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포교사단 부산지역단 원문보기 글쓴이: 9/幻休/朴譏柱
팔공산 동화사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동화사(桐華寺)는 팔공산의 가장 대표적 사찰로 이름나 있는 곳이다. 팔공산의 수려한 산세를 배경으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면서,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문화의 대표적 유산들이 즐비하다. 일제강점기에 31본산의 하나였던 이곳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서 상당 수의 말사와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동화사가 자리한 팔공산은 한국의 대표적 명산(名山) 가운데 하나이다. 대구광역시의 북쪽에 병풍처럼 둘러있는 산악으로, 대구․군위․영천․칠곡․경산의 경계에 위치하며 높이가 1,193m에 달한다.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봉과 서봉이 양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한 모습이며, 산 자체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영남 지방의 최고 영산(靈山)으로 일컬어져 왔다. 본래 이 산은 공산(公山)․부악(父岳)․중악(中岳)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중악’이라는 이름은 신라 왕실이 이곳에서 정기적인 제사를 지내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까지는 대체로 ‘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지금의 팔공산(八公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고려 태조 왕건과 연계된 내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후삼국 전쟁이 한창이던 때, 견훤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이곳에서 큰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왕건이 동화사 인근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을 가장하여 맞서 싸웠으며, 결국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이 전투에서 죽고 말았다. 훗날 왕건은 이들 여덟 명의 장수를 크게 선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산의 이름도 팔공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다.
동화사 인근의 전투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지만, 과연 이 때문에 산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공산’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볼 때, 팔공산으로 변화된 시기와 그 유래 등에 대해서는 보다 다양한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여하튼 팔공산은 신라 때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왕실로부터 크게 중시되던 산악이었다. 그 결과 팔공산의 골짜기마다 많은 사탑(寺塔)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곳 동화사를 비롯하여 동쪽에는 은해사(銀海寺), 서쪽에는 파계사(把溪寺)가 있으며 군위에는 극락정토를 기리기 위하여 아미타불을 모신 제2석굴암이 있다. 또한 유명한 갓바위부처님을 비롯하여 송림사․부인사 등 그야말로 이곳 팔공산은 불국토와 같은 형상으로 가꾸어져 왔다. 동화사는 이러한 팔공산의 여러 사암(寺庵)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동화사는 그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비교적 많은 관련 자료를 남기고 있다. [삼국유사]와 [고려사] 등의 일반 역사서 뿐만 아니라, 사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자료의 수도 풍부한 편이다. 특히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과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은 9세기 무렵 동화사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제 이들 자료를 중심으로 동화사의 창건과 관계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화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알려져 있다. 우선 493년(신라 소지왕 15) 창건설을 들 수 있는데,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이 해에 창건하고 사찰명을 유가사(瑜伽寺)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현재 동화사에는 극달 화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진영에는 ‘공산개조극달화상지진영(公山開祖極達和尙之眞影)’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기도 하다. 현재로써는 언제부터 이 설이 전해져 내려왔는지 확인할 수 없으며, 1931년 김정래(金鼎來)가 지은 「조선불교선교양종제일수사찰대본산경북달성군공산면동화사적비(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寺刹大本山慶北達城郡公山面桐華寺蹟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동화사는) 생각건대 극달존숙(極達尊宿)께서 부악(父岳)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고 유가(瑜伽)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때는 신라 소지왕 15년인 계유년(癸酉年)이었다.'
‘극달’이라는 법명의 스님은 일반 사서류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유독 이쪽 지역, 즉 팔공산 일대의 사찰과 관련하여 그 이름이 보이고 있을 뿐이다. 갓바위부처님으로 유명한 선본사에서도 극달화상이 491년에 창건하였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493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572년) 이전의 시기이므로, 이 때에 과연 동화사가 창건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극달 화상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특히 ‘공산의 개조’로 추앙받고 있었다는 점은 불교사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가 지속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93년 창건설과 함께 제기되고 있는 또 다른 창건설이 있다. 832년(흥덕왕 7) 헌덕왕(憲德王)의 왕자인 심지왕사(心地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이 창건설은 상당한 역사적 근거를 지니고 있으므로 학자들은 대체로 이 해를 동화사의 실질적 창건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면 [삼국유사] 권제4, 「심지계조(心地繼祖)」조에 들어 있는 다음 내용을 참조해 보자.
'심지 스님은 신라 제41대 헌덕대왕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15세)가 되어 불도를 부지런히 닦았다. 중악(팔공산)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의 영심공(永深公)이 진표 율사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아 과정법회(果訂法會)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며 신도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스님이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당(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였으나 스님은 사양하며 병에 걸린 듯 하면서 방 안에 물러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하였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 스님이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 보살이 매일 와서 그를 위문하였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簡子) 두 개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스님이 가지고 돌아가 영심공에게 말하니 영심이,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라고 하면서 조사해 보았다. 그러자 함은 봉해둔 대로 있는데 열어보니 간자는 없었다. 영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스님이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았다.
다시 돌아와 말하니 영심공이,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간자를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이 이것을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두 명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스님을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스님이 말하였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의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자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이때 신이 노래를 불렀다.
‘막혔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 간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찾아 정성드리려네.’
노래를 마치자 간자를 숲 속 샘에서 찾아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다소 긴 듯한 느낌을 주지만 「심지계조」조 전반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이 자료는 동화사의 창건과 사격(寺格)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자료에서는 가장 뒷부분에 있는 내용부터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정확한 연대 표기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심지왕사가 불골 간자를 모시기 위해 당(堂)을 지은 곳이 바로 동화사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 스님은, ‘지금 동화사 첨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바로 간자를 모셨던 곳’이라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심지 왕사는 동화사의 실질적 창건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헌덕왕의 아들 심지 왕사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불골 간자를 모셔와 이곳 동화사에 봉안하면서 당우를 지었다는 위의 내용은 동화사의 실질적 개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심지 왕사가 모셔온 불골 간자는 위의 내용에 밝혀져 있듯이 본래 진표 스님이 미륵 보살로부터 받았던 189개의 간자를 가리킨다. 미륵 보살은 간자 189개를 주면서 제8간자와 제9간자는 자신의 손가락뼈이니, 이것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삼으라는 당부를 하였다. 심지 왕사가 이 때 189개 간자 모두를 모셔왔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동화사는 이후 오랫동안 불골 간자의 봉안처로 많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위 인용문에 이어 계속되는 내용, 즉 ‘본조(고려) 예종(睿宗)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맞아 대궐 안에서 예배했는데, 갑자기 아홉번째 간자 하나를 잃어버려 아간(牙簡)으로 대신하여 동화사로 돌려보냈다. 지금은 이것이 점점 변해서 같은 빛이 되었으므로 새것과 옛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상아도 옥도 아니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더라도 이 간자가 얼마나 중시되었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또한 [고려사] 우왕 원년(1375년)조의 기사에도, ‘동화사의 석가불골(釋迦佛骨)을 맞이하여 신효사(神孝寺)에 봉안하고 불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4세기 후반까지 이 간자가 보존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이 불골 간자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울러 간자를 봉안했던 ‘첨당 북쪽의 우물터’ 위치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혹시 일연 스님이 보았던 그 우물터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동화사 역사는 더욱 뜻깊게 우리들 앞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심지 왕사와 불골 간자에 얽힌 동화사 창건담은 그 사상적 측면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건담은 곧 그 사찰의 전통과 사격을 이해하는데 있어 마치 기본적 사항과도 같기 때문이다. 위의 창건담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역시 미륵 신앙과의 관계이다. 진표 스님에게 189개의 간자를 주었던 주인공은 바로 미륵 보살이었으며, 그 가운데 제8․제9간자는 미륵 보살의 손가락뼈였다.
