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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歷史.文化 스크랩 고려 태조(王建)의 訓要十條(훈요10조)
시너먼 추천 0 조회 57 14.05.14 11: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 태조가 943년(태조 26) 4월에

박술희(朴述熙)를 통하여 왕실의 후손들에게 내린 유훈(遺訓)이다.

 

 

모두 10개 조로 되어 있으며,

주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지켜야 할 일들을 담고 있다.

훈요십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하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寺院)을 창건하고 주지를 보내어 각각 다스리도록 하되,

  간신들이 승려들의 청탁을 들어 각 사원을 서로 다투어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한다.

② 사원을 함부로 세우면 나라의 운수(運數)가 오래가지 못한다고 도선(道詵)이 말했으니,

   도선이 산수(山水)의 형세를 살펴서 세운 사원 외에는

   마음대로 사원을 창건하지 못하도록 한다.

③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올바른 법도이지만,

   만약 맏아들이 어리석으면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고,

   또 둘째 아들 역시 불초한 경우에는

   나머지 형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는 자를 왕이 되게 한다.

④ 우리 나라는 사람도 땅도 중국과 다르니

   반드시 중국의 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

   거란은 야만의 나라이고 풍속과 언어 또한 다르니

   의관(衣冠) 제도(制度)를 함부로 본받지 않는다.

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되니,

    철마다 서경에 가서 머무르기를 모두 100일 넘도록 하여 그곳의 안녕을 이루도록 한다.

⑥ 짐(朕)이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이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니,

   후세에 간신이 이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지 못하도록 한다.

⑦ 신하의 곧은 말은 따르고 헐뜯는 말은 멀리 한다.

   백성을 부리되 농사철을 피하고,

   요역을 가볍게 매기며,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어진(仁) 정치를 하되 상벌(賞罰)을 도리에 맞게 하면 음양(陰陽)이 순조로울 것이다.

⑧ 차현(車峴 : 車嶺) 이남 공주강(公州江 : 錦江) 밖은

   산지(山地)의 형세가 모두 거슬리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곳의 인심도 또한 그러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등용하여 권세를 쥐게 하면 혹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⑨ 나라의 관직을 함부로 늘이거나 줄이지 말며,

   만약 공(功)이 없는 자,

   사사로이 친한 자나 친척 등에게 관직을 주어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사나운 나라가 이웃에 있으니 항상 조심하고,

   병졸들을 잘 돌보아 그 가운데 뛰어난 자에게는 관직을 더해 준다.

⑩ 옛 고전을 많이 읽어 나라 다스리는 일에 거울로 삼는다.

  

   이러한 훈요십조의 내용은

불교와 토속 신앙,

풍수지리,

음양오행,

도참설 등에 대한

태조의 깊은 믿음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훈요십조가 기본적으로 왕실 내 가훈(家訓)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왕자(王者)로서 갖추어야 할 정책 운영의 방향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려 太祖 王建

 

877(헌강왕 3)~ 943(태조 26).

고려의 제1대 왕(918~943 재위).

  뛰어난 정치력과 덕망으로

고려왕조 창건과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이름은 왕건(王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개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왕륭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서 자신의 군(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歸附)하여

금성태수로 임명되었다.

 

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 왕건은

발어참성(勃禦塹城) 성주(城主)가 되었으며,

898년에는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다.

 

그뒤

왕건은 여러 전선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하면서 차츰 자신의 세력을 쌓아나갔다.

 

900년에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靑州: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지금의 화성)·

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 여러 군현을 경략하여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

수군을 거느리고 전라도지방으로 진출하여

금성(錦城:지금의 나주) 등 10여 군현을 빼앗아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으로 승진했다.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909년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이 되어

나주와 광주(光州) 일대에서 활약했다.

 

913년

변방에서의 공으로

파진찬(波珍粲)에 오르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궁예가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자

 

918년 6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이듬해에는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관제를 개혁하여 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태조는 일부 무인 중간세력, 일반 병졸, 민중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궁예의 옛 영역 내의 호족세력이나 집권층 내부의 정치세력 중에는

태조에게 불만을 품거나 반발한 세력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 건국 초기 태조의 당면 과제는 정치적 안정과 민심수습을 이루는 것이었다.

 

태조는 온건한 방법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새 왕조의 정치체제는

기존 체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마련했고,

다만 행정관서에 대한 인사이동과 궁예 때의 탐관오리에 대한 숙청만 단행했다.

 

이와 함께 지방 각처에서 독자적인 무력과 경제기반을 가지고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던

호족들을 극진히 회유하여 포섭했다.

 

즉위 직후 호족들에게 사절을 보내어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저자세 외교로써 화친의 뜻을 보였고,

귀부해오는 호족들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나아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및 호족출신 관료의 딸들과 혼인하고,

유력자에게 왕씨(王氏) 성을 하사했으며

그밖에 기인제도(其人制度)·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한편 고려 왕실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위해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의 경영에도 힘을 기울였고,

민심수습을 위해 궁예 때의 가혹한 수취를 비판하면서

'취민유도'(取民有道)를 표방했다.

 

또한 평민으로 몸을 팔아 남의 종이 된 자 1,000여 명을 찾아내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갚아주었으며,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유민(流民)은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했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직후

태조는 직접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여 반포했다.

 

이것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서북으로 청천강 하류 안주(安州) 지방에서 동북으로 영흥(永興)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민족융합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거란과는 국교를 단절했다.

 

943년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훈요10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훈요10조를 통해서 볼 때,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지리도참설, 유학이었다.

 

불교와 지리도참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유학은 정치의 실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육성시켜

건국 초기부터 많은 사찰을 지었고,

국내외의 고승을 극진히 예우했다.

 

943년

재위 26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仁德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1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했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켰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았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았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왔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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