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50 주년
(온 기철)
졸업 한지 반백년이 지났다. 말하자면 우리는 적어도 반백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다. 더러는 절친했고 더러는 졸업 후 듬성듬성 만나거나 아에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으나 대부분 적어도 안부는 전하며 지냈다. 백여명의 사람들이 만든 구룹이 반백년동안 서로 잊지 않고 지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운좋게 의술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한다. 의술은 서로가 통하는 관심사를 갖게 하고 비슷한 사회경제적인 위치를 제공해 준다. 자연히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고 만나서 할 얘기가 많다.
추운 겨울 날씨에 손을 비비며 성균관 대학에서 입학 시험 보던 때, 시골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합격자 발표를 듣고 새벽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서 문리대에 써붙인 합격자 발표 명단을 확인 하던날 옆에 서있는 최수강이와 인사를 나누 던 때가 눈에 선하다.
우리는 청양리 예과에서 처음 만났다. 네트 도 달려있지 않고 찌그러진 농구 링 밑에서 이내열이와 의 인연이 시작 되었다. 그 때 가장 즐거운 시간은 점심 시간이었다. 우리는 싸온 도시락을 들고 창양리 시장(?)
에 있는 국밥집으로 가서 여러명이 떠들며 점심을 먹었다.
8개 의예과, 의대 체육대회와 서울대 춘 추계 체육대회는 학업 못지않게 중요한 행사 였다. 힘든 공부는 크게 재미 있지 않았으 나 이내열, 이종준과 같이 하는 농구는 너무나 즐거운 일 이었다. 우리는 시합 3-4주 전부터 연습 했고 대부분의 시합에서 이겼다. 우리는 이렇게 6년동안같이 지냈다. 덕분에 인천 친구인 이남수, 김성덕과 어울려 다녔다.
해부학은 우리들에게 어마 어마한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같이 인체를 해부한 실험 파트너 들을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오승근, 오인석 그리고 유세화가 옆에서 같이 공부 했다. 우리는 서로 도우며 열심히 배웠다.
방학 때 전주 집에 내려오면 김인구, 이상문, 이우용, 조병선, 이종일, 김봉식이 김인구 아버지 병원 옥탑 방에 모여 놀 았다. 우리들의 장래, 나라의 장래를 토론하고 때로는 온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하루는 김봉식의 고향 삼례 평야의 오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1971년 졸업 후 우리는 뿔뿔이 헤어졌다. 미국에 갈 사람과 마땅한 수련의 자리를 얻지못한 동기들은 군에 입대 했다. 대구 군의 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방 대대 군의관 노릇을 하자니 배운것도 다 까먹을 정도로 무료 했다.
3개월 짜리 마취과 교육 프로그램에 지원 하여 청평 59 육군병원에 가니 곽승용이 와 있었다.
둘이서 희희낙락 거리며 재미있게 지냈다. 그러나 마취과 수련은 엉망이었다. 전신 마취 두번 척추마취 열번 쯤해보고 일동 103 후송 병원 마취과 군의관으로 보직을 받았다. 일반외과, 정형외과, 심지어 산부인과 까지 있는 군 병원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수술실을 찾으니 최수강이 선임으로 와 있었다. 그는 부산통합 병원에서 6 개월 동안 마취를 제대로 배워서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사실 나는 그의 제자였지만 동무가 되어 재미 있게 지냈다. 우리는 일반외과 군의관이 휴가 중이면 수술도 했다. 탈장, 맹장, 치질 수술 이었다. 척추 마취를 주고 최수강이 집도 하고 나는 조수를 섰다. 그러다가 6개월 후에 수강이가 대전통합병원으로 가고 홀로 남아서 마취와 간단한 수술을 했다. 이렇게 해서 내 마취인생이 시작 되었다.
군 3년차에는 미국 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 서울 근교에 보직을 받아야 했다. 대구 군의학교 교관으로 있는 김제홍을 찾아 갔다. 그의 안내로 3군 인사과를 방문하여 생면부지의 x소령에게 인사청탁을 했다. 덕분에 부평 공병대 군의관으로 보직을 받았다.
나와 이종준, 이내열은 인턴 매취가 안되어 뉴욕 프러싱에서 일년 고생하다가 이종준과 나는 브롱스 북쪽에 있는 마운트 버논에서 같이 인턴을 했다. 이종준은 같은 병원에서 내과 레시던트를 하고 이내열은 부루클린에서 산부인과 레시던트를 나는 뉴욕 대학 프로그램에서 마취과 레지던트 가 되었다. 이남수도 브루클린에서 소아과를 전공 했다. 황동하,조병선, 홍성진, 곽승용, 박상효, 이진영, 김유식, 김일영, 장문석이 뉴욕과 그 그근처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희영이 펜실바니아에서 외과를 하다가 일년 후에 뉴욕대학 마취과 레지던트로 들어 왔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레지던트 생활을 했다. 그리고 정명희가 부르클린 뉴욕 주립대학에서 약리학 박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달이 멀다하고 만나서 저녁을 먹으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랬다. 의사 면허 시험공부도 모두 모여서 같이 했다. 김일영은 양로원 문라이트 자리를 물려 주었다. 3년차 펠로우 시절 6개월 동안 양로원 당직해서 번돈으로 로드 아일랜드 집 다운 페이를 했다.