그 결과 진표는 신라불교사 전체에서 가장 대표적 미륵 사상가이자 미륵 신앙 전파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심지 왕사는 이러한 진표의 간자를 동화사로 모셔와 봉안하였으며, 이것은 곧 동화사의 사상적․신앙적 지향점이 미륵 신앙이었다는 점을 뜻한다. 아울러 미륵 신앙의 사상적 중심은 유식 사상(유가 사상)에 있었으므로 동화사는 많은 유식 사상가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동화사는 고려시대 이후 금산사․법주사와 함께 3대 미륵도량 또는 3대 유식도량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어나갈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동화사와 관련한 자료는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특히 이들 자료에 의하여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친 동화사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같은 사실은 역시 동화사가 지니고 있는 불교사적 위상에 기인한 결과로 보여진다.
오랫동안 성보(聖寶)로 중시되었던 불골 간자가 봉안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미륵 신앙과 유식 사상이라는 뚜렷한 사찰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등이 보다 풍부한 자료를 남길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자료 가운데 연대기적 서술이 가능한 사례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주요 연혁
-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
- 832년(흥덕왕 7)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창
- 863년(경문왕 3) 동화사 금당 앞의 삼층석탑과 비로암 삼층석탑을 건립. 이들 탑은 민애왕(閔哀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임
- 875년(헌강왕 1) 삼강대사(三綱大師)가 강당 남쪽에 있던 탑을 금당 앞으로 옮김. 이 때 사리 181과가 나와 다시 봉안함
- 934년(경순왕 4) 영조선사(靈照禪師)가 중창. 이 때의 중창은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함
- 1190년(고려 명종 20)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
- 1298년(충렬왕 24)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중창(이 해에는 「홍진국존진응탑비(弘眞國尊眞應塔碑)」가 동화사에 세워졌으므로 중창 시기는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함)
- 1319년(충숙왕 6) 금당암 서탑을 중수하고 사리를 봉안. 이를 기념하기 위해 중수기문을 작성하고 함께 봉안
- 1375년(우왕 원년) 동화사의 석가불골(釋迦佛骨)을 신효사(神孝寺)로 옮겨 불사를 행함
- 1544년(조선 중종 39) 지조(智祖) 스님이 금당암 동․서탑을 중수
- 1591년(선조 24) 서일(瑞一) 스님이 비로전을 창건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명당 유정(惟政)이 이곳에 승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승군을 통솔. 이 때 사용하던 일부 유물이 지금도 전하고 있음. 왜군이 동화사의 영험 있는 불화를 훔쳐갔는데, 후에 유정 스님이 이의 반환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606년(선조 39)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사명당 유정이 중창. 유정 스님은 이 때 해인사에 있던 학인(學仁)․천령(天靈)․해진(海眞)․옥보(玉寶) 등의 스님을 이 곳에 보내어 중창을 돕게 하였다고 함
- 1608년(광해군 원년) 학인 스님이 미륵당을 중건
- 1620년(광해군 12) 의현(義玄) 스님이 괘불을 조성하여 봉안
- 1622년(광해군 14) 극락전을 중창
- 1629년(인조 7)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상을 조성하여 봉안
- 1676년(숙종 2) 고운당(孤雲堂) 묘탑을 건립
- 1677년(숙종 3) 상은(尙訔) 스님이 중창
- 1688년(숙종 14) 괘불을 고쳐 그림
- 1692년(숙종 18) 계영당(桂影堂) 극린대사(克麟大師) 부도탑을 세움
- 1700년(숙종 26) 성임당(性任堂) 축존대사(竺尊大師) 부도탑을 세움
- 1702년(숙종 28) 극락전을 중수하고 금동불을 조성하여 봉안. 수마제전(須摩提殿)을 건립
- 1703년(숙종 29) 극락전의 후불도를 조성하여 봉안. 이 불화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 1709년(숙종 35) 상봉 정원대사(霜峰淨源大師) 부도탑을 세움
- 1725년(영조 1) 석덕(碩德) 스님이 미륵당 등을 대대적으로 중창. 선당이 화재로 소실됨
- 1726년(영조 2) 강생원(降生院)을 중건. 승통 영훈(穎勳) 스님이 지휘하여 선당을 중창
- 1727년(영조 3) 대웅전을 중건
- 1728년(영조 4) 왕준(王峻) 스님이 대웅전 내부에 삼존불상을 조성하여 봉안. 대웅전의 삼장도를 조성하여 봉안(현재 대웅전에 있는 지장도도 이 때 조성된 것임)
- 1730년(영조 6) 목어․운판․법고 등을 조성하여 봉안
- 1732년(영조 8) 관허(冠虛)․운암(雲岩)․낙빈(洛濱)․청용(晴用) 등의 스님이 중창
- 1739년(영조 15) 「옹호문(擁護門)」의 편액을 씀
- 1764년(영조 40) 기성대사(箕城大師) 부도탑을 세움
- 1793년(정조17) 영파 성규대사(影波聖奎大師)가 대적광전의 현판 글씨를 씀
- 1794년(정조 18) 대일(大馹)․영파(影波) 등의 스님이 금당암 동탑을 중수
- 1808년(순조 8) 「인악당의첨대사비(仁岳堂義沾大師碑)」를 건립
- 1838년(헌종 4) 퇴은(退隱)․무익(武益) 스님이 금당을 중건
- 1839년(헌종 5) 성암당(聖巖堂) 해정대사(海淨大師) 부토탑을 세움
- 1852년(철종 3) 금당암 서탑을 중수
- 1854년(철종 5) 동종을 조성하여 봉안
- 1857년(철종 8)칠성각 산신각을 건립하고 칠성각의 칠성도를 조성하여 봉안
- 1887년(고종 24) 대웅전의 신중도를 조성하여 봉안
- 1902년 영산전이 수해를 입자 월송(月松)․성파(性坡)․활허(豁虛) 스님 등이 중건함. 금당암 동탑을 수리
- 1905년(고종 9) 영산전의 후불화를 조성하여 봉안
- 1911년 대구 덕산동에 동화사포교당을 창건
- 1913년 주지 남파(南坡) 스님과 화주 황보응(黃普應)이 심검당을 중건
- 1927년 제월당대사(霽月堂大師) 부도탑을 세움
- 1931년 김정래(金鼎來)가 「동화사사적비」의 비문 내용을 찬술
- 1957년 금당암 서탑을 해체 수리. 이 과정에서 사리장치와 석탑 중수기문등이 발견됨
- 1962년 옹호문(擁護門)과 서별당(西別堂)을 이건
- 1964년 봉서루(鳳棲樓) 중건. 원음각(圓音閣)을 세움
- 1966년 금당암 동탑의 사리장치가 도굴됨
- 1967년 금당암 서탑을 수리. 비로암 삼층석탑을 해체 보수 도난당했던 삼층석탑 사리장치가 동국대에 기증됨
- 1969년「석우당보화대종사비(石友堂普化大宗師碑)」를 건립. 일주문을 이건
- 1974년 금당암을 해체
- 1976년 금당선원(金堂禪院)을 건립
- 1978년 심검당을 중건
- 1990년 설법전을 건립
- 1992년 통일약사대불과 통일대전을 건립
먼저 통일신라시대의 동화사 역사에서는 863년의 일이 주목된다. 이 해에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과 비로암 삼층석탑이 모두 건립되는데, 여기서 발견된 자료들을 통해 동화사 역사와 일반 역사의 소중한 부분들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탑은 모두 도굴의 수난을 겪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굴된 유품들 가운데 일부는 되찾은 경우도 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굴 당한 유물의 양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탑에서 발견된 명문(銘文) 자료와 기문(記文)류 자료들을 통해 탑 조성의 시기와 목적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 즉 이들 탑은 비극적인 생을 살다간 민애왕(閔哀王, 敏哀王으로도 표기함)을 추모하기 위해 경문왕(景文王)이 건립한 것으로, 사리호(舍利壺)에 새겨진 다음 명문 내용에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민애대왕의 휘(諱)는 명(明)이니 선강대왕(宣康大王)의 장자요 지금 임금(경문왕)의 윗대 어른이다. 839년 정월 23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23세였다. 장사를 지낸 후 24년만에... (결락) 연대(蓮臺, 불교)의 업을 숭상하고자 동수(桐藪, 동화사를 말함)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세운다.
