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상여(喪輿)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어떤 작품이 심금을 울리며 공감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그만큼 독자로 하여금 강열한 인상을 주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것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 무엇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독자는 책 자체가 유명해서 책을 손에 들지 않는다. 감동을 받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모두 다 읽는다. 내용 중에 무언가에 빠져드는 요인이 있을 때 손에서 놓지 않고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다.
책을 손에 드는 것은 생각없이 하는 동작이 아니다. 무언가를 느끼고 얻기 위함이다. 흥미나 감동 받기거나, 하다못해 무료함이라도 달래기 위한 소일거리라도 될 때 책을 손에 든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다르지 않다. 살면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책을 가까이 하며 지내면서 그간 읽은 책들이 적잖아 많다. 그간 나는 작가의 길을 걸으면 서는 쓰는 일과 읽는 일을 병행해 왔다. 그렇게 읽는 책들이 얼마나 될까. 수량을 꼭 집어서 수치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어림잡아 몇 수레는 되지 않을까 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는 글이라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
어렵지 않게, 연암 선생이 쓴 <누님을 보내며>라는 작품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 작품의 정황이 내 심중에 비추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되살아나 가슴 뭉클하게 감동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 글을 읽으며 공감하면서 빨려 든 것은 문장도 문장이지만 그 행간에 질펀하게 고인 서정이 크게 공감과 울림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강렬하게 뇌리를 때린 것이, 마치 마중물로 퍼 넣은 물 한 바가지가 심연에서 차오르는 내 안의 슬픔을 단숨에 끌어올렸던 것이다.
그 작품에 보면 선생의 손위 누나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고 마흔 셋에 세상을 뜬 것으로 보인다. 그 슬픔을 안타까워하며 비문을 짓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상여가 나가는 대목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절절한 슬픔을 끌어올려 가슴을 후벼 파며 먹먹하게 만든다.
글 속에서 선생은 상여가 고향 두포 뱃머리를 돌아갈 때 타고 온 말을 세워놓고서 그 정경을 처연한 모습으로 눈물 지으며 바라본다. 이때 붉은 명정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떠나는 돛대 그림자는 물위에서 꿈틀거린다. 이후부터는 그 정황이 환영으로 어린 상태로 그려진다. 강물 위의 먼 산은 검푸름으로 물 들어서 누님의 쪽진 머리카락만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게만 보인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다음의 한 대목에서 '끄응'하고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연암이 여덟 살 적에 시집가는 누님과 장난치며 한 행동이 침잠해 있는 심연의 슬픔을 툭하니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다. 선생이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자 그의 누님도 그만 빗을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대목에서다.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먹으로 분을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는 대목은 천진난만하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어서 새삼 폐부를 찌르며 별리의 슬픔을 증폭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글을 들라면 주요한의 '가신 누님'이란 시다. 이것도 여간 찡하게 마음을 울려놓고 있는 글이 아니다.
'강남 제비 오는 날/ 새 옷입고 꽃 꽂고/ 쳐녀 색시 앞뒤서서 /우리 누님 뒷산 갔네/
가서 올 줄 알았더니/ 흙덮고 금잔듸 덮어/ 병풍에 그린닭이 /울어도 못온다네. (이하생략)
나라고 하여 이런 슬픔이 없을까. 아마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해(1964년) 봄날은 어쩐 일인지 날씨가 맑고 따뜻했다. 한데학교를 파하여 집에 들어오니 집안 분위기가 무거운 것이 이상했다. 이상 기류를 예고라도 한 듯이 사립문 앞에는 웬 사자 밥이 놓여있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한데 말들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을 밀어내며 집 모퉁이를 돌라내가 쓰는 작은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는가. 아침 새벽까지도 내게 밥을 지어 상을 차려주었던 작은 누나가 평소 입은 입성대로 베개를 베고 반듯이 자는 듯 누워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러고 있을 누나가 아니었다. 해가 기웃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낮이 아닌가.
나는 누나가 평소 낮잠을 자고 있는 걸 본적이 없다. 재빨라서 일을 갑절로 해 늘 든든한 일꾼노릇을 하던 누나다. 그런데 이날은 얼굴에 흰 분가루를 뒤집어 쓴 듯 그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누나의 시체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나가 죽다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라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죽어 누워있는 누나를 보자 와락 달포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렸다. 그날은 누나와 함께 지병을 앓고 계시는 아버지의 약을 지으러 가신 어머니를 마중 나갔던 것이다. 그날 밤을 어찌 잊을까. 공포에 시달린 그 밤. 죽음은 혹여 그때 받은 충격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날 밤 나와 누나는 읍내로 나 있는 마을 뒷길로 호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그만 산 초입에 이르렀을 때 불이 꺼지고 말았다. 느닷없이 불이 꺼지니 사위가 갑자기 어두워져서 한 발짝 내딛기가 힘들어졌다. 사방이 칠흑 허방으로 변해버려 서 도무지 앞뒤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되자 무섬증에 몸이 수꿀해 졌다. 그런 중에도 풀 섶을 해치며 가다가 구르거나 넘어지면서 여러 군데 타박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우리 둘은 손을 단단히 붙잡고 어림짐작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마침내 어둠을 뚫고 집에 되돌아오니 마중나간 어머니는 어느 길로 오셨는지 이미 집에 당도해 계셨다.
