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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越郡六臣祠記(영월군 육신사기) 를 찬술하신 은진 송시열선생이 운명하시던 날의 기록과 실록의 기록
송시열 선생 운명의 날 기록(1689년 6월 8일)
한국문집총간 > 송자대전 > 宋子大全附錄卷十一 / [年譜]
숭정(崇禎) 62년 기사. 1689년(숙종 15)
선생 83세
6월
○ 7일(임신) 정읍(井邑)에 도착하였다.
8일(계유) 진시(辰時)에 관(館)에서 후명(後命 귀양 간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을 받았다.
흉도(凶徒)가 선생의 병세가 위급하다 함을 듣고 혹시 도중에서 운명할까 염려하였다. 이에 권대운(權大運)ㆍ목내선(睦來善)ㆍ김덕원(金德遠)ㆍ민암(閔黯) 등이, 선생의 죄악이 이미 드러났으니 국문(鞫問)할 것 없이 바로 사사(賜死)하자고 청하므로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선생이 장성(長城)에 머물렀을 적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이미 이런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처경이 다시 길을 독촉하여 노령(蘆嶺)을 넘어 밤에 정읍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후명이 내렸음을 듣고 곧 상소문을 기초하여 전후(前後)의 출처대의(出處大義)와 원통함을 품고 죽는다는 뜻을 말하고, 또 성조(聖祖 효종)의 수찰(手札)을 손자 주석(疇錫)에게 맡겼으니 조만간에 바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말하고는, 처음 어찰(御札)을 바치려 할 때 지은 상소문과 성조(聖祖)ㆍ성모(聖母 명성왕후)의 수찰을 손자 주석에게 주어 바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바치게 하였다. 후명이 이르자 아들 기태(基泰)가,
“국법(國法)에 형(刑)을 집행할 때 현일(弦日 상현일(上弦日)과 하현일(下弦日))을 피하는 것이므로, 문곡 상공(相公)이 사약(賜藥)을 받을 때에도 현일을 피했었다.”
하면서 금랑(禁郞) 박이인(朴履寅)과 논쟁하자, 선생이 듣고 엄히 꾸중하면서,
“내 생명은 곧 다하려 한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후명을 받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고, 약 들이기를 재촉하였다. 이때 자손과 문인들이 들어가 뵈니, 선생이 기운이 끊어지려 하였으나 눈을 떠 권상하를 보고 그의 손을 잡으며,
“내가 항상 조문석사(朝聞夕死)로써 자기(自期)했더니, 지금 80세가 넘었으나 끝내 들은 바가 없이 죽는 것이 나의 한이다. 오늘 같은 세상에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나는 웃으며 지하(地下)에 돌아갈 것이다. 이후의 일은 오직 치도(治道)만을 믿는다.”
하였다. 권공(權公)이,
“돌아가신 뒤에 어떤 예를 적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라야 할 것이나, 반드시 《가례(家禮)》를 주로 삼고 미비된 점은 《상례비요》를 참작 사용하라.”
하였다. 또,
“공복(公服)을 사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머리를 흔들며,
“나는 평소 공복을 만든 적이 없다.”
하였다. 또,
“심의(深衣)는 의당 사용해야 하겠지만, 그 다음에는 무슨 옷을 사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주자가 치사(致仕)하고 한가로이 지낼 적에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의복을 입었으니, 내 일찍이 이를 모방하여 만들어 두었다.”
하였다. 또 그 다음을 묻자,
“난삼(襴杉)은 명(明) 나라의 유제(遺制)이다.”
하고, 이어서,
“묘도(墓道)에는 큰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세운 다음 치도가 간단하게 몇 줄의 비문을 지어 누구의 묘라는 것만을 드러내라.”