민애왕은 희강왕(僖康王)을 왕위에 앉혔다가 다시 몰아내고 자신이 즉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장보고의 지원을 받은 김양(金陽) 군대에 의해 대구 전투에서 대패하며 23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한다. 이후 24년이 지나 경문왕이 민애왕을 위해 탑을 세워주었는데, 경문왕은 바로 민애왕에게 쫓겨났던 희강왕의 손자이기도 하다.
동화사 석탑들은 이처럼 복잡한 정쟁(政爭) 속에 죽어간 왕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 탑 속에서 발견된 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1,200년 이전의 동화사 역사를 확인할 수 있어 다행스러운 느낌이 든다.
고려시대의 동화사 역사는 유가종찰(瑜伽宗刹)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다져나가던 시기로 주목된다. 고려시대의 유가종(법상종)은 3대 종파, 또는 4대 종파의 하나로 인식될 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큰 종파였으며, 동화사는 이러한 유가종의 핵심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홍진국사(弘眞國師) 혜영(惠永, 1228~1294)은 그의 비가 이곳에 세워졌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던 인물이며, 자정국존(慈淨國尊) 자안(子安, 뒤에 彌授라고 고침, 1240~1327) 역시 1324년 무렵 이곳에 주석한 적이 있다. 혜영과 자안은 모두 이 시기 유가종단과 불교계 전체를 이끌었던 고승으로 평가된다. 한편 사적기 등의 자료에서는 보조국사 지눌의 중창 사실을(1170년) 소개하고 있으나 그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꼽히던 그가 유가종찰인 이곳 동화사를 중창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동화사 역사는 연표에서 보이듯 가장 풍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 등의 자료에 모두 현존 사찰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동화사는 특별한 폐사의 시기도 겪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꾸준히 당우를 중수, 또는 건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나름대로 사세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동화사 역사에서 우선 주목되는 점은 임진왜란 때 이곳이 영남 지역의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본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현재 봉서루에 걸려 있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을 보아도 동화사의 이같은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중에는 사명 대사가 사용하던 ‘영남도총섭인(嶺南都摠攝印)’ 인장을 비롯하여 금강저(金剛杵)․요령 등의 유품이 있으며, 승군을 지휘하는데 사용했던 ‘소라’도 함께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동화사는 이 시대 고승으로 추앙되는 인악 의첨(仁岳義沾, 1746~1796)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편양문파(鞭羊門派)에 속한 선승이면서 교학에도 무척 밝았던 그는 수원 용주사의 「불복장원문(佛腹藏願文)」을 지어 정조(正祖)로부터 큰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의 비는 1808년 이곳에 세워졌으며 지금도 ‘인악당’ 안에 잘 봉안되어 있다.
현대사회에 들어와 동화사는 두 차례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1976년의 금당선원 건립이 그 첫 번째 전환기이다. 기존의 낙후되었던 금당암을 해체하고 새로 건립한 이 선원은 이제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 수행 도량으로 자리잡을 만큼 빠르게 성장하였다.
1992년의 ‘통일약사대불(통일약사대불)’ 조성은 두 번째 전환기로 볼 수 있다. 총 5,000톤에 달하는 원석 자재가 소요된 이 불상은 이제 맞은 편의 통일대전과 함께 팔공산의 새로운 문화 유산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특히 이 대불은 팔공산의 전통적인 약사 신앙과 민족통일에로의 의지를 결합시키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조성되었으므로, 호국 불교의 전통과 연계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기 속에서 동화사의 전통적인 사상과 신앙이 다소 소홀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동화사는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한국 미륵 신앙을 대표하는 도량으로, 또한 한국 유식 사상의 본찰로까지 평가되던 유식도량이었다. 현대사회에서의 변화와 함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동화사 대웅전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은 반원상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의 문짝은 솟을빗살에 활짝 핀 꽃잎을 색색으로 새기고 그 바탕에 네 개의 잎을 배열시키는 형식의 장엄한 장식을 하였고, 기둥은 가공하지 않은 아름드리 나무를 그대로 세워 건물의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 전각은 높은 기단 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에 다포식 팔작지붕 구조이며 공포는 내5출목, 외3출목이다.
내부에는 불단과 그 상부에 닫집을 배치하였다. 불단에는 목조 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단은 1728년(영조 4)에 왕준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불도는 1620년(광해군 12)에 제작한 것을 1688년에 다시 고친 것이라 한다. 그 밖에 1728년에 조성한 삼장보살도와 지장도, 1887년(고종 24)에 조성한 신중도 등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왼쪽에 있는 반자(飯子)는 1836년(헌종 2)에 조성한 것으로 몸체에 ‘비구 성오(比丘 性午)…’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화사 영산전
동화사 극락전
조선 숙종 연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다포식 팔작지붕의 구조로 되어 있다.
2고주 5량의 가구(架構)로 고주 위에 대량이 걸리고 그 위는 우물반자를 가설하여 천장을 꾸몄다. 건물의 기단부는 통일신라시대의 기법으로 만들어진 가구식 기단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후진 고주부분에 토벽으로 막아 그 전면에 불단을 마련하였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극락전에는 숙종25년(1699)에 제작된 아미타 극락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부식이 심하여 별도로 보관되고 있다. 아미타 설법도(가로 172cm, 세로 295cm)와 좌,우 권속들의 그림(가로 133.5cm, 세로 290cm) 등 모두 3폭 1조로 구성된 이 불화는 아미타 삼존불을 중심으로 8보살 사천왕 14인의 제자상이 청문중(聽聞衆)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동화사 수마제전
대구광역시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에 있는 수마제전(須摩提殿)은 1702년 무렵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 구조는 두 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규모에 겹처마 박공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의 구조는 내외 3출목의 다포양식이며, 상부는 우물천장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이 건물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조선시대 중후기 다포 양식의 소박한 기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대좌와 광배까지 갖추고 있으면서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 비로자나불 양식의 전형적인 예이다. 생동감이 줄어진 단아한 상호에 통견으로 표현된 의섭은 규칙적이며 얇고 평판적이다.
어깨는 현격하게 좁아진 형태이며, 평판적인 가슴께에는 군의(裙衣)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주형(舟形) 거신광배로서 주변에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팔각 삼단대좌로 상대석과 하대석에는 연화가 배치되어 있다.
