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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廣州安氏)는 고구려 공신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 후손이라는 기록도 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의『송자대전(宋子大全)』187권에 연하의 같은 문중(宗少) 송규림(宋奎臨, 1637∼1682)의 처 광주안씨(廣州安氏, 1637~1678)의 묘지(墓誌)를 찬한 것이 남아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그녀의 선조는 고구려 공신(高句麗功臣)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대장군이 옳고 고구려 대장군은 틀린 것 같다. 하지만 묘지를 찬한 사람의 문집에 남아있는 기록과 비석이나 묘지의 실제 기록과는 차이가 생길수도 있는 것이다.
其先蓋本於高句麗功臣廣州君邦傑。 그 선조를 살펴보면 대개의 근원은 고구려 공신으로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이다. [句 : 句恐衍] : 글귀 구, 두려울 공, 넓을 연 (편찬자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일 것 같다는 의견을 따로 적고 있긴 하다.)
송규림(宋奎臨, 1637∼1682)의 처 안씨(安氏, 1637~1678)는 딸 넷을 두었고, 장녀는 성하징(成夏徵)에 출가하였으며, 나머지 셋은 알지 못한다. 그 선조를 살펴보면 대개의 근원은 고구려 공신(高句麗功臣)으로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 조부는 감찰(監察)을 지낸 안극제(安克悌), 아버지는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안근(安謹)이고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로 김란수(金蘭秀)의 따님이다. 광주안씨 부인은 戊午(1678)正月二十四日에 졸했고, 崇禎戊午(1678)三月日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묘지(墓誌)를 넣고 장례를 지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孺人安氏墓誌 a_114_275b
宗少宋奎臨妻安氏亡。崇禎戊午(1678)三月日。奎臨尊君縣監國士葬之于其先考掌令公諱希進之墓下。安氏事舅姑待郞君。孝順勤謹。無所違忤。蓋婦德備 矣。有四女。長適成夏徵。三女未行。安氏生於崇禎丁丑(1637)。歿於戊午(1678)正月二十四日。其先蓋本於高句[난001]麗功臣廣州君邦傑。其祖監察克悌。考龍驤衛副護軍謹也。母咸昌人金蘭秀女也。奎臨傷其賢而無子。來謂曰。倘後世墳土崩壞。願使人知其私親與夫黨。皆是簪纓故家而還掩之也。余遂書此使埋之。 [난-001] 句 : 句恐衍
송규림(宋奎臨, 1637∼168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여숙(汝淑), 호는 수촌(壽村). 조부는 예조좌랑(禮曹左郞)과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송희진(宋希進)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겸 전중어사(司憲府監察兼殿中御使)를 지낸 송국사(宋國士)이다. 일찍부터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향시(鄕試)나 경시(京試)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과거에서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유학의 정통은 주자(朱子)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로 이어진다고 하여, 항상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힘써 배우고 강론하였다. 송시열이 당쟁으로 인해 귀양길에 오르자, 자신이 지은 수촌정사(壽村精舍)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82년(숙종 8) 12월 19일 향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은 다음 날 황해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 현재 대전시 동구 이사동인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에 묻혔다. 저서로는 항상 자신이 음영(吟詠)하던 것을 묶어 만든 《수촌난고(壽村亂稿)》가 있다. |
첫댓글 고구려가 아닌 고려가 맞겠지요.
묘지를 찬한 송시열 선생은 고구려 공신 광주군이라고 쓴 듯 합니다. 이후 송자대전을 편찬하면서 [句恐衍(구공연)]이라는 주석을 달아논 것으로 보입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송자대전 기록에 [고구려공신 광주군 안방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이해서 올려봤습니다. 위 묘지는 1678년 3월에 작성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