하고, 또,
“학문은 주자를 주로 삼고 사업은 효종대왕이 하고자 한 뜻을 주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뜻을 이룰 수는 없으나 항상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已 원통함을 품고 어찌할 수 없어서 한다는 말)’ 여덟 글자를 가슴속에 새겨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전수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주자의 학문은 치지(致知)ㆍ존양(存養)ㆍ실천(實踐)ㆍ확충(擴充)인데 경(敬)으로 시종(始終)을 관통(貫通)한 것이니,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榦))가 지은 주자행장(朱子行狀)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하고, 또,
“천지가 만물을 내는 것과 성인이 만사를 수응하는 것은 직(直)일 뿐이므로 공자와 맹자 이후로 전수한 것이 다만 이 하나의 직 자뿐이었고, 주자가 임종(臨終)하실 때 문인들에게 말한 것도 이 직 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고, 또,
“옛 분들은 어찌하여 정릉(貞陵)의 복위(復位)를 청하지 않고 소릉(昭陵)의 복위를 먼저 청하였는가? 내가 벼슬하여 한 일은 오직 이 한 가지일 뿐이나, 후세 사람에게 할 말이 있게 되었다.”
하고, 또,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추시(追諡)에 대하여는, 만약 평상시라면 내 어찌 이를 서둘렀으랴마는 오늘날의 사태를 보건대 존주(尊周)의 의리가 어둡고 막혀 거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권권(眷眷)했던 것이다. 박화숙이 의견을 달리하였으나 참으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친구이다. 우연히 이 일에만 의견이 맞지 않은 것이다.”
하고, 또 김만준(金萬埈 김장생의 증손)의 손을 잡고,
“너희 집안의 화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만준이,
“증조부의 문집(文集) 판본(板本)의 보관 문제를 선생께서 항상 염려하셨습니다마는 지금은 운반하여다가 서원(書院)에 두었습니다.”
하자, 선생이,
“집람서(輯覽序) 중 개정(改正)한 두 글자를 다시 새겼느냐?”
하므로 만준이,
“이미 고쳤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 금리(禁吏 의금부(義禁府)의 관리)들이 들어와서 자손들을 쫓아내어 옆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이 고장 사람 임한일(任漢一)이 지난밤부터 선생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는데, 이때도 또 공생(貢生) 이후진(李厚眞)과 함께 선생을 모셨다. 선생이 눈을 떠 그들을 보고 시간을 묻고는,
“내 목숨이 다하려 하니, 후명을 받기 전에 죽을까 염려이다.”
하고 약 들이기를 재촉하는 뜻이 보였다. 이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내가 곧 죽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약이 이리 더디냐?”
하였다. 조금 뒤 약이 들어왔으나 선생은 이미 약을 볼 수 없었다. 금리가 앞으로 나와서 큰소리로 약을 내린다는 뜻을 고하자, 선생이 곧 몸을 일으켜 앉아서 상의(上衣)를 가져오라 하고는 다시 뒤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한일이 공생을 시켜 직령의(直領衣)를 갖다 드리게 하자, 선생이 어깨를 약간 움직이며 입히라 하였다. 한일이,
“지금의 기력으로는 일어나서 옷을 입으실 수 없습니다.”
하자, 선생이 곧 손으로 옷깃을 당겨 가슴 위에 갖다 대었다. 한일이 바로 그 뜻을 깨닫고 옷을 펴서 몸 위에 걸친 다음 누운 자리 채 받들어 청상(廳上)으로 나왔다. 금랑(禁郞)이 교생(校生)에게 교지(敎旨)를 읽히는 동안에 선생이 옷으로 무릎을 가리고 눈을 감은 채 앉아서, 때로는 몸을 굽히려 하는 듯도 하였고 때로는 경청(傾聽)하는 듯도 하다가 드디어 약 사발을 받아 마시고 자리에 누워 서거하였다. 선생이 서거하던 전날 밤에는 흰 기운[白氣]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서거하던 날 밤에는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져 붉은 빛이 이곳 옥상(屋上)에 뻗치니, 읍인(邑人)들이 감탄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문인들이 치상(治喪) 절차를 한결같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관(棺)은 부판(付板)을 사용하였다. 문인으로서 복(服)을 입은 이가 1백여 명이었는데, 모두 황면재(黃勉齋)가 주자의 복을 입은 의식에 따라 백포건(白布巾)에다 수질(首絰)을 두르고 흰 띠에다 상복을 입었으며, 본도(本道 여기서는 전라도를 이른다)의 선비들도 와서 초상(初喪)을 도와주는 이가 많았고, 읍재(邑宰 고을의 원) 권익흥(權益興)도 상구(喪具)를 주선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 이때 자손과 문인들은 처경의 엄금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거의 숨이 다하려는 사이에 홀연히,
“해가 이미 저물었느냐? 아이들은 어디에 있느냐?”
