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하는 제국, 번영하는 도시
11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 약체화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번영도 잠시 쇠퇴하지만,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콤네노스 왕조의 시대에 어느 정도 회복했으며 국제 교역 도시로서의 번영도 되찾았다.
그러나 상황은 복잡했을 뿐 아니라 변화하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존재,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긴장,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 사이의 긴장, 이슬람교 내 다양한 집단 간의 긴장, 서유럽 상인들의 다양한 파벌 간의 긴장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때 쯤 되면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서유럽의 태도는 과거의 맹목적인 동경과는 크게 달라졌다. 의혹과 시기, 심지어는 경멸도 뒤섞여 있었다.
서방과 동로마 제국 간의 관계는 무엇보다 종교적 차이로 인해 개선되지 못했으며, 1054년 교회가 결국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서유럽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성유물의 보고인 콘스탄티노플이 이제 이단자의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보았다. 더군다나 놀랄 정도의 세속적인 부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모든 대도시가 지나고 있는 명암 그리고 복잡함이 함께 존재했다. 서유럽에서 시골출신의 군인이나 소도시의 주민들은 이 도시를 매우 언짢게 여기기도 했다. 1140년대에 드 되이 신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도시는 더럽고 냄새가 났으며, 여러 곳에서 끝없는 음침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부자들은 중심 거리에 집을 지으며, 작은 길과 뒷골목들은 이방인과 빈자들에게, 그리고 살인, 강도 등 어둠 속에서 성행하는 온갖 범죄에 내맡겨진다.……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지나치다. 이곳은 세상 어디보다 부유하지만 또한 그 어디보다도 사악하다.”
“그들은 용맹심이 없었으며,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부적당했다.” 968년에 리우트프란트 주교가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황제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구입한 다섯 필의 자줏빛 비단이 수출금지 품목이란 이유로 압류되자, 격노하여 오토 황제에게 이런 글을 썼다. “그들은 용맹함이 없었으며,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부적당합니다.” 이 얼마나 온당치 못하고 모욕적인 처사입니까. 이 연약하고 여자 같은 놈들이 긴 소매와 두건, 모자 차림으로 나다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게으른 거짓말쟁이들이 자줏빛 옷을 입고 나다니는데 당신 같은 영웅이, 용감하고 전쟁에 능숙하고 신앙과 사랑이 가득하며 신에게 순종하고 미덕으로 충만한 분이 입어야 할 자줏빛 실이 아말피와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매춘부와 마술사들에게 팔리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앙갚음을 했다.
서유럽인들이 보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여인들은 화장에 너무 열중했고, 지나치게 정성을 들인 음식을 먹었다. 무엇보다 안 좋은 것은 남자들이 자신을 위해 싸워줄 용병을 고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콘스탄티노플은 점점 군사적으로 무능해졌고 황제들을 군사력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이런 풍조는 도시와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