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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머리
혹시 예전에 썼던 “첫 키스의 추억”을 읽으신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그 첫 키스의 여인과 함께 있었던 후속 얘기를 하고 싶다.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아직도 아련한 기억으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초등학교 6학년,
작은 나의 품에 안겨 울먹이던 당시의 기억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감나무를 보니 파란 잎사귀 사이로 제법 어린애 주먹만큼이나 커진 감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쯤의 크기라면 침시沈柿로 만들어 먹어도 별 무리가 없을 듯도 싶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주변의 감나무 밑을 돌아다니며 떨어진 감을 주워 뒤란 장독대의 빈 독에 물을 채우고 그 속에 담궈 놓으면, 며칠 후 떫은 맛이 없어진 땡감의 달작지근한 맛이 그렇게도 맛있을 수가 없었던 시기이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남의 밭에 심어진 멀쩡한 쌩감(땡감)을 매일 몇 개씩 몰래 따서는 아무도 모르게 벼가 심어진 논의 한쪽 귀퉁이에 감추었다가 몰래몰래 혼자 꺼내어 먹고는 하였었다.
깔(꼴) 베러 오가다 한 개씩, 혹은 멱 감고 오다가 한 두 개씩, 어쩌다 며칠을 건너 뛰면 팩 곯아서 먹을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이미 대다수의 학교가 개학을 한 시기이지만 60년대에는 9월1일 개학이 정해져 있었다.
지금쯤은 밀린 여름방학 숙제로 이리저리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다.
시원한 툇마루에 모여 숙제 한답시고 배를 깔고 누워 잡담이나 나누면서 실컷 웃고 떠들던 그 당시의 추억이 정말이지 그립기만 하다. 숙제는 뒷전이고 누가 방귀만 뀌어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 깔깔거리던 시절이었다.
책보다 크기가 더 큰 “방학생활” 책자의 문제를 푸느라 끙끙대었고, 또 그것을 베끼느라 정신이 없는 애들이 있었다.
식물채집을 한답시고 책갈피 사이마다 뿌리채 곱게 씻은 식물을 넣어 다듬잇돌로 눌러두었다. 식물채집 숙제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실은 쇠비름은 채집하기는 쉬어도 책갈피에 넣어 돌로 누르기가 용이하지 않았고, 다른 것들은 모양이 그런대로 예쁘게 만들어졌지만 모양도 완전히 딴 판이 된다는 사실이다.
곤충채집을 한다고 매미며 잠자리 등을 잡아 햇볕에 말렸으나 고정시킬 수 있는 핀이 없어서 종이에다 그냥 싸가지고 학교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공작 숙제도 있었다. 그러나 손재주 없었던 나는 밀대(밀짚)로 만든 여치집을 딱 한 번 제출하였을 뿐 공작숙제는 제출해 본 기억이 없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 교무실 옆에서 전시회가 열리고는 하였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잘 만들었는지, 식물채집도 그렇고, 곤충채집도 그렇고, 공작 숙제도 참으로 멋있는 것들이 많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당시에 나는 숙제를 끝내기가 무섭게 빌려가는 애들이 많았다. 산수 숙제한 것을 빌려 주었는데 동생이 오줌 쌌다고 시커먼 자국을 공책에다 그려 반납한 친구들도 있었다.
당시 방학숙제로 제일 힘든 것은 일기쓰기였다. 개학을 앞두고 한꺼번에 쓰기가 일쑤였다. 제일 힘든 것은 날씨를 채워 넣는 일이었는데, 당시의 일기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8월4일 일요일 맑음”
“오늘은 아침밥을 먹고 냇가에 가서 놀았다. 재미있었다.”
“8월5일 월요일 흐림”
“오늘은 어제와 같았다.”
“8월6일 화요일 맑음”
“오늘은 아침밥을 먹고 ○○와 놀았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런 일기장을 빌려가서 그대로 베껴 냈던 친구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초등학교 6학년 이맘 때 쯤.
