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는 억이면 충분했다. 소리만 내도 아득해지는 억 선생님은 조 경 해를 흑판에 쓰고, 우리는 쓸 일이 아마 없을 거라 했다. 내게 조 경 해는 친구들의 이름, 조 경 해를 넘어선 숫자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억이면 충분했다. 소리만 내도 아득해지는 신혼집은 억에서 한참 모자랐지만 그래도 좋았다. 서울에서 나는 억 아래의 방들을 전전하며 십 년을 살았다. 내가 낳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주아주 큰 숫자들을 배웠다. 아이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 억은 조금씩 작아지고 억은 억대로 고민했을 것이다. 점점 작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 ㅡㅡㅡㅡㅡ 숫자보다 사람이 소중하던 시절은 언제였었나? 평생 ‘억’이면 충분했던 시절이 언제 있기나 했었나? 도리(道理), 예의(禮義), 미덕(美德) 따위는 국어사전을 지키는 단어가 되어버린 걸까?
뉴스에나 볼 수 있는 몇 백억, 몇 천억이 출세자들 뒷주머니에 아무렇지 않은 듯 구겨 넣은 지폐 같아서, 자꾸만 쪼그라드는 서민들의 ‘억’, 부(富)가 인격이고 권력이라고 체면도 양심도 벗어던진 자들은, 억 때문에 허리가 휘고, 억 때문에 죽는 사람들을 알기나 하는지. AI시대의 부익부와 빈익빈, 가상과 실상의 혼재 속에 숫자만을 배우는 아이들의 미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나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