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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0)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2구간 (구미→왜관) ③ 박정희 대통령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독보 32km]▶ 백파
☐ [구미]→ [감천] 방초정- 직지사- 매학정→ 숭선대교→ 구미 산호대교→ [구미대교]→ 동락서원→ 구미공업단지 기념비→ 남구미대교→ 칠곡 낙동강 동안(東岸) 수변공원 길 / 왜관전적기념관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칠곡보]—[낙동강 철교]→ [왜관]
구미공업단지 기념비
☆… 낙동강 동락서원을 둘러보고, 역사의 눈물을 흘리며 구미대교를 건너 와, 다시 직선의 길 위에 섰다. 가을 햇살이 밝고 따스하다. 가로수는 은은히 추색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대로에는 차들이 오고가는데, 제방의 길은 인적이 드물다. 한참을 걷다보니 잘 다듬어진 비석이 하나 서 있다. 화강암 빗돌 전면에, 윤택이 나는 오석(烏石) 판을 붙이고, 그 위에 ‘구미공업단지’ 건설을 기념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詩)가 새겨져 있다. '구미공업단지' 초석의 글씨가 박 대통령 특유의 친필(親筆)이었다.
우리는 금오산 기슭의 / 쓸모없는 낙동강변 350만 평을 / 땀과 슬기 단결과 협조로써 / 전자공업단지를 이룩하였다. / 이것은 / 보람찬 80년대로 향하는 / 하나의 디딤돌 하나의 전진 / 잘 살기를 발돋움하는 / 민족 의지의 표현 꿈의 실현 / 조국 근대화의 우렁찬 고동 / 바꿔놓은 지도 위에 / 찬란한 태양이 영원히 빛나리라. — 구미공업단지 / 1973년 9월 3일 / 대통령 박정희
☆… 내 오늘 여기! 낙동강 강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배경으로 멀리 우뚝 솟은 금오산을 바라보며 당당한 체구의 대통령이 신념에 찬 모습으로 서 있었다. … 대통령은 형형한 눈빛으로 눈앞의 조성된 ‘구미공업단지’를 둘러보며 직접 기념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눈에, ‘기념비’는 살아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기념시’는 바로 그의 칼칼한 금속성 육성이었다. 직접 붓을 들어 ‘구미공업단지’와 '대통령 박정희'를 썼다. 감격 어린 목소리로 공단 완성에 대한 당신의 감회를 밝히고 미래의 번영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 황무지처럼 버려진 땅을 ‘땀과 슬기’, ‘단결과 협조’로 이룩한 공업단지! 그것은 조국근대화의 표상이다. 모든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지혜를 모아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하여 한결같이 전진하자고 호소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목줄을 죄어온 절대빈곤을 극복하는 도약의 발판인 것이다.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의지로 꿈을 실현하는 조국근대화의 신호탄, 우렁찬 고동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지도를 바꾸어 나가는 청사진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앞길에 ‘찬란한 태양’의 서광이 비치기를 기원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발전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6·25전쟁, 그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焦土化)되었고 국민은 처참한 가난 속에 허덕였다. 전후(戰後)의 한국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걸식(乞食)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부황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비일비재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보릿고개’는 참으로 처참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이에 저항하여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다. 장면 내각의 민주당이 집권했지만 무능하고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국민은 배가 고팠다.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이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 120개국 중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72달러, 인도가 52달러로 최하위였고, 당시 공산주의 체제의 북한은 우리보다 많은 86달러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국정지표는 ‘절체절명의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 박정희는 제일 먼저 미국의 원조를 기대했다. 그래서 1963년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의 원조를 구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문전박대, 만나주지 않았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파키스탄이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동남아 국가들이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던 시기, 민주당 출신의 케네디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을 단호히 반대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 동안 해오던 한국에 대한 잉여농산물 원조마저 중단해버린 상태였다. 박정희는 케네디를 만나지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빈손으로 귀국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노심초사(勞心焦思)했다. … 고심 고심한 끝에 상업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하기로 했다. 당시 서독은 ‘라인 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나라였다. 