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란을 바라보며
송 희 제(아녜스)
우리 집은 안방에만 베란다가 있다. 그곳에는 이사 올 때 그대로 가져온 화분들이 올망졸망 있다. 그중에서 봄이 되면 꼭 이맘때마다 주먹만 한 크기의 황금색으로 피는 꽃 화분이 있다. 그 화분은 군자란으로 우리 집에 입양된 지가 30여 년이나 된다. 그 군자란꽃은 해마다 제일 먼저 피어 우리 집 화분에서 봄의 전령사가 된다. 나는 아침에 창문을 열어젖히며 제일 먼저 화분들과 눈인사를 한다. 꽃대가 올라, 한 송이씩 꽃망울을 터트릴 때마다 나의 하루는 환희의 기쁨을 가득 안고 시작한다. 그 꽃은 오래 적 추억을 씁쓸하게 불러일으키며 나의 마음을 또한 애잔하게도 한다.
내가 40대 때 신앙생활을 활발하게 할 때이다. 성당에서 '레지오'라는 신심 활동을 꾸리아 간부로 왕성히 하던 때이다. 우리 레지오는 팀 구성도 연령층도 다양하고 단원들도 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노력하는 모범 팀이었다. 그중에서 밝고 활발하며 살림도 잘하기로 소문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홀 시모님을 모시며 3남매를 두었지만, 남편이 다리 한쪽은 의족을 하여 절룩거리는 장애인 이었다. 그 집의 가장인 그 남편은 보통 때는 수려한 얼굴에 다리는 절지만 퍽 점잖아 보였다. 그러나 술을 자주 들어 과음만 하면 점잖은 인상과 달리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하여 가족들을 괴롭혔다. 특히 그중에서도 과음했을 때는 여러 가지로 그녀를 힘들게 하였다.
그 자매 말에 의하면 옛날에 대천에서 화원을 비롯하여 큰 농장을 갖고 있을 때의 일이라 했다. 아이를 둘 낳았을 때 그 남편이 큰 사고를 당하여 다리를 절단하였다고 한다. 농장 풀을 예초기로 깎다가 기계 고장으로 사고가 났다. 예초기 칼날이 갑자기 튀어 다리를 크게 다쳤는데 부실한 처리로 감염이 되어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 사고 이후부터 장애인이 된 사실을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은 알코올 중독자까지 되었다. 자주 가족들이 그의 술주정에 시달리며 살았다. 결국은 시골 농장 일도 못 하고 농토를 정리하고 대전에 이사 온 것이다. 아파트를 장만하고 남은 재산으로 작은 건물을 샀는데 그것도 사기를 당하여 큰 손해를 입어 가세가 기울게 되었다. 그 후 아파트도 크기를 작은 평수로 줄여 이사했다. 그 자매네는 시골서 가져온 많은 화분도 다 버리고 이사를 간 것이다. 이사할 때 그 자매네의 화분이 내팽게 쳐져 있어 내 집에 그 작은 군자란 화분을 들여왔다. 그때부터 물과 영양제를 주며 고아를 돌보듯 정성껏 키위 온 것이다.
어느 해인가 한참 추운 12월 겨울밤에 그 집 셋째 아이가 3살쯤 되었을 때다. 그날은 그 남편이 더 만취가 되어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에게 폭행을 가하려 했단다. 너무도 무서워 피하려 막내 아기를 안고 맨발로 우선 집을 뛰쳐나왔다. 가끔 만취하여 술주정하다가 말았는데 그날은 더 심했다. 그 남편은 인사불성이 되어 칼까지 휘둘러 갑자기 신발 신을 겨를도 없이 그 자매는 맨발로 아기만 안은 채 도망치듯 가출을 한 것이다. 그 자매는 그 추위에 맨발로 아기만 안고 어느 가겟집에 숨었단다. 그날 밤은 가게 주인에게 사연을 말하고 창고 같은 쪽방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간신히 내게 공중전화로 긴급 구원 요청을 해왔다. 남편 있는 집에는 너무도 무서워 당분간 못 들어가겠다고 했다. 너무도 딱한 마음에 수소문 끝에 여고 동창생이 운영하는 연무대 육군 훈련소 근처 식당에 취업시켰다. 아기와 맨몸이라 주변 몇 교우들에게 알려 그 자매 모자가 입을 여러 옷가지를 나는 여러 집을 돌며 모았다. 그 남편에게 들킬세라 난 비 오는 날 내 얼굴을 우산으로 가리며 그 자매를 만나 옷 보따리를 전해 주기도 했다.
그 후 그 남편은 술을 안 들었을 때는 가출한 아내와 어린 막내아들을 찾고자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다 술을 들면 온 동네가 다 시끄럽고 그 자매와 친했던 집들은 다 불똥이 튈까 두려워했다. 우리 가족들 또한 그 사실을 아는 터라 그 모자를 도운 화살이 내게 올까 모두 노심초사하였다. 그 후에 그 남편은 아내와 친했던 자매들에게도 그녀의 행방을 물었고, 결국은 성당에도 찾아갔던 것이다. 그녀는 당시 성당 자모 회장이었다. 성탄을 앞두고 한창 바쁘고 일이 많은데 젊고 여린 본당 수녀님이 내게 전화가 왔다. 이 추운 겨울에 그 어린 아기는 어쩌고 어디서 먹고 자는지 천사 같은 수녀님까지 목소리를 울먹이며 안타까워하였다.
난 그 근황을 친구 식당서 일하는 그녀에게 수시로 전하였다. 그런 세월을 그 남편은 흥신소를 통하여 그녀의 행방을 결국 알아냈다. 할 수 없이 두고 나온 두 자녀도 있어 집에 돌아왔다. 당분간은 그 남편은 각서까지 쓰며 개과천선 한듯했단다. 그 후에 얼마 가지 않아 또 술 아니면 이틀을 못 넘긴다고 했다.
그 후 나도 그 아파트를 이사 나왔다. 세월이 흘러 여러 해 만에 백화점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요즘은 어찌 지내느냐고 근황을 물었다. 무조건 아들만 감싸던 시모님도 돌아가시고, 그 남편도 객사했다고 했다. 늘 술주정으로 세월 보내다가 동학사 쪽 어느 외나무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져 혼자 하늘나라로 간 뒤에 알았단다, 그 비보에 나 또한 한참 동안 멍멍하여 먼 하늘만 올려보았다.
인생무상! 아무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해도 백 년 안팎의 삶이다. 모두가 우리네 주어진 삶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살려고 노력한다. 인생 여정에서 예기치 않은 힘든 일들이 불어닥칠 때마다 우리는 그 가시밭길을 헤치며 딛고 일어나고자 한다. 군자란의 꽃말은 고결, 고귀, 우아이다. 해마다 피는 우리 군자란꽃이 필 때마다 나는 그 찐한 주황색 꽃이 그 자매 집안이 잘 일어난 듯, 내 마음이 반가워지며 애잔한 마음 또한 지울 수 없다. 일찍 간 그 가장 얼굴이 선하고 수려한 것처럼 그가 군자란꽃으로 환생한 듯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가장은 꽃말처럼 고귀하며 우아하게 하느님이 보시기에 장한 자녀로 하늘나라에서는 영생을 누리기를 빌고 싶다. 그 자매는 젊을 때 그렇게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신앙으로 견디며 노력했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