수련을 마친 후 우리는 대망의 돈벌이를 하러 미국 방방곡에 퍼졌다. 이종준은 버몬트 택사스로 나는 프로비던스 로드 아일런드로 이남수는 스캐낵타디 뉴욕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내열은 포츠머츠 오하이오로 갔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홍성진, 박상효, 장문석, 김일영, 이희영은 로스 안렐레스로 갔다. 1979년 쯤이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났다. 우리집은 보스턴에서 약50마일 떨어진 매사추세츠 와 로드아일랜드 경계에 있었다. 1980년대 초 였다. 뜻밖에 정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 했다. 조보연, 윤용수, 장기현,
김주현, 조현우, 오승근, 최성재, 민양기, 정문상이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포함한 전가족을 데리고 찾아 왔다. 주말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먹고 놀았다. 가까운 명소도 찾아 다녔다. 좀 늦게 조현오가 혼자 와서 우리집에 자주 놀러 왔다. 정규병이도 짧은 기간이 었지만 우리집에 왔었다. 일생에 이렇게 즐거웠던 시절은 없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6년동안 같이 몸살하던 친구들의 만남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경사 였다.
이무렵 유세화가 영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근처 사촌 누이 집에 들리는 김에 우리집을 방문했다. 김인구가 영국에서 돌아와 매스 제너럴 소아외과를 방문하는 길에 우리집에 왔다. 그집 아이들 3명 우리집 2명을 포드 스테숀 왜건에 싫고 여행을 떠났다. 펜실바니아 루트 66에서 사슴을 정면으로 들이 받아 라디에티어 망가지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었다. 근처 선배 집에서 염치불구하고 사흘을 숙식 하고 차를 정비한 다음 여행을 계속 했다.
그런대로 자리잡은 우리들은 20주년은 1991년 서울에서 25주년은 199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났다. 한국에 남은 친구들은 본교 아니면 유수한 대학에서 교수님이 되었거나 개업을 하여 잘 살고 있었고 미국에 온 친구들은 풍요로운 미국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내열은 포츠머스 오하이오에 한 일년 있다가 산호세 캘리포니아 에 자리를 잡았다. 샌 프란시스코에 미팅이 있을 때 마다 그곳에 가서 찾아 보곤 했다. 그러다가 1999년 내열이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멀리 서 이종준, 이남수, 조병선등이 오고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코 근처 친구들이 모여 그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이별의 아픔은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청양리 찌그러진 농구대 앞에서 처음만난 친구 였다.
아이들이 공부를 끝내고 딸은 산 호세로 아들은 로스 앤젤레스에 직장을 얻어서 이주를 했다. 동부에서 별 볼일 없어진 우리 부부도 따라가기로 했다. 직장을 찾다가 얻어 걸린 곳이 모데스토 캘리포니아 였다. 우리는 2001년, 9.11 한달 전에 지금사는 모데스토로 이사 했다. 같은 해에 하와이에서 30주년 모임이 있었다. 한국에서 이상문과 정명희 단두명이 와서 무척 섭섭 했다. 그러나 우리동기의 호프 황수택 형님의 동기 재회의 데뷔는 섭섭한 마음을 씻어 주기에 충분 했다. 만약 다음 모임에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줄 알라는 필사적인 약속은 우리를 감동하게 했다.
모데스토 에서 80여 마일 서쪽으로 가면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산 호세이다. 양주석, 황동하, 이진영이 이지역에 살아서 가끔 만나녀 지냈다. 요지음엔 양주석과 이진영이 로스 안젤레스로 이사가서 황동하 하나 남았다. 벨란치아 아들네 집에 들릴 때면 로스 앤젤레스 친구들도 동부에 있을 때 보다 자주 볼 수 있다.
택사스로 갔던 이종준은 5년전에 로스 안젤레스 북쪽 싼타 크라리타로 뉴욕 스케넥타디에서 40여년 살던 이남수는 3년전에 라구나 우드로 이사 했다. 나도 은퇴 했지만 아직 모데스토를 떠나지 않고 있다. 딸네가 사라토가에 살고 있고 오랜동안 정들은 칸트리 클럽을 뒤로 하고 떠나기가 힘들다.
모데스토로 이사온 후 매년 11월16일이면 산 호세 근처 이내열 산소를 을 찾는다. 동우 엄마도 일년에 두 세번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한다. 동우와 누리는 절친한 친구 이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돕고 위로하고 그리워 하며 반만년을 살아 왔다. 나이들어 소원해 지지 말고 자주 만나며 재미 있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더 할 나위 없겠다.
온기철
첫댓글 내가 모르던 얘기가 많네요~~~
좋은글이다.
언제 서울 올 예정이냐? 기철.
내년 4월로 예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코비드19 사정이
어떨지 모르겠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