하므로, 이후진(李厚眞)이,
“도사(都事)의 명이 엄하여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선생이 몸을 돌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어쩌면 그리 심하게 구느냐.”
하였다. 조금 뒤 조카 기학(其學)과 종손(宗孫) 종석(宗錫)이 보은(報恩)으로부터 달려와서, 도사가 군졸(軍卒)을 풀어 사관(舍館)을 세 겹으로 포위하여 지친(至親)과 문인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다가 종석이 격분하여,
“천하에 어찌 이런 법이 있느냐?”
하고는 군졸을 떠밀어 여러 겹의 포위를 뜷고 바로 선생의 처소로 들어가 여러 차례 선생을 부르니, 선생이 비로소 눈을 떠 종석의 손을 잡고,
“네가 왔구나. 하마터면 너를 보지 못할 뻔했다. 이미 결서(訣書)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것을 보았느냐?”
하고는 독서ㆍ수행(修行)과 성심으로 조상을 받들 것을 경계하고, 또,
“네 아들은 잘 있으며, 요사이 무슨 글을 읽느냐? 부디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 아이가 나의 선인(先人)의 제사를 받들 아이이다.”
하였다. 조금 뒤 금오리(金吾吏 의금부(義禁府)의 관리)가 들어와서,
“시간이 되었으니, 여러분은 다 물러가시오.”
하였다. 김극돈(金克惇)이 종석에게,
“대감께서 누운 자리가 매우 불결하니, 지금 그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후명을 받은 뒤 되모실 적에는 새 자리로 바꾸어 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므로 종석이 자리를 바꿀 뜻을 고하자, 선생이 정신이 혼미한 중에서도 손으로 자리를 만지면서,
“이 자리가 좋다. 나의 선인(先人)은 평생 이런 자리도 깔아보지 못하셨는데, 어찌 바꾸겠느냐?”
하였다. 전지(傳旨)를 들을 적에,
“송모(宋某)는 혼조(昏朝) 얼신(孼臣 간신(奸臣))의 자식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세 번 쳐다보고 지극히 원통해 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염습(殮襲)할 적에 두 눈을 감지 않았으므로 수암(遂菴) 권공(權公)이 여러 번 손으로 쓰다듬었으나 끝내 눈을 감지 않았다. 뒤에 권공이 그 문인 윤봉구(尹鳳九)에게 당시의 일을 말할 적에는,
“나의 선생은 지하(地下)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셨을 것이다.”
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 12일(정축) 발인(發靷)하였다.
상여(喪輿)를 쓰지 않고 다만 죽격(竹格 상여 대신 대나무로 만든 멜틀)에다 유지(油紙)로 시신(尸身)을 덮었을 뿐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사우(士友)들이 하인[奴]을 보내어 운상(運喪)을 돕게 하였고, 평소 선생과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도 간혹 와서 조상(吊喪)하고 하인을 보내어 운상을 돕게 하고는,
“이 어른의 상사(喪事)에 어찌 차마 태연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때 원근(遠近)에서 호상(護喪)하는 이가 매우 많았고 친지(親知)들은 혹 화가 더해질 것을 염려하면서도 상여의 앞뒤에 서기를 서로 다투었다. 북도(北道)의 선비도 와서 조곡(吊哭)하는 이가 있었다.