초조한 박정희 대통령은, 앞서 서독 정부가 원하는 광부 300여 명을 파견하였고, 같은 분단국가라는 입장에서 동정 어린 돈을 빌리러 독일로 간 것이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빈곤 타파의 의지와 국가재건의 열정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파독 광부의 성실성에 감복한 의회가 주선하고, 뤼브케 대통령이 초청하여 서독을 국빈 방문했다. 뤼브케 대통령은 전용기가 없는 한국에, 동경과 프랑크푸르트를 운행하는 독일 민항 루프트한자 항공편을 제공했다. 동경에서 서울을 경유하도록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 동경에서 출발한 항공기에, 김포에서 박 대통령 내외분과 일행이 타고, 홍콩-뉴델리-로마를 경유하여 독일 본 공항까지 9,000km가 넘는 장거리를 28시간 동안 비행하여 독일에 날아갔다.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과 독일 국민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964년 12월 8일 에르하르트 수상과의 회담을 통해 1억 5천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약속받았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에르하르트 수상은 독일의 예를 들어, ‘한국이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자동차산업과 철강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에 앞서 박 대통령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우리 광부들이 근무하는 탄광을 찾아가 애국가를 부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광부의 파독은 광부 인력 부족현상을 해소하고자 하는 서독 정부의 의도와 한국의 실업난과 외화 획득을 위해 해외 인력수출을 원했던 한국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조치였다. 지하 1,000m 지열에 숨이 막히는 깊은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들, 국가가 빚을 얻기 위해서 파견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광부들이었다. (그 파독 광부 중에 나의 영강의 친구 박세민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포를 만나고 난 후, 독일의 아우토반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독일방문을 통하여 차관(借款)도 받고 경제발전의 밑그림을 그리는 놀라운 학습을 한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초기 박정희 군사정권은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하여, 1962년부터 야심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당시의 주제어가 ‘조국의 근대화’, ‘국민총화’ 그리고 ‘총력 정진’이었다.
*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은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전력·철강·가스·석유 등의 기간 산업을 확충해 나가며 사회 간접 자본을 충실히 하고자 하였다. 사회간접자본[인프라]은 국민의 경제 활동을 지원해 주고 국가 경제 발전에 기초가 되는 도로, 항만, 철도, 통신 등의 공공시설을 말한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은 식량의 자급자족, 공업화 추진, 수출 증대, 국민 소득 증가, 과학 기술의 발전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년)은 포항제철 건설과 중화학 공장의 건설, 자동차 산업 발전과 수출 증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 한국의 경제발전계획은 미국의 경제학자 얼마 아델만(Irma Adelman, 1930~2017)의 이론을 바탕으로 삼았다. ‘아델만’은 한국에 적합한 수출주도형 모델을 연구·적용하여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다. 그녀는 미국의 존스홉킨스대 교수를 역임하고, 버클리대 교수로 재직했던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
사실 1970년 전후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지속적인 경제개발 5개년 정책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외 차관과 기술 협력을 통해 국가차원의 시멘트 공장, 비료공장을 꾸준히 세우며 수입대체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특히 철도와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등 도로 건설, 발전소 및 송전 시절 건설, 댐 건설 등 국가 기반산업(인프라)을 구축해 나갔다. 당시 필리핀,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 국가에서 경제개발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은 정부의 노력과 더불어, 근로자는 산업 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일하였고, 세계 여러 지역에 진출하여 피와 땀을 흘린 덕분이었다. 기업가는 공장이나 회사를 세워 우리나라의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기술 개발에 노력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 제품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였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근로자, 기업가, 그리고 모든 국민 서로 협력하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자립경제, 조국의 근대화
* [근대화의 대동맥,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 개통]▶
특히 1970년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는 한국 경제 개발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2년 5개월 동안의 공사 끝에 준공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km의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 연인원 892만 명, 장비 165만 대, 공사비 429억 원 등을 투입되었다.
