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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 네 번째
성경 ; 출16:2-15, 빌1:21-30, 마20:1-16
제목 ; 내게 있어서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국어사전에서는 ‘행복(幸福)’이라는 단어를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
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이
풍족하여 흐뭇하게 느껴지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복(福)’이라는 한자
는 ‘보일 시(示)’변에 ‘가득할 복’(畐)자의 합성어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
가 가득한 것을 보고 만족을 느낄 때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불만(不滿)’은 글자 그대로 ‘마음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
는 상태’를 뜻합니다. 요컨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
을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쉽사리 가름할 수 없
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그 주어진 상황에 따
라, 마음의 상태가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 돈 천원만
있어도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수억의 돈이 생겼더라
도 불만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다가 어떤 형편과 조건을 바꿔서 맞추려
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어진 그 형편에다가 자신의 마음을 맞추는 편이
훨씬 쉽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우리
의 형편이나 조건을 금방 내 마음대로 어떻게 바꿀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지금의 형편보다 훨씬 더 좋아
지리라는 큰 꿈을 갖고 살아가되, 지금 현재는 그 주어진 형편에다가 자신
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
안주(安住)하지 않고, 훨씬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
아가되, 당장은 그 현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
다.
어느 날, TV를 보니, 아주 보기 흉한, 그야말로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
서, 한 노인이 서서 TV기자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화
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자세히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사연인즉, 그 집은 할아버지가 오래 전에 한참 동안 살던 집이었습니
다. 지금은 다른 곳에다가 번듯한 새 집을 지어서 살고 있지만, 옛날에 고
생하며 살던 그 집을 허물지 않고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래서 세상사는 것이 좀 힘들거나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집을 찾
아와서 옛날에 엄청 고생하던 일을 회상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절에 비할 경우, 지금 겪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
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되거니
와, 평상심도 회복하게 된다고, 그 할아버지는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아무
도 살지 않는 집이지만, 할아버지는 그 옛날에 고생하던 때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집을 헐어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사는 것이 너무 힘들거나 고달플 때에는, 옛적 일을
회상해보는 것도 괴로운 현실을 이겨내는 하나의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
다. 지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잘 사는 모습과 비교하니까 불만과 불평을
갖게 되는 것이지, 10년이나 20년 전, 자신이 살던 모습을 회상하게 된다
면, 지금 갖고 있는 그 불만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하고 변덕스러운지,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의 자기 형편을 망각하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
디로 말해서,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고, 언제
나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아침 일찍
이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는 몇몇 일꾼들을 불러서 선택한 다음, 그들
에게 하루 품삯으로 십만 원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포
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홉 시쯤 되어서, 어쩌다가 인력시장 주변을 지나가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대기하고 있는 품꾼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포도원주인은, 그들의 그런 모습이 안타깝게 여겨져서,
그들에게 적당히 품삯을 따져주겠노라 말하고서는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인력시장에는 여전히 품꾼들이 일거리를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주인은 세 차례나 더, 사람들을 데려
다가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품삯을 얼마 주겠다는 말
은 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원주인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들의 형
편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그처럼 사람들을 데려갔던 것입니다.
하루해가 다가고, 일을 마칠 때가 되어서, 포도원주인은 일꾼들에게 품
삯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계
산해주었는데, 그들에게 십만 원씩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
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처음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리
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십만 원이 지급되었습
니다. 물론, 주인이 그들과 처음에 약속한 그 금액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을 하면서 투덜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인에게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이 사람들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우리를
똑같이 대우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 일입니까?”하고 따졌습니다. 이에, 포
도원주인이 그들 중에서 가장 불평이 많은 사람을 따로 불러서 이야기했습
니다. “이보게, 내가 자네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 자네는 하루 품삯으로
십만 원을 받기로 하고 일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자네는 자네 품삯
이나 가지고 가면 되는 일일세. 내가 모든 사람에게 품삯을 똑같이 준 것
은 내 마음에 달린 것일세. 내 돈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주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사실, 그렇습니다. 일꾼들이 포도원주인에게 불만을 표시할 아무런 이
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포도원주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 주인이 자기들을 불러주지 않았으면, 그들은 하루를 공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포도원주인에게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자기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포도원주인이 자
기들을 불러주기 전, 그들은 일당 10만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일거리만 있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건만, 그들은 그러한 처지에 있던 자기들의 형편과 그 입장을 잊어버
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포도원주인이 나중에 온 사람들과 자기
들을 똑같이 대접한다고 해서, 자기들을 불러서 일하게 해준 그 포도원주
인에게 항의하면서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손해를 보면서도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후덕한 인심을 보여준
그 포도원주인을 칭찬해주지는 못할망정, 자기들과 똑같이 대우해주었다고
해서 불평하고 있으니,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들입니까?
