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의 상해 - 1. 경무국장 당시의 사건들 기미년 3월, 안동현에서 영국 사람 솔지의 배를 타고 상해에 온 나는 김보연 군을 앞세우고 이동녕 선생을 찾았다. 서울 양기탁 사랑에서 서간도 무관 학교 의논을 하고 헤어지고는 10여 년만에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 때에 광복 사업을 준비할 전권의 임무를 맡던 선생의 좋은 신수는 10여 년 고생에 약간 쇠하여 얼굴에 주름살이 보였다. 서로 악수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인사들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 평화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파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후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인사들이 임시 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여 중외에 선포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에 탄생된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은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 등 부서가 있어 광복 운동의 여러 선배 수령을 그 총장에 추대하였다.
총장들이 원지(遠地)에 있어서 취임치 못하므로 청년들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을 대리케 하였다. 내가 내무총장 안창호 선생에게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이때였다.
나는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니 이후 5년간 심문관 판사·검사의 직무와 사형 집행까지 혼자 겸하여서 하게 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때에 범죄자의 처벌은 설유 방송(說諭放送 : 잘 타일러 내보냄 - 편집자 주*) 아니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도순(金道淳)이라는 17세의 소년이 본국에 특파되었던 임시 정부 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 영사관에 매수되어 그 특파원을 잡는 앞잡이가 되려고 돈 10원을 받은 죄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한 것은 기성 국가에서 보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하는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 운동자가 왜에게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정보과 사복의 경호원(警護員) 20여 명을 썼다. 이로써 홍구의 왜 영사관과 대립하여 암투하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조계 당국은 우리의 국정을 잘 알므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 동포의 체포를 요구해온 때에는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피하게 한 뒤에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 집을 수사할 뿐이었다.
왜구 전중의일(田中義一)이 상해에 왔을 때에 황포마두(黃浦碼頭)에서 오성륜(吳成倫)이 그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하므로 권총을 쏜 것은 전중은 아니 맞고 미국인 여자 한 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났을 때에 일본, 영국, 법국(法國 : 프랑스를 말함 - 편집자 주*)세 나라가 합작하여 법조계의 한인을 대거 수색한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님이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오신 때였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왜 경관 일곱 놈이 프랑스 경관 서대납(西大納)을 앞세우고 내 침실에 들어섰다. 서대납은 나와 잘 아는 자라 나를 보더니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여 왜 경관이 나를 결박하려는 것을 금하였다.
프랑스 경무청에 가니 원세훈(元世勳) 등 다섯 사람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왜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는 것도 허락치 아니하고 왜 영사관으로 넘기라는 것도 아니 듣고 나로 하여금 다섯 사람을 담보케 한 후에 나 아울러 모두 석방해 버렸다.
우리 동포 관계의 일에는 내가 임시 정부를 대표하여 언제나 배심관이 되어 프랑스 조계의 법정에 출석하였으므로 현행범이 아닌 이상 내가 담보하면 석방하는 것이었다. 왜 경찰이 나와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를 안 뒤로는 다시는 내 체포를 프랑스 당국에 요구하는 일이 없고, 나를 법조계 밖으로 유인해내려는 수단을 쓰므로 나는 한 걸음도 조계 밖에를 나가지 아니하였다.
내가 5년간 경무국장을 하는 동안에 생긴 기이한 일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고, 또 이루 다 기억도 못하거니와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말하련다.
고등 정탐 선우 갑(鮮于甲)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 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將功贖罪 : 장차 공을 세워 죄를 갚음 - 편집자 주*)를 할 서약을 받고 살려 주었더니 나흘 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들어갔다.
강인우(康麟佑)는 왜 경부로 상해에 와서 총독부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명을 말하고 내게 거짓 보고 자료를 달라 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공으로 풍산 군수가 되었다.
구 한국 내무대신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선생이 3.1 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을 버리고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아들 의한(懿漢) 군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적 일이다. 왜는 남작이 독립 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이 수치라 하여 의한의 처의 종형 정필화를 보내어 동농 선생을 귀국케 할 운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정 가를 검거하여 심문한즉 낱낱이 자백하므로 처교하였다.
