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경주, 비화가야이 본거지 창녕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6가야의 하나인 비화가야의 본거지이며 신라의 점령지가
된 이후로는 백제나 다른 가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 창녕은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이 넘친다'고 할 정도로 홍수가 잦았다. 그래서 불기운이 왕성하다는 뜻의 '화왕'을
붙여 유난스러운 물 기운을 다스리고자 한 화왕산이 있다. 또한 환경 생태의 보고인 창녕
우포늪은 낙동강의 배후습지로 형성된 것이며 수천 년 동안을 지켜 오고 있다.
일연의 고려 '사략'에는 금관, 고령, 비화, 아라, 성산을 5가야라 칭하며 비화는 지금의 창녕
땅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비화는 고유한 우리말 '빛벌', '빛불'의 이두식 표기이다. 읍내
를 들어서면 창녕이 비화가야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는 교동,송현동 고분군이 있고, 그 옆에
는 창녕박물관이 있다. 개인적으로 왕실 위주의 역사 서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고분군 사
이로 난 국도는 볼썽사납다. 왕실의 역사보다는 가야의 역사를 유린하는 것 같은 느낌!
오랜 도굴로 인해서 창녕박물관에도 그 중요한 유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출토 유물의 대부
분은 일본에 있다고 하니 더 안타깝기 그지없다.
창녕 읍사무소 근처에 있는 만옥정 공원에는 창녕의 국보가 그 몸돌의 거대함을 뽐내고 있
다. 받침돌이나 지붕돌이 없는 진흥왕 척경비는 진흥왕 순수비중의 하나로 불리우기도 하나
정확한 명칭은 척경비이다. '순수'란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을 뜻하는데, 새
점령지 정책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만 열거하였다 하여 경계를 넓혔다는 뜻의 '척경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한다.
창녕의 진산인 화왕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멋이 더 한 것 같았다. 그 아래에 '양과 친하자고
하면 매국이라고 했던가?' 창녕의 척화비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술정리에 있는 동,서 삼층석탑을 찾으려니, 국보급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이정표 하나 제대로
있지 않았다. 마을 안에 있는 술정리 동 3층석탑은 찾아가는 동안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
었다. 지금은 도로를 넓히는 것인지, 신식의 집으로 개조하는 중인지는 모르지만, 집들이 많
이 헐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옆을 흐르는 조그만 하천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수업시수 법제화'를 위한 서울 상경 투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천성산을 고속
철도로부터 보호하자!' '도룡뇽을 살려내자'라는 구호를 걸고 현재 50여일 가까운 날을 단식
하고 있는 지율스님을 뵙기 위해서 청와대 앞으로 갔었다. 우리가 타고 간 버스에 붙은 플
랭카드 때문인지 많은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몇 명만이 면담이 가능했었다. 나는 청와대 인
근에서 바라 본 청와대 쪽의 산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술정리 동 3층석탑에서 보는 화왕
산은 청와대 뒷 배경에 자주 등장하는 북악산, 인왕산과 흡사했다. 덧붙여 작은 하천이 흐른
다는 것은 필시 왕궁터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지형에 매료되어 한 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화왕산 능선을 따라 시선을 주면서 '좋옷타'
를 연발하고 '여기가 내 땅이 아닌가?'라는 넋나간 생각을 하면서 인간의 욕심과 권력으로의
지향이 내면 깊숙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짧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고귀함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것이 전 민중의 눈에 맞추지 않는 이상, 천박한 것일 뿐이다.
아름다움은 모두를 위한 것일 때, 위대한 것이 아닌가?
이 간단한 진리는 여러 곳에서 통한다. 하병수 가옥은 요즘 들어 친환경과 서정적인 시골집
을 꿈꾸는 나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대청의 시원스러운 나무마루와 터인 앞과 더불어
뒤뜰과 통하는 쪽문을 타고 오는 바람은 즐거운 '누움'을 연상케 한다. 금세 라도 차가움을
느끼는 등 쪽에서 땀이 식는 듯 하다. 지붕의 마감 재료는 볏짚이 아니라 화왕산 넓은 꼭대
기를 연상케하는 억새풀이라 하니 그 연상의 즐거움이 더 하기만 하다. 카~~~~~~~~~
사실, 화왕산의 넓은 억새밭은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화왕산과 오붓하게 친구한 관룡사
를 보고 싶어 물놀이 온 인간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 산 낮은 곳에 주차를 하고 한참을 걸었
다. 증법국사가 절을 지을 때 화왕산 위에 있는 세 개의 연못에서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 연유로 지어진 이름인 관룡사!!!