동화사 마애불좌상
대구광역시 동화사 일주문 입구 높직한 자연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으로 보물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머리와 상체는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었으나, 다른 부위는 얕게 표현되어 있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표현되지 않았고, 상호는 단정하다.
불의는 통견이며, 가슴께에 군의(裙衣)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께에 두고 있다. 다리는 반가부좌한 형태로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았다. 광배는 주형(舟形)이며 화염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연화대좌는 중대석이 생략된 형태이다.
동화사 염불암 마애불좌상
염불암마애여래좌상및보살좌상은 대구광역시 동화사 극락전 동측에 있는 거대한 부정방형 화강암괴의 서쪽면과 남쪽면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서쪽면에 위치한 불상은 높이 4m의 크기로 선각된 여래좌상이다. 운문위의 앙련연화좌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머리는 소발에 육계는 작계 표현되었다.
두 눈은 가늘게 뜨고 있으며, 코와 입은 두툼하게 나타내고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띄고 있다. 상체는 특이하게도 반나형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연화좌의 높이에 비해 양무릎이 넓어 다소 균형미를 잃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남쪽면의 보살상은 높이가 4.5m이며, 길게 늘어뜨린 법의로 인해 양무릎이 노출되지 않고 있다. 머리에는 부채형의 보관을 쓰고 있다.
상호는 두 볼과 턱이 퉁퉁하여 둔중감을 보이며 인중이 길어 기형적인 인상을 준다. 오른손은 복부에 평행으로 들어 엄지와 약지로 보상화를 잡았는데 꽃잎은 보관높이까지 광벽에 뚜렷이 조각했다. 보살상의 일반적인 법의와는 달리 우견편단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화사 석조지장보살 좌상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대구광역시 동화사 극락전 뒤쪽 경사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석불좌상으로 현재 극락전 내에 봉안되어 있다.
머리 형태는 소발이고 상호는 뚜렷하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아 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은 들어 명치에 두었는데 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다. 결가부좌한 다리는 두 발이 표현되어 있다.
불의는 통견으로 간결하게 옷주름을 나타냈으나, 단정한 자태와 상호 등 고식의 기법도 보인다. 출토 당시에도 광배는 없었다고 전한다.
불화
인악당 의첨진영
이 인악당의첨 진영은 조선 18세기 후반에 제작되어진 것으로 보이며, 세로 97.5cm 가로 97.5cm 이다. 현재 대구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소장중이다.
화면왼편에는 '仁嶽堂大師 義沾 眞'이라는 영제가 적혀있어 그림의 주인공이 인악당 의첨이라는 알 수 있다.
그림속의 인악당은 주장자를 쥐어 어깨에 기대놓고 왼손으로 염주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가운데 손가락 세 개로 염주를 쥔 대부분의 진영과는 달리 염주알을 굴리기 위해 염주알을 느르고 있는 표현은 매우 구체적이다.
동화사 사명당 유정진영(보물 제1505호)
대구광역시 동화사의 사명당유정진영으로 122.9 x 78.8cm의 크기이다.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기품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동화사아미타회상도(보물 제1610호)
대구광역시 동화사의 아미타회상도는 1699년 대화원(大畵員) 의균(義均)을 비롯한 묘해(妙解) ·지영(智英) ·상명(尙明) 등이 참여해서 그린 아미타불화로서 불보살과 호법신중을 3폭에 나누어 그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 폭 모두 박락이 심하고 채색이 떨어져 나가긴 하였지만 가는 철선묘(鐵線描)의 양감 있는 얼굴, 균형 잡힌 신체비례, 섬세한 인물표정, 담채색의 은은한 색조 등에서 의균의 뛰어난 필력과 색채 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불화는 화폭의 구성에서 본존을 중심으로 보살, 나한, 신중을 모두 한 폭에 그리는 일반적인 불화형식과 달리 아미타불과 팔대보살을 한 폭에, 나한과 범천·제석천, 사천왕 등 호법신을 각각 좌우 2폭으로 나누어 그림으로서 부처님의 설법장면과 수호신중을 구분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동화사보조국사진영(보물 제1639호)
대구광역시 동화사의 보조국사진영이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고려시대 중기 정혜결사(定慧結社) 내세워 불교계를 개혁시키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하였으며, 조계 혜능(曹溪慧能)의 선지(禪旨)를 우리나라에 전승시킨 공적으로 한국 선종사(禪宗寺)에서 나옹혜근(懶翁惠勤)과 함께 높이 숭앙되는 선사이다. 지눌은 송광사(松廣寺)비문에 의하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며 정혜결사문을 발표하였다. 동화사 사적비에는 동화사의 중창주(重創主)로 기록되어 있다.
보조국사는 염색하지 않은 소색(素色)의 장삼과 색조 가사를 입고, 등받이가 높은 법좌(法座)에 앉아 오른손에 육환장(六環杖)을 쥐고 왼손을 단전에 둔 채 선정(禪定)에 든 모습이다. 가사를 고정한 금강저는 인간 번뇌를 부수는 보리심(菩提心)의 상징이다.
화면 왼편에는 보조국사가 입적한 이후 조정으로부터 받은 시호 ‘원력수생해동불일보조국사’(願力受生海東佛日普照國師)가 기입되어 있다. 보조국사 진영은 얼굴의 세부 표현과 인물형태 묘사가 뛰어나며, 필선이 거침없이 능숙하다. 법좌는 안쪽에 귀갑문(龜甲文)을 측면에는 모란문을 장식한 나전칠기 의자이다. 수묵의 농담으로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모란문의 묘사가 정교하다.
인물과 법좌는 속도감 있는 필선으로 그려졌고, 질감과 명암은 수묵의 농담으로 표현되었으며, 가사와 발받침 등에는 부분적으로 진채가 채색되었다.
동화사 죽암당대선사선찰진영
죽암당 선찰은 부휴당 선수(浮休堂 善修:1543~1615)의 9세손으로 팔봉당 승휴(八峯堂 勝休)의 법손(法孫)이다.
석조물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이 석탑은 토단 위에 건립된 이중기단 위에 조성된 삼층석탑이다. 상하기단 각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표출하였으며, 상하 갑석도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탑신부에서 탑신석은 각 층이 돌 한 개씩으로 되었고 우주만을 표출하였다. 옥개석은 각 층 4단 받침으로 추녀는 전각까지 직선으로 처리하여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리 외함은 가로 15.3㎝, 세로 14.5㎝ 크기로 전면에 타출기법으로 삼존불을 표현하였다.
동화사금당암 삼층석탑
금당선원 앞에 보물 제248호로 지정된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동쪽에 위치한 탑은 대부분 후대에 보강한 것으로, 석재의 비례와 수법이 조화를 잃고 있다.
상층과 하층의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였고, 상층 갑석에는 부연이 모각되어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에는 우주(隅柱)의 표현 외에는 장식이 없으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의 전각부에는 풍탁을 달기 위한 홈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주가 남아 있다.
서쪽에 위치한 탑은 이중기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층과 하층에는 중석과 갑석을 갖추고 있다. 하층과 상층의 중석에는 각면에 탱주를 새겼으며 갑석 및 탑신석과 옥개석의 형태는 동쪽 탑과 같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철제 찰주의 원형만이 남아 있다.
