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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면죄부로 성 베드로 성당 증축에 온갖 비방을 다 해온 (500년간)
개신교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그들 교회를 통채로 그것도 신자 수에 따라
푸리미엄을 붙혀서 사고 팔고 하지요
아래 종교 개혁에 관한 글을 참고 하세요
*소위 종교개혁에 관하여
교회의 구성원인 백성들이 균형감각을 잃고 천상적 성격의 목표를 뒤로하고 현세적 성격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할 때 자연적인 현상으로라도 부패는 발생됩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상 문란한 사회풍조의 여세가 북유럽 일부 교회 성직계를 침범한 사실도 있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왕들은 스스로 교회의 양들이라고 자처했지만 그들은 교회보다는 그들의 영토와 권력과 부가 우선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황들은 각국 왕들로부터 정교 협약이나 불리한 조약 체결을 강요당해야했고 이 조약으로 각국 왕들은 교회를 조종하여 거대한 수입을 거두어들이는데 몰두함은 물론 성직자 임명에도 간섭함으로서 부패를 가중시키게 되었습니다.
각국의 왕들이 자기 영토 안에서의 개혁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허용하려 들지 않는 경향에 교황들은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한편 수입이 줄어든 교황들은 이들 세속 통치자들로부터 돈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높은 세율의 교황세를 부과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좋지 못한 선례였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각국 국왕들과 지방 제후들로 하여금 교회 및 수도원 재산에 침을 흘리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자국 내에서 자칭 주교나 수도원장을 겸임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일들은 부패사회에 더 큰 부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재 지주제도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 베드로대성당 신축공사에 필요한 모금을 위해 레오10세 교황의 평범한 대사령 반포는 처음에는 대사논쟁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소위 종교 개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대사는 원래 세상에서 죄는 사해졌으나 그 보속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잠벌을 탕감해주는 교회의 보고의 개방 또는 은전인데 보통 선행이나 기도로 해오던 것을 갑자기 헌금을 권유하는데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선행에 따라서는 돈이 수반되는 수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대사령은 정당한 것이며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맺고 풀 수 있는 권한에도 속하거니와(마태 16,19) 성전건축을 위해 헌금을 권유한 것은 모세도 성소 장식을 위하여 헌금을 요구하였고(출애 35,4), 요시아 왕도 성전보수를 위하여 성전 수리비를 거두었으며(Ⅱ역대 34,9) 솔로몬 왕은 성전 봉헌식을 위하여 황소 22.000마리, 양 12만 마리를 제물로 바친적도 있습니다(Ⅱ역대 7,5). 오늘날 개신교의 사정은 생략합니다. 그리고 이 대사령은 314년이래 그 권한을 교황에게 뿐 아니라 각 주교들에게도 허락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사령 세 번째 항을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개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하는 것이 좋다” 다만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대신 기도와 대재(금식)로 대사를 얻을 수 있다”라고 반포하였습니다. 이 3항이 바로 주여 주여라고 말만 잘하는 사람들에 의해 면죄부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사령 설교가 임명에 있어서 그 지역“알브레히트”대주교는 하필 루터 신부와 사이가 나쁜 도미니꼬 수도회의 텟젤(Tetzel)신부를 임명하고 당시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저술가인 동시에 웅변가로 그 명성이 높던 루터신부를 배제시킴에 따라 그를 따르던 많은 추종자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음은 물론 루터신부 자신에게도 인간적인 울분과 그가 볼 때 자기보다 못한 텟젤이 대사 설교가로 지명됨에 대한 냉소와 반감이 일어난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또 한편 불같은 시기와 불만은 텟젤신부가 “베텐베르크”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에 반항하여 베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항으로된 논문을 붙이도록 하였습니다. 사실 이 같은 방법은 그 당시 신학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던 관례화 된 방법이었습니다. 이에 질세라 텟젤도 나름대로 106개 조항의 반박 논문을 그 성당 문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여 소위 대사논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원래 “대사”라는 말은 Indulgence라는 말에서 오는 「은혜」「관대한 용서」라는 뜻일 뿐 면죄부 또는 속죄권이란 말은 오역(誤譯)중에도 이만저만 오역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일부 대사 설교가 라는 사람들(특히 텟젤신부 같은 사람) 중에는 지나친 실적만을 중요시 한 나머지 탈선적 언변과 교리에도 없는 개인적 의견 등으로 군중들을 선동함으로서 당시 교회의 적지않은 피해를 끼쳤음은 물론 오늘날 저희들에게조차도 할말을 잃게 만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루터에게는 텟젤과 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계기와 도화선이 되었고 대사에 관한 논쟁은 소위 종교개혁으로까지 치닫게 되어 처음에는 교회 내에서 교황에게 순명하면서 실시하려던 루터의 개혁은 갑자기
①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비난하고
② 교회의 모든 성사를 거부하고(세례 및 성체성사와 참외는 제외)
③ 독일의 그리스도인 왕들과 제후들에게 각기 자기나라에 독자적인 국가교회를 창설하도록 궐기시키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소위 종교개혁은 루터가 원하던 바와는 달리 후계자들에 의해 급진적으로 진리를 거스르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폭재가 되어 대부분 독일 왕 및 제후들은 로마의 권위와 세금부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던 차에 루터를 지지함은 물론 새로운 루터교회에 그들 자신의 주교를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그 당시 일고있던 인문주의에 매혹된 그 추종자들 중에는 수도원을 뛰쳐나가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하면 점차 루터를 따라 성직의 엄숙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성직자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당시 교회에 불평이 있던 사람들, 어려운 선행은 필요없고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달콤한 선전에 비상한 매력을 느끼는 무리들, 교의야 어찌되었든 독일인은 독일인의 그리스도교를 창설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충동에 날뛰던 자들,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교회의 혁신이 이제 곧 이루어진다는 속단으로 경거망동하던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음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의견이나 주장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이 증언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종교적 요소가 현대적 견지에서 과대 평가되어 왔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독일 제후들이 루터주의를 강행시키는데 있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루터는 분명 신비주의의 한 지도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Britanica Encycl V. p23. 4-11).