나는 누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일을 특히 잊을 수가 없다. 스물을 갓 넘긴 처녀의 몸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서인지 상여는 울긋불긋하게 치장을 하지 않았다. 그냥 흰 단색으로 흰 꽃으로만 장식을 했는데, 거기에는 앞장세운 명정이나 만사지도 없었다. 그렇게 쓸쓸히 집을 떠나서 누나는 외진 길섶에 묻혔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다. 누나는 군에서 안전사고로 사망을 한분과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파묘하여 멀리 떠났다. 유골이 수습되어 떠나던 날. 산역을 마치자 집에서는 제웅을 만들어 첫날밤의 의식을 치렀다. 슬프고도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밤이었다. 나는 그 일을 지켜보며 마음이 기쁜 한편으로 목에서는 뭉클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것은 이내 눈물샘을 건드려 한정 없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이튿날 무당이 품에 두 제웅을 안고 떠나자 이때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런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마도 내가 연암의 그 글을 읽고서 감동하고 감격한 것은 순전히 그의 사연을 내 사연으로 받아들이고 죽은 누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때 내가 불현듯 생각한 것이 있다. 내가 몽매간에 누나의 죽음을 두고 잊지 못해고 애달파 하는 정도가 지나치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점이다. 한데, 연암의 글을 읽으니 이미 나이 사십을 넘기고 세 자녀를 둔 누님의 죽음도 그토록 애달파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혈육 간의 사별은 이토록 특별한 것인가. 한으로 맺혀서 눈 감는 날 까지 잊지를 못하게 만드는 것인가. 나는 비극적인 그날을 떠올리며 늘 그날을 잊지를 못한다.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두고,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겠구나"
하고 읊던 것처럼. 나도 누나를 떠나보낸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누나가 사망한 액년(厄年)은 1964년. 그 해는 하늘도 캄캄하게 내 가슴 속에 한으로 새겨져 있다. 거기다가 바로 두 달 뒤에는 지병을 앓고 계시던 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떠나 참척의 상심을 이겨내지 못하게 만든 한해였으니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2018)
첫댓글 선생님의 작품을 통하여 누님에 대한 사연은 어림짐작하고 있었으나 참으로 애잔합니다.
더구나 연암의 글을 대하시면서 그 동안 참아왔던 선생님의 회한과
손위 누님을 떠나보낸 여한이 더욱 눈물겹습니다.
1964년이면 어김없이 바로 위의 누님이시군요.
영혼결혼을 하여 제웅으로 떠나가신 누님의 영혼은 아마도 평안을 누리시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게도 누님이 있을 뻔 했는데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어쩌다 한 번 그 누님이 살아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잠기곤 합니다.
세월이 흐른다하여 혈육의 정이 어찌 희석되겠습니까.
미혼 누님을 여읜 슬픔과 정한이 선생님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떠난 누나를 생각하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너무나 착하고 동생을 이뻐해 주던 누나여서인지 모릅니다
연암선생의 누나생걱은 애절하기만 한데 그보다 결코 더하먼 더했지 못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나의 흰꽃 상여
강물 같은 화장(化粧)에
먼산 쪽진 머리 날리며
백합 얼굴에 눈부신 아미(蛾眉)
이런 누님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사위(女壻)이면 좋으련만
제웅이 웬 말인고.
어둠이 사위(四圍)를 둘러쌓으니
꺼이꺼이 칠흑 바다는 허방이고
1964. 참척(慘慽)의 통한(痛恨)
애달다 어이할꼬.
나에게 있어 누나는 살아생전 안고가야할 업이기도 합니다.
누나에 대한 글을 여러편 섰는데, <밤길애상 > <동박새와 누나>
<누나의 흰꽃상여>가 좀더 나은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1964년 겪으셨던 그 당시 상황이 상상이 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네요. 한창 예민했을 사춘기 때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사랑하는 누나를 떠나보낸 별리의 한이 쉽사리 사라질 리 없겠지요. 그마나 글로 승화시키셨으니 다행입니다.
우리집안에서 1964년은 지망년에 해당합니다. 얼마나 운수가 사나운 해이면 우리집에서는 아버지와 누나가 돌아가시고, 큰댁에서는 큰아버니가 돌아가시고 어린조카가 죽은 흉변을 겪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