이 서탑은 1957년에 해체 보수할 때 1층 탑신석 윗면의 사리공에서 99개의 소탑을 비롯한 사리 장치가 발견된 바가 있다.
동화사 대구도학동 부도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부도는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아래받침돌과 가운데받침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윗받침돌은 별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큼직한 연꽃무늬를 소박한 솜씨로 둘러 놓았다.
동화사 부도군
동화사 내 속칭 『부도밭』에는 현재 10기 부도가 남아 있다. 이 부도군은 대체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형태도 종형과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는 부도 등 다양하다. 성암당해정대사탑(聖岩堂海淨大師塔)(1839), 제월당대사탑(霽月堂大師塔)(1927), 기성대사탑箕城大師塔)(1764), 성임당축존대사탑(性任堂竺尊大師塔)(1700), 고운당부도(孤雲堂浮屠)(1676), 함우당부도(涵宇堂浮屠)(1720), 상봉정원대사탑(霜峯淨源大師塔)(1709), 계영당극린대사탑(桂影堂克麟大師塔 )(1692), 고한당부도(孤閑堂浮屠)(조성연대미상) 일명 부도(逸名 浮屠) 등이다. 부도의 석재는 대부분 화강암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동화사염불암청석탑
동화사 부도암부도
부도암은 동화사에서 팔공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암자 동쪽으로 멀찍이 떨어진 산 기슭에 이 부도가 놓여 있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신을 화장한 후 나오는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인 이 부도는 현재 무너진 상태로 있는데, 3단을 이루는 기단(基壇)과 탑몸돌,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서, 원형을 이루는 맨 아래와 윗부분에는 연꽃을 새겨 두고, 8각을 이루는 가운데에는 모서리마다 배흘림 모양의 기둥을 본떠 새겨 놓았다.
탑몸돌 역시 여덟 모서리가 기단에서 보이던 얕은 배흘림의 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을 뚜렷이 표현해 놓았고, 각 선이 미끄러지는 끄트머리에 덩쿨무늬를 한 꽃조각을 돌출되게 조각하였다.
8각을 이루는 모습의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유행하던 것이나, 이 부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록 꼭대기의 머리장식도 사라지고 무너져 있긴 하나, 각 부분들은 대체로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인악당은 조선 시대 고승 인악 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이다. 인악대사비는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으로 조각한 것이 다른 비석들과는 대별된다. 이것은 동화사가 봉황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문은 1808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안동 김씨 김희순이 짓고 썼는데 와희지풍의 필체로 서법이 매우 유려하다.
동화사 목조약사여래좌상복장전적
대구 동화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중 약사여래의 복장 전적 7종이다. 대웅전은 1725년에 중창하여 1727년(영조 3)에 삼세불좌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고 조성과 동시에 복장불사가 이루어져 그 발원문이 각각 삼세불에서 수습되었다. 석가모니불에는 12종의 자료, 아미타불에는 6종이 복장되었으며, 약사불에 32종으로 가장 많이 복장되었다.
그 중 간기가 있는 것은 1417년(태종 17)부터 1725년(영조 1)사이의 것이고, 간행기록이 없는 것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에 해당하며 약사불이 조성된 이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약사여래 복장 전적 중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제4~7은 1417년 (태종 17)에 함양군부인(咸陽郡夫人) 박씨 등이 먼저 돌아간 부모의 천도를 위하여 인출한 4부 중의 1부이다.
권4 앞에 실린 변상도의 좌단에는 정씨가 죽은 남편 왕씨의 초생정토(超生淨土)를 기원하기 위하여 화공을 사서 변상도를 그리고 이를 판각 유통시킨다는 지기(識記)가 있어서 이 변상도의 조성경위를 알려준다. 이는 조선 초기 민간의 불교신앙에 대한 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자료가 된다.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은 발문과 묵서지기에 의하면 1474년(성종 5)에 견성사(堅城寺)에서 간행한 경판에서 예종의 계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한씨(韓氏)가 조모인 신숙화의 처 김씨의 영가천도를 위하여 1481년(성종 12)에 인출한 7부 중의 1건이다. 조선 초기 불교사연구는 물론 인출 시기와 동기, 부수가 분명한 자료라는 면에서 출판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정원본 권제1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주본 권제25?권제63은 24행17자로 6행씩 절첩된 折帖裝(절첩장장)으로 해인사 사간판(寺刊板)이다. 이 화엄경판은 고려대장경을 새길 때 저본(底本)으로 사용되었던 판이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속하는 12~13세기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상지은니무상의경 권하(橡紙銀泥無上依經卷下)와 상지은니대보적경 권제94(橡紙銀泥大寶積經卷第94)는 상지에 필서한 14세기의 은사경(銀寫經)으로서 고려말 사경연구의 자료가 된다.
역대조사
인악대사
인악대사(1746~1796)의 俗姓(속성)은 李氏, 本貫(본관)은 星山(성산), 諱(휘)는 義沼(의소), 字(자)는 子宜(자의), 法號(법호)를 仁嶽(인악)이라 하였다.
고려 司空(사공) 星山府院君(성산부원군) 能一(능일)의 23世孫(세손)이며 父는 徽澄(휘징)이고 母(모)는 達成(달성) 徐氏(서씨)이다. 1746년(영조 22)에 達成(달성) 인흥촌(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인흥촌, 고려때 유명한 仁興寺(인흥사)가 있던 곳)에서 태어났다.
인악대사는 8살에 鄕學(향학)에 들어가 小學(소학)을 세번 읽고 다 외워버리니 신동이라는 소문이 인근 고을까지 났다. 15세에 詩經(시경), 書經(서경), 易經(역경)을 다 읽고 글을 잘지어 천재라 했다. 18세에 龍淵寺(용연사)의 嘉善(가선) 軒公(헌공)에게서 僧(승)이 되고, 碧峰和尙(벽봉화상)에게서 具足戒(구족계)를 받았으며, 金剛經(금강경), 華嚴經(화엄경)등 大乘經(대승경)을 배웠다.
西岳(서악). 泓宥(홍유), 聾巖(농암)등 諸名師(제명사)에게서 修學(수학), 1768년(영조 44) 벽봉화상에게 돌아와 法(법)을 이어받고 講堂(강당)을 열어 설법했다. 또 靈源庵(영원암)으로 가서 華巖(화암)의 宗師(종사) 雲坡(운파)에게서 華巖經(화암경)과 禪門(선문)을 배운 다음 비슬산, 八公山(팔공산), 鷄龍山(계룡산), 佛靈山(불영산) 등의 산을 遊歷(유력)하며 佛經(불경)을 강의했으며 동화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
1790년(정조 14)에 正祖가 그 아비의 願堂(원당)으로 水原(수원) 龍珠寺(용주사)가 창건될 떄 證師(증사)가 되어 <佛服藏願文慶讚疏(불복장원문경찬소)>와 <龍珠寺祭神將文(용주사제신장문)>을 지으니 정조가 그 글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한다.
1796년(정조 20)에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향년 51세, 법랍 34세로 입적한 비는 지금 동화사에 세워져 있으며 저서로는 ≪인악집(仁嶽集)≫, ≪화엄사기(華嚴私記)≫, ≪금강사기(金剛私記)≫,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등이 있다.
사명대사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풍천 임씨이고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며 경삼남도 밀양출신으로 수성(수성)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持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됭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전직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1593년 (선조 26) 3월, 대사는 관군을 도와 왜병을 크게 무찌른다.
