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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대축일 축제를 기쁜 마음으로 지낸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순 시기가 도래하군요.
조금는 세속적인 연말 분위기도 함께 어울린 탓일까요
느슨해진 신앙심을 다시금 다잡기 위해서라도 사순 시기가 교회 전례력 안에 있다는 사실이
제겐 너무도 다행인 것 같습니다.
20일도 채 남지 않은 사순 시기를 준비하려는 마음에서 대전교구청 홈페이지에 올려진
『성주간 묵상과 성찰 기도문』에 대한 자료를 올려봅니다.
재의 수요일
전례주년 안에도 표징과 상징이 많이 있습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도 우리는 상징물을 이용하는데 그것은 ‘재’입니다. 사순 시기를 처음 시작하면서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습니다. 그리고 재가 뜻하는 상징을 통해 사순 시기의 삶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실천합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 첫머리에 이 깊은 의미를 되새기는 날을 ‘재의 수요일’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이 날에 재라는 상징물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재의 예식에 사용되는 재를 마련하기 위해 한해 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썼던 나뭇가지를 모아 태웁니다. 그것은 교회 예식에서 쓰던 물건에서 소재를 얻을 때에 예식의 표징에 가장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재나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합니다.
재를 받으면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창세 3,19)는 말씀이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을 듣습니다. 재가 갖는 상징과 함께 그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삶과 죽음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며,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삶을 바꾸어서 하느님께로 향하라는 회개의 호소인 것입니다.
재라는 상징물은 재의 예식을 통해 우리에게 세 가지 의미로 설명하여 줍니다.
① 먼저 재는 ‘열정’을 뜻합니다. 재는 불로 태운 것으로 시련과 단련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모두 태워버린 것입니다. 불로 자신을 태우듯이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열망과 열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태워 버리고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 또 재는 ‘정화와 순수’를 뜻합니다. 재는 태울 것을 다 태웠기에 깨끗한 것으로 무균질입니다. 그래서 ‘정화’를 뜻합니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 탈 수 있는 것은 다 태워서 제거되었기에 ‘순수’를 의미합니다. 재를 받고 살게 되는 사순 시기는 자신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순수한 본래의 모습, 흙과 같은 존재,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는 자신의 것으로 남는 생활이 되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③ 그리고 재는 ‘밑거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 재를 버립니다. 하지만 자연의 이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재는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며,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성장을 위한 거름이요 가장 좋은 비료입니다. 재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사순 시기에 새로운 삶을 출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향한 밑거름과 같은 생활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본래 성삼일을 앞둔 전례는 예루살렘의 전례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성목요일이 되면 예루살렘의 ‘순교 성당’에서 두 번의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첫째 미사는 사순시기의 단식을 마감하는 미사였습니다. 사실 단식을 실천하였던 수난시기에는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찬례가 이미 ‘먹고 마시는 잔치’이므로 단식 중에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미사는 특히 사순시기 동안 이름을 등록하고 실천하였던 ‘참회자’들과 공동체의 화해 예식으로 마련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두 번째 미사는, 골고타의 십자가가 서있던 자리에서 거행하였으며, 주님의 성찬제정을 기념하는 ‘만찬미사’를 지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성찬제정 기념미사는 단식 마감 미사와 이미 구별되어 거행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7세기 때부터 만찬 미사에서 거행했던 ‘발을 씻어주는 예식(세족례)’이었습니다. 이 예식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거행하신 당신의 성찬례를 기념하고 그대로 재현하듯이 똑같이 거행합니다.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높으신 어른이 먼 길을 왔을 때, 귀하신 손님을 맞았을 때 집주인은 그를 맞아 발을 씻어 주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귀중한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을 위하는 ‘봉사할 자세’를 갖추었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후만찬에서 예수께서 보이신 이 행위는 상황이 다릅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씻어드린 것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당신을 무한히 낮추신 겸손한 사랑이며,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며, 봉사 받는 자기중심이 아니라 상대편을 이해하고 봉사하는 사랑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신 행위에 대해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스승이며 주인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15)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일, 이것은 사랑의 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죽음의 의미는 생명을 지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셨기에 인간이 당하는 온갖 고통과 죽음까지도 그대로 다 맞이하신 것입니다. 그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참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① 죄의 결과는 고통이며 고통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 인류의 모든 범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②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직접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죽음,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초세기 교회 때부터 성금요일 전례를 매우 깊이 있게 기념하고 거행하였습니다.
성금요일의 전례는 시작예식 없이, 간단한 경배와 기도를 하고, 말씀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말씀 전례’는 ‘우리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신 구세주’(제1독서, 이사 52-53장)와 ‘예수께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심으로써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제2독서, 히브 4-5장)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는 구세주이심을 밝혀 줍니다.
