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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대가야축제
내일(토)과 모래(일)는 휴일이다
현재로서는 아무 일 없지만 자고나면 메뚜기처럼 어디로 뛸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오늘 저녁 이 글을 작성해 두자
남재가 알려준 방법으로 사진 20장 이상을 올리는 방법의 두 번째 시험판이다.
시험 대상은 이미 지난 4월의 사진들이지만 남재가 관심을 가진 고령의 사진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시킨 대로 20장 이상을 올려놓고 검토해 보니 글쓰기의 수정 창을 열고 복사해 붙인 것과 그냥 기 창에서 글 쓴 부분만 선택하여 사해 붙인 것과 약간의 이가 있다. 전자의 방법으로 한 것은 사진을 클릭해도 사진이 따로 열리지 아니하는데 반하여 후자의 법으로 한 것은 다음 사이트가 하라는 대로 글쓴 방법과 같이 사진이 한 장씩 열린다.
분명, 원칙과 예외는 차이가 있어야 할 터인데 이상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내가 알아볼 겨를이 없나 필요성도 없다.
각설하고
1. 고령
남재는 이곳이 得貫鄕이라 관심이 많겠지만 내가 지난 4월 이곳을 찾은 것은 마음을 두고 찾은 것이 아니라 다시 언제 가볼지 모를 오도산(경남 합천 야로면 소재)에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렀다.
나는 사물을 봄에 있어 학구적 성품이 아니어서 무엇이든 주마간산 격으로 스~윽 보고 읽고 즐기는 것으로만 족하고 이를 오래 기억하려 하거나 그 역사나 근본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왕지사 보고 듣는 것이 그 근본을 알고 보고 듣는 것이 나쁘지 않다싶어 안내문이 있으면 그냥 사진으로 찍어 온다.
고령!, 그 옛날 삼한시대로 올라가면 彌烏耶馬國(한글로 써놓고 읽어보면 마치 일본어을 읽는 것 같다) 또는 반로국이라 하였는데, 점차 강성하여 42년 이진아시(伊珍阿豉)왕이 大加倻國을 건국하였으며 낙동강을 통하여 일본까지 교역하는 강성국 이었는데, 562년 신라 진흥왕 23년에 신라에 멸망 병합되었단다.
그 강대하였음은 고분군의 수효와 규모 삼한시대의 인구수 등을 짐작하면 경주의 신라보다 오히려 막강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째서 신라에 복속되게 되었는지 역사의 흐름은 참 알 수 없다.
고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보자
가. 고령의 옛 나라 이름
나. 대가야의 건국신화
다. 가라국의 성립
2. 남명 조식 선생도 놀라고 나도 놀란 대가야 왕릉
아래의 첫번째 사진은 왕릉 발굴현장에 전시된 사진인데 언제 쯤 찍은 사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진의 기재 내용은 1560년쯤 남명 조식선생이 산위의 왕릉을 보고 “산 위에 저게 뭣꼬”라고 놀랐다고 했다.
남명 선생이 왜 고령에 왔느냐 하면 고령의 진양정씨 문중이 처가집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약 반년 가량을 고령군 쌍림면 어느 마을에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징검다리와 섶다리를 건너면서 사진에서 보이는 저 산을 보고 나 역시 “저기 뭐꼬?” 하면서 맘속으로 이상한 산봉우리도 다 있구나 생각하고 거처하는 집 처녀에게 물었더니 왕릉이라고 했다.
당시 내가 본 저 산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무란 나무는 나무꾼이 땔감으로 다 베어가고 오다 가다 무릎 정도의 크기의 나무가 서 있었다.
어느 날 짬을 내어 나 홀로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는데, 사진에서 보는 저 모습은 고령에서 본 모양이고, 현장에 가보면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반대편은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 져 있고 왕릉의 반대편 절반은 아예 불도저로 파버린 것 같이 도굴되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왕릉은 사방에 벌집 수셔놓은 것처럼 사람이 기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뻥뻥 뚫려있었다.
몹쓸 것들.....