선조는 대사에게 선교양종판사 직을 제수하고 또 절충장군 호분위 상호군의 교지를 내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대마도로 건너가 덕천가강과 화친을 맺고 붙잡혀 갔던 동포 3천여명을 구해오기도 했다. 스님은 그후 해인사에서 병으로 요양중 1610년(광해군 2)에 대중들에게 설법을 마치고 가부좌를 한채 열반에 드니 세속나이 67세, 법랍 51하(하)였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며, 광해군 10년(1618)대사의 출생지인 재약사(오늘의 표충사)에 사당이 세워지고 표충(表忠)이란 편액이 하사 되었다.
용암혜언
스님의 법명은 혜언(慧彦)이고 법호는 용암이며 성씨는 조씨이다. 율봉청고(栗峰菁皐)의 사법제자이고 월송성일과 법형제이며 청봉거안의 손자뻘 법제자이다.
용암스님은 조선조 정조 7년(1783),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는데 언제 어느적로 가서 출가했는지는 전해지지않고 다만 어린시적 율봉 청봉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만 전해온다.
스님의 교화활동은 동쪽으로 통도사 해인사, 서쪽으로 구월산 묘향산 남쪽으로 조계산 지리산, 북쪽으로 금강산 오대산, 중부의 삼각산 용문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고루 미쳤다. 스승 율봉 스님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기도 후 목소리가 좋아져 설법을 잘하게 되었고 스님의 제자인 포운윤경 대운성기 스님도 역시 스승의 가풍을 이어 받아 청아한 목소리로 설법을 잘하여 이후 설법의 한 저형을 이루게 된다.
용암 스님은 법회와 제자양성에 주력하다 생을 마친다.
확실함 기록은 없으나 대흥사에서 입적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퇴은여훈
스님의 법명은 여훈(如訓)이고 퇴은은 법호이며 머물던 거실의 현판은 향적정사(香積精舍)이다. 금강산 표훈사 정양암에 퇴은 스님이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친 거실이 있으니 바로 향적사이다.
스님은 영암취학(靈庵就學)스님 등과 더불어 금강산 내원통암 및 나한전을 중수하기도 했다. 스님은 인품이 고매하고 학덕이 높아 가르침을 청하는 스님, 신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스님의 문하에는 글을 배우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났고 삼매에 들어 화두를 참구하는 선수행자들이 언제나 선방을 메웠다.
스님의 출생 입적 연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수없다. 다만 180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로 추정할 뿐이다
회암심훈
스님의 법명은 심훈(心訓)이고 회암(悔庵)은 법호이다.
성은 금성(錦城) 박(朴)씨로서 옥주(沃州) 의신(義新)지역 출신이다.
옥주는 전남 진도의 옛 이름으로서 토지가 비옥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전한다.진도에는 죽림사(竹林寺), 쌍계사(雙溪寺) 등의 고찰이 있는데 회암스님은 15세 되던 해에 의신면 첨찰산(尖察山) 쌍계사로 들어가 평철동지(平哲同知) 스님 문하에서 머리 깍고 스님이 되었다. 이 때가 조선 순조 23년(1823)이다.
스님은 뒷날 하의(荷衣)대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이어 화담(華潭)선사 조실에 들어가 향불을 지피고 스승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 그리고 당시 선교종장(禪敎宗匠)으로 이름을 떨치던 초의(草衣)율사에게서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회암스님은 당시 교계에 도예(道譽)를 덜치던 하의, 하담, 초의 등 여러 선지식들로부터 구족계, 보살계를 받고 법맥을 이었으며 또한 경학을 공부하였다. 스님은 조선 순조 8년(1808)에 태어나 고종 24년(1887) 2월 6일 해남 두륜산 대흥사 심적암(深寂庵)에서 입적하니 나이 80이요, 승년(僧年) 65년이었다.
회암스님은 화담, 인곡(仁谷) 등 당대의 명강백들로부터 경학을 공부하였으며 불갑사(佛甲寺), 정방사(井旁寺), 은적사(隱跡寺) 대둔사, 대흥사, 미황사의 미타암, 보림사의 내원암, 송광사의 삼일암, 선암사의 칠전암(七殿庵) 등의 명찰에 두루 주석하여싿. 스님은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에 힘쓴 결과 세 가지 관법(三觀)과 5가(家)의 종풍을 증득하였으며 세속적 삶을 초탈하여 마음 부처님(心佛)을 정성스레 모실 수 있게 되었다.
회암스님은 간성(杆城)의 만일회(萬日會) 에 동참하고 순천 송광사 수선결사(修禪結社)에 참여하였으며 대흥사 무량회(無量會)에 참석하였고 장춘골(長春洞)의 무량 염불법회에도 동참하는 등 염불 수선에 힘썼다. 스님이 참선 염불에 몰입하여 마침내 망아(忘我)의 경지에 들어가 자연과 동화되기에 이르자 비로소 나무들은 기뻐하며 영화로운 빛을 띠었고 냇물은 졸졸 흐르는 것이었다. 스님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다만 삼매의 경지에서 존재를 잊은 채 정진할 뿐 오래 살기도 원치않고 부처님 나라에 왕생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회암스님은 이렇게 출가 이래 경학 공부와 참선 염불에 정진하다가 부처님의 열반을 본받고 싶었던 듯 산중 생활 635년 만인 80세에 담담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경운(敬雲) 등 21명이고 선법(禪法)을 전해받은 제자는 스님과 신도를 망라하여 30명이다.
용암체조
조선 후기의 스님으로 호는 용암(龍巖)이다. 성은 정(鄭)씨로 전남 장성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설악산에 들어가 출가했다. 지홈(智軟)에게 계를 받고, 일암 정이(日魔 精願)밑에서 내외교전(內外敎典)을 공부했다. 그 뒤 남북방의 여러 종사를 참방하여 식견을 넓히고 돌아오자, 정이가 자신이 거주하던 내원암(內院암)을 맡기고 법을 전했다.
이때부터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만년에 문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조용히 수도했다. 보시를 즐겼으며, 글을 잘하여 시문 약간 편을 남겼다. 1779년(정조 3) 나이 66세로 입적했다. 다비하여 영골(靈骨)을 얻었으며, 부도를 조성하여 안치했다. 10년 뒤 세자부(世子傅) 이복원(李福源)의 글을 받아 설악산 내원암에 비를 세웠다.
상승스님
고려 중기의 스님으로 승병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靑)이 서경(西京)을 점거하고 난을 일으켰을 때, 군대에 들어가 도원수 김부식(金富軾)을 따라 승려 55인과 함께 종군하면서 반란군을 정벌했다고 한다. 김부식이 토성을 쌓고 공격하였는데 적의 병사가 밤에 나와 전군(前軍)의 영문을 침범했을 때 이에 스님이 도끼를 들고 역습하여 10여명을 무찔렀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관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으며, 적군이 도망쳐 성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보조스님
고려 중기의 스님으로 승병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靑)이 서경(西京)을 점거하고 난을 일으켰을 때, 군대에 들어가 도원수 김부식(金富軾)을 따라 승려 55인과 함께 종군하면서 반란군을 정벌했다고 한다.
