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낭이 정겨운 집-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13) -15코스
어제 밤은 제주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의 모텔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숙박업소 두 군데를 돌아 세 번째에서 겨우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기상악화로 공항이 올 스톱 되었으니 많은 투숙객이 가까운 이곳으로 몰린 것은 정한 이치이리라.
뜻하지 않은 이틀간의 여유가 생겼다. 내일 비행기 시간을 고려해서 이틀 동안 15,16코스를 걷기로 하였다. 15코스 출발점인 한림항은 지금까지 보아온 그런 작은 포구가 아니었다. 수많은 배들이 정박 중이고 사람들도 붐빈다. 비양도 도항선승선장 건너 도선대합실 옆에 있는 올레 시작 간세를 짚고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날씨는 어제보다는 덜하다.
길은 바로 한수리로 들어선다. 한림과 수원의 중간에 위치한다하여 한수리가 되었다는 마을, 이름만큼이나 마을역사도 타의적이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비양도가 생길 때, 해수가 마을을 덮쳐 주민 모두가 수장되었다가 5백년 후에 마을이 다시 형성되었다고 한수리 ‘設村유래’에서 밝히고 있다.
마을 앞 길 섶에 둥근 돌담 두 개가 물위에 떠있다. 마을 공동 노천탕이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용천수로 몸을 식힐 것이다. 세상에 이웃끼리 이런 목욕문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제주 말고 또 있을까, 살아가는 지혜요 공생의 현장이다. 행복한 마을이다.
행복한 마을길은 수원리로 이어진다. 수원리 표석을 지나 작은 포구 앞에 이르니 어촌계에서 세운 입간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당 체험마을, 테우가두리 낚시체험. 관광유어장 다이빙체험. 교육학습체험 등,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제주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다. 제주의 민속은 민족의 보배이기 때문이다.
마을로 접어든 길 위의 팽나무는 가지가 모두 남쪽으로 쏠려있다. 예술적이다. 얼마나 북서풍을 맞았으면 저리되었을까! 나무들의 운명이다. 아니 그렇게만 말 할 일이 아니다. 강풍을 맞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저 기개는 바로 제주사람의 기개가 아니겠는가.
마을은 살기 좋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길은 넓고 깨끗하다. 주택들도 반듯반듯하다. 밭들도 티 하나 없이 정돈되어있다. 마을 어귀에 서있는 공덕비석들도 질서가 정연하다. 이런 비석거리를 지날 때마다 나는 부러움을 느낀다. 착한 선조에 그 고마움을 기리는 후손의 새김, 그것이 비석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제주의 마을만이 가진 전통이요, 유적이다.
길은 수원리 사무소를 지나 차도를 건너서 본격적인 들길로 들어선다. 들이 넓다. 들길 초입에 선 비닐하우스 몇 채, 바람이 하우스 안을 휑하니 지나간다. 찢어진 하우스 안에는 거미줄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황폐하다. 처음 설치할 때는 정부보조금도 받고 자부담도 많이 들었을 터인데, 제 역할을 못하고 쓰러져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비단 제주 뿐만은 아니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小農구조이기 때문에 시설영농보다는 자연노지영농이 더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넓은 들을 지그재그로 이어 가던 밭길은 일주도로를 건너 대림안길 입구에서 마을 속으로 들어선다. 마을 초입에 정원이 깨끗한 집 한 채, 노란 잔디에 검은 디딤돌이 조화를 이룬 집에 대문은 없다. 대신 정주석에 정낭 세 개가 가로 걸려있다. 반가운 제주의 풍경이다. 주인은 출타중이겠지만 들어가서 물이라도 한 잔 얻어먹고 싶은 집이다.
제주도는 원래 대문이 없는 대신 대문간 양쪽에 위아래로 구멍 세 개를 뚫은 작은 돌(정주석)을 세워서 거기에 나무막대기(정낭)를 끼워 집에 주인의 유무를 알렸다. 정낭 하나면 주인이 잠깐 외출한 것이고, 둘이면 저녁때쯤 돌아오겠고, 셋이면 장기출타 표시라고 한다. 이 얼마나 이웃과 방문객을 배려하는 풍습인가. 지금은 사라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마을과 들길을 지난 길은 다시 마을속의 성로동 농산물집하장을 지나고, 그루터기 쉼터도 지나서 귀덕농로라는 밭길을 돌고 돌아 작은 다리 두 개도 지나서 선운정사란 큰 절에 이른다. 오늘 절에서는 대단한 불사가 있는 모양이다. 주차장에 차들이 즐비하고 신도들이 많이들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절이 이쯤 되어야 스님들이 먹고 살지 않을까 싶다. 모처럼 성황을 이루는 사찰을 만나니 그 동안 만난 초라한 사찰들이 안쓰러워진다.
우리는 절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그만 고갯마루 공터에 앉아 준비한 김밥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통을 비우고 몸을 풀었다. 그곳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들판만큼이나 넓고 깨끗하여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을이름을 물어보니 납읍리라고 들려준다.