사실 한 수도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마르틴루터가 자신의 죄스러운 양심을 속죄나 자기 부정의 방법으로는 찾지 못하여 그 나름대로 마음의 평화와 하느님을 올바로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일과 그만의 고뇌는 긍정적으로 이해할 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교회를 떠나지 않고 옛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처럼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교회를 쇄신 할 수 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과 그가 영영 교회를 등진데 대한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83년 11월에 원죄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 그가 23세 되던 1505년 7월 독일의 한 교외에서 산책을 하면서 얼마 전 결투 끝에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 현세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있을즈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벼락이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친구마저 졸지에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황급한 나머지 안나 성녀를 부르며 이번에 목숨을 구해주시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굳게 맹세하고 그후 즉시 시작된 수련생활 끝에 그는 드디어 1507년 하느님대전에서와 모든 증인들 앞에서 청빈(가난함), 정결(평생독신), 순명(장상의 명령에 복종)의 삼대서원을 바치고 마침내 수도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사적인 의화체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비록 파문은 당하였으나 소위 진정한 종교개혁자라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 그가 오로지 부르짖고 믿는 하느님과의 약속만은 죽을 때까지 지켰어야 옳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께 서원하거나 맹세코 자제하기로 서약했을 경우에 남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한말을 어기지 못한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을 낱낱이 지켜야한다.”(민수 30,3) 는 말씀은 신약시대에 들어왔다고 없어지는 말씀이 결코 아니며 또 하느님은 일개 죄 많은 피조물인 한 인간에 의해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히브 13,8) 또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에페 2,10) 일 뿐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교황을 반역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또 교회를 떠나려고 했던 것도 아닌 것은 확실한 듯 합니다. 그러던 그가 과연 16세 연하의 환속 수녀와 결혼할 필요는 어디 있었으며 그것도 파문 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결혼을 하였으니 개혁자로서 자처한 그가 제일 급한 일이 이것이었던가? 그처럼 조급하게 서둔 이유는 어디 있었는가? 따라서 “선행이 없이 신앙(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는 주장은 “넓은 길”(마태 7,13) 을 마음대로 걸으려는 준비공작이었다는 비판에 대하여 무엇이라 답변할 것인지 무척 궁금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그의 동료 “에라스무스(1465-1536)” 는 이렇게 답변을 대신 했더군요. “비극같은 개혁운동은 희극(결혼)으로 끝났다” 라고요.
그것은 인간적인 나약으로 인한 희극으로 돌린다해도 그가 한 일 중에는 희극보다는 비극적인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헤센 백작 “필립” 을 17세의 처녀와 결혼시키기 위해 자녀를 7남매나 낳아준 그 백작의 조강지처와 비밀리에 이혼을 허락한 것은 역시 비극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원래 소위 면죄부 사건과 성직자들의 해이가 그의 개혁의 대상이었으나 천만 뜻밖에도 주님이 주시고 사도로부터 1500여 년간 이어오던 진리와 교리와 성서의 훼손이라는 것은 영원히 씻지 못할 죄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루터의 많은 제자들로부터도 “우리는 루터는 믿지 않고 다만 그가 발견한 복음을 믿는다” 라는 말을 심심치않게 듣고 있습니다. 또 그는 자기의 청빈(가난하게 삶)서원을 깨뜨리면서까지 자기가 기도하고 예배하던 수도원을 자기 개인저택으로 가족과 같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20년 이상을 더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그의 동지와 제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지켜보면서 어둠에 쌓인 가슴을 안고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습니다.(1546년 6월 28일) 그에 관하여 개신교 사학자 ‘찰스 리어’ 도 “루터의 반역동기는 원인(遠因)이든 근인(近因)이든 모두 심령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라는 것은 간과하여도 무방하다(무시해도 된다). 실상 종교개혁의 목적은 개혁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Cambridge Modern History V. I. p653) 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마태 7,18; 루가 6,44)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볼 때 아무리 개혁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사람의 일이고 주님이 친히 세우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지상의 보편적이고 참된 교회는 제가 회심한 가톨릭교회 하나밖에는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출처 : 김 안토니오 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성 바오로 (딸) 서원, 교보문고)
첫댓글 변명을 잘도 늘어놓았습니다. 예수는 죄로죽은 인간들을 살리려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죽은자가 없어요. 다들 잘랐다고 목아지를 세우고 살아있다고 우기고들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황당하지요. 기가막힙니다.병든자라야 의원이 쓸데있다고 하신 예수님말씀이 지금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죽은 인간들이 하고있는 모든짓거리는 죽이는일 뿐입니다. 먼저 예수의지하여 살아나신(거듭남) 다음에 봉사를하든지 헌금을하든지 하시라구요... 죽은 송장들이 모여않아 선이 어떻고 악이 저떻고 사랑이우짜고 해보아야 썩은 냄새밖에 안나옵니다. 이런 회칠한 무덤 같으니라구.ㅉ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