오르는 지름길을 약간만 돌면 드라큐라 같이 송곳니를 빼물고 있는 두 장승을 볼 수 있다
하여 길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관룡사에 올라서야 태풍 '매미'의 작품임을 추측할 수 있
었다. 태풍에 쓸려 내려갈 뻔한 두 장승을 관룡사 산문을 지나 절 입구에 세워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이 따로 없는 관룡사는 산문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처음
보는 것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사실, 관룡사의 풍경보다는 보고 싶었던 것은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이었다. 용선대를 반
야용선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나르는 배 또는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이 없는 극락의 세계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로 비유하는데, 이것이 바로
반야용선이며 용선대가 바로 반야용선에 해당하는 것이다.
용선대에 오르는 것은 극락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에 승선하는 기쁨인 것이다. 관룡사에서
700m만 오르면 용선대에 오를 수 있지만, 그 길이 너무 험하였다. 군데군데 태풍 '매미'의
작품을 볼 수 있기에 더욱 힘든 난코스였다. 땀흘려 오른 기쁨은 용선대라는 타이타닉호에
승선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 창녕의 기운이 보이고 뒤로는 화왕산의 억새밭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아무
리 좋은 곳이라도 인간의 발이 채이는 곳은 딱 질색이지만, 가을에 억새밭을 꼭 한 번 보고
싶다. 동아대학교 뒷산인 승학산에 오르면 그 억새장관만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설레임인
데, 전국에서 두 번째라면 서럽다는 화왕산 억새밭이라니 더 더욱 맘이 동하였다. 용선대 석
조석가여래좌상이 내려다보며 지켜주는 곳, 바로 이곳이 창녕이었다.
이쯤해서 두 번이나 언급한 '매미'를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든 개발의 재앙
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뒷통수를 칠 것이다. 이 만큼 기술이 발전하였으니 재앙은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개발론자들은 따져 물을 지 모르나, 개발이 후세에 가져 올 재앙
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금 그 개발의 재앙을 온몸으로, 그것도 천성산의 도룡뇽과 동·식물들이 자기의 자식이라
며 자식을 지키는 마음으로 50여일을 단식한다는 비구니 지율스님을 떠올린다.
감히 누구를 탓하랴 '나의 안목도 부재한 것을...???'
창녕 우포늪은 1000여종의 동식물을 키우는 어머니이자 한국 생태계의 자궁이라고 한다. 그
런데 나는 우포늪 주변을 걸으며 덥덥한 늪지만을 느꼈다. 딴에는 제법 안목있는 사람이라
며 자부했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까지 스스로를 탓할 수 없는 것을...
알아야 보인다고 했던가?
참! 연수원에서 이 말을 이용해 먹는 강사들은 알아야 보인다고 하더구만!
그러나 유홍준씨가 그 말을 한 것은 보기 위해서 배우라는 의미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지 않
겠나?
알아아 보인다고 한 뒷 말이 더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보이면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되짚
어보면 느끼기 위해서는 볼 수 있어야 하고, 보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최종이
바로 느끼기 위한 것이다.
최소한의 생태적인 안목이라도 가졌다면, '알아야 보인다'와 '알면 보이고 보이면 느낀다.'가
확연한 차이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느끼지 못하는 자는 실천할 수 없는 법!
청와대 앞에서 단식하는 지율스님을 생각하며, 이 번 주는 천성산쪽으로 발길을 옮겨야 하
겠다. 아름다움은 모두를 위한 것일 때 위대하다.
관룡사 용선대에서 바라 본 화왕산의 경치
관룡사 산문
관룡사 남장승과 여장승
창녕을 굽어보는 관룡사 석가석조여래좌상
창녕척화비
진흥왕 척경비
교동,송현동 고분(가야시대)
창녕석빙고
탑금당치성문기비
술정리 동 3층석탑
하병수가옥-초가삼간(실제 네칸)
한국생태계의 자궁 창녕우포늪
영산만년교
문호장 발자국
첫댓글 우히히-0-,.
하하하..즐거우셨겠다..맨 위에 사진..쌤이 도닦는거 가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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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나 저 위에 잇는글은 하나도 안보고 사진만 봣는데,,- -ㅋ
미투.. 저위에 있는글 읽으려면 백년..?백년은 오버구.. 99년걸리게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