복음은 요한의 수난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드라마틱하게 입체 낭독함으로써 현장감 있게 생생하게 주님의 죽음을 묵상합니다. 아울러 보편 지향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무엇이며, 우리가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죽음의 의미를 우리 생활 안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십자가 경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는 절정에 속합니다. 이 경배 때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 그리고 수난과 죽음의 절정으로 보여주신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성야 미사, 빛의 예식
빛의 예식은 부활의 생명으로 이끄는 과정을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예식입니다. 빛은 그리스도 부활의 가장 큰 상징이요 표징입니다. 빛이 비추이면 어둠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것이 빛의 힘이며,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입니다.
죽음과 파멸은 어둠에 비유되는 반면에 빛은 생명의 비유로 나타납니다. 빛을 보고 빛을 받아들이며, 빛의 능력은 곧 생명의 능력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 대축일 전 날 밤에 시작하여 날이 밝기 전에 마치는 것입니다.
부활 성야 예절에서 빛의 예식을 통해, 주님의 빛은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새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주간의 첫째 날이며,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신 날입니다. 빛의 예식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빛과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해 새 계절인 봄기운과 함께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오신 것입니다.
전례 위원 교육 기도문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그분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던 우리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처럼
그분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지성이 어두워져 인간의 법에만 얽매였던 우리는
죽음이나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알아보신 그분은
우리를 가엾이 여겨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내면의 폐허를,
전혀 희망이 없는 우리를 보시고
당신의 희망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를
불러주셨고
무(無)에서부터 존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로마의 클레멘스(1세기)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이성(理性)이나 언어, 풍습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보된 장소나 도시에서 살지 아니하며
신비스럽고 비밀에 싸인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으며
특별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마다 태어난 대로
동양이나 서양에서 살며
의복이나 음식,
그밖의 것도 다른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삶으로
여느 삶과 다른 삶을 사회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조국에서 살건만 이방인처럼 살고 있으며
모든 일에 참여하나
모든 것에서 떠나 있습니다.
육(肉)을 지니고 살면서도
육을 따라 살지 않으며
정해진 법에 순종하나
법을 초월한 삶을 살아 가며
모두를 사랑하나 모두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단죄받고 있는 우리는
가난하나 많은 이를 부유케 하고
죽음을 당하나 생명을 되얻습니다.
디오그네또(2세기)
우리 하느님은 기쁨의 하느님
인간의 육(肉)에 부어진 하느님 영(靈)은
슬픔도 고통도 용납치 않으시니
너는 언제나 기쁨에 충만해 있어야 한다.
기쁨은 언제나 하느님이 바라시고
반기시는 것
명랑한 사람은 누구든 선을 행하고
명랑한 사람은 모두를 선하게 생각하며
슬픔을 비웃는다.
우울한 사람은 비뚤어진 행동을 하고
악을 행하니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쁨의 영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사람의 기도는
그 마음속에 자리한 슬픔 때문에
주님께로 오를 만한 힘이 없으니
슬픔을 멀리하는 이들은 온갖 기쁨을 입고
주님 안에 영원히 살고
온갖 즐거움을 몸에 두른다.
헤르마스의 서간(2세기)
내 이름 기억해 주십시오
아버지, 나 당신 앞에 꿇어 엎드리오니
내 지성을 받아주시고
당신 섬기는 일에 순응하도록
내 지성을 인도해 주십시오.
당신을 찾고 사랑하며
당신 말씀을 깊이고 맛들이게 해주십시오.
내 손을 잡아
다시 일어서게 하시며
높은 곳을 향해 갈 수 있게 나를 도우시고
내 눈을 열어 안전하게 해주십시오.
부끄럼을 당하지 않게 하시며
생명의 책에 내 이름 적으시어
당신의 예언자들,
사도들과 함께 있게 하소서.
사도규정(4세기)
우리는 필요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은 교만한 자들의 폭력을 쳐이기시고
권세있는 자들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 들어올리시고
거만한 자를 낮은 곳으로 내치십니다.
당신은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시며
죽이시기도 생명을 주시기도 하며
절망에 빠진 자를 구해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기도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어려움 중에 있는 자를 구해주시고
넘어진 자를 낫게 해주시고
멀리 가버린 자를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혀 있는 우리 형제를 풀어주시며
수고하는 자를 도와주시고
용기없는 자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로마의 클레멘스(1세기)
우리와 함께
우리 모두는 서로 존경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이웃의 일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를 원치 않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자 합니다.
우리들 마음을 갈라 놓는 것을 원치 않고
목자들과 함께 충실히 살고자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선행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오로지 하나의 기도
즉 하나의 청원,
하나의 마음
하나의 희망과 보다 큰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능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이
한곳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곁으로
달려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2세기)
첫댓글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