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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제국의 분열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자는 이복형 아리다이오스, 그리고 박트라아 왕의 딸 록시나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 4세였다. 그러나 아라다이오스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었으며 알렉산드로스 4세는 아직 갓난아이였다. 두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군인들 사이에 벌어진 후계자 다툼에서 살해당한다. 기원전 309년에 왕가의 대는 끊어졌다.
본가인 마케도니아는 무장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기원전 279년,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등장하면서 겨우 안정됐다. 이에 앞서 시리아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임명한 바빌론 총독 셀레우코스가 지배 체제를 계승,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기원전 60년)를 일으켰고,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총독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마고우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기원전 30)를 일으켰다. 이른바 헬레니즘 3대 왕국의 성립이다.
그중 마케도니아 왕국은 기원전 214-167년 사이 로마로부터 세 차례의 침공을 당했고, 그 후에 일으킨 저항운동마저 진압되면서 기원전 147년에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다. 참고로 로마는 기원전 6세기 초 인도, 유럽어 계통의 라틴족이 세운 도시국가로, 이탈리아 전역을 제압하고 카르타고와 세 차례의 격렬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서서히 나라 밖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처음에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지배했으나 점차 국력이 쇠퇴하면서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소왕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 왕국은 수많은 도시를 건설해 이른바 그리스 문화의 동방 전파에 이바지 했다. 특히 유명한 도시는 원래 왕국의 수도였던 티그리스강 유역의 셀레우키아(지금의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근교)와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두라유로포스, 오론테스 강 유역의 에피파네이아(지금의 지리아 중서부 하마), 라오디케아(지금의 시리아 동지중해 연안의 도시 라타키아), 오론테스 강의 지중해 하구에 위치한 안티오키아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도 인류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녀였던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이야기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녀는 절세 미녀이자 재원으로 역사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안정적이었던 시기는 나머지 헬레니즘 두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대 프톨레마이오스 1세(재위 기원전 305-기원전 283)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기원전 246)가 통치하던 때였다. 마케도니아(그리스)식 중앙집권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관료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을 기용했다. 또한 제정 일치의 전통을 유지해 왕권을 신격화했고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과 성스러운 황소 아피스의 합성 신인 세라피스를 국가의 신으로 모셨다. 왕조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는 이집트 본토는 물론 키프로스, 팔레스타인 지역, 시리아 남부에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영토는 점차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이집트 본토만 남게 됐다. 로마가 지중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세력을 확장하던 당시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곳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헤롯 왕이 집권하는 유다 왕국뿐이었다.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나라였다. 이집트는 지중해 지역에서 으뜸가는 대국이었다.
지중해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찬란히 빛나는 도시였으며, 최대의 영화를 구가했다. 나일 델타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시는 바다를 향해 뻗은 곳에 있었다. 북쪽과 서쪽은 지중해로, 남쪽은 마레오티스 호수에, 동쪽은 나일 강 하구에 둘러싸여 있다. 도시는 15킬로미터 길이의 2중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질서정연하게 구획된 바둑판 모양의 도로가 놓여 있었다. 왕궁은 도시 북쪽에 있었는데, 전체 도시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플리니우스, <박물지>). 왕궁 안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비롯해 역대 왕들을 모신 왕릉이 있고, 남쪽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세라피스 신을 모신 신전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중해 최대의 곡물 수출항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 거점이 된 것이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완성된 연구 시설 무세이온이다. 여기서는 철학, 의학, 지리학, 천문학 등의 자연과학부터 인문과학 일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망라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헬레니즘 세계의 많은 학자가 이곳에 몰려들었다.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으며 도서관에는 50-70만에 이르는 장서가 있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한 규모다.
알렉산드리아를 유명하게 한 것 중 하나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파로스 섬의 등대다. 4층짜리 이 등대의 높이는 약 130미터, 그 불빛은 55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이 등대는 7세기에 파괴됐고, 이후 두 차례의 지진으로 피해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재건되어 14세기 무렵까지는 실제로 가동됐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산마르코 대성당의 모자이크 그림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교 활동을 펼치다 순교한 성 마르코 시신을 운구해 와 9세기에 지어졌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내던 성 마르코의 생활을 상상하며 13세기에 그렸다는 상상화에는 이 등대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등대가 있었던 파로스 섬은 지금도 등대를 의미하는 말로 남아 있다. 등대를 뜻하는 영어나 불어의 ‘Pharos’는 이 파로스 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재위 기웑너 221-204)가 재위하던 무렵부터 점차 쇠퇴하게 된다. 왕가의 내란, 시리아 왕국과의 전쟁, 로마의 내정 간섭 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 무렵인 기원전 69년 12월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로 태어난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6명의 클레오파트라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7세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6세와 언니 베레니케 4세, 여동생 아르시노에,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자랐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운명적 만남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피로 얼룩진 내분 속에서 태어났다. 선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왕가의 내란으로 살해되면서 사촌동생인 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의 키프로스 약탈을 허락했고 그로 인한 백성의 반발로 한때는 로마로, 다시 에페소스로 도망쳤다. 그 사이 클레오파트라 6세가, 또 그 사후에는 베레니카 4세가 이집트의 실권을 잡았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간절한 청을 받은 로마의 시리아 총독 가비니우스가 이집트로 진군해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남편 아르케라스를 처형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복위할 수 있었다.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왕위에 오른다. 이집트 왕조 당시에는 형제자매끼리 결혼해 공동 통치하는 풍습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18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10세 때의 일이다.