그 당시 우리들의 일과는 주로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부류는
아침밥을 먹고 깔(꼴) 한 망태 베어오면 냇가로 나가 실컷 놀다가,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또 곧바로 다시 냇가로 달려가 실컷 멱을 감고 놀다가, 4시쯤에 다시 깔 한 망태 베어오는 것이었고
두 번째 부류는
아침밥을 먹고 소를 몰고 나가서 냇가 등지에 메어놓은 다음, 꼴 한 망태 베어오면 즉시 냇가로 달려가 실컷 놀다가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기가 무섭게 다시 냇가로 달려가 실컷 놀다가, 4시 쯤에 소를 메어 놓은 곳으로 가서 소에게 풀을 뜯기고 저녁녘에 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첫 번째 부류였다.
오후였다.
왠일로 그날은 점심 새참 무렵이 되어 일찌감치 깔 한 망태를 베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당연히 동네에서는 친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 깔 한 망태를 채우지 못하였거나 소를 뜯기고 있을 시각이었다.
문득 학교의 연못이 생각났다.
우리학교에는 학교 교실의 뒤편으로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아마 학교를 지으면서 흙을 파냈기에 생긴 웅덩이가 연못으로 변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상당히 컸다.
아무튼 교실 뒤편의 연못에는 연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꾸라지가 열심히 헤엄치는 모습도 보였고, 특히 우렁이가 엄청나게 많았다.
(학교는 내가 사는 마을에 있었다.)
그날 우렁이를 잡을 욕심으로 학교로 갔다. 우렁이를 잡아 누나가 저녁밥을 지을 때 옆에 앉아 구워먹으면 그 맛 또한 감칠나는 맛이었던 것이다.
방학 중인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못에는 만개한 연꽃과 함께 열매가 맺힌 모습이 보였다. 연蓮 열매 또한 파란 껍질을 벗겨 먹으면 고소하였다. 물론 다 익어 검정색으로 변한 열매는 더 맛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다 익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죄다 따먹고 말았다.
검정고무신을 한 짝을 들고 들어가 그 속에다 우렁이를 잡아넣었다. 당시 우렁이 한 마리가 거의 내 주먹만큼이나 큰 것이 수두룩하였다. 금새 고무신 가득 우렁이를 잡을 수가 있었다. 연잎 하나를 따서 그 위에 잡은 우렁이를 쏟고 다시 들어가 또 고무신 가득 잡아 나오기를 몇 번 하였을 때였다.
“뭣 잡냐?”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 쳐다보니 같은 반 ○순이었다.
(그녀는 교감선생님의 딸로서 학교에 붙어 있는 관사에서 살았다.)
부끄러워 아무 대답도 하지를 못하였다. 반가운 마음도 들면서 가슴이 콩콩 방아를 찧었다.
“워매. 우렁 겁나게 잡아부렀다.”
그녀의 탄성에 어깨가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잡아놓은 우렁에 욕심이 생겼는지 그녀도 바지를 걷고 연못으로 들어왔다.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도 아무 말도 없이 연잎대를 제쳐가며 우렁을 잡았다.
얼마나 잡았을까?
밖으로 나와 다리에 붙어 있는 거머리를 떼었다. 사실 당시의 우리들은 다리에 붙어 있는 거머리쯤은 대수롭지 않게 떼어내고는 하였다. 연꽃이 피어 있고 우렁이가 지천으로 깔린 곳에 들어가면 당연히 거머리 대여섯 마리는 붙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거머리를 떼어내는 내 모습을 본 그녀가 갑자기 물 속에서 다리를 들어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신발을 내팽개치고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빠른 소리로 엄마를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의 양쪽 장딴지 근처에는 대여섯 마리의 시커먼 거머리가 붙어있었다.
그녀는 둑으로 나와 나를 쳐다보면서 훌쩍훌쩍 뛰고 있었다.
손으로 거머리를 뗄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렇게 쉽사리 떼어지지 않는 거머리였다.
얼른 그녀 곁으로 다가가 거머리를 떼어줄려고 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홀짝홀짝 뛰고 있었다.