○ 15일(경진) 흥농(興農)에 도착하였고 24일(기축) 관(棺)을 바꾸었다.
선생의 시체를 입관(入棺)할 때 명성왕후(明聖王后)가 하사한 홍사반령(紅紗盤領)과 녹사반령(綠紗盤領) 한 벌씩을 넣었다.
7월
초하루는 을미(乙未) 18일(임자) 수원(水原) 만의(萬義) 무봉산(舞鳳山)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이전에 부인(夫人)의 장사 때 선생이 부인의 무덤 오른편을 비워 두게 하여 자신의 묻힐 곳으로 삼았었는데 마침 풍수(風水)가, 합폄(合窆)이 산운(山運)에 맞지 않는다 하므로 합장하지 못하였다.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상례의 절차를 한결같이 사례(士禮)를 의거했으므로, 달을 넘겨 장사 지내는 제도를 적용하였고 원근에서 와서 구경한 자가 거의 1천여 명이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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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보궐정오21권, 숙종 15년 6월 3일 무진 1/1 기사 /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전 좌의정 송시열의 졸기
전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죽였다.
송시열이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한 뒤에 진계(陳戒)한 상소의 말이 임금의 위엄과 노여움에 거듭 저촉되어 모든 감정이 드디어 폭발하고 붕당(朋黨)의 참소가 이를 종용(慫慂)하여, 해도(海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된 뒤에 이어서 합사(合辭)의 청함이 있어, 반드시 죽인 뒤에 말고자 하였다.
금오랑(金吾郞)025) 에게 안법(按法)하기를 명하여 이미 나치(拿致)해 오게 하였는데, 문득 또 만나는 곳에서 사사(賜死)하기를 명하여 정읍(井邑) 길 가운데서 후명(後命)을 받았다.
송시열은 삼조(三朝)026) 의 원로(元老)로써 죄가 아닌 데도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이 원통해 하였다.
송시열은 영의 강과(英毅剛果)하고 기력(氣力)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젊어서부터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우고,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 등 제현(諸賢) 사이를 두루 다니면서 점차 갈고 닦아, 서로 도와서 알고 보는 것이 날마다 넓어졌다.
힘쓰고 가다듬어서 지조와 행실이 심히 확실하여 구검(拘檢)027) 에 힘쓰고 담부(擔負)028) 에 용감하여 주자(朱子)를 본받고 이이(李珥)를 존경하는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일생의 가계(家計)로 삼았다.
지론(持論)이 준절(峻截)하고 일에 임하여 용감히 추진하여 족히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켜 복종하게 하는 바가 있었고, 자신의 처사하는 사이에는 너무 지나쳐서 인정에 가깝지 아니함이 있었으나, 논하는 자가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복수(復讐)029) 의 대의(大義)로써 효묘(孝廟)의 지우(知遇)를 만났고, 일세(一世)의 유명한 재상과 어진 선비가 그 문하(門下)에서 많이 나왔다.
기해년030) 에 상복(喪服)을 논하였을 적에 정의(正義)를 지켰고,
갑인년031) 에 뭇 소인(小人)의 독한 모함으로 영해(寧海)에 귀양갔는데, 또 고묘(告廟)하기를 청하여 한 걸음 사이에 도거(刀鉅)가 있었으나, 사류(士流)가 더욱 마음을 기울여 복종하고 존중하여 명론(名論)이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이 높아서 유림(儒林)의 종사(宗師)가 된 지 50년이 되었다.
그러나 의례(議禮)032) 이후로는 자못 애증(愛憎)으로써 시비(是非)를 삼고, 또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고 간섭하여 대관(大官)과 요로(要路)를 내치고 올림과 주고 빼앗는 것이 송시열에게서 말미암음이 많았으며, 또한 다시 뜻에 따라 취하고 버렸다.