몸을 푼 우리는 버들못 농로를 돌아 납읍 숲길을 지나 떨어진 동백꽃잎이 한길바닥을 붉게 물들인 마을길로 들어섰다. 길은 납읍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멈추고 오른쪽을 가리킨다. 가르치는 쪽을 올려다보니 큼지막한 숲이 울울창창하다. 마을 사람들이 사랑하는 금산공원,
1만3천여 평의 난대림지역에는 후박나무. 생달나무. 종가시나무등 회귀식물 200여종이 서식하고 있다는 천연기념물375호로 지정된 공원이다. 공원 속으로 들어가서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니 숲은 깊고 바람은 고요한데, 사당 한 채가 눈길을 끈다. 마을제를 지내는 ‘포제단’이다.
제주의 마을제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제의 주관을 남성이 하느냐, 여성이 하느냐에 따라, 남성이 주관하면 유교식 포제고, 여성이 주관하면 무속식 당굿이다. 포제단은 남성들의 공간인 셈이다. 공원을 돌아 나와서 운동장이 넓은 납읍초등학교로 들어섰다. 푸른 인조잔디가 도시학교 부럽지 않다. 넓고 깨끗한 운동장 못지않게 단층짜리 교사도 산뜻하다.
학교를 빠져나와 마을길을 걸으니 마을역사가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큼지막한 마을 공동화장실을 비롯하여 효도시험마을이요 선비마을이라는 표지석에 마을노래비까지 세워져있고, 또 마을사람들의 공동식수장인 ‘공동정호’라는 옛 우물터가 비범하고, 넓은 마을도로와 고목의 가로수들이 마을의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마을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오솔길로 들어서니 백일홍길이다. 여름이면 백일동안 배롱나무 꽃이 붉게 핀다는 백일홍 길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꽃도 철이 되어야 피는 것, 오름도 올라야 보이는 것, 이어지는 과오름 둘레길과 도새기 숲길은 너무나 발이 편한 길이다. 마을길은 눈이 즐겁고 숲길은 발이 즐겁다.
원시림이 가득한 숲길을 빠져나와 포장길을 걸으니 저 멀리 고내봉이 고래 등처럼 길다. 고내봉은 봉수대가 있었다는 망오름을 주봉으로 다섯의 오름 군이다. 산 입구의 소나무숲길을 들어서니 일주문 대신 종각이 우뚝 선 사찰 하나, ‘보광사범종각’이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산속에서 절을 보는 일이야 흔한 일이지만 이렇게 종각이 절 입구에 높이 버티고 서있는 절을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에 없다. 그럼 이 절은 어느 종파에 속한 절인가? 혹시 제주가 고향인 일붕 서경보 선사가 창설한 일붕선교종 사찰이 아닐까, 생각하며 산을 올랐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 불교종파를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정토종을 비롯하여 무려 36개나 된다. 불교 갈래가 이렇게 많음에 나도 놀랐었다. 일붕선교종도 대한불교협의회에 등록된 종파임은 물론이다. 특히 제주에 일붕선교종 사찰이 많은 것은 일붕선사의 영향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붕선교종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니 소속 사찰 명부에 보광사는 없었다. 일설에는 보광사가 조계종 말사라는 의견도 있어 조계종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였으나 거기에도 등록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조계종 23교구 본사인 한라산 관음사에 전화로 확인하니 사고사찰이라는 설명이었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족보 없는 절, 부처님도 부끄러워하실 것 같다.
올레길은 보광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절을 끼고 산을 오른다. 산의 소나무숲길은 울창하고 편안하고 시원하다. 고내봉 정상에서 보는 한라산과 바다풍경은 절경이라는데 오늘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섶의 하르방당은 표석이 없다면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당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신령스럽다. 두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직도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고내봉 둘레길을 따라 내려온 길은 昭和시절 하가리 주민들이 세운 동지천 표석을 지나서 고내교차로로 이어진다. 교차로에서 일주도로를 건너니 마을 입구 대로변에 산뜻한 집 한 채, 커피점이 길손을 반긴다.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똑 들러서 커피 한 잔 맛보고 갈 만한 위치의 집이라는 생각이다.
길은 15코스 종점을 향하여 마을 사이의 밭담 속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이 피할 수도 없는 배염골이라는 아주 좁은 풀밭 길을 걸으니 뱀이 다리를 기는 듯이 스멀거린다. 아직 뱀들이 제 집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길은 마침내 바다향이 물신풍기는 포구에 이른다. 올레 종점 간세를 찍고 하늘을 보니 아직도 하루해가 남았다. 풍경도 좋고 길도 좋아서 16코스를 더 걸어 나갔다. 적당한 숙소를 만날 때까지. 오늘은 올레길 위에서 하룻밤을 지낼 예정이다.

-고내포구 입구 정갈한 커피집-
첫댓글 제주 풍경이 많이 달라졌군
지중해 모습이야..
읽어 주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