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처녀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우리가요 100선에 드는 노래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좋아하더군요.
특히나 어르신들 앞에서 연주할 때는 이곡만큼 좋은 곡은 드물지요.
찐교스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찐한 뽕필~을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사연이 있답니다.
무척이나 긴 글입니다. 노래 들으며 쉬엄쉬엄 읽으셔요.
[아래는 2001.8.14자 엔돌핀 전문기자 긴머리님의 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1968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명보극장 앞 네거리에서 을지로3가 방향으로 10여M 내려가다 보면,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 동지회`라는 사무실이 있었다.
지금은 이 사무실이 등촌동으로 옮겨 가버렸지만, 당시는 명보극장과 스카라 극장 주변이
스카라 계곡이라고 불리우며 (예전에는 중대부속병원에서 을지로 3가 방향으로 가는 길에
남산에서 흘려 내리는 물로 계곡을 이루었으나 훗날 복개되어 현재에 이름)
영화와 쇼, 그리고 가요에 관계된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정담을 피우던 그런 곳이었다.
이 작가 동지회 사무실에는 윤기순(尹基順)이라는 18세 소녀가 여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된 동기는 장차 가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쳇말로 그녀는 가수의 화려한 꿈을 안고 서울에 온, 강원도 촌구석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가사를 돕는데 책임이 막중한 그런 소녀였다.
이런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인정파 젊은 가요작가(지금은 물론 늙은 나이지만) 김종한 선생이 개인레슨을 해주며 한을 풀어주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평소에 레슨비도 제대로 못내는 윤기순은 죄송스러워 어쩌지 못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내어
스승인 김종한 선생을 비롯해서, 회장인 반야월 선생, 작사가 고명기, 류노완, 월견초 선생등을 자기의 고향인 소양강 댐에 초청했고, 고향집의 아버지도 자기 딸을 지도해 주는 서울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윤기순의 아버지는 소양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가는 어부였다.
윤기순의 부모는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인다.
토종닭을 잡는다는 등 부산을 떨고 있을 때의 여가를 틈 타, 윤기순은 반야월 선생에게
"회장님, 저기 조그마한 갈대 숲 섬이 보이시지요? 거기가면 아주 경치도 좋고 놀기도 좋아요. 우리 저 섬으로 놀러가요." 하고 청했다.
노는 일(?)에 일가견을 가진 그들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일행은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그야말로 시상(詩想)이 저절로 떠오르는 경치에 일행은 시상을 가다듬었다.
바로 이때............
청천벽력으로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오면서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소나기 비바람이 몰아치며 잔잔하던 강 물결이 산천초목을 삼킬 듯이 일렁거리고
갈대숲이 난리부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나기에 흠뻑 젖은 윤기순이
"어머 무서워!"하면서 반야월 선생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얼마나 좋았을까*^^*)
바람은 10여분 간을 몰아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을 거두고 다시 맑은 햇살이 내리 쪼이는 변화무쌍한 심술을 부렸다.
일행은 다시 뭍으로 나와 젖은 옷을 말렸고, 반야월 선생은 이때의 느낀 감정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듬어서 <소양강 처녀>라는 가사를 만들었다.
1.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 그리 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2.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1969년 봄, 반야월 선생은 이 가사를 가지고 오아시스 레코드사를 방문하여 신곡으로 쓰라고 내어 주자, 회사 문예부의 상담역이던 작곡가 이호선생이 자기가 작곡한다고 자청했다.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바로 악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노래에는 가수 지망생중에서 김태희가 선택되었다. 당시는 음반 한 장(12곡)에 옴니버스 스타일이어서 10여명의 가수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12곡의 취입이 끝난 뒤 회사는 어느 곡을 타이틀로 할 것 인가하는 고민 끝에, 오아시스 전 직원을 모아놓고 노래를 들려준 후 무기명투표로 타이틀을 결정했고 여기서 소양강 처녀가 뽑혔다.
LP음반이 나오자 김태희(본명 박영옥)의 아버지는 답례로 반야월선생에게 양복을 선물했다는 후일담도 있었고, 편곡은 박시춘 선생이 먼 친척 조카뻘 되는 김태희를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는 말도 있다. (역시 우리나라의 혈연은 무섭다)
어찌되었건. <소양강 처녀>는 대박이 났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흘러, 김태희는 <소양강 처녀> 이후 이렇다 할 뚜렷한 후속곡을 못내고 인기대열에서 멀어져갔다. 그런데 92년 한서경이라는 가수에 의해 현대적 감각으로 편곡된,
종전에 없던 3절 가사를 넣은 <소양강처녀>(역시 반야월 선생이 작사)를 리바이벌해
인기곡으로 재탄생 하면서 노래방 시대에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고, 가요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던 김태희가 덩달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리메이크한 소양강 처녀 때문에 그 곡을 편곡했던 강모씨(친구남편임)는 지하 월세방에서 당당하게 집도 사고 작업실도 차리고 이제는 방송음악작곡가로서 일하고 있다. 정말 한 곡 때문에 인생이 달라진 케이스라고 할수 있다.
3.달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95년 춘천시는 작사가 반야월 선생을 초청했다. 춘천의 명소 소양강, 그리고 소양강 댐에 더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소양강 처녀> 노래비를 세울 계획을 밝히고, 노래비 건립에 관한 자문을 요청해왔다. 그리고 노랫말 중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의 모델이 누구냐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반야월 선생은 스스럼없이 1968년 어느 여름 소양강 상류 작은 섬에서 소나기 맞는 순간 느꼈던 감정과 사무실 직원 윤기순의 일화를 피력했다.