김부식이 토성을 쌓고 공격하였는데 적의 병사가 밤에 나와 전군(前軍)의 영문을 침범했을 때 이에 스님이 도끼를 들고 역습하여 10여명르 무찔렀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관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으며, 적군이 도망쳐 성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영허
대웅전이란 현판은 정확하게 누구의 글씨인지 표시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200여년전의 기성대사(1639~1764)의 필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화사에는 기성대사의 영상을 모신 영정각이 있는데 이절에 소장되어 있는 <심지왕사행적기>에는 기성스님이 서문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기성스님의 흔적은 칠곡 송림사의 <기성대사비명>이 있는 비각, 은해사의 기성대사의 행적이 있는 사적비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동화사, 송림사, 은해사 등 팔공산을 중심으로 하는 인근 일대의 각 사찰의 강사로 있었던 대선사임을 짐직할 수 있는데 이 대선사가 이런 현판 글을 남겼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동화사의 일주문 현판 ‘팔공산동화사봉황문’ 역시 기성대사의 필적으로 짐작된다. 동화사 대웅전 정면의 주련으로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문소유아진견> 이란 장서의 찬불송은 석제 서병오의 필적이다.
대은낭오
스님의 법명은 낭오(郎旿)이고 대은은 법호이며 성씨는 배씨로서 전남 영암출신이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태어나 15세 때 영암 월출산으로 출가하여 금담(金潭)선사의 문하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된다. 대은 스님은 당대의 선장 학장들 문하에서 불교학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한편 선의 실체를 철저히 탐구하였다. 많은 선지식들을 찾아 다니며 탁마한 끝에 스님은 염화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등을 이어받는 한편 개당 설법을 통해 후학을 지도했다. 대은 스님은 조선 헌종 7년(1841) 윤 3월 25일, 두륜산 만일암에서 설법을 끝낸뒤 앉은채로 담담하게 입적했다. 이때 나이 62세, 법랍 47년이었다.
호월관례
스님의 법명은 관례(寬禮)이고 호월은 법호이며 성은 김씨로 전남 완도 출신이다. 어릴떄 해남 두륜산으로 들어가 보해지영(普海志英) 선사에게서 머리깍고 스님이 된 이후 신월호윤(信月好潤) 선사에게서 사미계를 받았으며 범해각안(梵海覺岸) 강백에게서 비구계 보살계를 받았다.
호월스님은 오랫동안 절안의 각종 업무를 맡아 보았고 수승 주지의 직책을 수임하였으며 자헌대부도총섭의 직첩을 제수받았다. 호월스님은 선대 조사들의 법맥을 계승하니 연담조사의 5대요, 치암조사의 2대이며, 태고스님의 17대 제자가 된다. 스님에게 제자가 두명이 있는데 능오 묘연 스님이 그들이다. 출생 및 입적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호암스님
호암스님(1664~1738)은 조선 중기의 스님이다.
호는 호암(護巖)이고 1664년(현종 5) 3월 12일에 전남 순천군 쌍암면 죽림동에서 태어났으며 언제 출가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출가하여 순천 수선사(송광사)에서 지냈다고 한다. 1698년(숙종 24)부터 8년 동안 선암사를 중창하고 불상과 탱화를 조성하며 성심으로 선암사를 보호하므로 호암자(護庵子)라 불렀다고 한다.
침굉 현변(枕胱 懸辯)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날마다 경전을 공부하며 계율을 엄하게 지켰다고 한다. 성품이 강직하여 공사의 손님에게 마혜(摩鞋)를 선물하던 폐습과 스님이 관리에게 절하던 풍습을 없앴다고 한다. 또한 호족(毫族)이 사전(寺田)을 사유하는 것을 막아 산문을 부흥시키기도 하였다.
산문 밖 두 곳에 돌다리를 세웟고 부사군 단교리(벌교)의 큰 강에도 돌다리를 세웟으므로 동리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1736년(영조 12) 팔도도총섭이 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승군대장에 임명되어 북한산성에 부임하였는데 이 때 상부에 고하여 승려가 무역에 종사하는 것을 그치게 하고, 청규(淸規)를 만들어 승려들의 규율을 바로 잡았다고 전해진다.1738년(영조 14) 2월 2일 나이 75세로 입적하였다.
석우스님
1875년 경남 의령 출생으로 설총의 45세손이다.
스님은 1912년 장안사에서 연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유점사의 차선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사제인 상월 스님과 20여년간 영원암에서 수행을 했고, 1932년 지리산 칠불사로 옮겨 수도에 정진했다.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며 1958년 세수 84세, 법랍 47년으로 동화사에서 입적하였다.
조실
진제스님
경남 남해군 해관암(海觀庵)에서 조계종 초대종정이셨던 설석우(薛石友)선사를 친견한 것이 출가의 인연이 되셨습니다. 석우선사께서 스님을 보시더니,
"세상의 생활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값진 생활이 있으니, 그대가 한 번 해보지 않겠는가?"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리 값진 생활입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네.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수행의 길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스님께서는 몇 일간 해관암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유심히 살펴보시게 되었는데 세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청정한 수행생활을 하는 스님들의 삶에 큰 환희를 느껴 그길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허락을 얻은 후 출가하시게 되었습니다.
남해의 조그마한 암자에서 시작된 행자 수업(行者修業)은 큰스님 시봉에다가 공양주 소임, 나무를 해오고 채소를 가꾸는 등 해야 할 일들이 종일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한 행자생활을 6∼7개월 한 뒤 하안거(夏安居) 해제일(解制日)이 되어 제방 선방에 다니면서 10여 년 간 수행해오던 선객 스님 몇 분이 석우선사께 인사드리러 왔다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석우선사께서는,
"오늘 내가 자네들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 보게. 옛날 중국의 삼한(三漢)시절에는 글자 운자(韻字) 하나를 잘 놓음으로 인해서 과거에 급제하던 때가 있었네. 이것은 그 당시 시험에 나왔던 문제인데, '일출동방대소(日出東方大笑), 즉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크게 웃는 모습이 어떠하더라.'하는 이 글귀에 운자 하나를 놓아보게."하시고는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나 '아(我)'자를 놓아서 재상에 등용되었는데 자네들은 어떤 자(字)를 놓아보겠는가?"
선객 스님들 중에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자 석우선사께서는 신출내기 행자였던 진제스님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네가 한 마디 일러보아라."이에 진제스님께서 대뜸 답하셨습니다.
"저는 없을 '무(無)'자를 놓겠습니다."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올라 밝은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지만 그 모습에는 호리(豪釐)의 상(相)도 없다는 뜻으로 '무(無)'자를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석우선사께서는,
"행자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시며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해관암에서 열달 가량 지내신 뒤 석우선사께서 해인사 선방 조실스님으로 가시게 되자 진제스님 역시 해인사로 가서 사미계를 받고 강원(講院)에서 경전(經典)을 익히셨습니다. 그 후 다시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동화사로 가시게 되었던 석우선사의 부름을 받고 동화사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빈 토굴을 발견하고 대중스님 몇분과 함께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고 돌아오신 일이 있는데, 석우선사께서는 당장에,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온갖 것을 다 하려고 든다."
하시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참학의지(參學意志)로 가득 차있던 진제스님의 심중을 간파하시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주셨습니다.
그 후 진제스님께서는 동화사를 떠나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에 오르셨는데, 그 때가 스님의 세수 24세였습니다. 처음 머무르셨던 곳은 태백산에 위치한 동암(東庵)이라는 한 작은 암자였습니다.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단신(單身)으로 각고정진(刻苦精進)해 보겠다는 각오로 그 빈 암자를 택하여 자잘한 피감자로 하루 세 끼를 때우면서 정진생활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두 달을 지내셨는데 마침 그 밑에 있는 큰 절 각화사의 주지를 맡게 된 도반스님이 와서 보고는 하루 세 끼 끼니 꺼리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어려운 생활을 걱정하여 함께 내려가자고 자꾸만 청하는 바람에 다시 바랑을 짊어지고 선산 도리사(桃李寺)로 옮겨가셨습니다. 도리사에서 일고여덟분의 수좌스님들과 여법(如法)히 정진하시면서 동안거 한 철을 나시게 되었습니다.
