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줘서 고맙다, 남아줘서 고맙다." 이 땅의 우리밀을 지켜준 투박하고 거친 농부의 손은 세상 어떤 손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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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돌을 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리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휘~익. 딱!" 작은 돌은 다윗 손을 떠나 바람을 가르고 거대한 골리앗을 한번에 쓰러뜨린다. "기적이다. 와~" 병사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다윗은 하늘을 향해 승리의 손을 높이 치켜든다(1사무 17,43 참조).
기적은 이땅에 다시 한번 일어났다. 모든 것을 삼킬 듯 무서운 기세로 덮쳐온 수입밀의 폭풍 속에 모두가 밀농사 짓기를 포기했다. 몇 갑절 비싼 우리밀을 지킨다고 나선 이들에게 조롱과 야유가 쏟아졌다.
우리밀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 먹을거리에 대한 사랑을 무기삼아 이 땅의 우리밀이 다시 일어섰다. 골리앗 같은 수입밀을 이겨내는 더 큰 기적을 일으켜 들녘의 평화를 되찾고자 다시 일어나 돌을 움켜쥔다. 먹을거리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수입 먹을거리에 많은 우리 농산물이 자리를 내준 이때, 이 땅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이제 부활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우리밀을 찾아 나섰다.
'화개장터' 노랫가사로 유명한 전남 구례군 광의면은 전국 유일의 우리밀 가공공장이 있는 우리밀의 고장이다.
논과 밭이 황토빛 속살을 부끄럽게 드러내는 5월에도 이곳 농지는 푸른색 밀옷을 뽐내듯 걸치고 있다. 푸른 밀알들이 불어오는 바람따라 춤을 추는 모습이 평화롭기만하다.
1983년 정부의 밀수매 폐지가 농민들 가슴에서 '우리밀'이라는 작물을 뿌리채 뽑아 버렸다. 그로부터 7년간 우리밀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1990년 가톨릭농민회 노력으로,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우리밀이 다시 이땅에 뿌리를 내렸다. 사라진 우리밀 종자를 찾고자 1년을 넘게 전국을 찾아 헤매면서 농민들에게 우리밀의 장점과 왜 우리농산물을 지켜야 하는지를 알렸다.
"시작 당시 땅 한 평에 오이를 심으면 수입이 5만 원인데 밀은 500원이였죠. 밀농사 지을 때 미친놈 소리 참 많이 들었어요." 밀밭에서 만난 영농조합법인 '밀벗' 최성호(바오로, 65) 대표. 밀을 바라보는 눈빛이 장성한 자식을 대견히 바라보듯 애정이 넘친다.
우리밀의 고장, 전국 유일 우리밀 가공공장 자리잡아 정부의 밀수매 폐지로 우리밀 사라질 뻔 했으나 자생 밀 자급률 0.3% 불과… 우리 먹을거리 수호 앞장서야
밀 살리기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찾아낸 밀종자를 각지로 보내고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를 세워 후원회원도 모집했다.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는 금융위기에 부도가 나는 등 몇 번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믿고 지원해 준 많은 이들의 정성 속에 지난해에는 최신시설을 갖춘 밀 가공공장도 세웠다. 가공공장의 굉음이 고막을 찢는 듯하다. 거대한 기계의 힘찬 움직임 속에 대견스러운 우리밀 제품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밀농사 짓기 전에 이 동네가 인근에서 가장 가난했는데 밀농사로 이모작도 하고, 공장에서 일도 하고, 이제 이 동네가 제일 잘 살아요." 공장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조합원들 얼굴에 함박 웃음이 핀다. 공장 주인이 조합원이기에 일이 밀려도 즐거운 비명이 나온다.
벼농사가 끝난 10월에 심는 밀은 혹한의 겨울을 이겨내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6월에 알곡이 여문다. 시련을 이겨낸 강인한 생명력이 우리 민족의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또 우리밀은 수입밀과 달리 생산된 그해에 바로 소비되기에 방부제도 안들어간다. 겨울작물이다보니 병충해가 없어 농약을 치지 않는다. 그러기에 몸에 좋고 소화도 잘된다.
"우리밀을 먹고 돌아서면 곧 배가 고파져 손해보는 느낌이다." 최 대표의 농담에 웃음이 절로 난다. 이제 우리 땅의 정기와 햇살을 가득 담은 우리밀은 전 국토를 푸르게 물들이며 밀가루와 국수, 건빵, 라면이 되어 소비자의 식탁으로 달려갈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하는 요즘 우리밀의 경쟁력이 한층 더 높아졌다. 한때 수입밀과 6배 이상 차이가 났던 우리밀 가격은 지금은 2배 차이도 채 나지 않는다. 조금은 비싸지만 직거래를 통해 가격을 내린다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밀 자급률은 0.3%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밀의 99.7%는 수입이라는 말이다. 우리밀 독립을 위한 갈 길이 아직 멀다.
최 대표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보지 않고 수입농산물의 가격을 더 눈여겨 본다"며 "밀농사 확대와 우리 먹을거리에 대한 인식전환을 통해 경쟁력을 더욱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라가 포기하고 대부분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외면했던 우리밀이 고맙게도 이 땅에서 자라나고 있다. 건강한 우리 먹을거리 수호에 선봉장이 돼 우리농산물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불가능은 없다고, 다같이 힘을 모아 지켜내자고, 이 땅을 가득 메운 모든 생명들을 향해 힘내라고 크게 소리치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 우리밀 체험장을 찾은 학생들이 우리밀로 요리를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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