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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을 통해 한국 방송을 보면, 하나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오락 프로그램이나 시사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면 대세를 이루는 것이 먹방입니다. 먹는 음식에 관한 프로그램입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배를 채울까, 어떻게 끼니를 메울까가 아니라, 이제는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웰빙 푸드를 먹을까? 어디가 맛나는 음식점인가? 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드시고 싶습니까?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 때에 제주도에 며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한라산에 올라가겠다고 하니, 아래 동서가 트레킹 코스를 설명하면서 ‘형님, 점심은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이 최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산에서 무슨 컵라면인가 생각하고서 김밥만 사서 가지고 갔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니 여기저기서 컵라면에 김밥을 먹는데, 컵라면 냄새가 한라산 정상에서 바람을 타고 제 코를 얼마나 자극했는지 모릅니다. 한라산 정상에서 먹을 음식은 컵라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고 살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수가성 우물가에 이르러 제자들로 하여금 수가성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오도록 했습니다. 그 사이에 물을 기르기 위해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장만하고 왔을 때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끝이 나고, 사마리아 여인은 긴 대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기다리던 메시아 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그녀의 마음은 뜨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이고온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수가성에 갔다온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하는 것을 보고 놀라와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들이 사온 음식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심에 그들의 놀라움은 더하기만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양식을 위해서 마을에 내려가서 구해 왔는데, 또 무슨 양식을 말씀하시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자신들이 없는 사이에 누군가 먹을 음식을 가져다 주었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은 단순히 육신적인 의미의 음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34).
위대한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님은 이 구절을 두고서 ‘황금 같은 문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문장은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했는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사셨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설명하는 진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생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이와는 완전 대조적인 삶을 산 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단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더 원하였고, 사단은 그 결과 만족을 얻지 못하였고 결국은 심판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기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5).
이 구절에서 사단이 어떠한 생각과 행위를 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단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지위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자 했습니다. 이미 그는 어떤 피조물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하고 아름다웠습니다(겔 28:12). 그는 인간으로부터 이미 피조물의 왕이요 대제사장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올라가 별들보다 더 높이 되고 많은 회중들 위에 이는 높이 올라 하나님과 같이 굴림하고 싶었습니다.
둘째로, 사단은 자기 자신의 뜻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구절 중에 ‘하리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가 헤아려보면 무려 다섯 번이나 사단은 자기의 뜻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리라 … 내가 하리라… 난 하리라 … 하리라. … 하리라. …”
사단는 ‘내가 하리라’라는 자기 주장이 결국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음무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지는’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다윗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언하기를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라고 했습니다(시 40: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 2:6-10).
성도 여러분,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사단은 자기 뜻을 최고로 높였으나 비참 밖에는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을 비참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비어 복종하시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자로 높였습니다. 그를 따라서 순종의 길을 걷는 자에게 축복을 끼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 우리는 누구의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평소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순종하기를 다짐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뜻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언제자 우리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조금 부담스럽고 힘들다 생각되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오래된 격언 가운데 “모든 법은 왕이 원하는 대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격언의 배경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2세기 초에 스페인의 교회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떤 기도서를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고딕서(Gothic)와 로만서(Roman)를 사용하느냐는 논쟁이었습니다. 결국, 교회가 결정하지 못하고 그 당시의 왕이던 알폰스 6세에게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불 속에 두 기도서를 던져서 불에 안 탄 책을 택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왕이 고딕식 책을 불에 던졌는데 그것이 잘못 떨어지자 왕이 가서 다시 집어 던져서 불에 태웠습니다. 왕의 뜻은 고딕식 기도서가 아닌 로마식 기도서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면서 계속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고 무단히도 애씁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고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은 말과 장식에 불과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여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아들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에게는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오늘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자.” 아들은 “난, 안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아들은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가서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들은 “예, 내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그 일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둘 중에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한 아들입니까?” 여러분, 누구입니까? 큰 아들이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절하였지만 그래도 큰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에 하나님께 언제나 “예, 예”하면서 교묘하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불순종했으나 나중에 회개한 당대의 죄인들을 떠올리게 해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보십시다. 우리는 입으로 ‘예, 예’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일을 순종함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입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까?
성경에는 너무나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돌아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6, 8).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ㅁ 12: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도 없이 많이 성경에 분명하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하나님의 뜻에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그렇게 사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세상의 아버지인 요셉의 목공소에서 목수의 일을 배우고 성장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그는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역을 하시느라 팔레스타인의 온 마을과 고을을 돌아다니셨습니다. 몇 해 동안 그는 자기 앞에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바라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바로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실 때에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이었습니다(요 19:30).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라고 위임받은 일을 끝까지 이루어내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죠지 뮬러는 영국의 유명한 고아원 설립자입니다. 그는 생애 가운데 세 명의 불신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뮬러의 친구였습니다. 이 세 친구가 회개하고 예수 믿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몇해를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의 일기 속에는 세 친구를 위한 기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뮬러는 평생을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세 친구 중에 한 명은 뮬러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명도 뮬러가 죽고 난 후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80세가 넘어서 말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어진 길,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일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피땀 흘리며 일하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매일 매일 우리가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십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