“암시랑 안헝께로(아무렇지 않으니까) 가만히 있어라.”
그러나 야무지게 따악 붙어버린 거머리는 좀체 떼어지지 않았다.
쉽사리 거머리가 떨어지지 않자 나는 흙을 한 줌 집어 거머리가 붙어 있는 그녀의 종아리에 대고 문질렀다. 거머리는 그렇게 흙이나 모래를 집어 문지르면 금방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해서 대여섯 마리 전부 떼어내었다.
“인자 다 띠어 부렀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종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거머리가 모두 떨어져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느닷없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맨발인 발 밑에서 꼼지락거리는 거머리의 모습이 보였다. 땀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싫지 않은 땀 냄새였다.
그러나 금방 또 내게서 후다닥 떨어져 나갔다.
그러니까 안겼다가 떨어진 그 시간이 꼬물꼬물 기어가는 거머리가 대략 5cm 정도를 기어간 시간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음을 보았다. 눈물도 범벅으로 흐르고 있었다.
괜스레 바닥에 떨어져 꾸물꾸물 기어가는 거머리를 죄다 돌로 쿵쿵 찧어버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아직도 연못 가운데에서 덩그러니 떠 있던 검정고무신을 주어다 주었다. 신발을 주어가지고 나오는데 종아리에서 빨간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신발을 연못에서 건져 가지고 나왔는데도 그녀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연신 팔목으로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서산을 넘는 태양이 붉은 저녁노을로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말없이 연잎 위에 수북히 쌓인 우렁이를 연잎조차 주섬주섬 집어들었다.
“니 묵을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주었더니 그녀도 그것을 받아들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내내 그녀의 채취가 풍기는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품에 처음으로 안긴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나와 처음으로 입맞춤을 한 여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울먹이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초등학교 동창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근 도시의 S여중으로 진학하였다. 나중에 S여고를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졸업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립다.
졸업식 날 나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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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 '아홉살 인생'에 보면요, 아이들이 방학 동안의 일기를 우림이 일기를 보고 동네 아이들이 베꼈어요. 7월 30일 날씨가 흐렸는데도 다 맑음, 맑음이라고 써 놓았다가 생님한테 되지게 터지는데요. 그것보고 옛날 우리들 생각이 나서 한참 웃었어요. 선생님 친구들도 그래었네요. 그리고 원래 조용하게 공부만 잘 하던 아이들은 얼굴 잘 안 내민대요. 공부는 잘 해도 말을 잘 못한다나요. 긴 글이지만 국수 가락처럼 후루룩 읽었습니다. 즐거운 시간 갖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당시 저희 남자들은 일기 같은 것도 대수롭지 않게 베껴내고는 하였습니다. 사실 일기의 얘기는 제가 2학년 때의 얘기로 아버지한테 오늘이 어째서 어제와 같았느냐고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일기를 베낄때 어떻게 베끼냐구요? 가장 많은 방법이 거꾸로 베끼는 것입니다. 8월1일 부터 8월31일 까지의 일기에서 8월 31일을 8월 1일로 내용만 베끼는 것이지요. 가능한 다른 반의 애들 것으로요. 함께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글 읽고요 방학책 얘기도 하고 첫사랑도 떠올려보고 그랬어요. ㅎㅎㅎ
우담 님의 첫 여인, 그리고 어린 시절 얘기 실감나게 잘 읽었습니다.
소년 우담의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ㅎㅎㅎ
그 여인도 이렇게 마음 언저리 어디쯤에 우담 님 고이 담아두고
가끔씩 꺼내보며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교감선생님의 딸이었기 때문에 전학을 왔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였고.(저보다는 못하였지만)
그런데 고향에 뿌리가 없어서인지 지금은 아무도 그 소식을 모릅니다.
고등학교 시절 동창회를 하였는데 거기에 참석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논에 농약을 치느라 못갔거든요. 그때 동창회 갔었더라면 또 혹시 모를텐데 아쉽습니다.
에고, 무한히 착한 우담 님, 농약 치느라 가고 싶은 동창회도 못 가고...!