황학선(黃鶴善)은 해주 사람으로 3.1운동 이전에 상해에 온 자인데 가장 우리 운동에 열심히 있는 듯하기로 타처에 오는 지사들을 그 집에 유숙케 하였더니 그 자가 이것을 기호로 하여 일변 왜 영사관과 통하여 거기서 돈을 얻어 쓰고 일변 애국 청년에게 임시 정부를 악선전하거나 나창헌(羅昌憲), 김의한 등 십수 명이 작당하여 임시정부를 습격한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곧 진압되고 범인은 전부 경무국의 손에 체포되었다가 그들이 황학선의 모략에 속은 것이 분명하므로 모두 설유하여 방송하고 그 때에 중상한 나창헌, 김기제는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황학선이가 왜 영사관에서 자금과 지령을 받아 우리 정부 각 총장과 경무국장을 살해할 계획으로 나창헌이 경성 의전의 학생이던 것을 이용하여 3층 양옥을 세를 내어 병원 간판을 붙이고, 총장들과 나를 그리로 유인하여 살해할 계획이던 것이 판명되었다.
나는 이 문초의 기록을 나창헌에게 보였더니 그는 펄펄 뛰며 속은 것을 자백하고 장인 황학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황학선은 처교(處絞 : 교수형에 처함 - 편집자 주*)된 뒤였다. 나는 나, 김 등이 전연 악의가 없고 황의 모략에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2. 임시정부의 온갖 사건들 한 번은 박 모라는 청년이 경무국장 면회를 청하기로 만났다. 그는 나를 대하자 곧 낙루(落淚)하며 단총 한 자루와 수첩 하나를 내 앞에 내어 놓으며, 자기는 수일 전에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왔는데 왜 영사관에서 그의 체격이 건장함을 보고, 김 구를 죽이라 하고 성공하면 돈도 많이 주려니와 설사 실패하여 그가 죽는 경우에는 그의 가족에게는 나라에서 좋은 토지를 주어 편안히 살도록 할 터이라 하고,
만일 이에 응치 아니하면 그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엄벌한다 하기로 부득이 그러마 하고 무기를 품고 법조계에 들어와 길에서 나를 보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자기도 대한 사람이면서 어찌 감히 상하랴 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 단총과 수첩을 내게 바치고 자기는 먼 지방으로 달아나서 장사나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놓아 보냈었다.
나는 '의심하는 사람이어든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어든 의심을 말라'는 것을 신조로 하여 살아 왔거니와 그 때문에 실패한 일도 없지 아니하였으니 한태규(韓泰圭) 사건이 그 예다.
한태규는 평양 사람으로서 매우 근실하여 내가 7,8년을 부리는 동안에 내외국인의 신임을 얻었었다. 내가 경무국장을 사면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무국 일을 보고 있었다.
하루는 계원(桂園) 노백린(盧伯麟) 형이 아침 일찍 내 집에 와서 뒤 노변에 한복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하기로 나가 본즉 그것은 명주(明珠)의 시체였다.
명주는 상해에 온 후로 정인과(鄭仁果), 황석남(黃錫南)이 빌어 가지고 있는 집에 식모로도 있었고, 젊은 사내들과 추행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 여자다. 어느 날 밤에 한 번 한태규가 이 여자를 동반하여 가는 것을 보고 한 군도 젊은 사람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친 것이 얼마 오래지 아니한 것이 기억되었다.
시체를 검사하니 피살이 분명하다. 머리에 피가 묻었으니 처음에는 때린 모양이요, 목에는 바로 매었던 자국이 있는데, 그 수법이 내가 서대문 감옥에서 활빈당 김 진사에게 배운 것을 경호원들에게 가르쳐 준 그것이었다. 여기서 단서를 얻어 가지고 조사한 결과 그 범인이 한태규인 것이 판명되어 프랑스 경찰에 말하여 그를 체포케 하여 내가 배심관으로 그의 문초를 듣건대 그는 내가 경무국장을 사직한 후로부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왜에게 매수되어 그 밀정이 되어 명주와 비밀히 통기하던 중, 명주가 한이 밀정인 것을 눈치를 알게 되매 한은 명주가 자기의 일을 내게 밀고할 것을 겁내어서 죽인 것이라는 것을 자백하였다.