하지만, 그들의 그런 그릇된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결
코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그 누구와 비교하기보
다는, 바로 우리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 사
람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과 비교합니
다.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우리는 꼭 우리보다 잘
사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처럼 일그러진 우리 인간의 모습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유대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불평과 불만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은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애굽
사람들이 자기나라 국무총리였던 요셉에 대해서 알고 있던 초기에는 어느
정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츰 요셉을 모르는 사람들
이 애굽을 지배하게 되자, 유대인들은 완전히 노예상태가 되고 말았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에서 탈출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했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어 유
대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릴까봐, 일부러 광야로 인도해서 신앙훈련을 시키셨
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 시기에 있었던 일
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 풍족할 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아무 것도 살아남
을 수 없는 사막에서 40년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가 참으
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불평을 늘
어놨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고기와 밥을 실
컷 배불리 먹을 수 있었는데, 그런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처럼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차라리, 그때 애굽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
라면 좋을 뻔했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종살이하던 유대인들이
무슨 수로 고기와 밥을 실컷 먹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더군다나, 농
사도 지을 수 없고 목축도 할 수 없는 사막에서 고기와 밥 타령을 하고 있
으니, 유대백성들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억지를 다 받아주셨다는 사
실이,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하
나님께서 저녁에는 고기를 먹게 하고, 아침에는 밥을 실컷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8)”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
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은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했기 때문에, 그 후로도 그들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대들면서 반항을 했던 것
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있
도록, 모세를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과 권능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그
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했고, 그래서 그들은 계속 원망과 불평을 했
으며, 결국은 광야에서 죽어 묻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생의 목
적을 땅이 아닌 하늘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이 제한이 없고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만족한 인생을 살고자 원한다면, 우리의 욕심
을 완전히 다 버려야 하는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스님들이
무소유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100% 거짓말입니다. 무소유는, 우리가 죽
어야만 이룰 수 있는 과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욕심을 억지로 없애려
고 할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중요한 일입
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믿음이 자라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
리도록 도와야 한다(1:25)’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것으로 우
리의 욕심을 채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갖
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즉 믿음 안에서 기쁨을 맛보게 될 때, 우리는 세상에 있
는 것을 갖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다(26)’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인생에 있어서 참다운 가치가 무엇인지 알면, 그것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게 되고, 또한 그것을 얻게 해주신 주님을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
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서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
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
인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고, 또한 그렇게 사는 방법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말하기를 ‘내게 있어서 산다는 것
은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죽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 선택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까, 바울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말은, 진리 안에서 살
고 진리를 위해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다시 표현한다면, ‘하나님
의 뜻에 따라 올바른 인생’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한다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
수를 믿는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처럼 폼 나게 잘 살려고 하는 것을 인생
의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요한 목사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청준의 소설 ‘낮
은 데로 임하소서’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안 목사님이 10여 년 전에 독일에서 집회를 하시던 중, 어느 유명한 안
과 전문의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눈에 대해서 대화를 나
누던 중, 그분들이 운영하고 있는 안과병원에 한 번 오라고 해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안 목사님의 눈을 한참 진료하더니, 당신의 의술로 시력을
회복할 확률이 99퍼센트 이상이라고 하면서 개안 수술을 권했습니다. 그런
데, 안 목사님은 숙소로 돌아와서 그 문제로 기도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내가 볼 수 있을 때에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시력을 잃었고, 그래서 다
시금 주님을 찾게 되어 새 생명을 얻었는데, 이제 다시금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된다면, 또다시 죄를 지을까 두렵다. 그리고 앞을 볼 수 없어서 만난
그 하나님을, 전 세계에 다니며 전파했는데, 내가 눈을 떠서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인도한 집회에서 은혜를 받으신 분들은 어떻게 되겠는
가?’
그래서 안 목사님은 그 의사를 다시 만나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
다. 그러니까,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수술을 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이지만, 자신을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수술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해서, 수술을 거부했다고 하는 이
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부단히 노력할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참된 가
치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를 믿을 특권은 물론이요, 예수를 위하여 고난받을 특권까지 받았다
(29)’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언제나 기독교인답게 살아가기 위하여, 지금보다 더욱 힘쓰시는 저
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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