"뻗어가는 고속도로 삼천리는 이웃된다" 경축 아치(사진)에 적힌 표어처럼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양대 지역, 한강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1일 생활권으로 이어주었다. 그리고 항만과 주요도시를 연결함으로써 산업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한편 고속도로 인근 지역의 소득 향상은 물론, 도로건설의 기술 축적으로 해외건설 사업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경인공업지역과 부산·울산 공업지역을 잇는 산업의 대동맥(大動脈)이요 신속한 대량 수송을 통한 국가 발전의 대로(大路)가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이자 가장 높은 지역인 추풍령에 ‘기념비(紀念碑)’를 세웠다. … 충북 옥천에서 이어지는 금강 주변 구간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최대의 난공사 지역으로 타 지역보다 최대 1.8배에 가까운 인력과 비용이 들어간 지역이기도 하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건설장비가 없던 시절의 공사판에 많은 희생자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금강휴게소 산록에는 고속도로 건설에 생명을 바친 77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비(殉職者慰靈碑)’를 세웠다.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1970년부터 일본의 자본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포항제철 설립에 착수했다. 그 결과 수출액이 신장하고 수출주도의 산업화도 병행되었으며, 기간산업도 꾸준히 추진해 나갔다. 경인공단과 구로공단의 노동집약적인 산업, 조립가공형 산업을 육성하였으며, 울산공단을 중심으로 조선, 기계, 중화학공업 또한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1973년 구민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전자산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 [다 같이 잘 살아보겠다고 일어선 ‘새마을 운동’]▶
한편, 자발적인 농촌생활 진흥운동인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고취하여 농촌을 활성화시켜 나가기도 했다. …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지역사회 주민의 자발적이며 자조적인 협동을 통하여, 주민들 스스로가 생활 태도와 정신 자세를 혁신하는 농촌운동으로 출발했다. 그리하여 낙후된 농촌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환경을 발전·개선해나가는 지역사회개발 및 사회혁신운동이었다. 그 지향은 첫째, 정부의 ‘농촌근대화정책’이었다.
1960년대 5·16 군사정변으로 수립된 제3공화국은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한 물자와 낙후한 기술 수준에서, 원조와 차관 등에 의지한 채 농촌을 제외한 도시 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해야 했다. 이러한 편향된 산업 전략을 반성하면서 농촌을 도시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창안한 전략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국제사회에 새마을운동이 훌륭한 농촌개발전략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이를 모델로 받아들이고 있다. 둘째, 새마을운동은 ‘지역균형개발전략’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의 근대화전략은 도시와 농촌 간의 경제적 격차를 야기했고, 이러한 정책을 반성하면서 지역간 균형적 발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였다. 셋째, ‘의식개혁운동’의 하나였다. '하면 된다.'는 신념(信念)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어줌으로써 온 국민에게 자신감을 갖게 한 정신운동이었다.
* [단합된 국민의 총력 정진과 국민적 희생(犧牲)]▶
사실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1960년대 초의 한국의 경제는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참한 굶주림! 선진국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절대 빈곤의 후진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틀을 만들고, 공업 입국, 수출 증대를 통해 국민소득을 높이는 길을 열었다. 대통령의 강력한 추진력과 국민의 단합된 마음이 온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발전의 성공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한강의 기적’, 이면에는 수많은 국민적 희생이 있었다. 「파독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독일에서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다. 그 당시 파독 간호사로 재직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간호사들은 식사 수발, 대소변 받아내기, 시신 닦기 등이 주요 업무였고 무시와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광부는 지하 1000m가 넘는 석탄광산 지열이 뜨거운 막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월남 파병으로 얻은 국가적 이득은 막대했다. 한국은 군대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인력을 보내 도로와 항만, 공장 등을 건설했고 이때로부터 나온 수익으로 이후에 이루게 될 ‘한강의 기적’의 시발점이 되었다. 수출이 수직상승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무기와 여러 가지 장비들을 미국으로부터 전수 받으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철수로 베트남이 공산화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한국이 지원해줬기에 미국은 경제적 원조를 끊지 않았고, 또 주한미군 주둔 협정인 SOFA가 체결되어 베트남 파병으로 여러 가지 보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희생도 컸다. 8년간의 월남전에 투입된 한국군은 연 30만 명, 전쟁 기간 동안 약 5만 명 정도의 군대 규모를 유지했다. 이 가운데 5,000여 명 가까이 전사하거나 실종됐고 7,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건설업의 중동 진출은 해외건설 수주의 획기적인 증대를 통한 국제수지를 크게 개선함은 물론, 1974년 적자로 반전된 무역외수지를 다시 흑자로 바꿔 놓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섭씨 40~50℃를 오르내리는 열사(熱砂)의 벌판에서 흘린, 우리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막대한 해외 자본을 도입하여 수출 주도형 공업 위주 정책을 추구해 온 한국 경제가 원자재 가격 급상승과 세계적 경제 불황 때문에 경제적 파탄과 사회적 혼란이 심각했을 것이다. … 이처럼 한강의 기적은 엄청난 국민적 희생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개발 독재