명주는 행실이 부정할망정 애국심은 열렬한 여자였다. 그는 종신 징역의 형을 받았다. 후에 나와 동관(同官)이던 나 우(羅愚)도 한태규가 돈을 흔히 쓰는 것으로 보아 오래 의심은 하였으나 확적한 증거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고하면 내가 동지를 의심한다고 책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아니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후에 한태규는 다른 죄수들을 선동하여 양력 1월 1일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하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 제가 도리어 감옥 당국에 밀고하여 간수들이 담총하고 경비하게 한 후에 약속한 시간이 되매 여러 감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칼, 몽둥이, 돌멩이, 재 같은 것을 가지고 죄수들이 뛰어나오는 것을 한태규가 총을 놓아 죄수 여덟 명을 즉사케 하니 다른 죄수들은 겁을 내어 움직이지 못하매 파옥 소동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재판하는 마당에 한태규는 제가 쏘아 죽인 여덟 명의 시체를 담은 관머리에 증인으로 출정하더란 말을 들었고, 또 그 후에 한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같은 죄수 여덟 명을 죽인 것이 큰 공로라 하여 방면이 되었고, 전에 잘못한 것은 다 회개하니 다시 써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듣건대 이 편지에 대한 내 회답이 없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본국으로 도망하여 무슨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이런 흉악한 놈을 절대로 신임한 것이 다시 세상에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서 심히 고민하였다.
내가 경무국장이던 때에 있었던 일은 이만큼 말하고 상해에 임시 정부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우리 운동 전체의 파란곡절을 회상해 보기로 하자.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元年)에는 국내나 국외를 물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 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世界思潮)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 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 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대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층생첩출(層生疊出 : 무슨 일이 자꾸 겹쳐 일어남 - 편집자 주*)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지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 진위대 참령(江華鎭衛隊參領)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톡 -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 가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革命)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 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 이 - 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에게 즐겨 쓰는 말이다 - 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 혁명을 하는 데는 제 3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 : 흔히 코민테른이라 부르는 제 3 인터내셔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을 지칭하는 것으로, 1차 세계대전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이 와해된 후 레닌의 지도로 각국 노동운동의 좌파가 모여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었다 - 편집자 주*)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 운동은 우리 대한민국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 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섰다.
3. 공산주의자와의 대립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철도 각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소련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 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백만 루블이라고 대답한즉 레닌은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백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니 2백만 루블을 한국 임시 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제 1 차 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 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 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 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 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 대표 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 여운형(呂運亨)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 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 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백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創造論), 상해파는 개조론(改造論)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란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歸一 : 하나로 합쳐지는 것 - 편집자 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 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 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 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 : 따져도 도무지 양에 차지 않음 - 편집자 주*)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느이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 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되어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 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 정부 공금 횡령범 김 립은 오면직(吳冕稙), 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 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를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임시 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 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 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 동맹(在中國靑年同盟), 주중국 청년 동맹(住中國靑年同盟)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도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 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 운동보다 민족 독립 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 독립 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 독립 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 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 독립당 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 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 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이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 독립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李裕弼), 차이석(車利錫), 김붕준(金朋濬), 송병조(宋秉祚) 및 나 김 구가 수뇌가 되어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서 민족 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딴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하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 아버지 죽이는 회 - 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남군정서(南軍政署), 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 김좌진(金佐鎭), 김규식(金奎植) - 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이 아니다 - 등 우리 운동에 없지 못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4. 껍데기만 남은 임시 정부 국제 정세의 우리에게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 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張作霖)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 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한 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 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 운동 단체는 다 임시 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群雄割據)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 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 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 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상해의 정세도 소위 양패구상(兩覇俱傷-편집자 주*)으로 둘이 싸워 둘이 다 망한 셈이 되었다.
한국독립당 하나로 겨우 민족 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朴殷植)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國務領制)로 고쳐 놓을 뿐으로 나가고 제 1세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李尙龍)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洪冕喜) - 나중에 홍진(洪震) - 가 선거되어 진강(鎭江)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 존위 - 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 - 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초창 시대의 추형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같은 자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 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尹琦燮), 오영선(吳永善), 김 갑 김 철, 이규홍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히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國務委員制)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 위원의 주석이 되었으나 제도로 말하면 주석은 다만 회의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 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도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家眷 : 거느리는 가족들 - 편집자 주*)이 있었느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님께로 돌려보낸 뒤라 홀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 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 집 저 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움 밥은 아니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曺奉吉), 이춘태(李春台), 나 우, 진희창(秦熙昌), 김의한 같은 이들은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엄항섭(嚴恒燮) 군은 프랑스 공무국(工務局)에서 받는 월급으로 석오(石吾) - 이동녕의 당호 - 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실 임(林) 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주며,
"얘기 사탕이나 사 주셔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盧家彎) 공동 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내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나는 애초에 임시 정부의 문 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총판(勞動局總辦)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다시 국무 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 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시무할 때에는 중국인은 물론이요, 눈 푸르고 코 높은 영, 미, 법 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가 왜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 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되는 형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 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 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 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각 군, 각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聯通制)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 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