가. 1560년 경 남명 선생이 보신 모습과 1970년경 내가 본 모습
나. 2009년 4월 현재의 모습
왕릉 주변은 잔디로 말끔히 정비되어있고, 그 밖은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다. 주산성 정상에 올라 고령읍 위로 멀리 내다보면 낙동강 건너편에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 마을이 보이고 대가야는 저 강을 통하여 일본과 교역했단다.
3. 가야시대 현해탄을 래왕하던 복원한 교역선
대가야 당시 왜와의 교역선을 복원한 체험선
4. 야광 조개국자 퍼즐놀이
도우미와 어린이 사이에 있는 녹색 물건은 왕릉에서 출토된 야광 조개국자의 모형인데, 여러 토막을 내어 놓고 짝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다
5. 대가야와 왜와 교역의 증좌
야광조개는 우리나라에서는 나오지 않고, 일본 가고시마현 남쪽 해안을 중심으로 나오는 조개인데 그 것으로 가공한 국자가 왕릉에서 나온 것을 보아 가야와 왜가 교역했다는 것을 추정된다.
6. 고령의 부랜드 농작물
현재 고령은 딸기와 수박을 특작물로 브랜드화 하고 있다
축제장의 열기는 특작물도 한켠으로 비켜나 있었다.
7. 대가야 발굴현장
축제장에서 큰길 건너편을 보니 소나무 숲 위로 사람이 오락가락 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 하고 찾아가 보았더니 왕릉 발굴현장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녹색의 걷혀진 천막 넘어 희미하게나마 왕릉이 아닌 무덤이 보인다.
아마 진양정씨 문중의 무덤으로 보인다.
8. 이 왕릉은 발굴내부를 잘 볼 수 있도록 바로 옆에 구름다리를 설치하여 일반인들이 구름다리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해 두었다.
9. 주변에 함께 묻힌 사람들은 왕과 함께 순장 된 사람들이라 한다.
10. 구름다리 쪽에서 축제장을 내려다보면 왕릉이 아닌 무덤들이 있는데, 진양정씨의 무덤들이다.
한때는 왕실 소유였던 이 산이 이제는 문중 소유가 된 것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새삼스럽다.
보이는 저 비석의 비문을 남명 선생이 찬한 것으로 기억된다.
11. 발굴현장에 전시된 사진인데,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박물관이고 중앙에 동그란 별빛모양이 발굴중의 왕릉이고 그 앞으로 6개의 작은 무덤이 보이는데 진양정씨의 무덤들이고 그 중의 한 무덤 앞에 남명선생이 비문을 찬한 비가 있으며, 산의 끝자락 도로 넘어 광장이 축제장이다.
12. 궁금한 고분발굴 과정
대충 살아야지 너무 궁금해 하면 오래 못 산다는데..........
그러나 발굴과정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음은 모두 보라고 전시한 것이므로 여기에 올려 함께 보도록 하자.
가. 제1단계
발굴을 위해 벌채하고 풀을 걷어낸 모습
나. 제2단계
나는 이 사진을 보고 가로 세로 걸쳐 놓은 듯한 구조물이 발굴을 위하여 시멘트블록으로 설치한 구조물인 것으로 알았다.
도우미의 설명을 들으니 발굴자들이 꽃삽으로 저 모양으로 남겨두고 그 곳을 밟고 다니며 발굴한단다.
다. 제3단계
표토 층을 절반 쯤 걷어낸 상태
적석이 비로소 들어나기 시작한다.
라. 제4단게
내부 공간이 들어난 상태
마. 왕릉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가야시대의 무덤이 있는데, 왕족이거나 귀족의 무덤으로 추측된단다. 그들도 순장자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바. 봉토가 함몰된 모습
봉토가 함몰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무덤 방식이 목곽 밖에 잔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덮었는데 목곽이 썩자 봉토가 함몰된 것으로 보아 목곽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단다.
사. 원형의 모습 재현
이 사진은 박물관 내에 전시된 원형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 적석층 안에 목곽을 사용했단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는 목곽은 현대의 연모로 깔끔히 다듬은 널판자이지만 가야시대의 연모로는 저와 같은 깔끔한 널판자를 만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13. 가야시대의 무덤에서 나온 횡대(橫帶)(관 위에 나무나 돌로 덮는 판)
이 돌에는 가야시대 이전 청동기시대의 바위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양전동에 있는 바위그림의 돌로 추정되는데 가야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유적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뜯어와 무덤의 뚜껑돌로 사용했다.
