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너는 매사에 너무 기승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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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북선매일신문 기자 시절의 구상. |
구상은 스무 살 전후해서 당시 인도적인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세 가지 의식 혁명을 치르기로 작정했다. 첫째는 반상 관념이요, 둘째는 지방 관념이요, 셋째는 남녀차별 관념이었다.
집안 내력이나 고향을 숨기고서, 자신을 원산 소농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닌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구상의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가족들은 저마다 당부를 했다.
중풍으로 4년 동안 자리보전을 하다가 1940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너는 매사에 너무 기승(氣勝)을 하지 말라! 아무리 의롭고 바른 일이라도 기승을 하면 위해를 입느니라!”라는 유훈을 남기셨다.
어머니도 매양 “나는 네가 세상에서 잘났다는 소리를 듣느니보다 그저 수굿이 살아 주는 게 소원이다”라고 애원에 가까운 당부를 하셨다.
당시에는 이런 당부들을 자기 안주의 운명관이라고 여겨 저항감마저 일었지만 신부가 된 형(구대준 가브리엘)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을 인용해 보낸 글을 훗날 구상은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내려 주신 모든 은혜를 도로 거두어 도둑들에게 나누어 주셨더라면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감사를 받으실 것을….”
카페 ‘에뜨랑제’의 백러시아계 일본 여인 유미짱을 향한 연모도 있었지만, 대학 생활이라는 젊음의 활기를 맛보지 못하고 1941년 일본에서 귀국한 구상은 집에 틀어박혀 그의 삶의 의의라고 할 시 작업에 미칠 듯이 정진했다.
주변에서는 서울집 아무개가 주의를 하다가 정신이상이 걸렸다며 폐인 취급을 하였다.
1942년 봄,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라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어려웠던 구상은,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일본인의 소개로 함흥에 있는 북선매일신문사에 들어가
“목숨을 부지하려는 일념과/ 펜을 잡는다는 매혹에/ 식민지 어용 신문의 기자가 되어/ 용왕 앞의 토끼처럼 쓸개는 떼어놓고/ 날마다 성전송과 공출독려문을 써댔다.”
구상이 정신적 가사(假死) 상태였다고 표현한 이 기자 생활은 폐결핵으로 눕게 됨으로써 끝이 난다.
1944년 봄 폐결핵의 첫 발병으로 구상은 마식령산맥 고개 너머에 있는 수도원 산장에서 요양하며 ‘소야곡’ 등의 시를 썼다. 형이 주임 신부로 있는 흥남본당에서 경영하던 대건의원의 여의사 서영옥(데레사)씨와 약혼을 한 때였다.
건강을 이유로 결혼 사절의 글을 보냈음에도 수십 리 마식령 고갯길을 걸어서 찾아온 약혼녀와 우여곡절 끝에,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하고/ 그레고리안 합창이 울려퍼지는/ 십자가 제단 앞에서” 혼인성사로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1945년 8월 15일, “망국의 쓰라림과 그 설움을 맛보지 않고서/ 이날의 우리의 환희를 어찌 알리야?//…나는 역사의 신 앞에/ 비로소 한 번 감사의 합장을 한다”고 감격했던 광복은, 구상의 인생에 선물과 수난을 동시에 가져왔다.
‘주의자 구상, 폐인 구상’은 선견자요 혁명가로 여겨져, 인민투표에 향리에서 최고 득점자가 되어 신생 조국의 역군으로 추천을 받았다. 원산여자사범학교 국어 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교원직업동맹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강토는 두 동강이 나고 구상은 ‘반동 인텔리겐치아’라는 명패가 붙은 채 다시 두문불출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46년 원산의 문학 동인들과 발간한 시집 「응향」으로 말미암아 필화를 입게 된다. 공산당 치하에서 구상은 원산문학가동맹으로부터 광복 1주년 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제출해 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표지 장정을 화가 이중섭이 맡은 이 시집 「응향」이 출간되자, 그해 10월 북조선 문화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에서 시집을 규탄하는 결정서를 발표하고 검열 사업을 벌이기로 공고하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시집 「응향」은 북조선 현실에 대한 반동적 경향을 가졌다”며 작품과 작가들의 사상 검토와 자아비판을 하라는 것이었다. 작품 가운데에서도 구상의 시 세 편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광복을 맞은 우리 현실 상황을 묘사한 그의 시는, 소련군이 덮치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을 까마귀 나는 불길한 아침에 비유한 것이었다.