여기서 노래비와 소양강 소녀 동상도 만들기로 결정이 되었다.
한데, 노래의 주인공이 된 윤기순의 행방이 묘연했다. 소양강 상류에 살고 있는 윤기순네는
이사를 가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춘천시에서는 경찰국에 협조를 의뢰, 전국적인 컴터 조회 탐지로 윤기순이 광주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끝내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또한 가정 형편상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취입곡 하나 없는 한 많은 무명가수 윤미라로 광주의 밤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후 윤기순과 <소양강 처녀>에 얽힌 사연은 KBS-TV <이것이 인생이다>시간을 통해서 방송되기도 했다.
***이글은 방송내용과 연예칼럼 리스트 김주명씨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아래는 연합뉴스 이해용 기자님의 글(2006.7.13) 입니다]
그녀는 장마철 개울 가운데 있었다. 넘치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지푸라기 같은 것을 뜯어내고 있었다. 한 두개 씩 잡아 당겨도 개울물은 줄어들지 않고 넘쳤다. `소양강 처녀'였다.
국민 애창곡 `소양강 처녀'의 주인공이 얼마 전 이 골짜기에 안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위해 한참 찾아다니다 이렇게 개울 가운데서 마주친 것이다.
그녀 옆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나이든 여성이 있었다. 두 여성은 콘크리트 관을 매설해 물길이 빠져 나가도록 만든 진입로인 잠수교가 막히는 수해가 발생하자 이렇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아침에 전화통화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하자 사양했다. 내일 정도면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무조건 찾아 나선 것이다. 우선 그녀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인터뷰 성사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판단에 VJ가 장화를 싣고 들어가 힘을 보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견인 줄을 이용해 취재차량으로 잡아당기니 상류에서 떠내려 온 커다란 철망덩어리가 마침내 끌려나왔다. 그녀는 짝짝짝 박수를 쳤다. 어린아이 같았다.
이왕 점심시간이 됐으니 오늘은 그녀와 어머니가 운영하는 지암리 풍전가든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참 그녀에 대한 소개가 늦었다. 국민 애창곡 소양강처녀 노랫말의 주인공인 윤기순(55)씨다. 19살에 노래를 배우기 위해 춘천을 떠나 서울에 갔다 아버지가 소양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맛본 반야월 선생 일행이 바람을 쐬러 내려오자 중도로 안내한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젓는 나무배에 솥과 장작을 싣고 들어가 어죽을 끓여 먹은 뒤 나오는 사이에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친 뒤 인상적인 소양강 풍경이 전개되어 반야월 선생이 이를 노랫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의 식당은 닭백숙 같은 것을 만들어 행락객들에게 파는 집이다. 기자는 닭백숙을 주문했다. 여기서 인터뷰의 인자라도 꺼냈다가는 거절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일단 밥부터 팔아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71)는 빗속을 뚫고 족구장 옆에서 토종닭 한 마리를 잡아왔다. 빗줄기는 더욱 강해졌다. 어느덧 강에서 물안개까지 피어나 거슬러 오르는 모습이 신비스러웠다. 빗줄기는 밤나무 숲을 배경으로 사선을 그었다. `그나저나 인터뷰는 가능할 것일까?'
"비를 좋아하면 안된대요"
"왜 그렇죠"
"인생이 슬퍼진다나요. 하하"
그녀는 무슨 노래인가 흥얼거리며 식탁을 훔쳤다. 눌러 붙은 그릇은 남은 소주를 이용해 닦아내는 손놀림이 익숙해 보인다. 아내도 남은 소주를 저렇게 이용하지 않은가.
닭백숙을 먹고 나서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어머니가 그간의 사정을 대략 이야기해줬다. 7남매의 맏딸로서 객지에서 노래를 불러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시집도 가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녀와 본격적인 인터뷰를 진행하려는 순간 건장한 남자 몇 명이 들어왔다. 70여명이 야유회를 오려고 하는데 미리 자리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러 왔다는 것이다. 소주와 맥주를 스폰서 받아 가져와야 하는지, 여기 것을 사야하는지, 근당 멍멍이는 얼마인지 흥정이 오고 갔다. 음식장사 하는 것이 손님 비위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자들은 늘 똑같은 것만 물어봐요"
"소양강 처녀 노래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때문이죠. 소양강 처녀와 뗄 수가 없잖아요"
"소양강 처녀가 제 인생에 보탬이 된 것도 없고 마이너스가 된 것도 없어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토록'이라는 음반을 냈지만 크게 반향을 얻지 못했고 정작 소양강 처녀 노래는 김태희가 부르지 않았던가. 나중에 한서경이 리메이크해 또 한번 우려먹었지만 그녀는 소양강 처녀 노랫말의 주인공일 뿐 세상에 그 빛을 전혀 보지 못했다.
윤씨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어머니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오랜 노래여정 끝에 돌아온 그녀에게 행복하게 꿈이 영글어 가길 빈다.
무엇보다 소양강 처녀 노랫말의 주인공인 그녀가 이제부터는 이 노래가 태어난 고향에서 진정한 `소양강 처녀'의 영광을 찾기를 기대한다.
개울물은 저 아래 소양강변으로 줄달음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