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안심하라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왼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 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 - 헬라어 성경에는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있다. 이는 눅 22:57;요 2:4;4:21과같이 '오'없이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네 믿음이 크도다 -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 확신 아울러 겸손과 인내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칭찬을 받은 두번째 이방인이다.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는데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예수의 병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부장과 가나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 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직인 선민론을 암시하고 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여자의 첫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두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내 세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이기어 그녀의 소원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 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그러나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차도 부정한 메시야를 참메시야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녀를 위허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소원대로'란 직역하면 '원하는 만큼'으로 각종 난관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를 굳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