“동이 트는 하늘에/ 까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으로 시작하는 시
‘여명도’를 두고, 좌익 평론가들을 동원해 퇴폐주의적이요,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라는 등의 일곱 가지 수식어를 죄목에 얹은 것이다.
그들 눈에는 구상의 시 자체가 예술지상주의적이요 출신 성분이나 행동거지가 반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상은 당시 북한 문단의 거물들로 구성된 검열원들이 와서 단죄를 하고 자아비판을 하게 되는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 남하를 결의하고 칠순 노모와 신혼인 아내, 형님 신부를 남겨 둔 채 고향을 떠났다.
38선 부근 연천에서 보안서원에 붙들려 불기 없는 싸늘한 유치장에 갇혔다가 탈출을 감행하여 1947년 2월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구상은 문학 행위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다시 학구의 길을 결의하고, 교회를 통해 북경 보인대학연구원에 소개를 받아 ‘동서 종교사상의 비교 연구’를 과제로 삼고 장도에 오르기로 선편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그 일주일 전에 중공에게 청도가 함락을 당하여 북경행에 실패, 자금성으로 달리던 풋 꿈은 깨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시집 「응향」 사건이 남로당 문학가동맹의 기관지에 대서특필되자, 김동리를 비롯한 남한의 민족진영 문단에서 반박하고 나서고,
구상이 소설가 최태웅이 운영하던 「해동공론」에 사건 경위를 공포하고, 우익 진영의 문학지인 「백민」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서울 문단에 입참을 하게 되었다.
이 필화 사건으로 구상은 문학적 이념이나 자세에서 엄청난 시련을 일찌감치 치름으로써 문학 본령에 일관하려는 지향을 견고히 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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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상이 스승으로 모신 공초 오상순의 묘에서(우측 사진). 앞줄 왼쪽이 구상이다. |
“역사의 격랑 위에 시대의 폭우를 맞으며 한켠으로 기울어진 배” 같던 조국, 이 땅의 사공들이 모조리 나서 군중들에게 에워싸여 아우성이었지만, 구상은 피안을 향한 뱃전에 까까중머리를 하고 홀로 앉아 줄담배를 피우던 노시인을 찾는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며 손 내밀던 그는, 구상이 ‘시를 체현한 구도 시인’으로 칭송한 공초 오상순이었다. 구상은 공초를 스승으로 모시고 명동의 술집 무궁원에 모여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대화의 향연을 벌였다.
서울에서 구상의 첫 직장은 이승만 정치노선의 부인단체인 대한독립촉성부인회의 기관지 「부인신보」였다. 20대의 구상은 문화부장을 맡아 모윤숙, 임옥인 등 여류 문인들과 일을 하며 이승만을 가까이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일 년도 채 못 가 또다시 결핵이 재발해 눕게 된다. 병과 지독한 가난에 몰려 있던 구상은 뒤쫓아 남하한 아내의 주선으로 마산 교통요양소에서, 부인은 의사로 자신은 환자로 10개월을 정양한다.
이즈음 그에게 소생의 약수가 된 것은 첫 아들 홍의 탄생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남쪽 반동강에다 UN이 탄생시킨 대한민국, 태극의 깃발이 게양되자 구상은 빌면서 다짐했다. “이 나라 아픔이 나의 아픔이기를!”
이런 와중에 이 땅의 풍류도의 재건을 선언하고 나선 이가 있었다. 요양소 시절 “해당화 같은 피를 쏟으며 고독하게 쓰러진 시인 구상을 구하자”며 모금을 해 준 선배인 진주의 시인 파성 설창수였다.
1949년 음력 10월 3일, 나라 안의 예술가들이 진주에 모여 개천예술제를 열었다. 촉석루 뒷산에서 고천제를 지낸 뒤 예술 경연을 벌이고, 홍등가에서 주연으로 밤을 지새웠다.
구상의 무수한 실태 가운데, 명기 순애의 머리 댕기를 풀어 중절모에다 띠 대신 두르고 다닌 일과 술에 취해 의곡사 불상 앞에 사추리를 까고 오줌을 갈긴 일이 훗날까지 회자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