가. 무덤에서 출토된 횡대
나. 역사의 이이러니
14. 양전동의 바위그림과 설명문
바로 이러한 돌을 뜯어 무덤의 뚜껑돌로 사용한 것이다.
바위그림
설명문
15. 김면 장군의 나무덧널
나무덧널이란 관을 넣는 널이다.
이것은 약 400면 전 우리 동문 남재의 선조 김면 장군님의 나무덧널이다.
그 옆에 부자간인 듯 한 어른과 아이가 관람하는 모습을 비교하면 그 크기와 두께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진을 보는 남재는 감회가 남다르리라
김면 장군의 나무덧널은 가야시대의 무덤으로부터 약 1200년 후에 만들어 진 것임으로 이것으로 지금은 모두 썩어 없어진 1600년 전의 가야시대의 나무덧널의 모습이 상상이 될런지?
16. 김면 장군은 어떤 분인가?
17.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
고령군은 금년 대가야 체험축제에 맞추어 206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고령읍 지산리 일대 15만4천여㎡ 부지(뭐 어렵게 말할 것 없고 박물관 길 건너편이다)에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를 조성 개관했다.
이곳에는 가야산성과 대가야 입체영상관, 철기방ㆍ토기방 체험관, 바닥분수, 유물체험관, 대가야 탐방숲길 등이 설치돼 있고, 관람객들이 고대문화와 첨단문화를 함께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으며 입체영상관은 철의왕국 대가야의 흥망성쇠를 4D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토기방ㆍ철기방 체험관에서는 토기 등을 직접 제작해 볼 수 있도록 했고, 대가야 탐방숲길은 숲길을 거닐며 퀴즈도 풀어보게 했단다.
18.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언덕에 아름다운 꽃나무가 사람들을 반긴다.
19. 홍매화와 나비
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 쪽 숲 속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누구 집에 초상이 났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곡소리는 한동안 구슬프게 산골자기를 흘러나갔다.
요즈음에도 이런 산골에 효자가?........
20. 곡소리의 발원지
곡소리를 따라 찾아갔더니 임종체험실 속에서 흘러나오는 곡소리였다.
체험실 안에 들어가 보니 제상을 체려놓는 등 상가 분위기가 나도록 장식해 놓고 체험자가 수의를 입고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면 흰옷을 입은 남자 도우미 한사람이 관 뚜껑을 덮고 사방에 못을 반 쯤 밖는다. 그러면 또 다른 굴건제복까지 한 남자 도우미 상주 3명이 슬프게 곡하며 임종하고 발상할 할 때까지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었다.
저기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무서워서 동료의 임종체험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21. 체험실 옆에 있는 신청소
이곳에서 일정 요금을 내고 접수하면 수의를 입고 체험과정을 설명을 들은 다음 체험실로 이동한다.
22. 테마관광지의 분재
데마관광지 내의 식물원에는 아주 잘 생긴 분재들이 많았다.
참으로 감상할 만한 나무들이 많지만 가져가라면 키우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여기 두고 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된다.
나이 탓인가?
김우홍 동문의 말이 생각난다.
산부인과 의사가 듣기 싫은 말은 무자식상팔자란 말이란다.
그렇담 꽃집 주인이 듣기 싫은 말은 여기 두고 감상하는 것이 났다는 말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많지만 3장만 올려본다
가. 모과나무
23. 메발톱
개량종인가 꽃 색이 여러 가지다.
24. 명자나무 꽃
첫댓글 聽岡! 고마우이. 훌륭한 사진들을 보니 우리 고령사람들은 정말 좋아할 것 같다. 聽岡이 雙林面에 살았다니 그 동네에 [高靈金氏 得貫祖] 墓所와 재실(景德齋)이 있는 곳이며. 일제시대 高靈金氏들은 고령에 살지 못하고 대구. 울산. 청도등지로 뿔뿔이 헤어져서 살게 되었다네 사진 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