한 마디 말이 회덕(懷德)033) 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고 하더라도 곧 서로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다.
경신년에 조정에 나감에 이르러, 출처(出處)에 의논할 만한 것이 많았으니,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논의는 식자(識者)들에게 비웃음을 당했고, 김익훈(金益勳)을 신구(伸救)한 말은 청의(請議)에 배치되므로 사류(士類)가 점점 더 실망하였다.
그 붕우(朋友)와 사생(師生) 사이에 처우하는 바가 전후에 결렬되고 위배되어 도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만년(晩年)에 말과 의논이 더욱 창광(倡狂)하여 상도(常度)를 잃음이 많아 전혀 도덕[道]이 있는 사람의 구기(口氣)가 아니었다.
드디어 선비의 추세(趨勢)가 분열되고 세도(世道)가 어지럽게 되자 송시열은 이미 명덕(名德)을 보전하지 못하고 나라와 더불어 패망하게 되었으니, 군자(君子)는 이를 시운(時運)에 돌린다.
대저 송시열은 크게 의심되지 않은 데 있었으나, 진실로 재주를 갖춘 것이 없었으며, 기질이 거칠고 학문이 허술하여, 본래 함양(涵養)함이 없고 강(剛)함과 엄함이 지나치며, 가엾이 여기는 어짊이 적었다.
명목(名目)에 끌렸으나, 체험의 공(功)이 없었으며, 스스로 사문(斯文)034) 을 위호(衛護)하면서 당습(黨習)의 괴격(乖激)함으로 귀착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대의(大義)를 발명(發明)하여 힘쓰면서도 도리어 패도(覇道)에 치우치고 〈인의(仁義)〉를 가차(假借)하는 병이 있었다.
처음에는 능히 통렬하게 갈고 닦으면서 말과 행실을 굳게 잡아서 우뚝하게 한 때 사람들이 복종하는 바가 되었으나, 군자(君子)는 본디 그 학술(學術)의 순수(純粹)하지 못함을 의심하는데, 그 혈기가 이미 쇠하게 되자, 스스로 다스림이 점점 허술하고 세상의 화(禍)를 겪어서 분함과 미워함이 이미 치우쳤다.
인도하여 아첨함에 익숙해지고 주장이 크게 지나치고 바로잡는 힘이 이미 약하여, 집요(執拗)한 성질을 돌이키기 어려우니, 사사로운 뜻이 농간을 부리고 친당(親黨)이 그르치는 바가 되어 거조(擧措)가 낭당(郞當)035) 하고 사기(辭氣)가 분치(忿懥)036) 하여 젊은 시절에 비하면 거의 딴 사람과 같았으므로, 군자(君子)가 더욱 그 이름을 끝까지 보전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박세채(朴世采)가 일찍이 송시열을 논하기를, ‘대의(大義)로써 나와서 사화(士禍)에 죽었으니, 심히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혹자는 그 말을 취하여 ‘송시열이 죽자 비록 평일에 의논이 다른 자라도 가엾이 여기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하물며 그 화(禍)를 입음이 산림(山林)에서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윤증(尹拯)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초사(初史)를 편찬한 자가 반드시 적휴(賊鑴)037) 와 더불어 두 사람의 감정(憾情)을 아울러 일컬어서 윤증을 화기(禍機)에 경중(輕重)이 있는 것과 같이 여김이 있었으니, 대저 경신년038) 이전에 누가 다시 윤휴(尹鑴)를 도와서 송시열을 죽이려고 하였겠는가?
그것도 크게 말이 되지 아니하며, 단지 아이의 소견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같은 말을 가지고 마음에 쾌하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암암리에 속이고 욕하며 거짓으로 과장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공정한 눈으로 보면 자못 한 번 웃을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또한 마음이 아프다.
[註 025] 금오랑(金吾郞) : 의금부 관원. [註 026] 삼조(三朝) : 효종·현종·숙종.