돌이켜 보면,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 소장은 5·16군사혁명을 주도하여,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고 난 뒤,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 그리고 1967년에 제6대 대통령에 재선되고 나서, 1968년 장기집권을 위하여 ‘3선 개헌’을 획책했다. 결국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초법적 권력 행사를 통해 개헌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갔다. 국가 안보 강화와 경제 발전을 구실로 ‘3선 개헌’을 단행한 것이다. 야당인 신민당과 민주화 운동세력의 격렬한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사당 별관에서 3선 개헌안 국민 투표 법안을 변칙적으로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을 강행하였다. 1972년 급기야 유신헌법으로 영구집권을 기반을 만들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모든 출판, 언론활동을 검열하였고, 단체 활동도 제한하였다. 이런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박정희는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주는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저 유명한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8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다. 이로써 유신정권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때부터 국민적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속적인 경제개발 정책은 성공하여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비슷한 시기에 1차 오일쇼크가 터지며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성장률이 추락했지만 이를 재빠르게 중동에 건설회사 진출과 노동자들을 송출하면서 매년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경제발전을 유지하게 되었다. … 그러나 동시에 상대적 빈곤의 심화(양극화)와 정경유착 등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노동자의 처우 및 인권 문제, 환경오염 문제 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분신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이 시기부터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항거하는 노동계의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
유신정권의 최후
국민들의 반(反) 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실질적이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했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安家)의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서거(逝去)하였다.
아,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그의 일생은 영욕(榮辱)이 점철된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우뚝한 큰 산(山)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번영의 기반을 만든,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다.
요컨대,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기반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전쟁(戰爭)의 참화(慘禍)를 겪어야 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남침(南侵)을 강행하여 온 나라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밀고 밀리는 3년간의 전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휴전으로,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는 것은 모면했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나라경제는 극도로 피폐해지고 국민은 처참한 가난 속에서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朴正熙)’는 오직 ‘나라라면 적어도 사람이 밥 세 끼는 굶지 않고 먹어야 한다’는 생각[信念]으로 가득했다. ‘밥 세 끼를 먹이려면 다른 거 다 멈추고 제한해서라도 경제 계발에 몰두해야 한다.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일부 제한하는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경제 계발에 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잘 살게 되면, 언론도 발달하고 문화도 발달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된 국민이 나를 ‘독재자’라고 욕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욕먹어도 좋다! 나를 독재자라고 욕해도 좋다. 우리가 잘 살 수만 있다면! …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박정희의 신념, 그의 강력한 추진력이 이 나라의 경재를 살리고 국민을 살렸다는 것이다. 오천 년 동안 내려온 지긋지긋한 민족의 가난, 돈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하는 한을 끊어냈다. 이처럼 욕먹을 것을 각오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이 나라 대한민국은 생존(生存)과 번영이 가능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적 신념과 구국의 의지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거나 압박하는 무리수’는 두지 않았어야 했다. 격변기의 모든 지도자들은 그 지도력이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또한 비난을 받기 일쑤다.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의 배고픔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제 발전을 이룬 것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집착하여, 3선 개헌을 하고 유신헌법을 만드는 등 ‘무리수(無理數)를 두어 영구집권을 기도한 것’은 잘못이다.