당시는 로마 공화정이 끝나갈 무렵으로, 로마 정권의 향방은 크라수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3명의 세력 다툼에 달려 있었다. 기원전 60년에 성립된 3명의 정치동맹(제1차 삼두정치)은 이들 세력의 균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중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지중해의 해적을 평정했으며, 기원전 66-61년 동망 원정을 떠나 소아시아를 정복했다. 기원전 64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시리아를 속주로 편입시키는 등 실력 면에서는 월등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해 카이사르는 훨씬 뒤처져 있었지만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콘술)에 취임한 후 급격히 세를 불렸다. 그 후 기원전 58-50년에 갈리아로 원정을 떠나 모든 켈트족을 제압하고 이미 속주였던 ‘알프스 앞에 있는 갈리아’에 이어 ‘알프스 너머에 있는 갈리아’까지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견줄만한 세력을 얻게 됐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파르티아 원정 중에 전사, 이 전쟁에서 중도 탈락하게 된다. 결국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싸움이 됐는데, 두 사람의 경쟁은 내전으로 번졌다.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령 내로 군대를 진격시키고 폼페이우스를 압도했다. 기원전 49년 3월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이어 폼페이우스의 또 하나의 기반이었던 스페인에서 승리하고 기원전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를 격파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해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를 지지하는 파벌과의 싸움에서 패해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시리아 국경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들은 폼페이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로마를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 교묘히 폼페이우스를 살해한다.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폼페이우스의 목과 반지였다.
이제 그토록 유명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먼저 카이사르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가 태어난 것은 기원전 100년 7월 13일, 사망일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다. 가이우스는 자신의 이름이고 율리우스는 씨족의 이름, 카이사르는 성이다.
고대 로마 사회는 귀족(파트리키우스)과 평민(플레브스)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후 귀족과 평민의 구별은 폐지되고 평민의 상류층과 귀족이 명문가(노빌리타스)를 형성했다. 율리우스 가문은 귀족에 속해 있었으나 특별히 유복하지도 않았으며 걸출한 명문가도 아니었다. 변변한 배경 하나 없던 카이사르는 관료의 길로 들어서자 신관직, 재무관, 안찰관, 법무관 등 집정관을 향한 계단을 착실하게 밟아갔다. 이런 과정만 보면 융통성이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연상되겠지만 이는 잘못된 선입견이다.
어쩌면 이런 선입견은 그의 용모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고대 로마 시대 미남의 기준은 여성과 같은 곱상한 용모였다고 한다. 그 기준에서 보면 카이사르는 절대 미남이 아니었다. 그는 젊을 때부터 볼에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고, 40대 후반부터는 점점 머리가 빠지고 이마가 넓어져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이마까지 내려 대머리를 숨겼다.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책 <로마 황제전>에서 카이사르의 용모에 관해 보다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그는 큰 키에 하얀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지고 있으며 입은 크고 눈은 형형히 빛나고 건강했다….. 체면을 중시했고 세간의 이목에 민감해 정성스레 머리와 수염을 다듬었다…..매번 정적들의 공격이 대상이 되는 보기 흉한 대머리는 그의 큰 고민거리였다. 때문에 숱이 적어진 머리를 항상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내리고 있었다. 원로원과 민회에서 결의되어 그에게 주어진 그 어떤 명예로운 칭호보다도 월계관을 평생 쓸수 있다는 권리만큼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는 대머리를 고민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호색가이며 방탕했다.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에 관해,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은 아내를 카이사르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을 정도다. 이 중에는 삼두정치 체제로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던 크라수스의 아내 테르투라,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키아, 폼페이우스의 부관이었던 가비니우스의 아내 로리아까지 있었다고 하니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카이사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였다.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집정관이 됐을 때는 세르빌리아에게 거금을 들여 진주를 선물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카이사르는 20년 가까이 그녀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으며, 둘의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러한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을 비꼬아 갈리아의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부인을 지켜라. 지금 우리는 머리가 벗겨진 바람둥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은 그만큼 유명했고 당시 로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하세가와 히로타카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거액의 빚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앞서 말한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에게 고가의 진주를 선물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액에 상관없이 고가의 선물을 세르빌리아에게 안겨줬다. 물로 ㄴ고대 로마 사회에서 관직을 하나하나 올라가는 데는 당연히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돈 씀씀이는 차원이 달랐다. 그다지 부유하지도 않던 카이사르의 집안은 눈깜짝할 사이에 거액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기원전 61년, 카이사르가 속주인 스페인의 지사로 부임했을 때 빚쟁이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돈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이때만큼은 카이사르도 어쩔 수 없었는지 대부호였던 크라수스에게 빚 보증을 부탁해 위기를 넘겼다. 당시 속주의 지사가 된다는 것은 그 직권을 이용해 채무의 상환은 물론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카리사르도 이 기회를 이용해 가까스로 빚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라로 쳐들어온 카이사르를 만나려 했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둠을 틈타 조각배를 타고 왕궁에 잠입한 뒤 하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담요로 싸서 밧줄로 묶어 짐짝처럼 들고 들어가게 했다.
담요를 풀어헤치며 카이사르 앞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21세, 카이사르는 53세였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의 지성과 미모에 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카이사르가 이 여자에게 빠진 이유는 고혹적인 자채로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의 첫 번째 작전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에 감탄한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화해시키고 왕위를 공유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이 화해는 성립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추종자들이 카이사르의 개입에 반발해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됐다. 카이사르군은 초반에 적은 병력 때문에 고전하다가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까지 불에 타게 됐지만, 소아시아에서 이집트로 원군이 도착하자 싸움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보다 열세 살 어린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공동 통치를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당시 11세에 불과했으므로 실질적인 클레오파트라의 왕정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