[註 027] 구검(拘檢) : 자신을 단속하는 것. [註 028] 담부(擔負) : 맡은 임무.
[註 029] 복수(復讐) : 청나라에 대한 복수. [註 030]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31]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032] 의례(議禮) : 기해 예송.
[註 033] 회덕(懷德) : 송시열의 고향. [註 034] 사문(斯文) : 유학.
[註 035] 낭당(郞當) : 맞지 아니함. [註 036] 분치(忿懥) : 몹시 성냄.
[註 037] 적휴(賊鑴) : 윤휴. [註 038] 경신년 : 1680 숙종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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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1권, 숙종 15년 6월 3일 무진 2/3 기사 /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송시열의 졸기
민암이 말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의 지극히 흉하고 악함은 국문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세움이 인후(仁厚)하여 일찍이 대신을 국문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권대운이 말하기를,
"송시열의 죄범(罪犯)은 흉역(凶逆)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므로 국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목내선과 김덕원의 말도 같았다. 우윤(右尹) 목창명(睦昌命)은 말하기를,
"신이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 국문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의논하는 이가 모두 잘못이라고 하니, 바로 처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여 사사(賜死)하되,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갈 때에 만나는 곳에서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제주(濟州)에서 나치(拿致)되어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을 이미 폐한 것과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가 간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드디어 먹지 아니하고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이에 유소(遺疏) 두 본(本)을 초(草)하여 그 손자 송주석(宋疇錫)에게 주어 다른 날을 기다려 올리게 하고, 또 훈계하는 말을 써서 여러 자손에게 남겼다.
아들 송기태(宋基泰)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형벌을 쓸 때 현일(弦日)380) 을 꺼리니,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니,
송시열이 들어 주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내가 병이 심하여 잠시를 기다릴 수 없으니, 명을 받는 것을 늦출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니, 이때 나이가 83세이다.
송시열은 은진(恩津)사람인데 그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다.
일찍이 꿈에 공자(孔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집에 이르는 것을 보고 송시열을 낳았기 때문에 소자(小字)를 성뢰(聖賚)라고 하였다.
천자(天資)가 엄의 강대(嚴毅剛大)하여 어려서부터 이미 성학(聖學)에 뜻을 두었고, 자라서는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뜻이 독실하고 힘써 실천하여 더욱 채우고 밝힘을 가하니, 마침내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적전(嫡傳)이 되었다.
대저 그 학문은 일체 주자(朱子)를 주(主)로 하였고, 동유(東儒)로는 이이(李珥)를 제일로 삼았다.
그 언행(言行)·어묵(語默)·출처(出處)·진퇴(進退)는 움직이면 주문(朱門)의 법을 따랐으며, 그 성취(成就)한 바에 대하여 논하면 그 높고 정밀하며 멀고 큼은 근세(近世)의 뭇선비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병자년381) 이후로 관구(冠屨)382) 가 무너진 것을 분하게 여겨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효종이 처음 정무(政務)를 볼 때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 여러 어진이와 더불어 조정에 나아갔다가 곧 돌아왔다.
효종이 큰 뜻을 가지고 송시열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할 만한 것을 알고는, 김익희(金益熙)를 보내어 성의(聖意)를 비밀리에 유시(諭示)하니, 드디어 계합(契合)383) 이 융숭하고 중하여 선생이라고 일컬었으며, 특별히 독대(獨對)를 내리고 또 밤에 현종(顯宗)에게 명하여 친히 어찰(御札)을 전하게 하였다.
송시열이 감격하고 분발하여 스스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세웠는데, 효종의 승하(昇遐)하자 애통하고 사모하여 살고자 아니하는 것처럼 하였고, 효종의 재궁(梓宮)384) 에 부판(付板)385) 을 썼으므로 유명(遺命)으로 자기의 상(喪)에도 부판을 쓰게 하고, 휘일(諱日)마다 어찰(御札)을 가지고 종일 통곡하였다.