나의 ‘3선개헌 반대’ 데모
나는 1968년 대학에서 학생회 임원(체육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진주고 출신의 학생회장 송영준, 청주고 출신의 총무부장 송기명, 대전 충남고 출신의 김성배와 더불어 ‘68. 3선 개헌 반대 투쟁’의 선봉에 섰다. 1967년 재선(再選)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 3선의 길을 열고자 획책한 것에 대해, 우리 학생회가 데모를 주도하였는데, 당시 김용덕 학생처장, 지도교수인 최성락 도서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생 시위대를 이끌고 수차례 거리로 나섰다. 물론 최루탄을 터뜨리는 경찰의 강력한 제재를 받아, 결과적으로 몇차례 뜨거운 구호만 외치고 말았지만, 그 뒤 나는 데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경찰서의 수배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해 7월 몰래 고향 문경으로 내려가, 절에 다니는 누님의 주선으로, 운달산 ‘김룡사 중암(中庵)’에 피신하여 2개월 동안 숨어서 지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때가 있다. 나아가야 할 때가 있으면 멈추어야 할 때가 있고, 해야 할 때가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만나야 할 때가 있으면 떠나야 할 때가 있다. 인간의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또한 영원한 내 것도 없다. 동양 최고의 지혜서인 『주역』에서 말하는 핵심철학 중의 하나가 ‘시중(時中)’이다. 우여곡절이 많은 세상에서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마다 시의(時宜)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 박정희 대통령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군사혁명을 단행하고, 또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 민정 이양의 약속을 깨고 1963년 대통령이 되었다. 경제건설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재선(再選)에 성공했다. 내 소견으로는, 거기까지였다. …
1968년에 감행한 ‘3선 개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분명 가지 말아야 할 길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경제개발 완수’라는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내세우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독선(獨善)이다. 독선은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다. 독재(獨裁)는 외견상 견고한 권력체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자체가 부조리한 권력구조이므로 언젠가는 파멸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독선이나 독재로 정치를 하게 되면 우선 주변의 의인(義人)들이 떠나게 된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국민들의 마음이 그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 독재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보다는 견실한 후계자를 키워서 경제발전사업을 계승하도록 도모해야 했다. 정상적인 정치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여, 차후 원만한 국정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했다. … 그런데 권력의 선로 위를 달리는 욕망의 기관차는 멈출 줄을 몰랐다. 주변에는 충정어린 마음보다 권력에 빨대를 꽂고 있는 세 치 혀들만 난무한다. 급기야 1973년 유신체제(維新體制)를 감행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었다. 수렁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러한 때, 시중(時中)의 대국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한 데서, 대통령은 정치적, 인간적 생명의 종말을 재촉한 것이다. 시인 이형기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낙화(洛花)」(1연)
국가의 대사든 사사로운 인간사든 나아갈 때의 성취감은 한없이 멋지고 아름답지만 그에 못지않게 때에 맞춰 물러나는 결단 또한 여간 중요한 게 아니다. 물러날 때 깨끗하게 물러날 줄 아는 것, 그것을 시인은 낙화(洛花)의 아름다움으로 형상화했다. 그것이 물러남의 미학(美學)이 아닐까, 불가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의 절묘한 경지다. 나라를 위해 내 몸을 던지겠다는 결의와 열정도 아름답지만, 겸허하고 큰 마음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야 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욕심을 내려 놓게 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경우가 그 좋은 예다. 안타깝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아름답게 물러날 수 있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처절하게 생을 마감한 대한민국의 위대한 대통령
☆… 불행하게도, ‘유신(維新)’ 대통령은 부하의 총탄에 쓰러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그에게는 ‘유신독재자’라는 꼬리표가 붙여졌다. 촉바른 진보논객 진중권은 박 대통령의 말을 패러디하여 ‘그래 그 무덤에 침을 뱉으마!’ 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최근 전북대 강준만 교수도 “… 50년 전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민족사적 금자탑’ 운운하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건설 중 사망자가 77명이나 나왔다. 1977년 사상 최초로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것도 격한 자축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이면엔 전태일 열사와 같은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사회적 약자를 희생으로 한 개발독재의 습속은 우리 모두의 의식에 깊게 새겨진 경로가 되고 말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 강준만,「사람 죽이는 경제는 안 된다」(한겨레신문, 2021.01.17.)
박 대통령의 말대로, 이제 언론도 발달하고 문화도 발달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된 상황이 되고 보니, ‘박정희는 독재자’라고 비판이 따라다닌다. 좌파 진영에서는 그의 빛나는 공적까기 말살하고 있다. …역사의 작용·반작용 법칙인가. 역설적(逆說的)이게도 그의 유신독재가 민주화 세력이 싹트고 성장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역사는 그렇게 돌고 도는 수레바퀴인가. …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대의 변곡점마다 생사(生死)를 넘나들며 불꽃같은 일생을 살다가 갔다.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21C 정보화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한민국의 격변기 속에서 온갖 영욕을 한 몸에 안고, 바닥에서 굶주리고 신음하는 국민을 살리고, 뿌리 채 흔들리는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말년은 인간적으로 고독했고 … 처절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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