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길을 생각하면 뚜렷한 흔적이 가슴에서 되살아난다.
봄날 백제 문화 탐방을 하며 찬란한 문화유산의 현장에서 벅찬 감동을 같이 나눈 일,
정기 세미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셨던 회원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아쉽게도 대구광역시에서 지원되는 '여름시조학교' 사업이 폐지되었고,
대구시조공모전 사업을 할 수 있는 지원금이 30% 삭감되는 어려움에 처했지만
폐지된 사업은 재개할 수 있을지 활로를 모색해 봐야 할 것이고
예산이 삭감된 사업은 상금 규모를 축소하거나 재정적으로 자부담을 크게 증액하지 않는 선에서
규모 있게 집행할 방법을 궁구하였다.
이런 상황에 아랑곳없이 1,200편이 넘는 전국시조공모전 응모 작품이 협회의 문을 두드려 주어 고맘다.
이는 단적으로 대구시조시인협회를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숙경 회장, <권두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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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조영일(1944~2023)
하늘을 나는 새들 살아가는 길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 우리 모르는 길
혼자서 깃에 숨기고 높이 날아 떠가는,
날이 저물도록 무한 허공을 건너
흔적 하나 없는 먼 길 바람 따라
가벼운 몸짓 하나로 살아가는 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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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하영필(1926~2023)
우리 아버지는 쌀은 보배니라 하시고
뜰에 떨어진 벼 한 알도 버리지 않으셨다
그 시절 우리 아버지들은 다 그렇게 사시었다.
삼백육십 일, 아니 평생을 늘 먹어도
물리지 아니하고 보양에도 으뜸인 쌀
그보다 더 진귀한 보배가 쌀 두고 또 있을까.
땅에 매달리고 하늘 보고 빌어도
채우지 못하시고 마르다가 가신 임들
그 쌀밥 원 없이 먹으니 그 임이 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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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를 벗고/ 장식환(1939~2023)
빈한貧寒으로 살아왔다
짓밟힌 질경이처럼
험한 풍랑 눈 귀 막고
숨죽이며 견뎌 왔다
새 시대
는개 걷힌 날
꽃향기 나를 깨운다
물풀이 되감기듯
허리 못 편 이 고뇌
살을 에는 동지섣달
목숨 지켜 걸어왔다
뒤틀린
덩굴을 풀 듯
훌훌 털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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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 숲에서/ 박방희(1946~2023)
너와 나 여기 와선 소나무로 설 일이다
나무가 나무끼리 더불어 뻗어 가는
직립의 여러 이치에 비로소 눈이 뜨이리
저마다 일가를 이뤄 서 있는 자리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당겨 안아 들이며
하늘을 주거니 받거니 교감하는 나무들
한 세월 한자리에 숲이 되어 서 있자면
비틀고 뒤틀리고 휘어지고 구부러져
서로가 더 큰 하나로 얽히고설킬 수밖에
나무가 서 숲이 서고 숲이 서 나무가 서는
상승과 하강이 출렁이는 이 언저리
우리도 어깨를 겯고 소나무로 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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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노중석
초목草木은 한 움큼씩 흙덩이를 움켜잡고
흙먼지는 날아올라 먼 산을 지우지만
하늘은 바람의 발목 잡은 적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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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축대/ 류금자
직지사 만덕정에
돌 축대 천년만년
돌의 모양 다 달라도 그 쓰임새 제자리 있고
장인의
손길과 영혼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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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 오영환
연필 촉 현란하게
빛을 피해 움직인다
점점이 그늘진 곳
흰 공간 사라지며
빛줄기
손거울 들어
제 모습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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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날의 동행/ 이숙경
묵호 가자 한마디에 동해가 출렁거려
하던 일 다 제치고무조건 따라간다
혼자서 나서지 못해 깊숙이 묻어둔 곳
가다 쉬고 쉬다 가는 모처럼 찾은 여유
막무가내 떠들썩 파랑으로 굽이치는
한물간 우리의 노래 해안선 휘몰아 간다
질척한 삶 짊어지고 오르는 논골담길
바다를 끌어안은 바람의 언덕 위로
당차게 가닥을 잡은 파도같이 넘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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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차꽃/ 장계원
피우지 못했기에
질 수도 없나 보다
오지 않을 내일에
칭칭 묶였나 보다
동장군 서릿바람을
끌어안은 꽃망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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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정표년
꽃 보러 갔다 왔는데
꽃이 날 따라왔는지
눈에도 소리에도
온통 꽃뿐이네
사람이 저리 고우면
무너지고 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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