우담 선생님도 어린 시절이 몹씨 그리운 모양입니다. 그 소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분도 우담 님을 그리워 하고 있겠지요.
민 선생님께서 들려 주셨네요. 그녀도 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생각만하여도 가슴이 뜨기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농사짓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고 거머리가 무서워 장화신고 논에 들어갔던 옛추억과 옆집 남학생과 냇가에서 고기잡던 일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담선생님의 첫여인처럼 그 당시 저의 아버님도 교직에 머물러 계셨던 관계로 농촌생활이 저에게는 모든게 신기했지요
목요일 뵙고 싶었는데 뵙지를 못하여 서운했습니다. 다른 별일은 없으신거지요? 글쎄요. 왠지 잊혀지지 않는 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자 분들도 과거의 스쳐지나간 인연들의 남자들을 그리워 할까요? 그리워 한다기 보다는 생각이 날까요? 솔직한 표현은 그립다는 표현보다는 생각이 난다는 표혐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다른 소나기(황순원의 소설)를 읽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때 그 시절의 학교 생활 방학 생활 등이 참 실감나게 그려졌네요 저는 꼴망태는 잘 모르지만 바다(부산)가 가까워 조개류 채집을 많이 하였지요 그리고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숙제는 쥐꼬리 가져오기랍니다 파리 백마리씩 잡아서 성냥갑에 넣어오는 숙제는 그래도 쉬웠는데 쥐를 잡아 꼬리 잘라오기는 정말이지 죽으면 죽었지 못하겠더라구요 한 번도 하지 않았답니다 ...추억을 떠올리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그 첫여인을 찾지 마십시오.
우담 님의 가슴속에 그냥 살아 있게 하십시오.
그래야 향기롭게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첫 키스의 추억'을 되살려 보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장 님. 찾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먼 기억 너머의 추억입니다.
시를 쓴답시고 앉았다가 잘 안되길레 주섬주섬 적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느낀 것은 이런 산문도 몇 번 써보니 문장의 표현력이 늘었다는 것을 감지하였습니다. 저 혼자의 자찬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찬이 아니고 확실하게 글 솜씨가 늘었습니다. 맛있어요. 이미지도 생생하게 살아 있고 그리움도 묻어 납니다. 긍께 우담님의 고향도 전라도 잉갑소이 나도 거머리 기억이 있는디
진짜 거머리는 거머리 입니다. 돌맹이를 가져다가 띠어도 보고 띠어내고보면 거머리가 파고든 구멍도 보였는데, 그 구멍에서 피가 철철나왔지라우..우매 징헌 것 근디 씩씩한 남친이
떼 주었으니 품에 앤길만도 허요. 아따 참말로 그시절로 돌아가 보았소 내 어린시절 60년대가 떠올라 부요..
아이구!!! 답이 늦어버렀구만이라우. 거마리 그 작것이 한 번 달라붙어부먼 진짜로 잘 안떨어졌지라우. 근디 그래서 내가 째까 먼 일이 생개부렀네요.
언제 생각하여도 그리운 60년대의 그 시절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투박하고 감미로운 추억을 가지신 우담 님. 부럽습니다.
어쩜 이렇게 실감나게 잘 쓰셨는가요. 감사히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성으로서의 관심이라기 보다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에서 나오는 추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쯤은 어디에서 살고 잇을까요?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래전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황순원의 '소나기'가 생각 났습니다. 역시 대부분의 첫사랑은 순수하고 선하고 안타까운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경험으로는 첫사랑은 굳이 찾아 확인하려 하지 말고,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첫사랑 그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하고 가끔 생각만 하며, 가슴속 한켠에 묻어두는것이 여러모로 좋을것 입니다. ㅎㅎ
그런가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감정이 풍부하신 분의 얘기는 틀림이 없겠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간단히 우렁이를 잡다가 옆에서 같이 우렁이를 잡던 여자 애의 거머리 떼어준 사실 뿐입니다. 어쩌면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재미있었지 가슴이 뛰고 하는 등의 얘기는 나중에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뭏든 함께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