이이(李珥)의 시대로부터 조정의 선비들 이미 사정(邪正)의 당(黨)으로 나뉘어졌는데, 김장생(金長生)은 매양 음양(陰陽)·선악[淑慝]의 분변에 조금도 가차가 없었고,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도(世道)를 스스로 맡아서 윤리(倫理)를 거스리고 인심을 허물어뜨리며 위험하고 간사한 자가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 힘써 물리쳐서 원수와 원망이 세상에 넘치는 데 이르렀으나, 오히려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며, 적 윤휴의 무리에게 꺼리고 미워함을 가장 많이 입었다.
갑인년386) ·을묘년387) 의 화(禍)에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면하고,
경신년388) 경화(更化)에 거두어 서용하고 돈독히 부르는 명이 있자, 정자(程子)의 서감(西監)의 예(例)389) 에 의하여 잠시 들어갔다. 곧 국휼(國恤)을 만나니, 성모(聖母)390) 께서 언찰(諺札)로 간절하게 만류함으로써 몇 달 힘쓰다가 돌아갔다.
계해년391) 에 또 부르기를 더욱 돈독히 하니, 송시열이 효묘 세실(孝廟世室)의 논의가 한 번 조정에 발론되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함으로써 항상 한(恨)스러워하다가 이에 미쳐 명령에 응하여 맨 먼저 이를 건의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도 조정에 나아가니 조야(朝野)에서 좋은 정치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 바랐는데, 이때 의논이 도리어 불화함을 품어서 참합(參合)392) 하고자 하기에 이르러, 을묘년의 흉당(凶黨)393) 과 더불어 같이 일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미 일체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으로 몹시 옳지 못하게 여겼으며, 수상(首相) 김수항(金壽恒)도 대대로 그 조부의 착함을 드러내고 악함을 징계하는[彰癉] 논의를 지켰다.
이 때문에 송시열과 더불어 뜻이 합하였으므로 당시의 무리가 김수항과 아울러 공격하여 훈척(勳戚)에게 편당을 한다고 지목하였는데, 송시열이 화(禍)을 입는 데 미쳐서는 이것도 죄를 얽는 한 단서가 되었다.
윤증(尹拯) 부자(父子)는 본래 윤휴(尹鑴)를 편들고 송시열과 어긋났는데, 윤증이 당시의 의논이 이와 같음을 보자, 갑자기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헐뜯고 배척하니, 당시의 무리가 이에 드디어 윤증을 도와서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윤휴·윤증의 무리가 두 감정을 번갈아 부채질하여 해기(駭氣)394) 가 더욱 벌어져서 드디어 극진한 화에 이르렀다.
송시열이 윤휴와 윤증을 배척할 때에 비록 송시열을 존중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혹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그 끝에 가서는 마침내 모두 송시열의 말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그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임명(臨命)395) 때에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부탁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을 주로 삼을 것이다.
주자의 이른바, ‘함원인통 박부득이(含冤忍痛迫不得已)396) ’ 여덟 글자를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전수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생(生)하는 소이와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소이는 ‘직(直)’ 일 뿐이다.
공맹(孔孟)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곧을 ‘직(直)’자인데 주 부자(朱夫子)가 문인에게 부탁한 것도 이에 벗어나지 아니한다." 하였다.
탐라(耽羅)에 갈 적에 일찍이 글을 지어 김장생(金長生)의 묘(墓)에 제사하여, 당인(黨人)이 화(禍)를 꾸민 전말(顚末)을 갖추어 진술하였고, 또 그 부모의 묘에 제사한 글에 그 평생의 출처(出處)를 두루 서술하였는데, 사실이 매우 상세하며 모두 유집(遺集)에 있다.
권상하가 그 화상(畫像)에 찬(贊)하기를,
"높고 높은 산악의 기상이요 넓고 넓은 하한(河漢)397) 의 마음이라. 미쁘도다.