진제스님께서는 견성(見性)해야겠다는 일념에 마음이 달아, 오로지 정진에만 힘을 쏟으셨습니다. 저녁 9시에 방선(放禪)하면 대중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리셨다가 살며시 혼자 일어나 두어시간 더 정진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빈틈없는 수행생활을 하신지 두달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참선 도중에 반짝 떠오르는 조그만 지견(知見)을 가지고서 알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참구하시던 것을 다 놓아버리고서는 해제일만 기다리셨는데 해제하면 가서 점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석우선사께서 열반(涅槃)에 드셨다는 부고가 날아와서 동화사로 가 다비(茶毘)를 치르셨습니다. 그 후 경남 월내(月內)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주석하시고 계시던 향곡(香谷)선사를 찾아갔습니다.
향곡선사는 대뜸,
"일러도 삼십방(三十棒)이요 이르지 못해도 삼십방이니, 어떻게 하려느냐?"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시자 향곡선사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남전(南泉)선사의 참묘(斬猫)법문에 조주(趙州)선사께서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가신 것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아라."
스님께서는 그 물음에도 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알았다'고 자신만만해 있었는데 그만 여지없이 방망이를 맞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스님께서도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신(信)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때라 자신의 생각을 쉽게 놓아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방(諸方)을 행각(行脚)하시면서 당시 선지식으로 이름이 나있던 고승(高僧)들을 거의 모두 참방(參訪) 해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선지식은 아니라고 하시지만, 또 어느 선지식은 긍정하는 듯이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모두 한결같이 불긍(不肯)했었더라면 직하(直下)에 '알았다'는 망념(妄念)을 놓아버리시고 다시 참학인(參學人)의 자세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탓에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하는 잘못된 인식이 박혀 2년여 세월을 어정쩡하게 허비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다가 26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冬安居) 정진을 하시던 어느 날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마루 끝에 앉아 자신을 반조(返照)해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인(古人)들과 같이 당당하여 낱낱의 법문을 확연명백하게 아는가? 누가와서 묻는다고 하더라도 의기당당(意氣堂堂)하고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답을 할 수 있는 그러한 혜안(慧眼)이 열렸는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대답은 여지없이 부정이었습니다.
'도둑을 잘못알아 자식으로 삼고 돌덩어리를 금으로 삼는다면 결국 내 손해가 아니겠는가?'
하며 거짓에 사로잡혀 허송세월 해왔던 자신을 반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잘못된 소견(所見)을 놓아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리라는 결심이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밝은 선지식을 의지하여 공부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분명히 갖게 되었습니다.
선사께서 제방 선지식들을 참방(參訪)하시던 과정에서 향곡선사만은 제방의 다른 선지식들이 쓰지 못하는 '언하(言下)에 흑백을 분명히 가려내는 법(法)'을 쓰시던 것을 보셨기 때문에 향곡선사에게 의지하여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하시기로 마음을 정하고 해제하자마자 향곡선사 회상을 찾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선사께 예배드리며,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하려고 왔습니다."하시니 향곡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심오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도(大道)를 네가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느냐?"
"신명(身命)을 다 바쳐서 해보겠습니다."라고 진제스님이 대답하시니 향곡선사께서 새로 '향엄상수화' 화두를 주셨습니다.
※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나무 위에서 나무가지를 물고 손으로 가지를 잡거나 발로 가지를 밟지도 않고 매달려 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수십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해야겠느냐?
이 화두를 들고 2년여 동안 신고(辛苦)하셨습니다. 결제와 해제를 상관하지 않고 일체 산문출입(山門出入)을 하지 않으시면서 화두 참구 외에는 그 어떤한 것도 용납하지 않고 궁구(窮究)하셨던 것입니다.
화두일념으로 두문불출하고 정진을 하셨는데, 28세 때 되던 해 가을 드디어 '향엄상수화' 화두의 관문을 뚫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종전의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미(迷)함이 걷혀지고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문답의 길이 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오도송을 지어 향곡선사께 바치시기를,
這 箇 柱 杖 幾 人 會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사람이나 알꼬
三 世 諸 佛 總 不 識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하누나
一 條 柱 杖 化 金 龍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應 化 無 邊 任 自 在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이에 향곡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용이 홀연히 금시조(金翅鳥)를 만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몸을 굽혀 (머리를)가슴에다 대고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屈節當胸退身三步]."라고 답을 하자 향곡선사께서는,
"옳고 옳다."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송고백측(頌古百則)으로 유명한 설두(雪竇)선사께서도 다른 공안(公案)에는 다 확연명백하셨으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20년을 참구하셨는데, 진제스님께서도 이 공안에는 막히셨습니다.
※ 일면불 월면불(一面佛月面佛) : 하루는 마조 선사에게 원주(院主)가 아침에 문안(問安)을 드리며, “밤새 존후(尊候)가 어떠하십니까?” 하니, 마조 선사가 “일면불(一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공안(公案). 일면불은 수명이 1천8백세지만 월면불은 불과 일일일야(一日一夜)라고 한다.그리하여 이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구하여 5년 여 동안 온갖 전력(全力)을 다 쏟으시다가 해결해 내셨습니다. 마침내 고인들께서 중중(重重)으로 베풀어 놓으신 온갖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림이 없이 상통되셨습니다.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一 棒 打 倒 毘 盧 頂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一 喝 抹 却 千 萬 則 벽력같은 일 할에 천만 갈등 흔적없네
二 間 茅 庵 伸 脚 臥 두 칸 토굴에 다리펴고 누웠으니
海 上 淸 風 萬 古 新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그후 선사의 세수 33세이던 1967년 하안거 해제법회 때 월내 묘관음사 법당에서 향곡선사와 법거량이 있었습니다. 향곡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默坐)하고 계시는데 진제스님께서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부디 일러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이에 진제스님께서,"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하시니 향곡선사께서는,"육육은 삼십육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진제스님께서 예배를 드리고 물러가자, 향곡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셔서 조실방(祖室房)으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진제스님께서 다시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眼目)입니까?"하니 향곡선사께서 이르시기를,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師姑元來女人做]."하셨습니다. 그러자 진제스님께서,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하시니 향곡선사께서 재차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진제스님께서 이렇게 답하자, 향곡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향곡선사께서는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으로 부촉(付囑)하고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습니다.
付 眞 際 法 遠 丈 室 진제법원장실에 부치노라
佛 祖 大 活 句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無 傳 亦 無 受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今 付 活 句 時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收 放 任 自 在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그후 1971년에 해운대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장수산 기슭에 해운정사(海雲精寺)를 창건하시고 상·하선원(上·下禪院)을 개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최상의 진리인 선법(禪法)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시변(市邊)에다가 선원을 세워 선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주창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0년 이상 회상(會上)을 열고 계시는 것은 지음자(知音者)를 만나 부처님의 최상승법인 임제정맥의 법등을 부촉하시기 위함입니다.
첫댓글 성지순례 답사 가실때 저두 데려가주세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