에게 제 삼의 선택지는 없었을까.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아름답게 퇴진해도 일족이 주살되는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또 큰 공을 이룬 후에도 일정한 권한과 지위를 계속 보유한 채로 정치체제 내에 한 세력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대안을 제시했었던 것이 바로 사마의의 형 사마랑이었다. 오등급작위제는 사마랑의 지론이었다. 오등급작위제론은 주나라 시대의 봉건제를 부활하자는 논의였다. 주나라 왕은 정치적 구심체로서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 등 의례적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실질적인 통치는 각 지방의 봉건영주들이 담당했다. 영주들의 세력 크기에 따라 공, 후, 백, 자, 남의 오등급으로 작위를 차별화했으므로 오등급작위제라 한다.
봉건제 하에서라면 조조의 선택은 훨씬 넓어진다. 자신의 봉국을 기반으로 제환공과 진문공의 역할을 해도 되고 천하의 삼분지 이를 소유한 대세력가로 남은 채로 천자에게 봉사할 수도 있다. 찬탈을 안 해도 패가망신할 일이 없는 것이다.
봉건제 하에서 영주들에 대한 재판권이 천자의 손에서 영주들로 구성된 배심제로 전환되면 이것이 바로 원시적 형태의 민주주의이다. 천자라는 전제 군주로부터 영주들의 재산권, 신체권 등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고 절차적 보장 장치로서 합리적인 재판절차가 수립되면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기본 얼개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징세, 전쟁 등 중요 정책결정 시 영주회의의 의견을 묻게 되면 의회의 원형이 수립되는 것이다. 1215년의 마그나카르타가 바로 이런 내용을 성문화한 것이었다.
영주 계급에서 민주적 권리와 절차가 확립되면 이것은 점차 그 하위 단계로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신사계급이나 시민계급에까지 이 제도가 확산되었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고 한다. 초기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재산권의 절대성에 그토록 집착하고 신체와 언론의 자유 등 자유권적 기본권이 가장 중시되었던 것이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영주들에게 있어서 봉지의 소유권을 누구로부터도 침해 받지 않는 것이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