뭇 선비의 학문을 모은 대성(大成)이오, 울연(蔚然)하게도 백세(百世)의 사종(師宗)이 되었도다.
한 몸으로 성인(聖人)의 길이 장차 막히려는 것을 열었고, 한 손으로 하늘의 기둥이 이미 쓰러지는 것을 받들었도다.
깊은 궁중에서 비밀히 협찬한 것은, 내가 그 무슨 계책임을 알지 못하겠고, 한가로이 있으면서 깊이 탄식하는 것은, 내가 그 무슨 포부임을 알지 못하겠도다.
아아, 도(道)가 커서 용납할 수 없으니, 내가 장차 고정(考亭)398) 을 버리고 누구를 따르겠는가?"
하였고,
김창협(金昌協)은 찬(贊)하기를,
"호걸 영웅의 자질(姿質)로써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공(功)이 있었고, 호연(浩然)의 기운을 가난한 집 가운데 모아서 우주(宇宙)에 채울 만하였으며, 지극히 중한 임무를 한 작은 몸으로 맡아서 화숭(華嵩)399) 의 높음과 겨룰 만하였도다.
나아가서 묘당(廟堂)에 올라 제왕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 궁(窮)함을 보지 못하겠다.
굳굳한 지주(砥柱)400) 는 홍수 속에 우뚝하고, 늠름(凛凛)한 푸른 솔은 한 겨울에 빼어났다.
만일 억만년 뒤에 이 칠분(七分)401) 의 모습을 보더라도 3백 년 간기(間氣)402) 의 모인 바를 오히려 알 것이다."하였다.
뒤에 억울함을 씻고 제문(祭文)을 내렸다.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태백산사고본】 23책 21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9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註 377] 긍식(矜式) : 모범. [註 378] 이부(吏部) : 이조.
[註 379] 천주(薦主) : 관원(官員)의 후보자(候補者)로 보증(保證) 추천한 사람. 추천되어 임관(任官)된 자가 만약 장오(贓汚)의 죄나 패상(敗常)의 죄를 범(犯)한 때에는 천주도 함께 그 죄에 연좌됨.
[註 380] 현일(弦日) : 음력 7, 8일의 상현(上弦)과 22, 23일의 하현(下弦)을 가리킴.
[註 381]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382] 관구(冠屨) : 의관 제도.
[註 383] 계합(契合) : 뜻이 서로 맞음. [註 384] 재궁(梓宮) : 관(棺).
[註 385] 부판(付板) : 판자를 붙인 것을 말함. [註 386]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註 387]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388]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389] 예(例) : 정자는 송(宋)의 학자 정이(程頤). 정이가 휘종(徽宗) 원부(元符) 3년(1100)에 귀양지인 부주(涪州)로부터 돌아와서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에 제수되자, 명을 받고는 곧 나아가 알현(謁見)하였음.
[註 390] 성모(聖母) : 대비. [註 391]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392] 참합(參合) : 섞이고 합함. [註 393] 흉당(凶黨) : 남인.
[註 394] 해기(駭氣) : 화가 일어날 기미. [註 395] 임명(臨命) : 임종.
[註 396] 함원인통 박부득이(含冤忍痛迫不得已) : 원통함을 품고 어찌할 수 없어서 한다는 말.
[註 397] 하한(河漢) : 하늘의 내. 은하(銀河)를 말함. [註 398] 고정(考亭) : 주자.
[註 399] 화숭(華嵩) : 화산과 숭산.
[註 400] 지주(砥柱) : 하남성(河南省) 섬주(陝州)에서 동쪽으로 사십 리되는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주상(柱狀)의 돌.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으며, 격류(激流) 속에서 우뚝 솟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난세(亂世)에 처하여 의연(毅然)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비유로 쓰임.
[註 401] 칠분(七分) : 화상. [註 402] 간기(間氣) : 천지의 기운.
