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가짜 행복이 아닌, 참된 행복을 찾고 계십니까?”
당신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기준 때문에 지금 행복하신지요?
한번은 영국의 싱크탱크인 신경제학재단(NEF)에서 발표한 나라별 행복지수(HPI,Happy Planet Index)를 보게 되었습니다. 조사대상 178개 나라중에서 한국은 102위, 미국은 150위, 일본은 95위를 차지했는데 1위는 인구 34만명인 남태평양의 바누아투공화국이 차지했습니다. 누구나 다 잘 산다고 인정하는 나라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 도대체 그 이유와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또한 각 나라의 중산층 기준을 조사한 내용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산층의 기준은 부채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소득 500만원 이상, 2000CC 이상급 중형차를 소유하고, 예금액 잔고가 1억원 이상 보유하고, 해외여행을 1년에 한차례 이상 다녀오는 계층이라고 밝혔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이 제시한 영국의 중산층 기준은 페어플레이를 하는 행동과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그리고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갖기, 사회적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하기, 불의와 불평, 불법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퐁피두 대통령이 밝힌 프랑스의 기준은 외국어는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악기가 하나씩은 있으며,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며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계층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은 또 이렇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며,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고, 페어플레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문화와 복지가 너무나도 잘 갖추어진 일명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이 없어 자살이나 우울증, 마약이나 정신병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비율이 오히려 높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행복의 기준은 결코 물질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이나 어떤 사회의 시스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 가져다 준 불행의 함정,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창세기 11장 바벨탑의 비밀입니다. 하나님 같이 높아보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과 견고한 도시를 형성하여 흩어짐을 면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탑을 쌓음으로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잘 살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을 과시해 보려고 했던 바벨탑의 사건.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인간의 야망과 욕심의 결과는 결국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덩그러니 터만 남은 바벨탑의 자취와 같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욕심 뒤에는 공허만이 영혼 가득 내려앉아,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 파괴시키는 재앙을 불러 왔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이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 하나님을 떠난 이후 인간에게는 세가지 정욕이 찾아왔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한일서2:16).” 이때부터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일평생의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근본이 회복되지 않으면 욕망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불행도 끝나지 않습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고백한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바벨탑이 아닌 참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참된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관점이 달라질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본질을 발견할 때, 잠깐의 필요가 아닌 영원한 우선순위를 붙잡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린도후서3:5)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명기33:2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하박국3:17-19)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참된 행복의 시작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가고, 나무가 뿌리를 땅에 내리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원리인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행복한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빼놓고 인간을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존재로만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 부분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고, 저주와 재앙과 고통이 들어왔으며 이 문제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가 없고, 오히려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더 심해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후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역사하고 있는 사탄, 마귀, 귀신이라고 하는 악한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탄이 가져다주는 사주와 팔자, 운명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근원적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복음(福音, 기쁜소식)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迎接)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이란 불행의 근원인 사탄의 손에서 해방되어,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셨고,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1:2).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수기6:24-27)
삶의 고통→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베드로전서5:7-10)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요? 하나님은 당신이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고통 가운데서도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언제 시작되었으며 언제 끝이 날까요?
원래 인간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그 때부터 고통 가운데 빠지고 말았습니다.(창세기3:1-20)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하여 고통에서 해방받을 수 없으며, 죽어서도 죄로 인한 심판을 면할 수 없고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까지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면 고통이 시작되고, 나무는 땅을 떠나면 고통이 찾아오듯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속이는 자인 사탄의 지배 아래 속하게 되었고(요한복음8:44), 일생토록 세상 풍속을 좇아 우상을 섬기며 사탄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에베소서2:1-2) 또한 사탄에게 완전히 억눌려 영적인 병과 정신질환, 육신의 질병, 가정 문제 등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사도행전10:38).
■그렇다면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오신 그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탄의 문제, 죄와 저주의 문제, 지옥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시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고통 가운데 방황하는 인생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주셨습니다. 즉, 고통의 모든 원인을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모든 죄악과 허물, 고통을 다 담당하시고 이미 끝내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당신의 중심에 주인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한복음1:12).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내 인생을 완전히, 영원까지 책임지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20)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
바울의 사역 말기에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제자를 속히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함께 드로아 가보의 집에 맡겨둔 겉옷과 책(parchment/두루마리 양피지)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특별히 가죽종이에 쓴 것이라고 명시한다(딤후4:13).
기원전 4000년 무렵부터 이집트에서 사용했던 파피루스는 지중해를 건너 수천 년 동안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뒷받침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도시국가 페르가몬을 통치했던 에우메네스 2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견줄 만한 도서관을 세우고 20만 권가량의 책을 보유했다. 페르가몬의 급부상을 경계한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자 에우메네스는 신하들에게 이를 대체할 필기 재료를 찾으라고 명령해 양피지가 발명됐다고 한다. 양피지를 뜻하는 영어 ‘parchment’는 ‘페르가몬 종이’를 뜻한다. 언어 표현에서 서로간에 정확한 의미를 찾아서 소통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보통 우리들이 일을 시킬 때 두루뭉수리한 표현을 쓴다. 아이야 계란 서너더댓개 삶아 오너라 라고 한다. 이것은 계란을 3개, 4개, 5개를 포함하는 다중 숫자 개념의 표현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보통 정확하게 3개 아니면 4개를 삶으라고 정확하게 말한다고 한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과 같은 한자 문화권 아래에 있으므로 어떤 동일 대상을 같은 의미의 한글(Vernacular Korean)과 한자어(Sino-Korean)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한글로 한해, 두해라고 하지만 한자어로 일년, 이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어떤 사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다른 느낌을 줄 때가 있는데 단어(words)와 표현(expressions)은 다양한 언어생활을 통해 습득한다. 대개는 대화를 통해 알게 되지만 독서를 통해서도 알게 된다. 어떤 글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해력을 갖춰야 하며, 그다음에는 독해력이다. 문해력(literacy)은 말 그대로 문장의 내용 을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이다.
독해력(reading comprehension)은 읽은 내용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나름대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이른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복음을 확인한다. 확인된 복음은 글과 말을 통해 전달한다. 국어의 기본이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인데 같은 말을 들어도 서로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지방의 사투리가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듣지 않으려는 의도가 강하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 귀기울이지 않는 결과이기도 하다. 책 제목이 주어지지 않은채로 바울이 가져오라고 한 두루마리를 디모데는 잘 알아듣고 가져갔을까? 책이 그것 하나뿐이었다면 다행이지만 여러권의 책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종이 시대를 지나 영상 시대가 되었으므로 글을 읽고 분별하는 일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너무도 간단한 복음메시지를 이해하는 문해력이 안되므로 당연히 독해력을 기대할 수 없는 답답함이 요즘들어 부쩍 많아지고 있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것이 진정한 토론이라고 하는데 옳음의 가치를 자신의 테두리에 가두어 놓으면 단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니 표현은 어떻게 알수 있을까 말이다. 시대가 발전하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도 많아진다. 짚신만 신던 우리에게 고무신이 생기고 운동화가 생기고 구두가 생겼다. 이름 모른다고 안신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에는 있지만 그것을 찾아 집중으로 고백하는 전도자들이 살아나는 시대 현장의 정복을 위해 플랫폼, 파수망대, 안테나를 활용한다. 숫자 1과2로 구성된 디지털과 흑암문화 666시대를 능가하는 777망대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초대교회시대 최고 엘리트인 바울은 싸구려 파피루스 종이 대신 두루마리 양피지(parchment)를 애용했다. 시대를 아는 바울은 성도들의 헌금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가장 귀한 자료에 담을 줄 아는 선각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